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기호(嗜好), 하면 술·담배·차·커피 등을 떠올린다. 물론 동물에겐 이런 기호가 없다. 신경에 대한 자극을 즐기는 것은 사람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호는 문화에 의하여 규정된다. 지역이나 환경 조건에 따라 독특한 음식문화며 풍속을 보여준다. 특히 음료에 대해서는 역사나 문화가 민감하게 반응해 왔다. 사람 몸에 수분이 70%이어서 물을 잘못 마시면 금세 기력을 잃거나 병이 나기 때문에 음료의 선택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세계 3대 기호음료는 차(tea)·커피(coffee)·마테(mate)이다. 모두 카페인이며 탄닌산 등을 함유하고 있어 해독의 효능이 있으며 머리를 맑게 하고 소화를 도우면서 신경을 자극해 우리를 한적한 명상의 숲으로 인도한다. 그래서 이 음료들은 하나 같이 발견됨과 동시에 종교 수행자들의 공부를 도와주는 용도로 출발했다. 마테는 남미 고산지대를 신천지로 여기며 활약한 예수교도들이 즐겼으며 커피는 아라비아 회교승들이, 차는 동양 불교 수행자들에 의해 애음되고 널리 전파되었다.
이 음료들은 따지고 보면 모두 아시아에서 출발하였다. 마테 역시 고대 인디언이 마시던 음료요, 인디언의 뿌리가 베링해협을 건너간 동이(東夷)라고 보면 음료의 기원은 BC 3,000년경 불의 이용법을 알려준 염제신농씨가 기원이 된다.
물론 최초로 발견되어 가장 오랫동안 인류의 반려로 내려온 것은 차이다. 신농씨는 약과 의술의 신이기도 하여 만가지 약초를 씹어 그 효능을 일일이 기록하였는데 어느 날은 독초를 씹어 온몸이 기운을 잃고 죽어갔다. 이 때 한 초목이 살랑거려 그 잎을 따 씹어 먹었더니 해독이 되어 살아났다. 신농씨는 이내 "풀(艸)도 나무(木)도 아닌 것이 사람을 구했다" 하여 가운데 사람 인(人)자를 넣었고 차(茶)라 이름한 뒤 해독에 탁월한 효능이 있다고 적었다. 명의 편작은 소화를 돕는다 하였고 달마 대사는 잠을 쫓아주는 음료라 했다.
7세기에 육우는 최초의 다서인 다경(茶經)을 저술, 차의 종류, 물의 선택, 다기 선택, 불다루기, 마시기 등을 규정화 했다. 이후 중국에서는 차라는 매개물을 상징으로 삼아 예술과 인생을 접목시키는 노력이 이어졌다. 사실 중국은 물이 나빠 차로써 음료를 대신하는 경향이 있었다. 육우로 인해 생활음료로서의 차(烏龍茶類)와, 정신 수양으로서의 차(綠茶類)가 구별된 셈이었다. 16세기에 와서 일본에서는 전국시대 영웅 오다 노부나가가 차를 깨우침의 종교로 삼으면서 다도를 세웠고 토요토미 히데요시 대에 이르러 전국이 통일됨과 동시에, 리큐(千利休)에 의해 와비(陀の茶) 사상을 완성시켰다. 요지는 평화에 대한 갈망이었다. 평화란 그 평화적 심성을 실생활에 반영할 수 있을 만큼 스스로를 검소하고 아름답게 가꾼 다음이라야 접근할 수 있다면서, 다도를 통해 순수 이상의, 예술 같은 존재가 되도록 했다. 수 없는 반복 훈련을 통해 다실에서 도달할 수 있는 세련된 정신 가짐을 일상생활에 적용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다. 아무 꾸밈없는 조선의 막사발을 다완(茶碗)이라는 미명 하에 상징으로 삼았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막사발에 나타난 조선인의 소박한 심성을 체득하도록 가르쳤다.
20세기에 접어들어 중국에서도 임어당의 영향을 받아 다예부흥운동이 일어났다. 임어당은 '차의 성질 가운데는 우리 인생을 한적한 명상으로 인도하는 말할 수 없이 오묘한 마력이 있다. 이러한 차를 즐기려면 달이나 꽃을 감상하고 음악을 즐길 때와 마찬가지로 스스로의 사고를 예술화 해야 한다. 차는 지성인의 선택이자 영원한 반려이다.' 라며 앞장섰다. 다예부흥운동은 민중운동으로서 대중적인 차생활을 통해 생활 속에 예술을 수용하는 마음을 기르는 것이었다. 이렇게 일본은 정치적인 이유로 다도를 세우고, 중국은 물이 나빠 그대로 마실 수 없는 환경에서 차를 마시다, 다예운동으로 발전되었다.
우리 나라 차의 역사는, 기록상으로는 9세기 신라 흥덕왕 시절부터라고 전한다. 그러나 식물학적으로 접근하면 토산차일 가능성이 많고, 또 가락국 시대에도 차로서 예를 올린 흔적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신라 화랑도 정신이 차생활로 다져지고 고려시대에는 불교의 발전과 더불어 온 국민이 차를 즐겼다. 조선으로 넘어와서도 차 마시는 풍습은 이어졌으나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 하에 즐기기만 했을 뿐 생산을 장려하지 않아 쇠퇴하고 말았다. 1800년을 전후하여 다산 정약용이 "차 마시는 민족은 흥하고, 술 마시면 망한다(飮茶興飮酒亡)고 외치며 차생활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추사 김정희, 초의 장의순 같은 분이 있어 조선의 다경 '다신전(茶神傳)'을 펴내고, "옛부터 성현이 모두 차를 사랑했으니 차는 군자와 같아 그 성품에 삿됨이 없기 때문이다." 라며 우리 차를 노래한 동다송(東茶頌)을 저술했지만 세계가 힘의 구도로 재편되는 역사의 격랑에 묻히고 말았다.
차는 동양을 원산지로 하지만 지구촌에 차를 상음하지 않는 민족은 없다. 일인당 소비량을 보면 영국을 으뜸으로 스웨덴·노르웨이·프랑스 등, 유럽이 생산지인 동남아보다 더 차를 즐긴다. 추위가 심하고 공기가 건조할수록 몸의 수분이 결핍되기 일쑤여서 갈증을 해소하는 생존 수단으로 차를 마셔야 하기 때문이다.
차로 인해 일어난 전쟁 중 유명한 것은 미국 독립전쟁과 영·청 간 아편(阿片)전쟁을 꼽을 수 있다. 미국의 독립전쟁은 1773년, 당시 영국 수상이던 F·노스가 신대륙 식민지 상인들에 의한 차의 자유 거래를 금지시키고, 차에 높은 관세를 부과한 것이 원인이 되었다. 보스톤 시민들은 이에 항의하여, 마침 항구에 정박 중인 무역선을 습격, 배에 실려있던 차를 모두 바다에 던져버렸다. 그러자 노한 영국은 군대를 파견해 응징하려 했고, 여기 보스톤 시민들이 민병대를 조직해 맞선 것이 미국독립전쟁의 직접적인 발단이었다.
또 아편전쟁(1840-1842)은 영국 국민들의 차 소비가 늘어나 수입이 급증하자, 기존의 은(銀)이나 모직물·향료 등으로는 무역적자를 감당할 수 없어 인도산(産)의 아편을 중국에 수출하기 시작한 데서 비롯되었다.
차로 인해 생겨난 이와 같은 일화들은 차가 인간생활의 필수적인 기호(嗜好)음료로서 인류 문화(文化)에 끼친 영향이 적지 않음을 시사한다. 오늘날 술·담배·커피 등과 함께 인류가 애용하는 기호품(嗜好品)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갖고 있는 것이 차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차잎의 엽록소를 유지하며 가공한 것이 녹차요, 반쯤 발효시킨 것이 중국의 오룡차요, 100% 발효시킨 것이 홍차다. 동양에서는 일찌기 발효차(醱酵茶) 만드는 제법이 발달하였고, 그 우린 물이 붉다하여 홍차(紅茶)라 이름하였는데, 유럽인들이 이 홍차에 블랙티(Black Tea)란 이름을 붙이게 된 데는 재미난 일화가 있다.
유럽에 차를 싣고 간 최초의 배는 네델란드 상선으로 1609년이고, 내용물은 홍차가 아닌 녹차, 즉 그린티(Green Tea) 였다. 그런데 당시의 뱃길이란 적도를 지나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고, 다시 적도를 지나야 했다. 뜨겁고 긴 항해에서, 배에 실린 차는 다 발효되어 하역할 때쯤은 새카맣게 변해 버렸다.
"이게 무슨 그린 티인가. 이건 블랙 티가 아닌가"
상인들은 썪었으니 버리자고 했다. 그 때 화주가 나서서 버릴 때 버리더라도 뜨거운 물에 한 번 우려나 보자고 나섰다. 실험하니 빨갛게 우러나는 것이 약간 떫지만 향기도 좋고 뒷맛의 상쾌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는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버리려던 차를 얼른 거두어 들였고 이 붉은 물이 우러나는 차에 "블랙 티"란 이름을 붙였다.
이들은 동양의 차 마시는 분위기도 전했다. …차라는 음료는 마시는 절차부터 까다로운 의례를 요구한다. 종교적인 신비성과 사회적인 윤리성이 숨어 있음에 한결 놀랍고 감동적이었다. 유럽인들이 다이아몬드나 루비같은 보석에 비싼 값을 치르며 소중히 하듯, 그들은 좋은 다기 (茶器) 다구(茶具)를 보물처럼 애중히 다뤘다… 동양문화에 호기심을 가지고 있던 네델란드인들은 이를 즉각 흉내냈다. 홍차로써 다도(茶道)에 열중했다. 1701년 암스텔담에서 공연된 희극 "데(Toe)에 참석한 부인들"은 당시 네델란드 귀부인들의 다회 모습을 잘 묘사하고 있는데 일본의 것을 그대로 모방한 것이었다.
네델란드 귀부인들 간에 유행한 다회는 점점 호화로워지면서 사회적 문제가 되었다. 부인들의 외출이 잦아지고 귀가 시간이 늦어지자 남편들은 술집으로 흘렀고, 그래서 많은 가정이 파괴되는 혼란이 차 때문에 빚어지기도 했다. 수입된 차에는 엄청나게 비싼 값이 매겨졌지만 네델란드 상류사회는 이 차를 구하지 못해 야단법석을 떨었다. 그때까지 유럽에는 주류(酒類)와 밀크 정도가 있었을 뿐 뜨거운 음료라는 것은 전연 없었던 것이다.
비슷한 무렵 실크로드를 통하여 중국의 홍차가 폴란드에 전해졌다. 당시 동양에선 홍차는 인기가 없었다. 대량의 홍차를 싼값에 사간 폴란드 상인들은, 우선 궁정에 진상함으로써 상품의 가치를 높인 후, 포르투갈과 영국에 수출했다. 홍차는 금세 귀족사회의 인기를 차지했다. 모든 정치 이야기는 티하우스에서 이루어졌고, 법률가·문학가·의사·성직자 등이 모두, 짙은 향기를 내뿜는 붉은빛 음료에 예찬을 아끼지 않았다.
영국인들이 차를 맛본 것은 1650년 경으로 유럽에서는 가장 늦었다. 영국왕실에 차마시는 풍습을 전한 사람은 포르투갈인이었다. 찰스 2세와 결혼한 포루투갈 브라간자가(家) 출신의 캐서린 왕후로, 그녀가 영국으로 건너간 것은 1662년이다. 늦게 알았지만 "재빠른 영국인들"은 홍차를 보자마자 이것의 상권이 유럽의 정치 경제사회에 미칠 강대한 영향을 간파했다. 폴란드 상인들이 영국에 차를 전한 것은 어떤 의미에선 실수였다. 소량의 수출이 영국의 동양진출을 본격화하게 만들어준 결과가 되었다.
유럽에 진출한 차는 이렇게 유럽 각국을 파고들며 식생활에 큰 변화를 주었고, 심한 논쟁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논쟁의 요지는 "부인들이 차를 지나치게 애호하여 가정파탄의 원인이 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영국 메소지도스교회는 신도들에게 "차는 건강에도 도움이 되지않고 도덕적으로도 유해한 것인만큼 마시지않는 것이 좋다"고 공개적으로 차를 반대했다. 또 스코틀랜드의 한 의사는 1730년 발표한 논문에서 "차의 효용에 환상적인 신뢰를 품어서는 안된다"면서 "알려진 것과 반대로 차는 사람을 우울하게 하든가 심한 불쾌증을 품게하는 유해로운 음료이다"라고 하여, 차를 지탄하는 내용까지 담고 있다. 프랑스의 학자 기 파텡은 차를 가리켜 "금세기 가장 엉뚱한 물건의 하나"라고 매도했고, 영국의 헤일스 목사는 차는 해로운 것이라며 돼지새끼의 꼬리를 뜨거운 찻잔에 담그면 털이 죄다 빠져버린다는 것을 입증해 보였다.
한편 예찬의 소리도 만만치 않았다. 영어사전을 만든 것으로 유명한 닥터 존슨은 "디텔러리 매거진"에 쓴 "건강하고 처세에 부끄러움 없는 남자의 선언"에서 "나는 지난 몇 년동안 오로지 가장 사랑하는 식물을 끓여 우린 물로 빵을 부드럽게 해서 먹는 일에만 열중했다. 나의 포트는 식은 예가 없다. 홍차로 저녁을 즐기고, 홍차로 한밤을 위로 받고, 홍차로 아침을 맞이한다"고 당당하게 노래했다. 기행 작가인 죠나스 항웨이라는 작가는 "차에 관한 에세이"에서 "홍차는 백해무익한 것으로 나라를 가난하게 만드는 산업이다. 그리고 홍차는 국민의 미풍양속을 해친다. 호텔의 여종업원까지 홍차를 마시는데 건강한 얼굴색을 잃게되지 않을까 심히 염려된다"고 반박했다.
영국인끼리의 홍차논쟁에 종지부를 찍게 한 것은 코크레이·렛솜의 논문 "차의 의학적 성질과 끽다의 효과에 관한 고찰"이었다. 렛솜은 이 논문에서 "홍차는 너무 뜨거운 것을 마시거나 벌떡벌떡 마시지만 않는다면, 달여마시는 다른 어떤 식물보다 바람직하다고 말할 수 있다. 원기를 회복하는 효과가 있다. 사람들의 홍차에 대한 애정은 그것이 유행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월등하게 좋은 맛과 향기, 효과가 높은 것이기 때문이다"고 주장했다. 이 온건한 의견이 대세의 지지를 얻으면서 홍차를 적대시하는 사람은 없어지게 되었고 '티타임' 문화가 피어나 신사도를 구축하게 된다.
커피에 이런 일이?
차와 쌍벽을 이루는 커피(Coffee)는 회교승들의 수도용 음료로 출발했다. 커피의 유래도 차와 마찬가지로 정확히 밝혀지는 것은 없는데, 18세기 로마대학에서 언어학 교수를 지낸 화이토스 나이론의 설에 이런 내용이 있다.
…먼 옛날 이디오피아의 초원에서 산양을 몰던 목동이, 자기의 산양이 어느 지점에 이르기만 하면 펄쩍펄쩍 뛰고 이상하게 흥분하는 것을 이상히 여겨 가까운 수도원 원장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수도원장이 원인을 조사해 보니 그곳에 있는 한 식물의 열매를 먹은 탓이라는 것을 알았다. 수도원장은 자신도 열매를 먹어보았는데 조심스러워 끓여 마셨다. 그랬더니 졸음이 사라지고 형언할 수 없이 기분이 상쾌해지는 것을 느꼈다. 커피는 이 수도원장에 의해 알려지기 시작했다 …
커피는 이렇게 아라비아 회교승에 의해 발견되고, 수도용 음료로 오래동안 애음되다, 오스만제국(터키)의 아라비아 침략을 계기로 유럽에 전파되었다.
알라신을 유일신으로 삼아 엄격한 수행이 요구되는 수도승들에게 커피는, 자칫 나른해지기 쉬운 자세를 바짝 긴장하게 하는 비상의 약으로 사랑받았다. 세계 최초의 커피하우스인 "뷰도·알·카파"가 아라비아의 성지 메카에서 문을 연 것도, 회교 전도를 목적으로 하는 회교승들에 의해서였다. 그들은 메카를 찾아온 순례자들에게는 물론, 상인, 일반인에게까지 커피를 나누어 주었다.
이러한 커피는 오스만제국 군인들의 발길을 따라 유럽에 소개되었다. 아라비아의 커피하우스를 흉내내서 1552년 유럽 최초의 커피하우스가 이스탄블(콘스탄티노플)에서 문울 열었고, 이어 옥스포드·베를린·빈·런던·마르세이유·파리·함부르크 등의 순으로 커피하우스들이 생겨났다.
커피를 즐겨 마시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그것이 마치 예술품 같이 완성된 음료로 인기를 모아가자 기독교 사회 지도자들은 커피 금지령을 내리고 박해를 시작했다. 이단자인 회교도가 마시는 "악마의 음료"를 기독교도가 마셔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커피 금지령에는 오스만제국에 대한 원한 서린 감정이 포함되었을 수도 있었다. 커피를 마시다 붙잡힌 사람은 혀를 뽑았고, 원두를 암거래하다 붙잡힌 사람은 커피포대에 넣어 물 속에 처넣는 극형이 여기 저기서 서슴없이 행해졌다. 그러나 커피의 마력은 한 번 그것을 마신 사람을 헤어나지 못하게 했다.
커피 논쟁이 피를 부를 정도로 뜨거워지자 마침내 교황의 결재가 필요하게 되었다. 커피를 마신 교황은 클레멘스 8세였다. 생전 처음 커피를 맛 본 교황은 침묵 속에서 충분히 음미한 후 기운찬 목소리로 말했다.
"악마의 음료가 이렇게 훌륭한가. 이런 음료를 이교도들만 즐겼다는 것은 차라리 애석한 일이다. 내가 커피에 세례를 주어 기독교인의 음료가 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할 터이니, 앞으로는 커피 박해를 금하도록 하라"
이리하여 커피는 교황으로부터 의식을 갖춘 세례를 받게 되었고 사람들은 다투어 커피를 받아들였다. 루이 14세의 명언(?)은 이런 일이 있은 후에 나온 것이다. .
"커피가 없이는 아무리 진수성찬이라도 훌륭하다고 할 수 없다"
커피 하우스는 단순히 기호음료를 마시는 장소가 아니라, 지식인·정치가들의 집회소 또는 토론장으로 애용되면서 사회발전에 긍정적인 많은 기여를 했다. 프랑스 혁명도 "커피 하우스의 토론"에서 시작되었다.
세계 3대 기호음료는 차(tea)·커피(coffee)·마테(mate)이다. 모두 카페인이며 탄닌산 등을 함유하고 있어 해독의 효능이 있으며 머리를 맑게 하고 소화를 도우면서 신경을 자극해 우리를 한적한 명상의 숲으로 인도한다. 그래서 이 음료들은 하나 같이 발견됨과 동시에 종교 수행자들의 공부를 도와주는 용도로 출발했다. 마테는 남미 고산지대를 신천지로 여기며 활약한 예수교도들이 즐겼으며 커피는 아라비아 회교승들이, 차는 동양 불교 수행자들에 의해 애음되고 널리 전파되었다.
이 음료들은 따지고 보면 모두 아시아에서 출발하였다. 마테 역시 고대 인디언이 마시던 음료요, 인디언의 뿌리가 베링해협을 건너간 동이(東夷)라고 보면 음료의 기원은 BC 3,000년경 불의 이용법을 알려준 염제신농씨가 기원이 된다.
물론 최초로 발견되어 가장 오랫동안 인류의 반려로 내려온 것은 차이다. 신농씨는 약과 의술의 신이기도 하여 만가지 약초를 씹어 그 효능을 일일이 기록하였는데 어느 날은 독초를 씹어 온몸이 기운을 잃고 죽어갔다. 이 때 한 초목이 살랑거려 그 잎을 따 씹어 먹었더니 해독이 되어 살아났다. 신농씨는 이내 "풀(艸)도 나무(木)도 아닌 것이 사람을 구했다" 하여 가운데 사람 인(人)자를 넣었고 차(茶)라 이름한 뒤 해독에 탁월한 효능이 있다고 적었다. 명의 편작은 소화를 돕는다 하였고 달마 대사는 잠을 쫓아주는 음료라 했다.
7세기에 육우는 최초의 다서인 다경(茶經)을 저술, 차의 종류, 물의 선택, 다기 선택, 불다루기, 마시기 등을 규정화 했다. 이후 중국에서는 차라는 매개물을 상징으로 삼아 예술과 인생을 접목시키는 노력이 이어졌다. 사실 중국은 물이 나빠 차로써 음료를 대신하는 경향이 있었다. 육우로 인해 생활음료로서의 차(烏龍茶類)와, 정신 수양으로서의 차(綠茶類)가 구별된 셈이었다. 16세기에 와서 일본에서는 전국시대 영웅 오다 노부나가가 차를 깨우침의 종교로 삼으면서 다도를 세웠고 토요토미 히데요시 대에 이르러 전국이 통일됨과 동시에, 리큐(千利休)에 의해 와비(陀の茶) 사상을 완성시켰다. 요지는 평화에 대한 갈망이었다. 평화란 그 평화적 심성을 실생활에 반영할 수 있을 만큼 스스로를 검소하고 아름답게 가꾼 다음이라야 접근할 수 있다면서, 다도를 통해 순수 이상의, 예술 같은 존재가 되도록 했다. 수 없는 반복 훈련을 통해 다실에서 도달할 수 있는 세련된 정신 가짐을 일상생활에 적용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다. 아무 꾸밈없는 조선의 막사발을 다완(茶碗)이라는 미명 하에 상징으로 삼았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막사발에 나타난 조선인의 소박한 심성을 체득하도록 가르쳤다.
20세기에 접어들어 중국에서도 임어당의 영향을 받아 다예부흥운동이 일어났다. 임어당은 '차의 성질 가운데는 우리 인생을 한적한 명상으로 인도하는 말할 수 없이 오묘한 마력이 있다. 이러한 차를 즐기려면 달이나 꽃을 감상하고 음악을 즐길 때와 마찬가지로 스스로의 사고를 예술화 해야 한다. 차는 지성인의 선택이자 영원한 반려이다.' 라며 앞장섰다. 다예부흥운동은 민중운동으로서 대중적인 차생활을 통해 생활 속에 예술을 수용하는 마음을 기르는 것이었다. 이렇게 일본은 정치적인 이유로 다도를 세우고, 중국은 물이 나빠 그대로 마실 수 없는 환경에서 차를 마시다, 다예운동으로 발전되었다.
우리 나라 차의 역사는, 기록상으로는 9세기 신라 흥덕왕 시절부터라고 전한다. 그러나 식물학적으로 접근하면 토산차일 가능성이 많고, 또 가락국 시대에도 차로서 예를 올린 흔적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신라 화랑도 정신이 차생활로 다져지고 고려시대에는 불교의 발전과 더불어 온 국민이 차를 즐겼다. 조선으로 넘어와서도 차 마시는 풍습은 이어졌으나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 하에 즐기기만 했을 뿐 생산을 장려하지 않아 쇠퇴하고 말았다. 1800년을 전후하여 다산 정약용이 "차 마시는 민족은 흥하고, 술 마시면 망한다(飮茶興飮酒亡)고 외치며 차생활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추사 김정희, 초의 장의순 같은 분이 있어 조선의 다경 '다신전(茶神傳)'을 펴내고, "옛부터 성현이 모두 차를 사랑했으니 차는 군자와 같아 그 성품에 삿됨이 없기 때문이다." 라며 우리 차를 노래한 동다송(東茶頌)을 저술했지만 세계가 힘의 구도로 재편되는 역사의 격랑에 묻히고 말았다.
차는 동양을 원산지로 하지만 지구촌에 차를 상음하지 않는 민족은 없다. 일인당 소비량을 보면 영국을 으뜸으로 스웨덴·노르웨이·프랑스 등, 유럽이 생산지인 동남아보다 더 차를 즐긴다. 추위가 심하고 공기가 건조할수록 몸의 수분이 결핍되기 일쑤여서 갈증을 해소하는 생존 수단으로 차를 마셔야 하기 때문이다.
차로 인해 일어난 전쟁 중 유명한 것은 미국 독립전쟁과 영·청 간 아편(阿片)전쟁을 꼽을 수 있다. 미국의 독립전쟁은 1773년, 당시 영국 수상이던 F·노스가 신대륙 식민지 상인들에 의한 차의 자유 거래를 금지시키고, 차에 높은 관세를 부과한 것이 원인이 되었다. 보스톤 시민들은 이에 항의하여, 마침 항구에 정박 중인 무역선을 습격, 배에 실려있던 차를 모두 바다에 던져버렸다. 그러자 노한 영국은 군대를 파견해 응징하려 했고, 여기 보스톤 시민들이 민병대를 조직해 맞선 것이 미국독립전쟁의 직접적인 발단이었다.
또 아편전쟁(1840-1842)은 영국 국민들의 차 소비가 늘어나 수입이 급증하자, 기존의 은(銀)이나 모직물·향료 등으로는 무역적자를 감당할 수 없어 인도산(産)의 아편을 중국에 수출하기 시작한 데서 비롯되었다.
차로 인해 생겨난 이와 같은 일화들은 차가 인간생활의 필수적인 기호(嗜好)음료로서 인류 문화(文化)에 끼친 영향이 적지 않음을 시사한다. 오늘날 술·담배·커피 등과 함께 인류가 애용하는 기호품(嗜好品)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갖고 있는 것이 차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차잎의 엽록소를 유지하며 가공한 것이 녹차요, 반쯤 발효시킨 것이 중국의 오룡차요, 100% 발효시킨 것이 홍차다. 동양에서는 일찌기 발효차(醱酵茶) 만드는 제법이 발달하였고, 그 우린 물이 붉다하여 홍차(紅茶)라 이름하였는데, 유럽인들이 이 홍차에 블랙티(Black Tea)란 이름을 붙이게 된 데는 재미난 일화가 있다.
유럽에 차를 싣고 간 최초의 배는 네델란드 상선으로 1609년이고, 내용물은 홍차가 아닌 녹차, 즉 그린티(Green Tea) 였다. 그런데 당시의 뱃길이란 적도를 지나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고, 다시 적도를 지나야 했다. 뜨겁고 긴 항해에서, 배에 실린 차는 다 발효되어 하역할 때쯤은 새카맣게 변해 버렸다.
"이게 무슨 그린 티인가. 이건 블랙 티가 아닌가"
상인들은 썪었으니 버리자고 했다. 그 때 화주가 나서서 버릴 때 버리더라도 뜨거운 물에 한 번 우려나 보자고 나섰다. 실험하니 빨갛게 우러나는 것이 약간 떫지만 향기도 좋고 뒷맛의 상쾌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는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버리려던 차를 얼른 거두어 들였고 이 붉은 물이 우러나는 차에 "블랙 티"란 이름을 붙였다.
이들은 동양의 차 마시는 분위기도 전했다. …차라는 음료는 마시는 절차부터 까다로운 의례를 요구한다. 종교적인 신비성과 사회적인 윤리성이 숨어 있음에 한결 놀랍고 감동적이었다. 유럽인들이 다이아몬드나 루비같은 보석에 비싼 값을 치르며 소중히 하듯, 그들은 좋은 다기 (茶器) 다구(茶具)를 보물처럼 애중히 다뤘다… 동양문화에 호기심을 가지고 있던 네델란드인들은 이를 즉각 흉내냈다. 홍차로써 다도(茶道)에 열중했다. 1701년 암스텔담에서 공연된 희극 "데(Toe)에 참석한 부인들"은 당시 네델란드 귀부인들의 다회 모습을 잘 묘사하고 있는데 일본의 것을 그대로 모방한 것이었다.
네델란드 귀부인들 간에 유행한 다회는 점점 호화로워지면서 사회적 문제가 되었다. 부인들의 외출이 잦아지고 귀가 시간이 늦어지자 남편들은 술집으로 흘렀고, 그래서 많은 가정이 파괴되는 혼란이 차 때문에 빚어지기도 했다. 수입된 차에는 엄청나게 비싼 값이 매겨졌지만 네델란드 상류사회는 이 차를 구하지 못해 야단법석을 떨었다. 그때까지 유럽에는 주류(酒類)와 밀크 정도가 있었을 뿐 뜨거운 음료라는 것은 전연 없었던 것이다.
비슷한 무렵 실크로드를 통하여 중국의 홍차가 폴란드에 전해졌다. 당시 동양에선 홍차는 인기가 없었다. 대량의 홍차를 싼값에 사간 폴란드 상인들은, 우선 궁정에 진상함으로써 상품의 가치를 높인 후, 포르투갈과 영국에 수출했다. 홍차는 금세 귀족사회의 인기를 차지했다. 모든 정치 이야기는 티하우스에서 이루어졌고, 법률가·문학가·의사·성직자 등이 모두, 짙은 향기를 내뿜는 붉은빛 음료에 예찬을 아끼지 않았다.
영국인들이 차를 맛본 것은 1650년 경으로 유럽에서는 가장 늦었다. 영국왕실에 차마시는 풍습을 전한 사람은 포르투갈인이었다. 찰스 2세와 결혼한 포루투갈 브라간자가(家) 출신의 캐서린 왕후로, 그녀가 영국으로 건너간 것은 1662년이다. 늦게 알았지만 "재빠른 영국인들"은 홍차를 보자마자 이것의 상권이 유럽의 정치 경제사회에 미칠 강대한 영향을 간파했다. 폴란드 상인들이 영국에 차를 전한 것은 어떤 의미에선 실수였다. 소량의 수출이 영국의 동양진출을 본격화하게 만들어준 결과가 되었다.
유럽에 진출한 차는 이렇게 유럽 각국을 파고들며 식생활에 큰 변화를 주었고, 심한 논쟁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논쟁의 요지는 "부인들이 차를 지나치게 애호하여 가정파탄의 원인이 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영국 메소지도스교회는 신도들에게 "차는 건강에도 도움이 되지않고 도덕적으로도 유해한 것인만큼 마시지않는 것이 좋다"고 공개적으로 차를 반대했다. 또 스코틀랜드의 한 의사는 1730년 발표한 논문에서 "차의 효용에 환상적인 신뢰를 품어서는 안된다"면서 "알려진 것과 반대로 차는 사람을 우울하게 하든가 심한 불쾌증을 품게하는 유해로운 음료이다"라고 하여, 차를 지탄하는 내용까지 담고 있다. 프랑스의 학자 기 파텡은 차를 가리켜 "금세기 가장 엉뚱한 물건의 하나"라고 매도했고, 영국의 헤일스 목사는 차는 해로운 것이라며 돼지새끼의 꼬리를 뜨거운 찻잔에 담그면 털이 죄다 빠져버린다는 것을 입증해 보였다.
한편 예찬의 소리도 만만치 않았다. 영어사전을 만든 것으로 유명한 닥터 존슨은 "디텔러리 매거진"에 쓴 "건강하고 처세에 부끄러움 없는 남자의 선언"에서 "나는 지난 몇 년동안 오로지 가장 사랑하는 식물을 끓여 우린 물로 빵을 부드럽게 해서 먹는 일에만 열중했다. 나의 포트는 식은 예가 없다. 홍차로 저녁을 즐기고, 홍차로 한밤을 위로 받고, 홍차로 아침을 맞이한다"고 당당하게 노래했다. 기행 작가인 죠나스 항웨이라는 작가는 "차에 관한 에세이"에서 "홍차는 백해무익한 것으로 나라를 가난하게 만드는 산업이다. 그리고 홍차는 국민의 미풍양속을 해친다. 호텔의 여종업원까지 홍차를 마시는데 건강한 얼굴색을 잃게되지 않을까 심히 염려된다"고 반박했다.
영국인끼리의 홍차논쟁에 종지부를 찍게 한 것은 코크레이·렛솜의 논문 "차의 의학적 성질과 끽다의 효과에 관한 고찰"이었다. 렛솜은 이 논문에서 "홍차는 너무 뜨거운 것을 마시거나 벌떡벌떡 마시지만 않는다면, 달여마시는 다른 어떤 식물보다 바람직하다고 말할 수 있다. 원기를 회복하는 효과가 있다. 사람들의 홍차에 대한 애정은 그것이 유행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월등하게 좋은 맛과 향기, 효과가 높은 것이기 때문이다"고 주장했다. 이 온건한 의견이 대세의 지지를 얻으면서 홍차를 적대시하는 사람은 없어지게 되었고 '티타임' 문화가 피어나 신사도를 구축하게 된다.
커피에 이런 일이?
차와 쌍벽을 이루는 커피(Coffee)는 회교승들의 수도용 음료로 출발했다. 커피의 유래도 차와 마찬가지로 정확히 밝혀지는 것은 없는데, 18세기 로마대학에서 언어학 교수를 지낸 화이토스 나이론의 설에 이런 내용이 있다.
…먼 옛날 이디오피아의 초원에서 산양을 몰던 목동이, 자기의 산양이 어느 지점에 이르기만 하면 펄쩍펄쩍 뛰고 이상하게 흥분하는 것을 이상히 여겨 가까운 수도원 원장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수도원장이 원인을 조사해 보니 그곳에 있는 한 식물의 열매를 먹은 탓이라는 것을 알았다. 수도원장은 자신도 열매를 먹어보았는데 조심스러워 끓여 마셨다. 그랬더니 졸음이 사라지고 형언할 수 없이 기분이 상쾌해지는 것을 느꼈다. 커피는 이 수도원장에 의해 알려지기 시작했다 …
커피는 이렇게 아라비아 회교승에 의해 발견되고, 수도용 음료로 오래동안 애음되다, 오스만제국(터키)의 아라비아 침략을 계기로 유럽에 전파되었다.
알라신을 유일신으로 삼아 엄격한 수행이 요구되는 수도승들에게 커피는, 자칫 나른해지기 쉬운 자세를 바짝 긴장하게 하는 비상의 약으로 사랑받았다. 세계 최초의 커피하우스인 "뷰도·알·카파"가 아라비아의 성지 메카에서 문을 연 것도, 회교 전도를 목적으로 하는 회교승들에 의해서였다. 그들은 메카를 찾아온 순례자들에게는 물론, 상인, 일반인에게까지 커피를 나누어 주었다.
이러한 커피는 오스만제국 군인들의 발길을 따라 유럽에 소개되었다. 아라비아의 커피하우스를 흉내내서 1552년 유럽 최초의 커피하우스가 이스탄블(콘스탄티노플)에서 문울 열었고, 이어 옥스포드·베를린·빈·런던·마르세이유·파리·함부르크 등의 순으로 커피하우스들이 생겨났다.
커피를 즐겨 마시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그것이 마치 예술품 같이 완성된 음료로 인기를 모아가자 기독교 사회 지도자들은 커피 금지령을 내리고 박해를 시작했다. 이단자인 회교도가 마시는 "악마의 음료"를 기독교도가 마셔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커피 금지령에는 오스만제국에 대한 원한 서린 감정이 포함되었을 수도 있었다. 커피를 마시다 붙잡힌 사람은 혀를 뽑았고, 원두를 암거래하다 붙잡힌 사람은 커피포대에 넣어 물 속에 처넣는 극형이 여기 저기서 서슴없이 행해졌다. 그러나 커피의 마력은 한 번 그것을 마신 사람을 헤어나지 못하게 했다.
커피 논쟁이 피를 부를 정도로 뜨거워지자 마침내 교황의 결재가 필요하게 되었다. 커피를 마신 교황은 클레멘스 8세였다. 생전 처음 커피를 맛 본 교황은 침묵 속에서 충분히 음미한 후 기운찬 목소리로 말했다.
"악마의 음료가 이렇게 훌륭한가. 이런 음료를 이교도들만 즐겼다는 것은 차라리 애석한 일이다. 내가 커피에 세례를 주어 기독교인의 음료가 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할 터이니, 앞으로는 커피 박해를 금하도록 하라"
이리하여 커피는 교황으로부터 의식을 갖춘 세례를 받게 되었고 사람들은 다투어 커피를 받아들였다. 루이 14세의 명언(?)은 이런 일이 있은 후에 나온 것이다. .
"커피가 없이는 아무리 진수성찬이라도 훌륭하다고 할 수 없다"
커피 하우스는 단순히 기호음료를 마시는 장소가 아니라, 지식인·정치가들의 집회소 또는 토론장으로 애용되면서 사회발전에 긍정적인 많은 기여를 했다. 프랑스 혁명도 "커피 하우스의 토론"에서 시작되었다.
출처 : 인천시무형문화재10호범패와작법무
글쓴이 : 모봉형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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