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일기

추성부도와 세한도

차보살 다림화 2009. 12. 5. 03:47

 

날씨가 차가워진 후에야

 

 

 

 

호암미술관 소장

 

 

 

 

                                         
                                                                                                                 조윤수

1. 추성부도(秋聲賦圖)
 
  먹구름이 하늘 가득한 날, 바람 소리만 웅∼웅∼ 우웅!, 위윙 위잉, 심란하다. 창 틈으로 밖을 내다보니 세찬 바람에 나무가 한 쪽으로 사정없이 쏠리고 있다. 침대에 편히 누워 있자니, 고요한 가운데 요상한 소리가 귓속을 헤집는다. 바람이 길을 찾지 못하여 빌딩 벽을 치고 높은 건물 사이를 헤치며 아우성대는 소리일까. 세찬 파도가 벼랑 바위에 부딪치는 소리가 저렇던가.
  언제 오라고 기다리지도 않았건만 단풍물 뿌리면서 왔다가는 낙엽을 굴리면서 떠나는 늦가을 바람의 심술인가. 이럴 때의 마음의 풍경을 그림 한 폭으로 그릴 수 있었던 옛 선비들을 생각한다. 오늘날의 화가라면 어떤 그림을 그릴까.
   몇 년 전엔가, 호암미술관에서 보았던 한 전시회, <그림 속의 글>이란 테마 전이었다.  늦가을 스산한 바람소리만 난무하는 이런 날은 그때 보았던 추성부도(秋聲賦圖)가 떠오르기 마련이다. 마침 전시회 때의 전단지가 옆에 있어서 사진 속의 추성부도를 다시 들춰본다. 추성부도는 보물 1393호로 지정된 김홍도가 불우했던 말년에 그린 그림인데, 가을밤의 스산함과 인생무상을 읊은 중국의 송대 문인 구양수의 시 추성부를 묘사한 것이다. 그림 말미에 단정한 행서체로 쓰인 추성부를 나는 읽을 수는 없으나 그 글씨체들이 그림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추성부는, 어느 날 밤 글을 읽던 구양수가 어디선가 들려 오는 이상한 소리를 듣고 동자에게 알아보라고 하니, 동자가 밖에 인적은 없고 나무숲 사이에서 소리가 난다고 하자, 구양수는 이 소리가 가을의 소리임을 깨닫고, 산천이 적막해지는 가을의 자연현상과 인간사를 연관시켜 인생의 무상함을 탄식하였다는 내용을 담은 글이라고 한다. 그것으로 보아 단원 자신이 불우했던 말년과 연결하여 구양수의 시의(詩意)와 같은 심사를 그림에 표현하였으리라.
  쓸쓸한 가을 달밤의 분위기에 휩싸여 그림을 그렸던 그의 심정이 깊이 와 닿는 날이다. 우뚝 우뚝 솟은 건물들을 나무숲으로 상상해본다면 그 속의 한 초옥에서 추성부를 어찌 생각하지 않으랴! 화면 우측 집에 조용히 앉아 있는 구양수의 모습은 단원 말년의 모습을 투영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오늘 나는 아파트촌이 생기기 전의 시절로 돌아가서 산 마을의 숲에서 이는 바람소리를 연상하며 추성부 속에 선다. 오늘 같은 센바람이라면 휘어질 듯한 대나무 가지의 댓잎은 서걱거리기도 힘들어 어떤 무선 통신을 전할 수도 없을 것이다. 낙엽수에서 떨어지는 잎새들은 사연을 남길 여유도 없이 사방팔방 정신 없이 휘날리고 있으리라. 갈잎들은 뿌리 채 흔들려서 사치스런 가을의 연정으로 살랑거릴 수도 없으렷다. 연륜이 깊어짐에 따라서 계절이 주는 느낌도 이렇게 달라지는 것이려니 싶다.
  추성부를 생각하면 바로 이어지는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세한도는 진품을 딱  한 번 보았을 뿐이지만 영인본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 작품에 대하여 어떤 감상도 말할 수 있는 지경은 아니었다.  물론 나는 젊었을 때 문인화를 이해하고자 서체와 사군자 그리기를 습작해본 적은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그림 속의 글자, 특히 어려운 한문 때문에 항상 난감하였다. 요 근래 와서야 그림 속의 글을 해석한 것으로나마 이해하고 마음에 와 닿는 것이 많아져서 새삼 가슴으로 들어오는 즐거움이 있다. 세한도 역시 그랬다. 그 그림은 일반인들이 결코 좋아할 그림은 아니다. 인생의 후기가 되어서야 김정희의 제주도 유배 시절의 심정을 이해하게 되었기에 다시 보는 작품이다. 김정희에게 제주도 유배 생활이 없었다면 어찌 추사체를 완성할 수 있었겠는가. 조선의 유배제도가 낳은 인간 승리요 학문과 예술의 성취 중의 하나였다.

  지난번 국립박물관에서 전시되었던 일본의 국보가 되어버린 안평대군의 작품 '몽유도원도'를 보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운집하여 몇 겹의 줄을 선 것을 보았다. 그림을 보고 이해하고 싶은 것보다도 그 유명세로 인한 이유도 한 목 했을 줄 안다. '몽유도원도'가 명품이 된 이유 중의 하나도 '그림 속의 글'때문이기도 하다.
   세한도 역시 그랬다. 2005년 용산국립중앙박물관의 개관 때에 <세한도>를 전시한 바 있었다. 결코 일반 관람객이 선호할 성격의 작품이 아니었음에도 그 <세한도>를 보기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운집한 것이다. 세한도가 작품이라기 보다 거의 '신화'가 되다시피 한 것은 그동안 축적된 <세한도>에 대한 연구와 보존된 과정의 배경 때문인 것이 더 큰 이유라고 생각한다. 나 역시도  미술적인 감상이 주는 정서보다 그 작품이 지닌 이력이 신화적이기 때문에 관심을 가지고 보게 되었다. 일제강점기에 경성제대 교수 후지스카에게 넘어간 '세한도'를 서예가 손재형씨가 동경의 후지스카 집으로 발이 닳고 무릎이 닳도록 백 날 동안 문안하여 넘겨달라고 간청하였다. 감복한 후지스카는 무조건으로 넘겨주었다. 그 석달 뒤 후지스카 집이 폭격을 맞았고 후지스카가 소장했던 모든 책과 자료가 불타버렸지만 세한도만  살아남게 되었다. 하늘이 지켜준 명품이란 극적인 이야기다. 그 외에 제자 이상적과의 감동적인 관계.  중국 문인들과 한국 근대 기 애국지사들의 찬문(撰文) 등이 세한도를 신화로 만든 것 같다.
  
 

 

 

 

 

 

 

 

 

 

 

 

2. 세한도(歲寒圖)
 
  국보 180호가 된 추사 김정희 작품 <세한도歲寒圖> 는 제주도 유배 때 그렸다.
  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也(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야) '날씨가 차가워진 후에야 전나무와 소나무가 늦게 시듦을 안다'는 <논어>구의 한 구절을 빌어 '세한도'라는 말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천한 모양으로 쇠한 나이 육십에 꽉 찼는데 육 년을 바다에 칩거하여 이제까지 이르니 역시 이상한 일이로세. 연초에 까닭 없이 모진 병이 파고들어 꼭 죽는 줄만 알았는데 무슨 인연인지 되살아나기는 했으나……. 게다가 입과 코의 풍화는 한결같이 덜함이 없어 이미 3년이 되었으니, 이는 또 무슨 병인고란 말인가? 온 몸과 감각 중 편한 곳이 하나도 없으니, 이러고서야 어떻게 오래 갈 수 있겠는가?"
   아름다운 섬 제주도에서 도저히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그 시기의 김정희의 삶을 대변하는 한 줄기의 글이었다. 제주도로 유배되기 전의 추사는 당시의 최고의 문화적인 향유를 누리면서 당당한 위치에 있었다. 그런 그에게 인적도 드물고 뱃길도 험난하여 누구도 자주 올 수 없는 섬 생활은 고통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이런 그에게 변함 없이 중국의 책들을 구해주던 제자 이상적과의 관계는 너무도 애틋한 이야기다. 세한도는 김정희가 그런 이상적에게 자신의 심사를 표현해서 그려준 그림이다.           김홍도의 추성부도를 보자면 다음에 올 세한이 자연스레 그려지는데, 나는 세한도의 전형처럼 추성부도를 보게 된다. 추성부도에 나타난 집이 세한도에 비슷한 모양으로 그려지며 추성부도에서 초옥 한 채와 나무 네 그루만 남겨두면 그대로 세한도 같기 때문이다.  물론 추사의 세한도가 중국의 예찬이란 사람의 산수 전통에 영향 받았다고 하지만, 김정희는 이미 북경에 형성된 예술품 시장과 중국의 문인 지식인과의 접촉이 있었던 만큼 중국의 고서화를 그보다 많이 접한 사람도 드물었을 것이다. 그런 그가 김홍도의 그림을 낱낱이 모를 리가 없었을 것이기에 세한도를 그리면서 김홍도의 추성부도도 어찌 떠올리지 않았으랴 싶은 것이다.
  마음으로 보지 않는 한 알 수 없는 간결한 그림. <세한도>는 추사 김정희의 암울하고 쓸쓸한 자신의 말할 수 없는 처절한 심정을 볼품 없는 조그마한 집 한 채와 늙은 소나무로, 제자의 고마운 행동은 지조의 상징인 우뚝 선 소나무와 잣나무로 표현하였으며 '너와 나'둘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의 무관심은 집 이외의 아무것도 없는 겨울 배경으로 표현하였다고 해석한다. 그림의 제일 오른쪽에 찍은 주문방인(朱文方印)이 '장무상망長毋相忘'이라니 이제 와서야 세한도의 소박하면서도 초탈한 듯한 깊이 있는 격조가 내 감수성에 와 닿는다. 제자 이상적에게 '오랫동안 서로 잊지 말자' 라고 했던 그 마음만이 매서운 바닷바람이 스치고 간 자리를 어루만졌던 것인가.
  겨울이 오는 길목에서 유배시절의 김정희의 나이를 넘고 보니 그 세한의 의미를 이해하게 된다. 밤낮이 없는 시멘트 건물 군 사이로 뜨는 현란한 인공 빛들 속에서는 늦가을의 소리와 세한지정 같은 심사가 생길 틈이 없는 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옛 선비들이 마음에 품고 있던 정신을 그림으로 말할 수 있었던 그 시대의 예술혼이 아련하게 그리운지도 모른다.
  현대인들이라고 빌딩 숲을 헤치고 아우성치는 겨울바람 소리에 인생의 무상함을 생각하지 않겠는가. 부모가 되어 보아야 부모 심정을 안다 듯이 인생의 후렴을 살게 될 때가 되어서야 인생의 무상함을 새삼 느끼게 된다. 누군들 세상살이의 풍파를 거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세상살이 바람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바람이거늘, 바람의 종류와 강약은 다르겠지만 강풍이 아닐지라도 사람 마음의 크기에 따라서 바람맞는 자세도 다르리라.
  돌이켜 보면 내게는 1970년대 전주 살이 자체가 유배생활 같이 생각될 때가 있었다. 처음 서울에서 전주에 오니 허허벌판 같았다. 아마도 문화적 향유를 누리던 김정희가 갑자기 외딴 섬에 내려졌을 때와 같았다고나 할까. 시대가 다르니 비교할 정도는 아니지만 결혼 생활 자체를 엮어나가는 동안 남편과의 정서적 갈등과 경제적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불편이 심했다. 현실의 교육이 못마땅하여 아이들의 낙원을 찾아 헤매기도 했다.  한쪽으로 사정없이 쏠리는 나무처럼 뿌리가 흔들리는 충격도 맛보았지만 그 시기야말로 밑바닥부터 내 정신을 치열하게도 고양시켰던 것 같다. 생각해보자면 그것은 스스로 만든 감정의 유배였지 외부의 조건은 아무 문제될 것이 없었다. 부모라는 어른이 되어 가는 수련과정에 오는 성장통이기도 했다. 봄날의 외진 언덕에서 가시 돋친 찔레가지는 하얀 꽃을 무더기로 피워냈고 겨울이 오는 동안 새빨간 열매를 익혔다. 파도가 쳐야 바닷물이 맑아지고 먹구름이 지난 하늘이 맑다. 친정붙이 하나도 없는 먼 고장에서 서울에서 변함 없이 나를 후원해준 자매들은 김정희의 제자 이상적과도 같았다.
  몇 십 년 전에는 유배지 같았던 전주가 이제 고향처럼 아늑해졌으며 전주가 지닌 전통의 문화미에도 푹 젖어 지낼 수 있게 되었다. 단풍잎 오그라드는 인생의 가을이지만 겨울 나목이 되어도 정신만은 소나무의 푸름을 지닐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육신이 죽는 날이 오더라도 세한도는 그리지 않을 것 같다.
   귀양살이하는 하와의 자손을 굽어살펴 달라는 천주교 기도문이 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하와이기에 세상살이의 유배의 고통을 짊어지게 되었다는 뜻이다. 어쩌면 본성을 잃고 헤매는 인간에게는 세상살이 자체가 유배인 지도 모른다. 그래서 끊임없이 행복했던 에덴을 추구하는 것이 아닐까. 손에 잡히지 않는 행복마저 먼저 취하고 독점하려는 듯 인간의 소유에 대한 집착이 전쟁의 역사를 끝내지 못하니 말이다. 유배시절 위대한 업적을 남긴 조선의 선비들만큼이 아니라도 세상살이 동안 후손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이었으면…. 간절한 마음으로 '장무상망長毋相忘' 이란 붉은 도장을 나도 찍고 싶다.  (2009/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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