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화가 데이비드 호크니(David Hockney)는, 앵그르(Ingres)의 스케치 작품을 바라보고 있었다. 볼 수록 그의 입에서는 찬탄이 흘러나왔다. 어떻게 저렇게 정확하게, 그리고 빠르게 그려나갔을까. 자신도 화가이지만, 눈을 굴려서 살피며(이걸 아이볼링eyeballing 이라 한다)  쓱쓱 그려나간 그림치고는 너무나 디테일이 실감나게 묘사되어 있다. 그가 생각하기에, 아이볼링으로는 불가능한 그림이었다. 도대체 앵그르는 어떻게 저런 묘사를 할 수 있었을까. 천재성이란 말로 저 능력과 성취를 설명할 수 있을까. 호크니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연구를 시작했다. 그리고는 결론을 내렸다.

“나는 앵그르가 모종의 광학장치를 작품에 이용했다고 확신한다. 드로잉의 경우에는 카메라 루시다였겠지만, 회화의 섬세한 세부를 그릴 때는 카메라 옵스큐라도 사용했을 것이다. 그것만이 내 유일한 설명이다.”


카메라 옵스큐라(obscura)와 카메라 루시다(lucida). 카메라 옵스큐라(어두운 방이라는 뜻)는 바늘구멍 사진기(핀홀카메라)와 같은 원리를 가진 광학기구이다. 어두운 상자(혹은 암실)의 벽에 작은 구멍을 뚫어놓으면 구멍을 통해 투사된 빛은 반대편 벽면에 거꾸로 된 상을 남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발견한 원리다. 화가들은 카메라 옵스큐라를 통해 대상물의 정확한 상을 얻고 그 위에 화폭을 대고 베꼈다는 얘기다. 카메라 루시다(밝은 방이라는 뜻)는 하나의 프리즘에 두 개의 반사면을 붙인 기구다. 화가는 접안 구멍을 통해 사물을 보면서 동시에 프리즘을 통해 비치는 종이와 연필의 끝도 볼 수 있다. 그 윤곽에 따라 그림을 그리면 된다. 카메라 루시다는 휴대가 비교적 간편해 이동용 화구로 쓰였다고 호크니는 설명한다.


호크니의 주장은 서양 미술계를 발칵 뒤집히게 할 만큼 충격적인 얘기였다. 인류의 자부심으로 여겨져 왔던 위대한 명화들이, 천재화가들의 기적의 손에 의해 창조된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습자지를 대고 밑그림을 베끼듯 모사(模寫) 도구를 사용해 베꼈다는 얘기가 아닌가. 이 은밀한 반칙을 자기네들끼리 공공연한 노하우로 전승해가며, 관객들을 우롱해왔다니... 서양의 근대 미술사가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이라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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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크니는 이같은 광학도구를 처음으로 쓰기 시작한 사람들을, 1420년-30년대의 플랑드르 화가들로 잡는다. 베르메르, 렘브란트, 반 아이크, 할스는 사진처럼 정확한 이미지를 얻기 위해 거울과 렌즈를 사용했다. 이 기술은 당시에는 사업기밀이었지만 빠른 속도로 유럽 각국으로 퍼져 나갔다. 호크니는 이 무렵에 갑작스럽게 작품의 리얼리티가 확 올라가는 현상에 주목한다. 바로, 베끼기 도구 때문이란 얘기다. 3차원 이미지를 2차원 평면에 비친 다음, 종이에 그대로 따라 그리는 이 방법 덕분에 화가들은 습작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었다. 게다가 16세기 말에는 갑작스럽게 왼손잡이 모델들이 늘어난다. 거울이미지 탓이다. 그러나 화가들은 어느 누구도 자신이 이런 방법으로 그림을 그렸다고 고백하지 않았다.







카메라 옵스큐라와 카메라 루시다가 나온 건, 화가들의 양심불량 때문이라기 보다는, 사물을 좀 더 리얼하게 그리고 싶은 욕망의 산물이라고 보는 게 옳겠다. 이른 바 리얼리즘이 저 도구를 만들어냈단 얘기다. 그런데 600년에 걸친 서양의 노하우가, 1780년대 조선에도 활용되었다는 게 오늘 기사의 핵심이다. 이 놀라운 ‘발견’을 한 사람은 명지대 이태호 교수다. 정조 시절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의 여유당전서를 읽다가 그는 깜짝 놀랐다. ‘칠실관화설(漆室觀火說)’이란 제목의 글 때문이다. 칠실관화는 암실에서 빛을 이용해 사물을 비쳐 보는 ‘카메라 옵스큐라’의 한자어이다. 다산은 이렇게 적고 있다.

“방 안을 칠흑같이 깜깜하게 해놓고, 다만 구멍 하나만 남겨둔다. 돋보기 하나를 가져다가 구멍에 맞춰놓고, 눈처럼 흰 종이판을 가져다가 돋보기에서 몇 자 거리를 두어 비치는 빛을 받는다. 그러면 물가와 묏부리의 아름다움과 대와 나무와 꽃과 바위의 무더기, 누각과 울타리의 둘러친 모습이 모두 종이판 위에 내리 비친다...구성이 조밀하고 위치가 가지런해서 절로 한 폭의 그림을 이룬다.”



다산은 한 화가가 카메라 옵스큐라를 이용해 한 유학자(이기양)의 초상화를 그리는 장면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복양이 일찍이 나의 형(정약전)의 집에 칠실파려안(카메라 옵스큐라)을 설치하고 거기에 비친 거꾸로 된 그림자를 따라서 초상화의 초본을 그리게 하였다.” 칠실은 암실이며 파려안은 유리렌즈다. 이태호교수는 서학에 심취한 정약용이 북경에 다녀온 그의 매부 이승훈이나 장인 홍화보로부터 카메라 옵스큐라에 관한 정보를 얻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다. 이교수는 조선 후기의 초상화 중에서 실제로 이런 도구를 활용한 흔적이 있는지를 꼼꼼히 찾아나선다. 그는 “얼굴과 몸의 길이와 폭은 원래 신장의 절반으로 줄어보인다”라는 글이 그림 옆에 적혀있는 유언호의 초상화를 주목하여, 카메라 옵스큐라를 사용했을 것으로 짐작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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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하튼 서양의 화가들이 쉬쉬해온 ‘작업의 비밀’을
조선의 다산 정약용이 드러내보이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카메라 옵스큐라’에 비친 정밀한 이미지가 필요할 정도로, 당시 한국 사회가 리얼리즘의 갈증을 느끼고 있었다는 얘기도 되는지라 인상적인 대목이다.


출처 :♬미리내 소리사랑♬
원문보기 글쓴이 : 불나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