[스크랩] 꽃사과 꽃 고운 자태
유채꽃 큰잔치를 시샘하는 안개와 가랑비가 내리던 어제.
우리는 직선거리 1km 정도 떨어진 구두리와 가문이, 쳇망오름에
다녀왔다. ‘가는 곳마다 비가 피해간다.’는 해설사 3기생들과의
산행이었지만, 번영로에서 남조로에 들어서는 순간 컴컴하다.
오전 중에 한 때 비가 내리고 오후에 개겠다는 예보가 있었기에 1
큰 걱정은 안했지만, 컴컴한 동굴 속으로 들어서는 느낌이었다.
해발 400m 정도 되는 지대여서 고사리가 솟았을 거라는 기대를 갖고
구두리오름으로 진입하데, 성급한 고사리가 몇 개 보일뿐
며칠 동안 찬바람이 불었기 때문에 아직은 철이 아닌 것 같다.
복수초는 거의 끝물이고, 남산제비나 흰제비, 개별꽃, 현호색 등은
춥거나 말거나 난만히 피어 우리를 맞는다. 가랑비가 조금 내렸으나
산행에는 지장이 없었고, 내심 꽃 잔치가 열리는 정석항공관에
가보려 했던 마음을 접고 남조로를 벗어나는 순간 비가 조금 내렸다.
그러나 제주시가지는 언제 비가 내렸냐는 듯 길이 말라있었다.
♧ 꽃사과 - 안경희
하루를 더 못견디고 잎들이
하르륵、하르륵、 바람에 져 내렸다.
지상의 목숨들 하나 둘 꺼져가는 소리도
이와 짐짓 다르지 않을 것이다.
꽃들은 울음을 남기지 않고서도 사뿐사뿐 잘도 지는데
떠나가는 사람들은 눈물을 남겼다.
꽃들이야 햇살 만나 그 나무에 다시 피면 그만이지만
우리 한 번도 그리운 사람의 환생을 목격한 바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품안으로 은밀히 싹을 내리나 보다.
꽃을 만나 잎처럼、
잎을 만나 꽃처럼、
오늘 나의 뜨락에 올망졸망 과실들이 열고
잠든 아기 손 어느 샌가 꼭 쥐고 놓지 않는
꽃사과 한 알. 언제 주웠을까
자박 자박 걸음마 하며 꿈결엔 듯 다녀왔을까
너무 쪼끔 해서 구슬인양 아롱아롱
잠결에도 놓지 못하는 내 아기 손안에 꼭 잡힌
바알갛게 태열 앓는
애기꽃사과.
♧ 꽃사과가 익을 무렵 - 김영자
해마다 꽃사과가 익을 무렵
아파트 경비원들은 잔디를 깎았다.
작은 사과 알 사이
빠알간 빛 사이사이
한 움큼씩 바람을 집어넣으며
잔디를 깎았다.
깊은 그리움을 깎아내고
몇 개의 산을 내려오면
봄날 잔디에 새순이 돋듯
그리움 그 자리
환한 꽃사과 꽃 피면서
침묵의 바람 불겠다.
♧ 사과꽃이 필 때 - 김종제
사과 한 알
손바닥 가운데 올려놓고
빛 고운 살갗에
선뜻 입술 가까이 하지 못하는 봄날
가지에서 툭 떨어져
한 철 어둡고 찬 방에서 쓸쓸하게 보냈을
속내를 들여다보기 싫어
꽃 핀 날을 더듬어 보는 것이다
번뇌 같은 사과꽃이 피었을 때
눈감은 부석사를 찾아갔다
삐이걱, 불이문을 열고
진흙 묻은 발을 내밀었는데
손님도 없이
독경 소리가 봄꽃처럼 활짝 피었다
캄캄한 불 옆엔
사과 한 알이 덩그러이 놓여있고
꽃 내음새 대신
법당의 짙은 향내가
예불을 알리며 범종을 치고 있었다
누구 손을 잡고 있었는지
마음속에서 불길이 일어났다
아득한 계곡에 누웠는데
꽃잎 같은 당신 손에
한 알 사과 같은 내가 놓여있었다
사과꽃이 필 때였다
당신과 내가 벌거벗고 놀았던
사월의 어느 날이었다
♧ 사과꽃 - 이향아
6.25 사변이 터지던 몇 해 후
이북에서 월남했다는 내 친구 경옥이
경옥이 얼굴은 사과꽃같이 작았다
목청을 떨며 사과꽃 노래를 불렀었다
이북에서 배웠다는 소련 노래 사과꽃
발바닥으로 마룻장 굴러 손뼉을 치며
아버지가 알면 혼찌검이 난다면서
그 애는 졸라대면 사과꽃을 불렀었다.
우리가 이남에서 미국 노래를 배울 때
경옥이는 이북에서 사과꽃을 배웠다.
지금은 수녀가 된 내 친구 경옥이
사과꽃보다 이쁘고 향기로운 경옥이
소련에 핀 사과꽃은 경옥이의 노래였다
♧ 사과꽃 향기 - 강세화
아침에 길을 가다 아파트 담장 너머
미소처럼 피어있는 사과꽃을 보았어요
내뻗은 나뭇가지가 얼마나 생생하던지
가던 길을 멈추고 한참을 보았어요
이쁘게 비어지는 살냄새를 맡은 듯이
능금이 익는 생각에 얼마나 떨리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