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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가장 아름다운 한국의 집- 연경당(演慶堂)

차보살 다림화 2007. 7. 26. 13:52

 

 

 

 

        가장 아름다운 한국의 집 - 연경당(演慶堂)

 


 

내가 만약에 로또에 당첨되거나 많은 돈을 벌게 될 경우 하고 싶은 일 중의 하나가 우리 나라에서 제일 가는 대목수를 구해 <연경당>같은 한국 전통 주택을 지어 살아 보는 것이다. 예전엔 한옥이 불편하게 여겨 졌고 마음에 안 들었으나 지금처럼 여유 없는 세상에서 여유로움을 느낄 수 있는 한옥에 사는 분들이 한 없이 부럽게 느껴진다. 하지만 현대에 한옥을 짓는다는 것은 예전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경제적인 이유도 있고 설사 경제적 여건이 갖추어진다해도 좋은 재료와 그 재료를 유용하게 쓸 수 있고 한옥을 제대로 아는 대목수를 만나는 일은 그리 쉽지 않다. 그렇지만 대리 만족이라는 것이 있다.
남산의 한옥 마을도 있고 서울의 가회동이나 계동도 있고 멀리는 하회마을 구경가는 것도 있으나 무엇보다도 가장 아름다운 주택은 창덕궁 후원인 금원(비원)내에 있는 <연경당>이 白眉라고 여겨진다. 그런데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오랜 시간 이 곳 비원에 머물수 없다는 것이다. 정해진 시간에 안내인의 안내를 받아 슬쩍 보고 오는 방식으로는  충분히 대리 만족을 못해 주고 있다. 
 
 
 
 
 
 
<연경당>은 순조 28년(1828)에 당시 왕세자였던 효명세자가 사대부인 선비들의 일상 삶을 경험하고 싶다고 청하여 궁궐 안에 지은 99칸짜리 양반집이다. <연경당>이라고 이름이 붙혀진 것은 이 집의  남성의 공간인 사랑채 당호가 바로 <연경당>이기 때문이다.  위의 사진은 <연경당>의 대문으로 솟을 대문이다. 솟을 대문은 대개 처음에는 높은 벼슬의 양반집에서 이용 되었다. 가마나 말을 타고 들어가기 용이하도록 지붕이 높고 문턱이 없는 것이 그 특징이다. 그리고 사진에서 보면 대문 옆에 나무로 된 공간이 있는데 마차나 말을 보관하는 곳이다.
그리고 이집에 들어갈려면 사진에서도 보듯이 작은 돌다리를 건너야 한다. <연경당> 서북쪽 골짜기에서 내려오는 물을 일단 서쪽 행랑채의 마당 밑으로 끌어들였다가 , 다시 서쪽 행랑채 밑에서 작은 개천으로 끌어내어 행랑채 앞을 돌아 흐르게 만들어 놓은 개천 위에 이 돌다리는 놓여져 있다.
 
 
 
 
 
 
 
스캔하다가 약간 비뚤어졌는데 <연경당>의 평면도를 먼저 살펴 보면 솟을 대문을 들어오면 하인들이 기거하는 행랑채와 행랑마당이 있다. 그리고  2개의 중문이 보이는 데 그 중문은 각각 남성의 공간인 사랑채와  여성의 공간인 안채로 들어 가게 해준다. 사랑채에는 이 집 주인이 기거 하는 <연경당>과 서재 역할을 하는 <선향제>와 <농수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그리고 <선향제> 뒤에는 노단식(계단식)정원을 두어 위의 <농수정>에서 감상 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다.
안채는 이 집의 안주인이 기거하는 안채와 뒷쪽에 <반빗간>이라는 부엌이 있다. 그리고 중문과 측문이 두껍게 보이는 것은  거기에 행랑채가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각 구역은 작은 출입구를 둔 뒤 담으로 막았다. 하지만 재미있는 것은 사랑채와 안채의 주인이 공식적으로 움직일 때는 앞 마당 쪽으로  신을 신고 나와 두 공간의 출입구인 일각문을 지나  들어 가게 되어 있으나  사적으로는 뒷 쪽에 좁은 툇마루를 연결해 놓아  버선 발로 얼마든지 드나들 수 있게 해놓았다. 
 
 
 
 
 
 
 

사랑채로 들어가는 중문인 <장양문> 사이로 보이는 <연경당>의 모습이고 사진에 없지만 안채로 들어가는 문의 이름은 <수인문(修仁門)> 이라는 명칭을 가지고 있다. 
 
 
 

 
 
 
 
사랑채인<연경당>은 집 주인이 주로 대궐에서 퇴궐한 뒤에 찾아 오는 손님들을 맞이하고 그들과 담소를 나누는 공간이다. 정면 6칸, 측면 2칸의 팔작 지붕 홑처마 집으로 대략 27평쯤 된다고 한다. 그리고 오른쪽 두칸이 누마루 다락으로 높다란 돌 기둥 위에 얹혀 있는데 이런 누마루는 주인의 여름 기거 공간이다. 우리 나라는 기후 때문에 북방식 구조인 온돌과 남방식 구조인 마루를 지혜롭게 이용하고 있다.
일반 시대부 집에서 여름의 더위를 피하기 위해 초가와 흙으로 만든 초당을 두어 거기에 기거 하기도 한다. 사진에 대청의 문들이 들어 올려져 있는데 이렇게 하는 것은 주로 여름에 바람이 잘 통하기 위해서이고 지금은 내부를 잘 보여주기 위해서 그렇게 해놓았다. 그리고 사진안에 있는 왼쪽 작은 사진은 <노둣돌>로 주인이 초헌(2품이상의 벼슬이 타는 수레의 일종)이나 말을 탈 때 쉽게 오르고 내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오른쪽 작은 사진은 다른 사대부 집들과는 달리<선향제>라는 넓은 서고를 가진 서재가 별도의 건물로 위치해 있다. 이 건물의 특징은 앞쪽에 맞배 지붕을 덮어 넓은 차양을 가지고 있어 햇빛과 바람 비로부터 서책들을 보호 받을 수 있게 해 놓았고 차양의 방향을 조절 할 수 있게 해 놓았다. 
한 때 이것이 제대로 고증을 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일본의 영향이라고 하여 없어질 뻔 했으나 다행히 없어지기 전에  일본보다 우리가 먼저였다는 기록과 발굴조사에 의해 입증(신라 황룡사 금당에 있었음)이 되어 없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연경당>에서 가장 부러운 공간이다.
 
 
 
 
 
 
 
 
안채는 ㄱ자형 평면을 가진  안 주인의 거처이고 사랑채랑 다른 것은 누다락과 안방이 동서로 맞붙어 있다. 그리고 사랑채는 누다락 밑에 공간에 돌기둥만 있었는데 안채에는 누다락 아래 쪽에 아궁이를 두었다. 일반 사대부 집에선 여기가 보통 부엌이나 이곳 <연경당>은 안채 뒤쪽에 커다란 <반빗간>이라는 부엌을 따로 두고 있다고 평면도에서 이미 말하였다. 그리고 커다란 나무를 담 옆에 붙혀 심었는데 이러한 나무를 정심수라고 한다. 정심수면 말 그대로 중앙에 있어야 하나 전에 스페인 주택에서 언급 했듯이 한자의 困에 해당되어 정 가운데에는 나무를 심지 않았다.
 
 
 
 
 
 
 
사랑채 뒷쪽 언덕에 계단을 만들고 그 위에 세운 정자로 이름은 <농수정>이다. 亞자 모양을 기본으로 한 문이 달려 있고 이것 역시 접어서 들쇄에 매달 수 있게 해 놓았다.
 
 
 
 
 
 
 
 
안채 뒤쪽으로 사랑채랑  연결된 뒷문이 있어 이문은 주로 하인들이 들락 거렸다. 그리고 벽돌 쌓은 것은 굴뚝으로 비원에서 가장 아름다운 굴뚝은 예전에 이방자여사가 기거한 <낙선재>가 있다.
 
 
 
 
 
 
 
 
행랑채로 주로 하인들이나  찾아 오는 식객들이 기거하였다.
 
 
 
 
 
 
 
 
참고 문헌들로 두 권은  예전에 이대 미대 장식미술학과 교수님하시다가 고대 건축과로 가신 주남철 교수님의 저서로 우리나라 주택에 관해선 이분이 가장 방대한 자료를 가지고 계실 것이다. 대학교 때 강연과 강의를 들은 적이 있는데  한옥에 흠뻑 빠지고 재인식 하도록 만들어 주셨다.
그리고 지금 생각할 때 무엇보다 아까운 것은 주남철 교수님이 이대에 계실 때 해마다 직접 찍으신 우리 나라 건축물에 관한 사진첩을 내셨는데 학창 시절 다른 과목 스크랩 숙제에 아낌 없이 써버렸다. 지금 같으면 스캔하여 썼을텐 데 이래 저래 아쉽다.
가운데 있는 신영훈님은 우리 나라의 최고의 대 목수이다. 그리고 목수를  대 목수, 소 목수하고 부르는데 이들의 차이는 대 목수는 집같은 건물을 짓는 목수를 가리키는 말이고 소 목수는 가구등과 같은  공예품 등을 만드는 목수를 가리킨다. 
서양식으로 짓던 우리나라 식으로 짓던 목수를 잘 만나야 한다. 그리고 목수는 멋진 전문 직업 중의 하나이며 서양에선 고급 취미 중의 하나이다. (blog.empas.com/cutesun21c/15739529)

 

 

 

 

 

 

 

   

출처 : 포기하는 순간 불가능은 확정된다
글쓴이 : 멋진언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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