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일기

함라한옥마을

차보살 다림화 2010. 5. 6. 23:56

초의보다 2백여 년 전에

차를 소개했던 실학자 잠곡 김육

 

 

용봉문양의 불망비 앞에서

                                     

                                                                            조윤수


  

  뭉개뭉개 피어올랐던 꽃구름이 사라진 자리에 벌써 연록색이 짙어간다. 떡차團茶 덩어리를 소복이 담고 있는 듯한 싱그러운 5월 산이다. 꽃잎을 여윈 아픔을 붉히고 있는 꽃꼬투리가 울긋불긋한 벚나무 가지에서 마지막 꽃잎들이 하르르 날리고 있다. 가고 또 가도 그리운 산길. 몇 겁 동안 피고 지고 했던 세월 속에 닦여진 오월의 투명한 빛살 속으로 들어간다.

   입하가 가까웠는데 이제야 차 순이 겨우 나오고 있다. 차신茶神들의 시샘인가 아니면 벌써 다 마셔버렸나?  4월에 갑자기 엄습했던 추위가 몇 차례 거듭했던 탓이다. 겨우 두어 시간 동안 한 주먹쯤 잎을 따고 개울가로 내려가서 점심을 먹고 마음을 접었다. 싱그러운 작설雀舌을 먹고 또 먹어서 입안이 달콤하다. 이것만으도 햇차 맞이는 충분하다. 차신茶神도 엄살이 심한데 난들 신이 날 리가 있는가. 

  누군가와 묵은 차라도 몇 잔 나누며 옛 이야기라도 읊고 싶다. 차신도 내리지 않는 이런 날 외롭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은 깊고 은은한 차 맛 같은 고독이란 친구가 곁에 있기 때문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의 반대쪽으로 핸들을 돌리고 만다. 바로 익산 방향으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함라면에 있다는 잠곡 김육(1580-1658)의 불망비를 찾아보려고 작정한다. 불현듯 옛사람의 차 사랑에 젖으면서 그분의 업적이라도 기리고 싶다.
  익산 역에서 관광정보를 얻고 지도를 얻었다. 익산시 함라면 파출소 바로 뒤편에 김육金堉의 불망비가 있다. 마치 잊어서는 안 될 옛 친구의 흔적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이다. 혹은 옛 스승을 기리고 싶은 마음이랄까. 연고도 없는 김육의 불망비가 왜 여기에 서 있는 것인가.  350여 년 전의 김육의 숨결이 왜 이곳 함라 마을에 남아 있는가. 불망비란 그 지방민들이 그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세워준 비석이 아니던가. 옛 사람들은 그를 잊지 못해 공덕비를 세웠건만 지금의 사람들은 그를 잊고 있어 주변이 어수선하다. 오늘의 관리는 그 불망비의 위치도 모른다.

  김육은 충청도관찰사와 영의정까지 지낸 분이다. 도정을 펼치면서 대동법 시행을 관철하였고 水車를 만들어 보급하였다. 김육을 실학자라고 한 것은 백성들의 살림에 도움이 되는 화폐를 유통시키고 수레를 제조하였으며, 時憲曆을 제정하고, 지식을 집대성한 백과사전인 <유원총보類苑叢寶>을 편찬하였기 때문이다. 정찬주씨의 <다인(茶人)기행>에서 알게 된 후부터 관심을 가졌다. <유원총보>는 47권 30책으로 37권은 음식을 집대성한 <음식문>인데, <차茶편>이 나온다고 한다. 유원총보를 읽어볼 여유는 없지만 그런 사실만으로도 나에게는 그분을 기리는 이유가 된다. <차편>에는 <다경>의 저자인 육우, 차의 효능, 차의 일화, 차세에 얽힌 얘기 등이 총 1천 7백30여 자로 기록되어 그동안 접하지 못했던 흥미로운 정보를  준다.  김육보다 백년 앞선 이목李穆의 <다부(茶賦)>와 이백 년 후의 초의선사의 <동다송>이 차를 개인의 정서에 접목시킨 문학적인 다서茶書로 이미 알고 있지만, 이 책은 김육의 차에 관한 다양한 지식을 사전적으로 찾아볼 수 있도록 집필했다는 것이 새롭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사신으로 송나라와 명나라를 다녀온 사람들은 모두 중국의 앞선 문명과 차에 흠뻑 영향을 받고 돌아오기 때문에 김육 또한 다르지 않았다. 김육 이후 200년이 지나도록 아무도 뚜렷이 그의 문화의식과 백성들을 위한 개혁 정책을 잇지 못한 것 같다. 정조시대에 와서야 박지원, 박제가를 비롯한 정약용과 같은 실학자들에 의하여 김육의 실학 정신은 그 맥을 이을 수 있게 되었다. 초의스님과 정약용과 추사 김정희에 이어져서 차문화도 증흥을 맞았던 것이다. 
  내가 특히 감명을 받는 것은 김육이 광해군 때에 자신의 포부를 펼칠 수 없게 되자, 경기도 가평군 잠곡에 내려가 10년 간 손수 농사를 지었다는 점이다. 김육은 인조반정 이후 관직에 진출하여, 백성과 나라를 위한 경세 이념을 다양한 정책으로 구현하여 추진하였다. 농사의 체험으로 농촌의 실정을 소상히 파악하게 되었기 때문에 백성들에게 이로운 기구들을 개발하는 정책들을 구체화할 수 있었다. 그는 대동법이 전국적으로 확대되고 동전이 전국적으로 보급되는 데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김육이 죽자, 대동법으로 혜택을 입은 충청도 주민들이 슬퍼하여 그의 공덕을 기리는 대동선혜비(大同宣惠碑)를 세웠다. 그것은 현재 경기도 평택시 소사동에 있다. 김육의 유수비는 개성의 선죽교에도 세워진 것이 있다고 한다. 효종임금도 대동법을 추진하던 지난날에, "김 영부사(領府事)가 홀로 담당하여 확고하고 흔들리지 않음으로써(堅確不撓) 성공하기에 이르렀다. 나는 매번 생각할 때마다 잊지 못하여 김육처럼 확고한 인물을 얻기를 바라나, 어찌 얻을 수 있겠는가." 라고 탄식하였다고 한다.

       

 

 

 함라면 파출소를 찾아 뒤로 돌아가니 바로 조해영 가옥의 안내판이 먼저 나를 맞는다.  조해영 고택 옆에 김육의 불망비를 세운 것은 조해영의 조부 조용규가 농장을 경영하여 부를 쌓았으며 대동법을 제정한 영의정 김육의 불망비를 세우는데 공이 컸기 때문이었다. 

 

 

 

  비석의 지붕돌은 없지만 이수의 조각이 예사롭지 않다. 머리는 봉황이고 몸통은 용이다. 한 쌍의 용봉문양이라고 해야 할까. 비석의 이수에 문양을 조각할 때 용봉차의 의미로 새긴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김육의 차 사랑과 나의 관심이 맛 닿아 용봉문양을 단차團茶와 연관짓게 한다. 단차 즉 떡차에 용봉 문양을 새기면 용단봉병이 되었다. 용봉차의 시작이었다. 송나라 때는 단차를 만들고 숯불에 구워서 가루를 내어 마시는 말차가 유행하였다. 황제에게 용봉차를 공납하는 다원이 있었고 시장에서는 금보다 비싼 가격으로 팔리기도 했다. 그런 까닭으로 고려 때는 송나라의 영향을 받아 말차를 마실 수 있는 고려 청자 다완이 탄생되었다. 고려의 왕실 귀족들과 선비들이 송나라에서 수입한 단차를 애용하여 고려의 임금도 신하에게 차를 하사하곤 했다. 
 

 

 

 

   혹시 비석을 조각하는 사람이 김육이 그 용봉차를 좋아했다는 것을 알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조선시대에 차문화가 쇠퇴하였지만 고려 때의 영향이 조선왕실에 이어지고 있었다. 김육도 명나라에 다녀왔기 때문에 차에 대한 지식을 집필하기도 하고 애용하면서 백성들에게도 알리고 싶어했을 것 같다. 함라 지방에 우리나라의 최북단 야생차 군락지가 있는 것을 보아서도 김육과 따로 떼어놓고 생각되지 않는다.

 

 

 

 

 

  예스런 돌담길을 걷는 동안 담장 밖을 기웃거리는 눈부신 탱자꽃과 수수꽃다리(라일락) 향은 김육이 이곳에 머물었을 그 시절로 나를 돌려놓고 행복감에 젖게 한다. 백성을 위한 일이라면 험난한 고통도 마다하지 않았던 경세가이자 도인이었던 그런 분을 오늘 같은 정치 현장에서 찾을 수 있을까?  마을 곳곳의 돌담과 어울리는 예쁜 꽃밭이 5월의 초록빛과 어울려 사무치도록 영원의 빛에 대한 그리움을 일게 한다. 숙연한 마음으로 신차 맛 흐르는 5월 산을 통째로 바치고 싶다.  (2010년 5월 3일)

   

 

 

 

 

 

 

 

 

 

 문화재청에 의해서 정비를 하는 것 같았다. 일부 공사가 진행중이었다. 내가 이곳 저곳 둘러보고 마루에도

앉아보곤 했더니, 공사 인부들이 어디서 온 교수냐고 물었다.

 

 익산 둘레길의 시작인 함라마을에는 함라 3부잣집과 돌담길이 있다.

김안균가옥(지방민속자료 제 23호) 부친 김병순은 진사를 지내 평소 마을에 걸인과 과객에게 후한 대접을 하였으며, 주변에 많은 은덕을 베풀고 많은 재물을 사회봉사에 사용하여 그 소문이 백리 안까지 자자하여, '인심  좋은 함라'라는 명성을 얻었다.

조해영가옥(지방문화재자료 제121호) 조부 조용규는 농장을 경영하여 부를 쌓았으며 대동법을 제정한 영의정 김육의 불망비를 세워 백성을 이롭게 하는 정신을 기리고 있다.

이배원가옥(익산시향토윶적제10호) 부친 이석순은 참봉으로 빈민을 구제하는데 힘을 썼으며, 이배원은 교육사업가, 서예가로, 동생 이집길은 유명한 배우로 활동하면서 사회봉사에 헌신하였다.

 

 주변이 흐트러져 어수선하였지만 정원의 꽃나무들과 장독대들이 옛날의 영화를 말하고 있었다.

 

 

 

 

 약 100년 전에 지었을 이 집의 역사를 안고 있는 모과나무. 

 보기에 천여 평은 될듯한 집을 둘러싸고 있는 돌담, 최근에 보수한 듯하다.

 

 

 

 입구에 조립식 집 한채를 짓고 살고 있는 조씨의 종가집 며느리가 살고 있다.

곧 냉면집을 열려고 준비 중이며, 종갓집 된장을 손수 만들어 판매한다.

주변에 꽃밭이 예뻤다. 희귀한 꽃들도 많았다.

 

 

 긴 담장 밖에서 안이 보이는 조해영가옥이다.

뒷 편 위 쪽으로는 함라향교가 있다.   다음 편 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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