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말의 대유학자이며 경주 최씨의 시조인 최치원을 당연히 경주 출신으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은 믿기지 않는 황당한 일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최치원 군산 출생설은 그 내용을 확인해보면 나름대로 객관적 증거를 지닌 이야기이다.
군산에는 예부터 최치원 선생 출생에 관련된 선유도 전설과 내초도 전설이 전해오고 있었으며 옥구군의 군지에도 최치원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고 과거 서해안에 자리한 정자였던 자천대의 내력에도 최치원이 등장한다.
그러나 최치원과 관련된 전설이 전국적으로 수십 개나 있을 정도로 최치원은 도선 국사나 이태조와 함께 백성의 정신 속에 살아온 영웅적 인물이었기에 이제까지 최치원과 군산에 대한 연관성은 특별한 관심을 받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던 중 이상비 교수의 연구를 시작으로 군산의 최치원 출생설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 글에서는 최치원이 군산 출신임을 증명하는 전설과 지명 그리고 유적들을 중심으로 그 진위를 확인해 보도록 하겠다.
최치원은 통일신라 헌강왕 1년(857년)에 태어났다. 자는 고운(孤雲), 또는 해운(海雲)이라고 하였으며 경주 사량부 또는 본피부에서 출생하였다고 한다. 12세데 당에 유학하여 17세에 과거에 급제하였고 관직에 나아가 황소의 난에 '토황소격문'을 적어 이름을 날리었다. 이후 28세에 귀국하여 신라 사회를 개혁하고자 시무 10조를 건의하였으나 귀족들에게 배척 당하고 난세에 절망하여 각지를 돌아다니다가 가야산 해인사에서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처럼 최치원에 대한 기록은 무척이나 짧다. 이제까지 최치원의 출생지는 경주로 보고 있는데 그 이유는 고려시대 편찬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각각 최치원의 출생지를 경주라고 적고 있기 때문이다. 마을의 이름은 사량부와 본피부로 다르지만 우리나라 최고의 역사서가 경주를 최치원의 고향으로 기록한 이상 최치원의 출생지에 대한 논의는 불필요한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이르러 최치원의 고향에 대한 전혀 다른 주장이 제기된다. 그것은 정조 때 서모씨라는 사람이 최치원의 전기를 썼는데 그 책에서 최치원의 고향을 고군산(선유도)라고 적은 것이다. 이후 <최고운전>이라는 소설에서는 최치원의 고향을 문창군이라고 적고 있다.
왜 최치원의 출생지를 고려시대에는 경주 라고 적다가 조선시대에 이르러 군산의 고군산 혹은 문창군으로 변하는 것일까? 아마도 이러한 변화는 본래 최치원의 출생지가 명확하지 않았음을 반증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최치원의 출생에 대한 의문의 답은 <삼국사기>의 한 문장에서 찾을 수 있다. <삼국사기>에는 최치원에 대한 기록을 남기며 그 집안을 세계(世系) 실전(失傳)이라 적고 있다. 세계(世系) 실전(失傳)이란 최치원의 집안은 알 수 없다는 뜻이다. 어찌하여 유학의 시조라 칭해지는 최치원의 집안을 알 수가 없다는 것일까?
최치원의 제자 중에서는 고려 태조 왕건에게 충성하여 고려의 중앙 귀족이 된 자가 많았는데 그 결과 최치원은 도선 국사와 함께 고려의 호국신의 위치에 오른 사람이다. 이처럼 위대한 사람의 집안을 알 수 없다는 것은 최치원이 통일신라의 도성인 경주 출신이 아니며 또한 지방 호족 출신도 아니라는 근거가 될 수 있다. 최치원이 경주에 살아온 집안이라면 대학자를 낳은 최치원의 집안이 알려지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최치원은 그의 자(字)처럼 외로운 구름 혹은 바다의 구름처럼 신라의 지배 계층과는 전혀 다른 출신 성분의 사람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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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 탄 초인을 기다리던 민족 그러나 이 땅에 아직도 그분은 오지 않고 있다.
이번에는 그분이런가! 기다려보지만 다시 한 번만 믿어보자 하며 혹시 그분이런가! 여전히 기다리고 있다. 언젠가 나타날 그분은 백성이 바라는 세상이란 부자가 되는 세상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공평하게 대우받는 세상이길 원함을 알고 있는 분이리라.
아주 먼 미래에 나타날 미륵보살님을 기다리는 민초들은 자신들의 삶을 한탄하며 백성을 위한 왕이 오시기를 기다려 왔다. 선유도의 망주봉에도 왕을 기다리는 백성들의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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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이 간직된 망주봉은 두 개의 바위산이 서로 마주보고 있는 선유도의 상징이다. 이 망주봉 은 천년 도읍을 이루기 위하여 왕이 되실 분이 북쪽에서 선유도로 온다는 말에 젊은 부부가 나란히 서서 북쪽 방향을 바라보고 기다리다 지쳐 굳어져서 바위산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 한다. 큰 봉우리는 남편 봉우리이고 작은 봉우리는 아내 봉우리라는 이 전설은 위대한 지도자를 기다리는 우리 민족의 안타까운 소망을 담고 있다.
이 이야기는 우리나라의 미래를 예견한 조선시대의 비결서인 [정감록]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씨 조선 다음에는 정씨가 계룡산에서 나라를 다스린다고 기록된 [정감록]은 그 내용 중에 황당하게도 범씨가 고군산(선유도)에서 천년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다스린다는 믿을 수 없는 예언을 기록하고 있다. 결국 망주봉 두 부부가 기다린 왕은 고군산에 도읍을 정한다는 범씨 왕이었던 것이다.
과연 서해의 섬 고군산에 왕이 출현할까? 현재와 이전 대통령이 모두 섬 출신인 점을 볼 때 고군산군도에서 언제인가 대통령이 나오지 말라는 법도 없겠지만 요근래 섬주민들의 [정감록]에 대한 해석은 좀더 구체적이다. 그 내용을 보면 [정감록]에서는 고군산이 범씨 천년 도읍이 되는 때는 "퇴조(退潮) 300리" 즉 군산에서 바닷물이 300리 밖으로 물러난 후라고 밝히고 있는데 최근 새만금 사업으로 신시도와 야미도까지 방조제가 연결되었고 이후 새만금 사업대로 된다면 선유도에는 국제 항구가 건설되는데 군산 인근 지역의 바다가 육지가 되는 그 때가 되면 선유도는 국제 항구와 관광 위락 중심지로 역할이 증대되어 [정감록]의 기록대로 될 것이니 범씨 천년 도읍이 바로 이 때를 말함이 아닌지 하는 기대들을 지니고 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새만금 사업에 대한 섬 주민들의 자의적 해석이 웃음을 자아내지만 예나 지금이나 새 세상에 대한 백성의 기대가 변하지 않음은 씁쓸할 뿐이다. 과연 가을 한 철 태풍에도 무기력하기만 한 인간들의 오만한 발상인 새만금 사업은 어떤 결과를 낳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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