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일기

윤슬

차보살 다림화 2015. 4. 16. 17:23

 

윤슬

 

조윤수

 

! 환상적이다.’ 홍매의 사진을 본 사람의 말.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운 장면을 볼 때, 우리는 흔히 환상적이란 말을 사용한다. 그럴 때 나는 말글의 한계성을 깨닫는다. 단지 그 속의 말 없는 말을 음미해볼 뿐이다. 홀로 고고하게 무심히 서 있는 천년 고찰의 매화는 하 많은 사연과 감성을 지니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렇지. 자연의 힘, 초봄에 꽃샘추위를 겪어낸 꽃이기에. 그 생명의 힘을 어찌 한마디로 말해버릴 수 있을까. 아름다움의 창조자는 누구인가. 어디서 온 것인가. 죽음에서 틔워낸 꽃무리.

오래전부터 소문으로 듣고 사진으로 알고 있었다. 자주 갔던 절이기도 하고 며칠 머물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는 여름의 그 매화나무를 눈여겨보지 않았다. 몇 번의 초봄에 가서 혹시나 했지만 조우하지 못했다. 바로 일주일 전에 화엄사의 주변 암자에서 홍매와 백매를 만났다. 그 때 각황전 옆의 홀로 홍매는 겨우 한 두 송이 피기 시작하였다. 화사하게 피웠을 홍매의 수관을 상상하며 꽃봉오리를 머금은 가지를 올려다보며 조마조마했다. 그런 뒤, 오늘 다시 갈 기회가 생겼다. 나는 일행보다 먼저 빠른 걸음으로 들어가서 확인하고 싶었다. 법고각 옆에서 각황전을 향해서 눈길을 올린 순간, 가슴에서 확 윤슬이 일기 시작했다. 환하게 붉은 빛이 나를 향해 반사하는 것 같았다. 초봄 카페서 본 호수의 윤슬과 곧 터질 듯한 백매의 사진이 동시에 떠올랐다.

윤슬이란 말이 햇빛이나 달빛에 비치어 반짝이는 잔물결을 일컫는 순우리말이란 것을 알았다. 호면(湖面)의 윤슬이 빛나는 매화 꽃송이 같다고 말했다. ‘은하수 가 쏟아져 내려앉은 별 빛’, 그런 윤슬이 각황전 뒷산을 배경으로 붉은빛을 발산하고 있었다. 바로 윤슬이! 아침 햇살이 비친 눈부신 빛이 잔물결처럼. 내 시야가 물결치는 것 같았다. 가까이 가서 일주일 전에 보았던 봉오리들인가 하고, 활짝 핀 꽃들과 반개한 봉오리들까지 자세히 보고 또 올려보았다. 전각의 처마 단청에 절묘하게 걸친 가지들이 그렇게 환상적일 수가 없었다. 환하게 가슴에 안겨서 피어나는 꽃들이 전각 지붕 사이를 수놓았다. 너무 붉어 흑매라고 불린다는 그 홍매 나무의 수관을 밑에서 올려보고 옆에서, 담장 너머에서, 전각 뒤에까지 돌면서 아름다운 자태를 탐미했다. 한순간에 빛나는 윤슬이어서 붙잡기라도 할 듯, 그 빛나는 홍매를.

사군자화(매난국죽)는 오랫동안 선비정신을 나타내는 그림의 소재였다. 탈속하여 고아한 선비의 으뜸이었던 중국의 당나라 시인이었던 맹호연의 탐매고사도는 유명하여 뒤에 많은 묵객들에게 탐매도(探梅圖)를 낳게 했다. 물론 사군자화도 시대에 따라서 그 정신을 달리했음은 물론이다. 매화는 사군자의 하나로 오래전부터 선비와 화가들 사이에서 중요한 화목(畵目) 중의 하나였다. 월매도, 설매도, 연매도 등이 많다. 조선 중기 어몽룡의 <월매도>는 우리나라 5만원 지폐에 당당히 인쇄되었을 정도다. 특히 김명국의 <탐매도>와 심사정의 <파교심매도>도 맹호연의 탐매에서 비롯된 조선의 그림 중에 손꼽힌다. 눈 싸인 산속으로 술병을 든 동자가 뒤에 웅크린 모습으로 주인의 탐매 행을 따르고 있는 그림. 주인의 뜻을 모른 채 시중을 들며 따르는 시동은 추위에 떨었을 테다. 맹호연의 탐매이후, 많은 시인묵객들이 매화를 추종하는 버릇이 생겼다. 시대를 넘어 조선의 시인묵객들로 이어져서 많은 시와 그림으로 탐매도를 남기고 있다. 그 영향은 현대의 우리나라 탐매꾼들과 사진작가들에게도 고매(古梅) 작품을 줄줄이 탄생시키고 있다. 그리하여 나도 화엄사 홍매와 인연이 닿기를 바랐다.

옛날에는 매화가 귀해서 산속으로 탐매를 나섰겠지만, 오늘날은 매화 농원이 많아서 초봄에 섬진강을 낀 마을마다 산기슭은 하얀 구름이 내려앉은 것 같지 않은가. 전국의 매화 관광꾼들로 교통이 혼잡할 정도이니. 고고한 매화에서 어떤 선비의 정신도 찾을 수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어느 꽃이든 마른 가지에 잎보다 먼저 피는 꽃에 시선이 끌리기 마련이다. 지금도 옛 선비들의 홀로 고매가 전국 곳곳에 남아서 그 유명세를 치르고 있다. 화엄사의 홍매도 통도사와 단속사지 정당매와 산천재의 매화와 더불어 이름난 매화 중의 하나다.

아름다움은 항상 존재하지 않아서 시공간의 거리 안에 존재함이다. 아름다움은 변화 자체라고 나도 말한 바 있지만, ‘이별이 미()의 창조자라고 말한 한용운의 글이 참으로 오묘한 의미로 다가온 요즘이다. ‘아름다움이란 세상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 절대미(絶對美) 그 이상이란 뜻이라. 그 절대미야말로 이별이 만들어내는 이 세상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 창조미(創造美)! 꽃이야말로 그 이별이 만들어내는 으뜸가는 아름다움인가. 열흘 가는 꽃이 없다는 그 이별의 슬픔이 만들어내는 절대미인가. 각황전 아미타불의 법문일지. 법신불의 화신 중의 하나인 홍매화일지니. 몇 백 년의 세월동안 온갖 풍상과 시련을 넘어 살고 있는 매화나무. 수많은 사람들의 기원과 화엄 사찰의 사연이 꽃으로 피어나지 않을까. 이별의 사연들까지. 사람이 꽃 중의 꽃이라면 이별하지 않는 꽃이 어디 있단 말인가. 언젠가 세상을 이별해야 하는 운명 앞에서라면 한 때라도 저 윤슬 같은 빛을 남길 수만 있으면…….

 

      

 

 

화엄사 주변에는 토종 매화가 많다. 가지에 듬성듬성 꽃이 피어 있는 나무는 토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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