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일기

유배의 땅 진도

차보살 다림화 2012. 7. 8. 18:37

 

 

유배의 땅 진도

 

 

                                                                      

 

아침 일찍 전북문인문협 문학 기행 버스는 남쪽으로 달렸다. 꽃이 피기 시작하는 4월 남녘은 봄맞이하기에 좋은 풍경을 만들고 있었다. 여전히 진도는 멀었다. 역사의 물결이 출렁대는 남해. 남해에 오면 이순신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유명한 한려수도, 다도해에서 핏빛을 뿌리면서 지켜낸 우리의 바다가 아닌가. 해남에서 진도대교를 건너오자마자 전라우수영지가 공원화되어 이순신의 첩들을 맞게 한다. 진도에 오면 이순신의 유명한 첩이 맞이해준단다. 서해가 문학적이라면 분명 남해는 역사적일 수밖에 없다. 전라우수영 공원에서 화사하게 피는 꽃길을 돌면서 어찌 옛 기억에 가슴 아파해야 하는지 가슴 쓰렸다. 좋은 봄날에. 아름다운 지구촌에서 어찌 인류는 싸움하지 않을 수 없었던가.

화려하게 장식된 울돌목 야외무대에서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건너편 우수영 자리를 아슴히 바라보았다. 도저히 이 바다에서 치열한 해전이 있었으리라고 상상하기 어려웠다.

 

 진도대교와 전라우수영공원

 

 

 

진도읍내에서 향토음식 생선 알 비빔밥을 맛있게 먹었다. 음미할 새도 없이 시장이 제일의 반찬이었다. 섬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읍내 풍경이었다. 몇 년 전에 낭만 여행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해남의 친구댁에서 하루를 쉬었다가 진도로 건너왔기 때문에 그리 힘들지 않았던 것 같았다. 운림산방과 신비한 바닷길를 산책하였지만, 그때와 지금의 형편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완전 도시형 관광지로 변모한 것 같았다.

단체로 몰려다니니까 개인적 관심사는 뒷전일 수밖에 없었다. 보배라는 말이 붙은 걸로 보아 선사시대부터 문명을 일구어왔던 섬이었다. 그러나 우리에게 진도가 가까이 오게 된 이유는 조선 시대의 유배제도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진도 하면 아리랑이 자연스럽지만, 진도에 오면 다섯 가지를 자랑 말라고 했다. 시, 서, 화, 춤, 노래다. 그래서인지 일행 중에 아무도 진도아리랑을 부르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유배 왔던 옛사람의 기억이나 흔적을 여기저기 흘깃거려보았지만. 알 수 없고 다만 이야기로 들은 적이 있던 노수신을 그려보았을 뿐이었다.

 

소재(穌齋) 노수신(盧守愼, 1515~1590).

선생 자신이 을사사화(乙巳士禍)에 연루되어 순천에서 3년, 이어서 진도에서 19년의 유배생활의 역경을 딛고 재상의 반열에 올라 영의정에 이르고, 시문과 철학으로도 일가를 이룬 분이어서 여러 향교에 배향된 걸로 알고 있다.

노수신이 자주 다녔다는 진도향교에 못 들려서 못내 아쉬웠다. 진도향교는 어느 곳의 향교보다 아름다워서 그가 자주 산책하면서 선비들과 교유했다. 고향과 부모님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고 비탄에 젖은 감회를 쏟아내기도 했다. 하지만 그에 머물지 않았다. 그는 진도 사람들과도 잘 어울렸다. 첩도 얻어서 자식도 낳았다. 진도의 풍속에도 관심을 기울여 굿하는 모습을 보고서 장편시도 지었고, 진도는 曺씨와 朴씨가 가장 세력이 강한 성이라는 것도 밝혔단다. 나이가 같은 사람과는 동갑회도 만들었다. 술과 서책을 벗 삼아 시렁 위의 책을 몇 번이나 읽고 취하면 시를 지었다. 그가 가장 많이 읽은 책은 논어와 두보의 시로, 읽은 수효가 2천 번에 이르렀다. 그가 대가로 칭송받고 귀양지에서 풀려 정승이 되는 데 유배 시절의 독서가 바탕이 되었다. 나중에 정승이 되어서도 진도에서 행한 책 읽는 습관을 버리지 않았다. 조선 왕조 전체를 통틀어 책을 많이 읽은 선비로 노수신을 빼놓지 않는다는 데, 진도에서 익힌 습관이다. 유배지에서 탄생한 문집과 글들을 많이 남겼다.

추사 김정희의 제주도 생활에 비교하면 유배의 기간은 길었지만 요즘 말로 낭만적인 생활도 영위했던 것 같다. 한가로운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여유를 즐기기도 했다. 귀양지에서의 네 가지 맛이란 시도 지었단다. 그 맛이란 맑은 새벽에 머리를 빗는 맛, 늦게 아침밥을 먹고 천천히 산책하는 맛, 환한 창가에 앉아 햇살을 쪼이는 맛, 등불을 맑히고 책을 읽는 맛이란다. 보통 사람들이 노년에 와서야 누릴 수 있는 맛을 젊은 나이에 맛볼 수 있었다. 28세부터 유배생활을 하였으니 그 기간 동안에 닦았던 학문과 객지의 생활체험은 고스란히 명재상이 될 수 있는 밑바탕이 되었던 것이다. 뜻을 이루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본보기가 되는 점이다.

 

 소전 손재형 미술관에서

 

 

 

 

 

 

진도가 예술문화의 땅으로 자리매김한 것도 유배의 땅이기 때문이었지 싶다. 정치 싸움에서 밀려난 사람은 누구나 유배를 가야했던 시대. 옛 중국에서는 중죄인은 도성에서 3,000리 밖으로 내쫓았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땅이 작아서 섬이 유배지가 되었다. 진도는 제주도와 거제도에 이어 우리나라의 세 번째로 큰 섬이어서 고려 때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유배지로 사용되었다. 진도에 유배된 사람의 수효가 제일 많았다고 한다.

유배를 온 사람들은 학문이나 문화생활에 젖어 있던 양반지식인이어서 화려했던 날을 잊기 위하여 시, 서, 문에 몰두했고 그것이 지방문화를 형성하는 데 큰 역할이 되었을 것이다. 남종화로 명문대가를 이룬 소치 허련이 일군 운림산방도 그와 맥락이 같다. 양천 허씨의 본향은 본래 경기도 양천일 텐데 진도에 자리 잡은 것이다. 소치의 선대 어른이 진도로 유배 와서 눌러앉게 된 연유로 소치도 진도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산골짜기에 이는 구름이 숲을 이룬다는 운림산방. 몇 년 전보다 주변 정리가 매끈하고 미술관과 건축물이 들어서서 낯설었다. 이른 봄날의 꽃 잔치가 운림산방에서 열리고 있었다. 운림산방 자체가 한 폭의 산수화였다. 어느 해 여름 연꽃이 피었던 연못 주위를 배회하면서 나무 그늘에서 쉬었던 때의 연정이 피어올랐다. 추사와 초의선사의 교유가 소치 허련을 남종화의 대가로써 일가를 이루게 한 계기가 되었다는 생각에 인연의 소중함이 새로웠다.

추사의 세한도를 도쿄 후지스카 교수에게 빌고 또 빌어서 끝내 조건 없이 되찾아온 신화의 주인공이 진도사람 소전 손재형 씨가 아니던가. 이후 세한도는 국보 제180호로 매김 되어 조선 회화사에 독보적인 존재가 되었다. 옛날부터 명성으로만 들어오던 그의 예술혼을 이제야 진도 그의 기념 미술관에서 만나볼 수 있었다.

 

 

 

 남종화의 산실인 운림산방에서

 

 

 

 

용장성 고토의 벚나무 아래서 옛사람들을 생각하며 마지막까지 몽골과의 투쟁을 감행했던 고려 삼별초의 고난도 다시 떠올리며 오늘을 감사했다. 중국사람들이 조선을 기억하는 세 가지 중에 옛 고구려가 수나라의 백만 대군을 물리쳤던 일과 몽골과의 60여 년의 투쟁을 꼽는다든가. 우리 민족의 끈기를 길이 발전해야 하리라. 마지막으로 벽파진에 올랐다. 오솔길을 지나니 지금은 항구가 된 벽파진 언덕 너럭바위에 이순신의 벽파진전첩비가 웅장하게 앞 바다를 지키며 우리를 압도했다. 명량대첩의 역사를 적은 비문은 노산 이은상이 짓고 손재형 씨가 한글과 한문을 혼용하여 쓴 것으로 웅혼한 기상을 자랑한다. 이순신의 최고의 첩들이 우리나라를 지켜냈다. 

옛날 노수신은 벽파진 언덕에 있던 벽파정을 찾아 벽에 기대어서 시를 지었다. 주차장 옆 쉼터의 현대식 정자 하나가 옛 벽파정을 기리는 듯했다. 수형 좋은 벚나무 아래서 사진을 찍으며 켜켜이 쌓인 진도 사람들의 한을 풀어내기에 알맞은 진도아리랑 가락을 흥얼거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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