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이야기

[스크랩] 오대산 신성굴(五臺山 神聖窟)

차보살 다림화 2008. 2. 17. 19:29
오대산 신성굴(五臺山 神聖窟)

오대산 다섯 봉우리는 봉우리 마다 천년 차향이 깃들어 있다. 자장율사가 부처의 진신 사리를 가져와 모셨다는 중대(中臺)의 적멸보궁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봉우리에서 흘러내리는 물은 옛부터 해동 최고의 물로 손꼽혔다. 적멸보궁 아래서 지금도 솟아나는 용안수(龍眼水), 그리고 서대(西臺)의 우통수(于筒水) 등 오대산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물은 수천리를 가도 다른 물과 어울리지 않는 우중수(牛重水)로 지금도 으뜸을 자랑한다.

우통수와 용안수는 지금도 찾을 수 있지만 문제는 1천3백여년 전 신라의 보천(寶川),
효명(孝明) 두 태자가 오대산 골짜기의 물로 아침마다 다섯 봉우리의 5만 진신보살에게 차공양을 올렸다는 그 찻물, 또 보천태자가 50년 동안 차공양 후 득도했다는 신성굴 등 <삼국유사>가 가리키고 있는 차의 성지를 찾는다는 것은 오늘에 사는 차인들이 해결할 문제이다.

서산의 높은 봉우리 외롭게도 끊겼는데
우통(于筒)의 물은 기운이 맑고 차네
상인은 병가지고 손수 차를 달이고
서방의 극락세계 부처님께 예배하네

우통의 정화수는 깨끗함이 옥같은데
상서로운 향화(香花)는 바퀴같이 큼이라
희미한 여러 봉이 구름 속에 보이니
천녀가 옷깃 여미고 청신(淸晨)에게 공양하듯...

생육신이었던 매월당 김시습은 우통수를 이렇게 노래했다.

또, 홍길동전을 남긴 허균(許筠.1569~1618)은,

...물러나고자 할 때마다 임금님의 은혜로 해마다 머물렀는데
뉘라서 알았으리 늙어서 이렇듯 귀양을 살 줄을
헐뜯고 비웃는 것은 모두 원수진 사람들이 만든 것
마음따라 찾아 온 손님 몇은 우리 무리를 불쌍하게 본다네
봄 온 뒤 숲에 꽃이 피지만 눈은 병들어
술은 남았는데 산새는 그윽한 잠을 깨우고
차그릇에 차를 끓여서 목마름을 덜 하나니
어찌하면 천하 제일의 우통수를 얻을 수 있으리

라고 노래한 뒤 *우통수는 오대산 상원사 옆, 한강 상류에 있는 동국 제일의 샘* 이라고 註를 달아 놓았다.

많은 사람들은 <삼국유사>를 들먹이며 보천태자가 서대에서 우통수 물로 차를 올린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차 연구가인 茶丁 김규현(金圭鉉)씨는 고개를 흔든다.
<삼국 유사>에는 서대와 수정사(水精寺)가 나오고 우동수(于洞水) 동중수(洞中水)우동영수(于洞靈水)는 나오지만 서대에 두 태자가 거처하며 이곳의 샘물로 차를 공양했다는 내용은 없다고 지적했다.

김씨는 "우통수라는 기록은 고려말 조선초 목은 이색이 지은 동문선(東文選)에 실린 양촌 권근(陽村 權近.1352~1409))이 지었다는 <서대수정암중창기(西臺水精庵重創記)>에 처음으로 보인다. 이때부터 서대의 샘물을 우통수로 불렀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있다.

또 오대산 서대밑의 샘물인 우통수는 한강의 시원(始原)이라고 <동국여지승람>에도 밝히고 있다.
조선 단종 2년에 간행된 <세종실록지리지>에도 "한강의 시원은 오대산 서대사에 위치한 우통수이며 한수(漢水)의 명칭도 우통수에서 비롯되었고 춘추로 관에서 제사를 올리었다."고 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우통수는 한강의 시원지로 또 특이한 물로, 도를 통하는 물로 모든 사람의 머리에 각인 되어 버렸다.



출처 : 인천시무형문화재10호범패와작법무
글쓴이 : 모봉형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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