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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조윤수 수필집 / 발길을 붙드는 백제탑이여

차보살 다림화 2016. 12. 8. 00:38
















발길을 붙드는 백제탑이여!


-후기


 폭염이 계속되던 어느 날, 늦은 오후에 금산사로 산책을 나갔다. 보제루 옆길 큰 마당으로 가던 중 대적광전 쪽을 힐끗 바라본 순간, 푸른 나무 사이에서 배롱나무 꽃빛이 내 가슴에 불을 붙이는 듯했다. 한순간 시원한 감동에 떨었다. 큰 마당의 유서 깊은 잣나무와 사진작가들의 소재였던 고풍스런 감나무는 사라진 지 오래다.


  미륵전 앞의 산사나무는 <고목에 핀 꽃>으로 추억의 나무다. 반쪽이 헐어버린 기둥이 위험해서 옆에 후손을 키우고 있다. 미륵전 옆에서 배롱나무 꽃이 그토록 아름답게 하늘을 채우고 있는 것을 처음 보았다. 전각들의 건축미에 장소가 주는 공간미를 더한 감흥에 멍하니 나무 주위를 맴돌았다. 주위에 수형 좋은 나무가 많기는 하지만, 어느 시간 어느 공간, 어떤 조명을 받는가에 따라서 느낌이 주는 감상이 이렇게 달라진다. 이날만은 전각의 삼층 지붕선이 배롱나무의 배경이 되는 것 같았다. 미륵전에 들어 백팔배를 올렸다. 땀을 내며 열을 높이는 일도 시원했다.

 

 어차피 땀에 젖을 바에야 열렬히 젖었다. 불타는 여름을 감사했다.

하루 사이에 갑자기 가을이 된 듯하다. 열렬했던 청춘의 사랑은 역시 한 순간인가.

가을이 깊어지면, 사랑 뒤에 남는 쓸쓸함을 어찌 감당할 것인가. 풍성한 가을에 대한 기대보다 사라짐에 대한 그리움을 먼저 앓을 것이다. 뜨거움을 열로 치유하듯, 허전함을 달래는 데는 폐사지에 남은 돌탑이 어울릴 수도 있다. 지난 세월의 흔적에서 의미를 찾아낼 일이다.


  가끔은 미륵사지에서 “고운 님 보고픈 생각이 나면 황룡사 문 앞으로 달아 오소서” 하던 민사평(1295-1359)의 시도 읊조릴 것이다. 살다 보면 문득 가버린 날들이 못 견디게 그리울 때가 있겠지. 그럴 때면 당간지주와 외로운 탑 하나 남은 빈 절터로 오라고 했다. ‘아무 말 말고 황룡사 문 앞으로 찾아오소서. 빙설처럼 고운 그 모습이야 보이지 않겠지만,’ 가만히 눈을 감고 그 앞에 서면, 임들의 목소리가 지금도 소곤소곤 들려온단다. 우리 사랑했던 아름답던 시간들 주춧돌 위에 여태도 남아 반짝인다고. 잊고 있던 사랑의 꿈이 안타까운 날이면, 눈감고 당간 기둥에 기대보시라!


  하늘과 맞닿아 있는 탑의 꼭대기를 바라보는 순간 받았던 처음의 전율을 다시 느낄 것이다. 해질녘 노을빛이 탑을 감싸 만드는 아름다운 실루엣이 드리우는 시간, 그보다 더 좋은 마음의 휴식처가 없으리라. 무상과 소멸이라는 화두를 챙기고 침묵의 가르침을 되새기며, 나만의 시간과 공간을 챙길 일이다. 사라지는 것에서 흐르는 시간의 힘을 얻을 수도 있으리라. 나를 잘 다스리는 일이 진정으로 이웃을 돕는 일이 될 것이기에.


출처 : 수필과비평 작가회의
글쓴이 : 김나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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