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희양산(曦陽山) 998m ● 봉암사(鳳巖寺) / 경북 문경시 가은읍 원북리 /
▶ 봉암사 - 부도길 - 산성골 - 산성 - 정상 - 대슬랩 - 부도길 - 봉암사(원점회귀 8시간)
▶ 2010. 5. 21 (금) 석탄일
봉암사 경내로 들어 서는 다리 앞에서 바라본 희양산
봉암사 정진대사원오탑비 (鳳巖寺靜眞大師圓悟塔碑)
-보물 제172호-
정진대사는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기에 활동한 승려로 왕씨(王氏)이고 속명은 긍양(兢讓:878∼956),
시호는 정진(靜眞), 탑호는 원오(圓悟)이다. 고려 초기의 조형적 특색을 지닌 비로서, 965년(광종 16) 무렵에 세워졌다.
귀부(龜趺)와 이수(螭首)의 형식은 일반적인 방식이나 비좌(碑座)가 두드러지게 커졌고,
정상의 화염보주(火焰寶珠)는 뚜렷하게 조출(彫出)되어 있는데 이는 다른 예에서도 볼 수 있는 형식이다.
귀부와 이수의 조형은 매우 간략해졌고 조법(彫法)은 퇴화하였다. 6각형 중곽갑(重廓甲) 무늬나 이수의 소보운(小寶雲)
무늬, 용두화(龍頭化)한 귀두(龜頭) 등에서 고려시대의 양식적 특성을 볼 수 있다.
비문(碑文)은 당대의 문장가 이몽유(李夢游)가 지었고 글씨는 장단열(張端說)이 썼다.
봉암사를 중흥한 정진대사의 부도탑비(浮屠塔碑)로 고려 초기의 조형미를 잘 나타낸 석비이다.
봉암사정진대사원오탑(鳳巖寺靜眞大師圓悟塔)
- 보물 제171호 -
봉암사에 자리잡고 있는 고려 전기의 사리탑으로, 정진대사의 사리를 모셔놓고 있다.
정진대사(878∼956)는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활약한 승려로, 효공왕 4년(900) 당나라에 들어가 25년간 유학하고
경애왕 1년(924)에 돌아와 신라 경명왕의 극진한 예우를 받았다.고려 태조 18년(935)에는 봉암사를 두번째로 크게 짓고,
불교의 중흥에 이바지하기도 하였다.특히 고려 전기의 태조·혜종·정종을 선문(禪門)에 들게 한 장본인으로,
79세의 나이로 입적하자 왕은 ‘정진’이라는 시호와 ‘원오’라는 탑이름을 내리었다
.비는 거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머리돌을 올린 모습으로,
거북의 등 중앙에 마련된 비를 꽂아두는 부분이 두드러지게 커 보인다.
꼭대기에는 불꽃무늬에 휩싸인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가 또렷하게 조각되어 우뚝 솟아있다.
고려 광종 16년(965)에 세워진 비로, 전체적인 조형이 간략화되었으며 조각 기법이 퇴화하였다.
비문은 당대의 문장가 이몽유가 짓고, 명필 장단열이 글씨를 썼다.
함허당득통탑 (涵虛堂得通塔)
- 경북문화재자료 제134호 -
기단 탑신옥개석 모두가 8각으로 하대석에 복연문을 새겼고, 옥개석 지붕 위에는 기와골이 있다.
석재는 화강암이며 총 높이는 2.75m이다. 옥개석에 기와골이 있고 낙수면은 반전되어 있다.
함허득통대사(1376∼1433)는 21세에 관악산 위암사에 출가하였다.
세종의 부름을 받고 대자어찰(大慈御刹)애 4년동안 머무르며 교화를 했고 봉암사를 크게 중수하였다.
저서로는 원각경소 3권, 금강경오가해설의 2권, 현정론 1권, 반야참문 2집, 윤관 1권 등이 있으며
한국불교의 거성으로 평가 받는다
다시(茶詩) / 함허당 |
一椀茶出一片心 |
一片心在一椀茶 |
當用一椀茶一嘗 |
一嘗應生無量樂 |
|
한 잔의 차는 한 조각 마음에서 나왔으니 |
한 조각 마음은 한 잔의 차에 담겼어라 |
마땅히 이 차 한 잔 한 번 맛보시게 |
한 번 맛보시면 한없는 즐거움이 솟아 난다네. |
환적당지경탑(幻寂堂智鏡塔)
- 경북문화재자료 제133호 -
함허당 득통지탑과 석종형부도 1기와 함께 있는 팔각원당형의 환적당 부도탑으로 보존상태는 양호하다.
지대석, 하대석, 중석, 상대석, 탑신, 옥개석 모두가 팔각으로 되어 있다.
하대석에는 팔각에 맞추어 복련(覆蓮)을 새기고 그 사이에 간엽(間葉)을 두었다.
중대석과 상대석은 일석(一石)이며 상대석에는 8엽의 양련을 새기고 그 사이에 간엽이 있다.
탑신 일면에 종(縱)으로 "환적당 지경지탑"이란 명(銘)을 음각하였다.
옥개석 지붕 밑에 연목은 없고 지붕위에도 기와골은 없고 우동(隅棟)만 나타냈으며
8각의 귀는 반전이 심하나 귀꽃은 없다.노반, 복발 또한 팔각이며 그 위에 둥근 보주가 있다.
팔각원당형의 부도이겠으나 전체적 균형이 불안하다. 높이가 3.5m로 조선시대 작품이다.
- 문화재청 자료 인용 -
?....
풍일지탑
여기 저기 기웃대다 대충 감으로 치고 들어선 산성골,
몇 번에 결쳐 계곡을 가로지르며
묵을대로 묵은 길을 헤치며 위쪽으로 치고 오르자니...
불쑥 암괴지대가 앞을 가로 막는다
암괴 사이를 헤치며 더 윗쪽으로 오르자니,
시루봉, 이만봉, 백화산, 황학산,이화령, 조령산과 조령을 지나
월악산권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길과 마주친다.
백두대간 갈림길.
성을 따라 계속오르면 희양산 정상이고, 여기서 오른쪽으로 내려서면
구왕봉과 악휘봉 곁을 지나 막장봉으로 이어가는 속리산권으로 이어지게 된다.
바로 앞은 구왕봉이고
왼쪽으로 마분봉 악휘봉 등이 도열한 모습이다
부처의 초청(?)으로 오르게 된 희양산 정상
자.... ! 드디어 오늘의 하일라이트.
거대한 암릉으로 이루어진 희양산 대슬랩 하산길 개봉박두....
초장부터
이런 저런 침니와 로프와의 씨름이 시작되고...
가슴 짜릿한 슬랩지대
여기 저기 풍화혈도 보이고...
멀리 왼편으로는 속리산 천황봉과 문장대 라인이고, 오른편 멀리는 상학 묘봉 라인.
돌아본 정상 부분
저 아래 봉암사가 화심 가운데 자리를 잡은 모습이다.
원북리 하경
석탄일을 맞아 한창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을 봉암사
긴장을 늦추어선 절대 곤란한 하산길의 연속
갈라지고,내리 누르고, 중심잡기에도 만만찮은 슬랩의 연속
이 슬랩 위 어디쯤이었던가...?
로프를 타고 내려선 시누대밭. 마치 낫으로 베어낸 것처럼 잘려나간 시누대.
한 쪽, 수북하게 쌓인 시누대에 눈길이 닿는 순간,
이크 ~~~~ !! 멧돼지 선생의 분만실이다.
금방이라도 어디선가 갈기를 세운 멧톨이 돌진해 오는듯...
동시에, 내 척추도 마치 갈기를 세운듯 뻣뻣해지고 있었다.
다시 돌아본 정상일대
걱정도 팔자....?
만약 손에 쥐라도 나는 날이면...!
이쯤에 다다르니 이젠 오버행 정도는 식은죽 먹기....??
진즉에 썩어버린 사다리 코스
'썩은 사다리를 내려서면 거대한 바위 틈새 통과
그 와중에도 괜찮은 풍경이 나타날라치면 해찰은 필수....
희양산 대슬랩을 역으로 올라가는 맛은 어떨까...?
봉암계곡
작년, 저 건너 악휘봉에서 내려오는 바위슬랩지대에서 만났던
"가는잎향유"의 기막힌 향기가 생각나는구나...!
오른쪽은 희양산 왼편은 구왕봉
짜릿한 대슬랩의 향연은 이제 거의 끝나 가는 듯...
봉암사 윗쪽 계곡에 자리한 백운대
백운대에 자리한 마애보살입상
고려말 유행하던 지방양식의 마애불로 본다고...
봉암사 지증대사적조탑비 (鳳巖寺智證大師寂照塔碑 -국보 제315호- (왼편)
높이 2.73m, 너비 l.64m, 두께 23cm으로 편마암이다.
비의 조출(彫出)이 뚜렷하고 이수(螭首)의 조형등은 다양하여, 사실성(寫實性)을 띠고 있다.
귀부(龜趺)와 이수가 완전히 보존되어 있으며, 귀두(龜頭)는 이미 용두화(龍頭化)되어 있다.
비좌(碑座)의 각면에 비천상(飛天像)을 각출(刻出)한 점 등은
통일신라시대 성기(盛期)의 요약된 강렬한 표현기법이 말단장식화(末端裝飾化)되는 기법이라 할 수 있다.
최치원이 지은 사산비명(四山碑銘)의 하나로 통일신라 때 세워졌다.
구산선문의 하나인 희야산문의 개조 지증(智證:824∼882)을 기리는 내용을 담고 있다.
비문에 따르면
882년(헌강왕 8) 지증이 입적하자 왕이 시호를 내리고 적조라는 탑호와 함께 비명을 최치원에게 짓게 하였다.
최치원의 관직명으로 보아 비문은 893년(진성여왕 7)에 작성된 것으로 보이며
탑이 건립된 것은 그로부터 30년 뒤인 924년(경애왕 1)이었다.
분황사의 혜강(慧江)이 글씨를 썼으며 글씨 크기는 2cm로 왕희지체의 영향을 받은 행서이다.
선종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는 탑비이다.
봉암사 지증대사적조탑 (鳳巖寺智證大師寂照塔) -보물 제137호- (오른편)
높이 3.41m, 지대석 너비 2.28m이다. 8각 원당(圓堂)을 기본으로 한 부도(浮屠)로서
전면에 새겨진 조식(彫飾)의 찬란함과 그 조화 통일에 있어 훌륭한 걸작이다.
하대(下臺)·중대(中臺)·상대(上臺)로 구분되는 기단(基壇) 밑에는 넓직한 사각의 지대석이 있고,
그 윗면 중간에 연꽃을 조각한 몰딩이 있다. 얕은 탑신(塔身)에는 모마다 우주형(隅柱形)이 있고
전후 양면에는 호형(戶形)을 만들어 자물쇠와 문고리를 표시하였고,
그 좌우에는 사천왕(四天王) 입상(立像)을 두었으며,양 측면에는 보살 입상을 양각하였다.
광대한 8각 옥개석(屋蓋石) 밑에는 곡선을 그리는 받침이 있고,
서까래는 각형(角形) 2중연(重椽)으로 되었으며 처마는 크게 반전(反轉)되었다.
옥상에는 기와의 표현이 없고 다만 우주(隅柱)만이 있는데, 굵직한 우주 끝에는 각각 귀꽃이 있다.
옥개 정상에는 16판(瓣) 연좌(蓮座)를 얹고 그 위에 노반(露盤)·앙화(仰花)·복발(覆鉢)·보주(寶珠)를 차례로 얹었다.
지증대사가 882년(헌강왕 8)에 입적한 사실로 미루어 이 탑도 그 무렵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 문화재청 해설 인용 -
지증대사적조탑의 기단부에 돋을새김된 공양상.
뜯어진 그물망 사이로 렌즈를 들이 밀어 찍은 것인데,
힘차고 섬세한 조각 솜씨가 가히 일품이다.
봉암사 삼층석탑 (鳳巖寺三層石塔)
-보물 제169호-
전체 높이 6.31m, 상륜(相輪) 높이 2.83m, 지대석 너비 3.24m이며, 재료는 화강암이다
이 탑은 그 기단(基壇)이 석탑의 일반형인 중층(重層)이 아니라 단층(單層) 기단 위에 3층의 탑신부(塔身部)와
상륜부(相輪部)로 이루어져 있다.지대석 위에 1층 기단을 얹고 기단석에는 우주(隅柱:탑 몸돌의 모서리에 세운 기둥)와
탱주(撑柱:탑의 기단 면석 사이에 세우거나 면석에 돋을새김한 기둥 모양)가 모각되어 있다.
탑신(塔身)은 옥개석(屋蓋石)과 함께 각각 하나의 돌로 만들어졌으며, 탑신에는 각층마다 우주가 있고 옥개석은 추녀밑이 직선이다.
주목할 만한 것은 탑 꼭대기의 상륜부가 잘 보존되어 각 부분을 완전한 형태로 모두 지니고 있는 점인데
밑에서부터 노반(露盤:불탑의 맨 꼭대기 지붕 바로 위에 놓여 상륜부를 받치는 부재),
복발(覆鉢:불탑의 노반 위에 있는 장식으로 바리때를 엎어놓은 모습),
앙화(仰花), 보륜(寶輪), 보개(寶蓋), 수연(水煙), 용차, 보주가 차례로 철제 찰주(鐵製擦柱)에 꽂혀 있다.
선문구산(禪門九山)이라고 일컫던 봉암사가 창건된 통일신라 말기인 9세기 무렵에 건립된 석탑으로 추정된다.
탑신의 비례와 균형이 조화된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이다.
- 문화재청 해설 인용 -
엄마 손에 이끌려 봉암사를 찾은 꼬마 보살
거대한 희양산과 구왕봉 암벽을 병풍 삼은 봉암사 전경
머나먼 거리,
어둠을 뚫고 열심히 중원을 달려 도착한 원북리.
일 년에 단 한 차례,
석탄일 하루만 산문을 여는 것으로 잘 알려진 문경땅 봉암사.
벌써부터 전국에서 달려온 불자들로 넘쳐나고 있는 모습이었는데
듣자하니,
전 날 부터 찾아온 사람들도 상당수에 달 한다고...
간신히 셔틀을 얻어 타고 당도한 봉암사 다리 앞.
건장한 체격의 승려에게 합장으로 다가 간다.
"부처님 오신 이 기쁜 날,
가여운 산적에게 약간의 자비를 비풀어 주셨으면 합니다."
"예~~~
무슨 ~~~?? ~~~"
" 다름 아니옵고 희양산 암봉위에 계신 부처님을 친견하고 싶은데,
넓으신 아량으로 길을 좀 터 주시고 기왕이면 코스까지 추전해 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배낭과 카메라를 둘러맨 잡인의 행색을 위 아래로 한참을 훓던 스님.
"정진대사원오탑비 뒤로 해서 오르는 길이 있긴 있습니다만
여간 어려운게 아니라서요?"
급 반색과 함께 머리를 연신 조아리며
"고맙습니다, 쓰니~~~이~~~ㅁ~~~"
혹여라도 맘 변하시기 전에 잽싸게 숲 속으로 줄행랑을 놓는다.
띠엄띠엄 부도가 나타나는 포행로를 따라가면서 치고 오를 지점을 가늠해 보건만
암릉으로 직접 오르는 뚜렷한 길을 찾을 수도 없었고,
설령, 정상의 암봉을 향해 치고 오른다 해도
계단이나 행거가 마련되어 있을 턱이 없는데다, 막말로 열심히 기어올랐는데
만약 진퇴양난의 지경에라도 이른다면....
지난 칠십년대, 봉암사에서 희양산을 한 차례 오르긴 했는데
막상 당도해 보니, 어떤 코스로 올랐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산성계곡을 따라 오르리라 마음먹고 포행로를 따라가자니 불쑥 나타나는 집 한 채 .
계곡을 따라 오르는 길을 물으려 들어서고 보니 하필이면 사자 아가리(?)
자칭, '희양산 지킴이'를 자처한다는자가 절대 입산은 불허란다.
경험상, 이럴땐 절대 열을 내서는 될 일도 않된다.
차분히 간식까지 얻어 먹고 돌아 나온다.
오던길을 잠시 따르다가 소나무 묘포장 옆을 지나 적당한 지점을 골라 치고 오르니
묵어버린 길의 흔적이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한다.
얼마나 올랐을까? 이젠 제법 길이 뚜렸해지며 소폭까지 나타나고 있었다.
계곡의 끝은 언제나 능선으로 이어지는 법.
바윗돌 사이를 헤집자니 어느덧 희양산성과 대간길 능선에 이르게 되고,.
곧바로 희양산 정상에 당도, 사람들로 미어터지고 있을 봉암계곡을 하염없이 내려다 본다.
하산...
오던길을 되짚어 간다는 건 있을 수 없다.
분명 암벽 어딘가에 봉암사로 내려서는 루트가 존재 할 터.
있었다.
직벽 소나무에 매달린 로프 한 가닥.
희양산 대슬랩 내림길....
더 이상의 중언부언 할 것 없이 정말 최고였다.
난이도가 다소 높긴 했지만, 반대로 해석하면 그건 곧 무척 매력적이라는 뜻.
'왜 산을 찾을 수 밖에 없는가'에 대한 해답이 거기 존재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산을 내려와 들어선 봉암사.
이미 그 옛날의 봉암사가 아닐거라는 예측은 하고 있었지만
이건 변해도 너무 많이 변해버렸다.
나라안의 금석문 가운데 단연 최고로 쳐 준다는 '지증대사적조탑비'
그리고 곁에 나란히 선 '지증대사적조탑'
그 내용이야 너무나 잘 알려진 것이라서 더 이상 나까지 나서 떠들 필요까지야...
헌데, 내 기억어 틀린 것일까.?
예전엔 비와 탑미 나란히 서 있지 않았던 것 같은데...
또 무슨까닭인지 몰라도, 촘촘한 그믈속에 두 유물을 가두어 놓아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당대 최고의 석학 고운 최치원의 찬에다,
자그만치 83세의 분황사 노스님 혜강의 글이 어우러 졌다는 탑비.
종교와 권력의 하모니가 빚어놓은 걸출한 결과물이라는 생각이다.
물경 400일을 넘겨가며 사월 초파일에 태어났다는 도헌(道憲).
봉암사를 창건했다는 지증대사의 속가 본이 '경주金' 이라고들 하던데....
.
.
.
언제 시간 나면 집안 족보나 한 번 뒤적여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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