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일기

상관면 신리의 겨울

차보살 다림화 2011. 1. 4. 15:34

 

 

순수(純粹)

                                                                                                              조윤수

 

 

  창 밖이 새하얗다. 흙 한줌도 안 보인다. 백설이 쌓여 상처 나고 찢긴 맨살을 덮었다. 바람결 따라 공중에서 춤추던 눈발이 유리창에 사뿐사뿐 내려앉는다.
  설국(雪國)에 첫 발자국을 내딛는 기분. 적설 위에 발자국이 찍히는 소리 '뽀드득 뽀드득'. 자동차들은 솜이불을 덮은 듯 고이 잠을 자고 있다. 주택 뒤를 돌아 언덕길을 오른다. 봄이면 찔레꽃 담장이 아름답던 집 앞을 지난다. 왕죽과 청죽들 사이로 제법 울창한 숲길이 열린다. 푸른 잎새 하나 하나마다 눈이 내려 쌓인 대나무들이 청신한 신부를 연상케 한다. 눈 덮인 대나무 숲 터널을 바라보며 조금 오르면 오른 쪽으로 전주 유씨 무덤 하나가 있다. 여기까지 오면 한 숨을 돌리고 후끈한 발을 쉬어야 한다. 목화 솜을 송이송이 머리에 얹어 놓은 듯 소나무 밑이 안온하다.
  정강이까지 푹 푹 빠지면서 비탈진 언덕을 올라 구릉 끝에 선다. 눈발은 강풍과 함께 몰아친다. 바로 눈앞의 나무들만 보일 뿐 온통 눈구름에 덮여 하얗고, 그 뒤는 회색구름이 가득 내려앉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맑은 날은 이 언덕에 서면 전주의 서부 시가지가 한 눈에 시원하게 보이는 곳이다. 왼쪽 멀리 박물관 지붕이 보이고, 버스길 위로 자동차들이 질주하는 광경도 보인다. 정면으로 멀리는 전주공대 건물이 우뚝 솟아 있는 모습도 볼 수 있으며, 오른쪽으로는 마전으로 넘어가는 천 변에 새 아파트 건물들이 선명하게 줄지어 서 있다. 눈보라 속을 헤치며 거북이 걸음으로 자동차들이 걷고 있을 텐데, 그 모든 광경이 눈구름에 갇혀 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는 말을 이럴 때 쓰는 것인가?
  눈 방석에 주저앉아 노송에 기댄 채 숨을 고르자니 마을의 전설이 솔잎에서 새어나오는 듯하다. 소나무 사이로 작은 새 한 마리가 후드득 날아와서 눈 덮인 땅을 헤집어보다 이내 멀리 날아가 버린다. 이렇게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날, 먹이를 낚아야만 하는 뭇 생명들에게는 힘들고 추운 겨울이리라. 살기 어려웠던 옛날에 어른들은 없는 사람은 여름 살기가 차라리 쉽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눈보라가 휘날리던 바람 찬 흥남 부두에…" 노래 말이 떠오르면서 52년 전 1.4후퇴 (오늘이 마침 1월 4일이다.) 때 생각이 난다. 그 때 그렇게 추웠다는 기억은 왜 나지 않는지 알 수 없다. 전쟁의 후유증을 잊기엔 아직도 시간이 필요하건만, 여전히 전의(戰意)가 사라지지 않는 남과 북의 관계이며 이 지구촌이다. 몇 년만에 눈다운 눈이 펑펑 내린다.
  그 해 겨울은 유난히 추웠었다. 눈이 많이 내렸던 그 겨울도 고요하고 적막한 날들이 이어졌었다. 오로지 강아지 한 마리가 내 뒤를 쫄랑거리면서 눈 덮인 마을길을 즐겁게 뛰놀며 따랐었다. 식구도 몇 안 되는 가족이 뿔뿔이 자기 일로 흩어져 있어 먼 하늘만 보던 때가 새삼스럽다. 각자의 터널 속에 갇혀 있어 같이 가야할 길이 보이지 않던 그 때가 지금처럼 눈구름에 가려 앞이 보이지 않았던 때 같았나보다. 분명히 눈보라가 그치고 뿌연 구름이 비가 되든 눈이 되든 쏟아져 내리면 거기 길이 훤히 드러나기 마련이었던 것을……. 시간이 필요했었다. 눈구름이 하얀 꿈이 되어 부서지고 미로를 헤매다 만든 상처를 덮어 아물게 했던 시간들이었다.
  오던 길을 다시 내려가는 것은 재미가 없다. 좁다란 오솔길, 인기척 소리 하나 나지 않는 고요한 숲길이 이렇게 아늑할 수가 없다. 포근한 백설의 양탄자 위를 사뿐 사뿐 걷는다. 키가 몇 척이나 될 것 같은 노송들이 하얀 털모자를 쓰고 여기 저기 우뚝 서서 마을을 호위하고 있다. 집들이 송림 앞으로 옹기종기 모여 있다. 구들을 데우려는 나무 타는 소리가 사라진지는 오래 전, 보일러 돌아가는 소리만 간혹 들려오고 있다.
  샛길로 내려오니 마을 분지 가운데 편안한 모습으로 서 있는 우리 주택의 전경이 보인다. 눈은 여전히 강풍과 함께 휘몰아친다. 봄가을 찾아보던 감나무 밭과 배나무 밭까지 올라본다. 앙상한 가지마다 자신의 분수만큼 알맞게 디자인한 흰 드레스를 보기 좋게 맞추어 입은 듯 아름다운 모습으로 치장했다. 감나무 가지 밑에 살며시 누워본다. 하얀 침대 위에 흰 드레스 입은 하늘의 신부가 꿈을 꾸듯이. 마지막 잎새까지 다 벗어 던지고 정갈한 맨 몸으로 기다렸던 나목들의 기다림을 이제야 알 것 같다. 삭막하기만 한 것 같은 이 겨울이 축복의 시간이 되는 이유를 순백의 너울로 치장한 나목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나무 잎들의 흘러간 생은 따뜻한 눈 밑에서 땅 속으로 녹아든다. 눈발이 내리듯 그들의 꿈도 나래를 펴고 있을 것이다. 솔숲과 대숲에서 부는 바람이 눈꽃을 흩날린다.
  여름내 싱싱한 맛을 자랑했던 채소밭도 하얀 이불 밑에서 조용하다. 갈색으로 말라버린 부들은 가녀린 몸매로 마른 머리채를 흔들거린다. 새 싹을 움트게 하기 위하여 눈보라를 맞으면서도 끝까지 뿌리를 지키고 있다.
  적막한 마을에 아이들 소리가 명랑하게 울린다. 눈을 맞으러 나오는 사람은 없고 오직 아이들뿐이다. 아이들을 보니 몇 십 년 전의 겨울이 춥지 않았던 이유를 알겠다. 내 생애 이런 순백의 향연을 얼마나 더 즐길 수 있을 것인가. 눈바람이 잦아드는가 했더니 이내 함박눈이 되어 펑펑 쏟아져 하늘을 메우고 땅으로 쌓인다.
  동녘으로 솟아오른 일출이 아스라이 보이는 먼 시가지를 건너와 이 마을까지 비추기 시작했다. 만물이 제 모습대로 백설을 쓰고 있는 정경이 눈부시게 빛나고 가슴 가득 양광(陽光)으로 채워진다. 그랬다. 눈구름 위에는 찬란한 태양이 그 자리에 늘 있는 것이다. 태양은 먹구름이 신비한 결정체를 빚어 땅을 덮을 때까지 기다렸다. 세상은 단순 명쾌한 순수의 아름다움으로 빛난다. 쌓인 눈은 오래지 않아 햇볕에 힘없이 녹아버리고 땅은 다시 지저분한 일상의 모습으로 돌아올 것이다. 한겨울에 받는 하얀 눈 세례는 여전히 우리 안의 순수성을 일깨워준다.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있는 순수를 잃지 말라고…."
(2003. l. 4) 월간 (새마을 금고) 2003년 2월호 발표        조윤수 수필1집 <바람의 커튼> 중에서

 

 

 

 

 

다시 1월 4일을 생각한다

 

 

 

  매년 1월 4일이면 연례행사처럼 이 '순수'를 떠올린다.  그로부터 8년이 지난 지금의 나는 어떤가. 가족들 각자는 자기 둥지를 찾아 날아가서 자기의 자리에서 소임을 다하고 있고, 우리는 이곳 상관면 신리로 이사왔다.  남편은 이내 하늘나라로 자리를 옮겨서 편하게 자기의 수행을 계속 할 것이며, 세상의 나를 위해 응원하고 있는 것을 나는 잘 안다. 내 삶의 패러다임이 또한번 바뀌었다. 영원히 나를 지켜줄 나의 '순수'가 내게 늘 암시를 주기도 한다. 올해도 1월 4일 을 맞는다. 이곳 전주로 들어오는 관문인 상관의 신리에서 내 남은 꿈을 펼치고 있다. 5년째의 1월, 신묘년 토끼해의 1월이다.

 

  눈이 쌓인 이 마을 주변을 산책을 했다. 신리 지큐빌 아파트 옆에 상관성당이 있다. 성당 마당에 눈 위에 발자국을 내어 뒤돌아서 나의 발자국도 회상했다.  시간이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보이는 육체를 통하여 보이는 현상이 변화하고 있다는 데서 그 실체를 실감한다. 1980년대 이곳 상관 성당의 주임신부님은 <베소라 성서>을 번역 작업을 했다. 나는 우연한 기회에 신부님의 조수가 되어 그 작업을 도우러 전주 덕진에서

여기까지 출근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성당 주위는 전부 밭이었으며 큰길 가에만 상가가 있을 뿐이었다.

 

  빨간 벽돌집 건물은 근대적인 건축양식이어서 근대문화유산으로 남았다. 지금은 이 건물 뒤안에, 옛날 사제관이 있던 곳을 헐고

다시 새 성당건물을 지어서 그곳을 사용하고 있다.

  내 집에서 남으로 열린 공간을 쳐다보면 이 구건축물의 십자가가 보인다. 그럴 때 옛날 이 성당으로 신부님을 도우러 다녔던 때가 생각된다.

어찌 그 때 내가 이곳이 나의 마지막 둥지가 될지도 모르는 곳이란 것을 알 수 있었을까. 사람 일이란 참 묘한 것이다. 그때 마음 한 자락이 이곳에 남아 있다가 나를 이끌었을까.  김정원 신부님과의 인연도 참 묘했다. 나는 그 때 덕진성당에 다닐 때였고 집도 덕진동에 있었다. 교구청에서 열리는 신부님의 성령세미나와 베소라성서 강연을 들었고, 신부님의 강연은 교회 내의 개혁의 목소리였다. 교회 내의 보수파 성직자들과 신도들에게는 반감도 많이 사기도 했다. 김신부님은 전국으로 초청되어 베소라성서 강연을 다녔다. 내 평소의 생각과도 공감되는 부분이 많아서 자주 참석하였다. 그러다가 어느 때 신부님께 신랄하게 교회의 부정적인 면을 지적하고 항의했던 때가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도 선무당같은 짓이었다. 무슨 얘기를 했는지도 지금 딱히 말할 수도 없다. 그런 일이 있은 뒤, 신부님은 미사 강론 때, 나의 이야기를 공개했다. 물론 내가 누구란 것을 알릴 리는 없었다. 그리고 신부님은 성서 번역의 도우미로 나를 불렀던 것이다.

 

옛날의 박혓던 많은 발자국 위에 다시 발자국을 내어 보았다.

  지금 수필 쓰는 일을 하기 때문에 가끔 김신부님 생각이 날 때가 자주 있다.  신부님은 성서 번역 작업을 할 때 작업실 주변이 참 말끔했다. 히브리 원서의 사전을 볼 때도 한 번 사용하면 바로 책장에 꼽아 둔다. 나는  히브리 사전을 보다가 화장실에 가고 싶을 때면 책상 위에 그대로 두고 갔다. 다시 볼 거니까. 그런데 내가 다녀오는 사이  신부님은 그 사전을 책장에 꼽아 놓는 것이다. 잠시도 주변을 흩어지게 하는 법이 없었다.

그럴 때마다 다른 직원에게 그 깔끔성이 조심스럽다고 말하면, 그는 우리가 더 깔끔하게 해버리면 된다고 말했다. 지금도 나는 내 책상 주변이나 컴퓨터 주변을 그렇게 하지 못한다.  또 한 가지 생각나는 대목이 있다.  당시에는 컴퓨터가 없을 때였다. 원고지에 일일히 단정하게 글을

쓰고 나는 그 원고를 교정한다고 했지만 순전히 아무것도 모르면서 했다. 단지 신부님이 나를 옆에 두기를 원했던 것 같다. 가끔 히브리말을

우리말로  번역할 때 나한테 물어왔다. 나는 단순하고 쉽게 우리말을 이야기 하면, 신부님은 잠시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곤 했다. 그렇게 쉬운

말을 신부님은 모르는데 내가 말하는 것이 신기하다고 했다. 그것은 신부님의 생활이 우리의 일상과 다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성서에서 자유스러워진 후, 교구청에서 신부님을 만난 적이 있었다. 신부님은 나를 알아보기도 힘드셨던 것 같았다. 건강이 몹씨 안좋아졌고 얼마 뒤 이 세상을 하직하였다. 그때 본 신부님의 모습은 참 무거워 보였다. 학자 신부님이었기 때문에 너무나 많은 것을 담고 다 내려놓지

못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신부님의 선종 모습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는데, 돌아가실 때도 깔끔하게 모든 것을 담고 떠나셨다고 했다. 

 

 

 

  성당 뒷쪽에 하얀 십자가가 서 있고 그 옆에 빈가지로 남은 은행나무에 까치집이 여러개 얹혀 있다. 아마도 까치들도

이 성당의 가족이 된 것 같다. 아파트에 살게 되니까 밖을 나오지 않으면 새소리도 듣기 쉽지 않다. 오늘 눈구경을 나오니

까치들도 때를 지어 깍깍거리면서 나들이를 다니고 참새들도 나무들 새로 날아다니는 것을 보니 반가웠다. 무엇을 먹고들

사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옛날의 1월 4일들을 생가하면서...  한무리의 까치들이 날아가는 뒤를 잡다가 세 마리가 앵글에 잡혔다.

까치들의 모습은 검정과 흰색이 잘 배합된 옷을 입고 있으니 멋쟁이 중에도 아주 세련된 멋쟁이다. 그러면서 소리를 내면 우리에게

뭔가 반가운 소식처럼 들린다. 또한 칵, 칵 또는 꺅깍 하는 소리가 우리에게 '각覺' 을 강조하는 외침으로 들려온다.

그럴 때마다 마음을 챙겨볼 수도 있다.

 

 

 

 만덕정에 오르는 동안 하늘의 먹구름이 하얗게 변모하여 다양한 모양을 그리면서 사라졌다 나타나기를 반복했다.  남쪽에서 전주부로 들어오기 위하여 거쳐야 하는 관문이 남관이고 다음이 상관이다.  상관면의 신리는 서쪽의 고덕산 주변과 동쪽 만덕산으로 넘어가는 계곡 사이에 형성된 마을인 것 같다. 남쪽 슬치에서 발원한 대흥천 물이 남관을 거쳐 상관으로 흘러서 한벽당에서 한벽청연을 이루고 서쪽으로 돌아서면 '전주천'이라 불린다.

 

전주의 서부지역으로 갈 때면 전주천 쪽으로 올라가지 않고 서쪽의 고가 도로로 나가면 빨리 갈 수 있다. 이 길은 익산으로 이어진다.

 

 

매주 수요일 박물관에 갈 때면 이 고가도로로 가면 중인리와 금산사 입구를 지나 쑥고개로 나가면 되고 쑥고개에서 김제와 전주시의 갈림길을

만날 수 있다.

 

만덕정에서 서쪽을 관망하면 멀러 진안 쪽으로 통하는 만덕산 줄기가 보인다. 가운데로 최근 광양까지 이어지는 새로운 고속도로가

건축중인데 얼마 전에 삼레에서 남원까지는 개통되었다.

 

 

 

 

  남관 쪽을 멀리 쳐다보면  기찻길을 가운데로 왼쪽은 광양으로 나가는 새 고속도로가 보인다. 오른 쪽 도로는 일반 국도이고 또 그 옆으로

서부 고가도로에서 나오는 길이 상관 톨게이트로 연결된다.

 

 

 

 

만덕정은 절벽 위에 있다. 아무도 흔적을 남기지 않은 순수의 눈땅. 바위 틈에 뿌리를 내리고 서 있는 소나무가 소나무 다운

힘과 굳은 의지를 보인다.

 

 

 

 

 

 

 

 

최근에 동네 산책로가 마재봉에서 상관 저주시까지 이어져 걷기 좋게 되었다. 곳곳에 벤취도 있었다.

 

 

 

 

눈 쌓인 날 소나무 숲의 벤취에 앉아서 명상에 잠겨 보는 맛이 좋다.

 

1월 4일이면 자연스레 1.4 후퇴란 말이 떠오른다. 오늘 이 날에 다시 생각하는 것은 앞으로의 1.4.에 대한 걱정이다.

2010년은 남북이 팽팽한 기장감 속에서 전쟁에 대한 공포를 실감나게 한 사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자연에 대한 경각심도 심했던 해이기도 했다.  3월에 일어난 천안함 저격 사건을 춘설이 분분했던 4월 내내 서해 바다에서의 인양작업의 귀추를 목격해야 했고, 이어서 태풍 곤파스로 전국이 또 한 번 자연의 위기를 실감했다. 북한의 연평도 폭격 사건은 작은 전쟁의 예행연습처럼 우리에게 남북전쟁의 공포심을 안겨주었다. 2010년은 한국전쟁  60주년이었다. 마치 60주년이 되면 가만 있지 않겠다는 북한의 의지를 나타낸 것 같기도 하여 60년이란 세월이 무색할 지경이었다. 사람의 일생 같은 세월,  뭔가 다 해결될 것 같은 기간이 아무 의미도 없이 사그라질 수도 있다는 허무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잠시 벤취에 누워서 하늘 호수에 잠겨 보았다.

 

 

 

걷기 좋은 코스를 돌아서 반대편에서 아파트를 바라 볼수도 있고 만덕정 쪽을 다시 바라본다.

 

햇살 좋은 곳은 어떤 산이건 유택들이 자리잡고 있다.

 

 

상관 저수지를 돌아 소양면으로 나가기 때문에 이 곳 일대를 소양로로 이름 붙였다.

 

 

 

신리역사

 

  신리역은 하루 한 번 기차가 멈춘다. 새벽 7시 쯤 여수로 내려가는 기차를 타면 여수에 도착하여 구경을 다 하고 다시 저녁 기차를 타고 신리역에 내릴 수 있다.  이렇게 편리하고 살기 좋고 경치도 좋은 마을이 좋은 생활터전으로 남게 되기를 바란다.

신묘년 새해에는 모두 다 좋은일과 행복하기를 바라는 망년의 기원을 했지만, 신년 첫날부터 국가재난으로 '구제역'을 선포했다. 수많은 소들이 그대로 강매장 당하는 처절한 현장을 어떻게 할 것인가. 사람을 그렇게 생매장했던 사건을 인류역사는 기억하고 있으니, 어떻게 인류의 앞날의 평화를 보장할 것인가.  이렇게 세상바람은 가만 있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그 바람을 맞을 것인가의 마음 자세만은 우리 마음대로 가질 수 있을 뿐이다.

 

 

언덕에서 내려와 기찻길 옆으로 걸다보면 동네로 넘어오는 육교가 있다. 기칫길을 넘어가는 통로인데

 이 다리를 처음 넘어본다.

 

 

 

동네를 한 바퀴 돌아서 집으로 돌아오니 하얀 꼬깔모자를 쓴 주목나무가 반겨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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