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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호

차보살 다림화 2006. 6. 16. 20:58

별호  

 

 

                                                                    나도향  

 

 

글을 쓰는 사람이나 글씨를 쓰는 사람이나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대개 별호를 쓴다. 또는 소위 행세한다는 사람치고 별호 없는 사람이 없는 모양이다. 서양에도 별호를 쓰는 풍습이 있지마는 동양에서는 아주 심하다.
이것에 대하여 역사적으로 생각하여 보고 싶은 생각이 없지 않은 게 아니지만 그러러면 상당한 전문 지식이 있어야 할 터인데 그것이 없으므로 다른 이에게 미뤄 버리고 우선 내가 쓰는 나락도稻 자와 향기 향香 자를 어찌 쓰느냐 하는 것을 말하려 한다.
누구든지 나를 만나면 "당신의 별호는 어찌 도향이라 지었소?" 하고 물으며 혹은 계집애 이름 같다고도 하고, 괴상하다 하기도 하고, 전례 없는 일이라 하기도 하고, 향이 좋다든가 의마가 있어 보인다든가 옛날 글에도 도화향 稻花香이 있었다든가, 또 혹 농담하기 좋아하는 친구는 "나락에도 향내가 있다" 하기도 하고, 혹 실없는 친구는 밥 안 먹어도 배부르겠다는 말까지 한다. 이와 같은 말을 하도 많이 듣는 나는 언제든지 내 별호의 뜻을 아주 공개하여 버린 후에 누가 물으면 이것을 공개한 잡지나 신문을 보라고 방패막이를 할 마음이 생겼으나, 이다음에 누가 또다시 묻는 사람이 있으면 덮어놓고, <조선문단朝鮮文壇> 제 4호를 보시오, 하고 내밀어 버릴 작정이다.
내가 별호를 쓰기는 , 내 나이 열여덟 살 때 '은하隱荷'라고 쓴 일이 있었다.
그것은 그 글자나 글에 의미가 있어서 그러한 것도 아니요, 또는 누가 지어 주며 스라고 한 것이 아니라 나의 누님의 별호가 '만하晩荷'인 까닭에 하荷 자 돌림으로 하자는 우애에서 나온 데 불과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너무 속되고, 또는 묵은 냄새가 난다고 해서 내버릴 마음이 생기자 아무리 생각을 하여도 신통한 별호가 얼른 생각나지 않으므로, 하루는 나의 친구 박월탄朴月灘 군을 찾아가서 이 이야기 저 이야기 하다가 나의 별호를 바꾸고 싶다는 말을 하니, 군君이 그러면 자기가 하나 생각해 보겠노라고 하므로 그렇게 하여 달라고 부탁한 후, 그 이틑날 갔더니 별호를 한 십여 개 지어 놓았다.
군이 그렇게 내놓으며 이 중에서 어느 것이든 마음에 드는 대로 골라 잡으라고 하는데 어찌나 많은지 그놈이 그놈 같고, 이것이 맘에 들면 저것이 솔깃하여 갈피를 잡지 못하다가 마침내 고른 것이 내가 쓰는 도향이다. 그런데 그때에는 나락 도 자보다도 항기 향 자가 친구 간에 문제가 되어 찧고 까불고 좋다 흉하다 하는 말이 많았으나 그저 아무 말 없이 사오 년 동안을 써 오니까 도리어 향기 향 자를 좋다고 하는 사람이 많아진 것 같다.
가을에 나락이 누렇게 익어서 바람이 봄을 따라 이리 물결치고 저리 물결치는 것을 볼 때 거기에서 구수한 향내가 나는 것도 같고, 가리를 지어서 척척 쌓아 놓은 노적에서는 배부른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하다.
이것이 보통, 얼른 생각하는 이가 나의 별호를 듣고 연상하는 것이겠지만 나의 해석은 그와 다르다.
행길에 금싸라기 한 개가 떨어졌다 하면 그것은 집을망정 싸라기 한 알이 떨어졌다 하면 그것을 누가 집을 터이나. 그러나 우리가 배가 고플 때 나락은 우리를 살릴지라도 금은 우리를 살리지 못할 것이다. 나락이란 그렇게 평범하고 우스꽝스럽지마는 때론 우리에게 우리에게 가장 귀하고 고마운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세상에는 항상 우스꽝스럽고 대수롭지 않은 것이 가장 귀하고 고마운 것이다.
또는 단순하고 평범한 것에 항구불변의 진리가 있다. 나는 이 점에서, 평범하고 대수롭지 않은 데서 향내를 맡는다는 의미로 도향이라고 한다.
 내가 만일 나락을 먹지 않고 서양 사람처럼 밀가루로 만든 것을 많이 먹는 나라에서 태어났다면 밀향기로 별호를 지었을는지도 모르지마는 조선에서 난 까닭에 도향이요, 평범하고 단순한 것 중에서 가장 인생에 절실히 필요하고 또 우리가 먹어야 산다는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진리가 가장 영원성이 있는 까닭에 내 별호가 도향이다.
이만하면 대개 의미가 통하여질 것 같다.

나도향 羅稻香(1926~1926) 

한국의 소설가. 서울 출생으로 본명은 경손慶孫, 호는 도향稻香, 필명은 빈彬이다.
배재고보를 졸업하고 경성의전을 다니다가 도일했으나 학비를 마련치 못해 귀국했다.
1921년 <백조> 동인으로 참가한 것이 문단 진출의 계기가 되어  <젊은이의 시절>,
<별을 안거든 울지나 말걸>과 장편 <환희幻戱> 등을 발표했고, <물레방아>, <뽕>,
<벙어리 삼룡이> 등을 발표함으로써 객관적인 사실주의적 경향을 보여 주었다.
작가로서의 완숙의 경지에 접어들려 할 때 요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