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4 . 23
임원식 시의 산책로(597)
탁족(濯足)
우전 임 원 식
제주에 오면
우주의 귀가 열린다
번쩍이는 파도 소리 두 손 높이 들어
나를 맞이한다.
수많은 물고기들의 소리
한라산에 살고 있는 초록 물상의 소리가
교향곡처럼 들려온다.
저 깊은 바다의 소금 빛 소리들이
티끌 세상에 묻혀 온
내 발가락 사이 때를 씻어준다.
<시작노트>
마음이 산란스러울 때 제주에 자주 갑니다.
제주는 나에게 천국 같은 곳 입니다.
한라산과 늘 푸른 바다와 파도소리,
어지러운 나의 귓가를 씻어주는 소금바람.
이러한 이국적인 풍광이 나의 가슴, 나의 발자국을 씻어줍니다.
가슴에 쌓인 것들을 하늘로 보내버리고 새롭고 새로운 마음으로 돌아오는 제주로 갑니다.
2012. 4 . 25
임원식 시의 산책로(598)
<필자의 정원 영산홍>
영산홍
미당 서 정 주
영산홍 꽃잎에는
산이 어리고
산자락에 낮잠 든
슬픈 소실댁(小室宅)
소실댁 툇마루에
놓인 놋요강
산 너머 바다는
보름살이 때
소금발이 쓰려서
우는 갈매기
<시작노트>
지난 일요일에 제주에 갔다가 수요일 오후 집에 왔더니
저의 집 정원에 머물렀던 분홍빛 영산홍 연정이 달아 올라 우리집을 하늘로 떠 올리고 있었습니다.
참을 수 없는 영산홍의 사랑을 몇 장 찍어 나의 이메일 친구들에게 보내고 서정주씨의 영산홍 시를 보냅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시입니다.
영산홍(홍:붉은 꽃잎에는, 산:산이, 영:어린다)을 거꾸로 풀이한 1, 2행 그 꽃이 핀 산자락에 슬픈 소실댁, 그 아름답고 애처로운 소실댁에게 남자는 너무 먼 존재, 채우지 못하는 여자로서의 색적 욕망은 놋요강으로 표현되어있고,
기다림과 그리움으로 여자의 시선은 멀리 바다로 이어져, 보름살이(남자가 보름에 한 번씩이나 온다는 의미도 포함하는 중의적 표현)에서 우는 갈매기로 이미지가 연결되고 있습니다.
특히 이 시는 소실댁을 중심으로 영산홍, 갈매기, 놋요강, 보름살이 등의 시어가 연결되어 있고, 자음 ㅅ, ㅂ과 모음 ‘아’, ‘오’가 절묘하게 이어지며 반복되고 있어 시적 분위기를 살리고 있습니다.
즉, 꽃잎-산, 산-소실댁, 소실댁-놋요강, 보름살이-소금발이 특히 ‘보름살이’-‘소금발이’의 표현은 마치 바다의 파도가 밀려왔다 밀려감을 반복하는 모습을 떠오르게 하는 표현입니다.
또한 영산홍 꽃잎 색깔에서 한 여인의 그리움의 한을, 앞의 단어를 반복하여 연쇄적으로 이어감으로써 자연스럽게 이미지를 연결시키고 있는 것도 작품의 미를 배가시키는 기법입니다.
2012. 3 . 21
임원식 시의 산책로(583)
바람소리
우전 임 원 식
이 바람
어데로 갈까.
창 밖 목련 가지 끝에
송이 송이 어두움 밝히던
하늘을 향한 꽃등들
바람 따라
어느 곳으로 떠나고 있을까
종소리처럼 다가오던
비둘기의 날개짓들.
나의 적막한 가슴에 그리움 드리우더니
길고 긴 세월 슬픔을 잊기 위해
꽃잎 사이 스미는 흰 하늘로
사랑과 바람을 녹여간다.
비가 내릴 듯합니다.
<시작노트>
백목련은 하늘빛을 향해 투명함을 밝혀간다
두꺼운 꽃잎 주름을 켜켜이 여미며
투명히 투명히 하늘을 우러른다
먼지 산란된 푸르러진 하늘빛이 아니라
태양이 직접 내리 쬔 하얗디 하얀 하늘빛을 바라며
백목련은 흰색의 투명함을 밝혀간다
꽃 한송이, 한송이
꽃잎 한장, 한장까지
투명히 여며진 흰빛을 하늘을 향해 떠올린다
어찌 태양이 무서워 반대편에서 고개를 들고서는
어찌 이렇게 강렬히 하늘빛을 우러르는가
백목련은 대답하지 않는다
짧은 수명, 곧 바래져 버릴 슬픔을 잊기 위해
시간을 아껴 작은 빛 조각을 담아갈 뿐......
강렬히 강렬히 하늘을 닮아갈 뿐......
그리고는
꽃잎 주름 사이 스미는 흰 하늘로
삶을, 존재를, 사랑을, 바람을 녹여간다
2012. 4 . 2
임원식 시의 산책로(588)
<살구꽃과 열매>
살구꽃 동무들
우전 임 원 식
초가삼간 뒤란
울긋불긋 살구꽃 너머
시간의 혀끝에서 녹아나는
여름을 기다렸다.
달삭하고, 새콤한 맛
그리워하고 있었을까.
살구나무 가지 사이 살구를 향해
돌이나, 가지를 흔들다가
장독을 깨어
어머니의 회초리에
“새콤한 맛을 보고 싶어서”
눈물을 흘렸던 소리 들을 수 없다.
빗방울의 노크소리에
주름살로 얽힌 나무 표피에
꽃등이 피어나고,
꽃벌들의 날갯짓 소리 지나면
황금빛 살구가 익어가지만
나무도 늙어지고
풋살구 먹었던 아이들도
한 사람씩 스러지고 없다.
<시작노트>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살구꽃..
살구꽃을 보면 어린 시절 뒷집에 큰 살구나무가 생각이 납니다.
그때는 꽃을 감상할 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봄이면 당연히 피는 것으로 생각했지요. 빨리 세월이 흘러 여름이 왔으면 하는 바램이었으며 살구 따먹을 생각을 했습니다.
살구의 달삭한 맛과 새콤한 맛이 그리울 뿐입니다.
2012. 3 . 23
임원식 시의 산책로(584)
뿌리를 베면서
우전 임 원 식
사월 오일이면
학교에서 준비한 나무들을
삽과 괭이와 함께
산이나 들로 나가 한 그루의 씨알을
심었었다.
공무원 시절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도
우리들 산의 그들은
잡목뿐이다.
미국이나 캐나다, 호주, 유럽 등에서 보는
미래가 있는 푸르름이 아니다.
아파트나, 주택, 아스팔트 길가에
몇 그루의 나무들이
늘 푸른 뿌리를 내리고 있을까.
바람 따라 잎들이 흔들리고
비가 오나,
햇볕이 빛나는 날에도,
눈들이 춤을 추면서
맑은 꽃과 산소를 내 품는
나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학교에서, 일터에서
고마움을 잊어버리고,
사월이 오더라도 그 날은 없어지고,
자동차 길을 넓힌다고
옛길에 서 있는 나무들을
시퍼런 도자로
베어내고 있다.
<시작노트>
요즈음 나무 심는 마음이 스러지고 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 시대부터 나무 심는 것이 봄부터 시작하였던 그 옛날 생각이 떠오릅니다.
그러나 심는 것 보다 베는 일들이 많습니다.
몇 십년 자라난 나무들을 베어내고 있습니다.
나무 생각들을, 나무가 우리에게 주는 그러한 것들을 생각지
못하고 있습니다.
임원식 시의 산책로(600)
고사리를 꺾으며
-제주도에서
우전 임 원 식
4월이면 솟아오르는 자유
흙을 뚫고, 바위 틈새에서
꼬부랑 머리는 돋아내는 푸르른 머리.
인간의 손길
꺾고, 다시 꺾어
기쁨 맛을 던져주네.
자유의 몸통이 잘려나가지만
고사리의 그물 같은 잎들은
태양을 향하여
솟아오릅니다.
“꺾자 꺾자 고사리 꺾자
제주 한라산 고사리 꺾자”
어미님들의 노래를 부르며
자유를 찾아 나서네.
<시작노트>
꺾고 또 꺾어도 돋아나는 고사리의 자유.
돌아서면 그곳에서 다시 돋아나는 고사리 오형제를 아시나요.
제주 한라산의 고사리는 유명한 고사리입니다.
매년 4월이면 세인트포 골프장 곶자왈에 가서
“꺾자 꺾자 고사리 꺾자” 하면서 그 자유를 꺾어 봅니다.
땅을 뚫고 솟아나는 자유를 위하여!
2012. 3 . 28
임원식 시의 산책로(586)
화등(花燈)
우전 임 원 식
창 밖이 환하다
겨울을 지낸 목련 가지 끝에
불이 켜진다
꽃등들
바람 따라
길을 나선다
종소리처럼 다가오던
비둘기의 날갯짓들
나의 빈 가슴에 그리움 드리우더니
새벽의 조각달들 데리고
먼 하늘로 날아간다
목련이 불을 끈다
<시작노트>
지난번에 보내드렸던 “바람소리”를 화등(花燈)으로 바꾸어 보냅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으로 가슴앓이하며 하얀 나비처럼 누군가의 가슴 속에 살폿이 내려와 쉼을 얻고 싶어하는 백목련의 홍목련과 더불어 곱게 피어나기 시작하는 모습에서 숭고한 정신과 깊은 우애를 느낄 수가 있습니다.
동물이든, 식물이든, 사람이든 더불어 살아갈 때에 존재의 의미와 그 존재가치가 한층 돋보이는 것이며 보는 사람들에게도 깊은 감동을 줄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