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이야기

[스크랩] 한국의 차문화/ 차운동 일선에 나선 승려와 여성

차보살 다림화 2008. 2. 17. 19:07
1980년대 차생활 운동에 가장 적극적인 세력의 하나는 불교인(佛敎人)들이었다. 차가 불교를 따라 전래했고, 사원 중심으로 명맥을 이어왔다고 보면, 그것이 특별할 수는 없다. 더구나 역사의 오랜 기간 불교가 국교(國敎)였던 나라 실정에서 차생활운동에 승려들의 참여는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노스님들은 조용한 데, 젊은 승려들이 목소리를 높인 것은 질서있거나 자연스러운 게 아니었다.

불가(佛家)의 이러한 움직임은 비구승 대처승 정화 이후 가장 큰 문제로 대두된 "불교의 대중화"와 때를 같이 함으로써 하루가 다르게 열정을 더 해 갔다. 차생활 운동을 불교 전도 차원에서 펼친 것이었다. 근대에 와서 차생활의 중요성을 일깨워준 초의, 효당이 모두 승려였고, 차생활운동에 참여한 주요 인사들 역시 종교적 성향이 같아 이를 탓할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통일된 이론이나 수평적 화합을 이루지 못 하고, 저 마다 제 신도를 대상으로 개성있는 주장을 편 것은 후일 다인들을 더욱 여러 분류로 갈라놓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차 이전에 불교의 종파 대립이 있었다. 차생활 운동과 관련하여 가장 영향력 컸던 대립은 송광사를 중심으로 한 수선사(修禪社)와 백련사를 중심으로 실천중심 수행인들이 뭉친 백련결사(白蓮結社)였다. 차 운동의 일선에 나선 것은 백련결사 쪽이었고, 이들을 비웃듯 조용히 - 혹은 무관심하게 - 지낸 것은 수선사 쪽이었다. 그리고 명망있는 노스님들도 수선사 쪽이었다. 초의(艸衣)를 다성(茶聖)으로 추대하는 일 조차 "부질없는 짓"이라며 거부하는 일부가 있었다.

차운동에 나선 승려들은 설법하는 선에 머무르지 않았다. 다기 다구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었고, 좋은 차 만들기와 선택법까지 알려주다가 이윽고는 자기 법명이나 절 이름을 상표처럼 붙여 차와 다기를 직접 만들어 팔기까지 하였다. 젊은 승려들의 이와같은 활동은, 차생활을 널리 알리는 데는 공헌하였으나 차에 불교색을 짙게 담은 면에서는, 오히려 저해하는 결과가 되었다. 차·다기 가격도 결국은 그들에 의해 천정부지로 높아졌다.

사실 70년대 후반까지만도 차값이나 다기값은 참 쌌었다. 3천원 정도면 상품의 차를 200그람 정도 살 수 있었고, 위에 토우(土偶)가 말했듯이 다기값이라 해야 1만원 안팎이었다. 그랬던 것이 "○○스님 수제차" "△△寺 차"하면서 일반보다 두 배 세 배의 값을 붙였던 것이다. 수제차라지만 당시는 일반 제품도 거의 수제였다. 색향미에 특별히 나을 것이 없었다. 일부 승려는 부도덕하게도 기존 제다공장의 제품에 상표만 자기 이름을 얹어 "특별히 만든 수제품"인양 속여서 팔기도 했다.

이런 류의 비밀이 오래갈 까닭은 없었다. 특별할 것 없는 차가 비싼 값에 잘 팔리자 "바싸야 팔리는 것(?)"을 깨달은 일반업자들도 덩달아 값을 올리기 시작했다. 게다가 차 인구는 점점 늘어나 공급이 딸리는 현상도 생겼다. 해가 다르게 차는 품귀해지고, 값은 큰 폭으로 오랐다.

값 싸고 건강에 좋은 우리 차 마시기 운동은 주춤하게 되었다. 차와 다기가 비싸지고 귀해짐에 따라 상류층의 놀이로 귀족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으니 차생활 운동가들도 그만 긴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우여곡절 속에서도 차생활 인구는 점점 늘어 이윽고 전국적인 차원에서 차운동은 거론되기 시작했다. 77년 8월, 몇몇 인사들이 진주 다솔사에 모여 전국 차원의 한국다도회(韓國茶道會)를 발족하였다.

회장은 효당(曉堂) 최범술, 부회장은 전각가(篆刻家) 청사(晴斯) 안광석·도예인 토우(土偶) 김종희, 사무국장은 교육계(敎育界)의 아인(亞人) 박종한 교장이 맡아 차생활 문화의 조직적인 발전을 시도했다. 그러나 첫 움직임은 내부적인 사정으로, 다만 한 가지도 뜻을 이루지 못하고 무산되고 말았다. 이때 계획했던 일 중에는 "차의 날"을 제정하자는 안건이 있었다. 차로서 경천(敬天) 사상을 고취하기 위해 "차의 날"을 제정 선포하자는 것이었다.

입춘으로부터 1백일 째 되는 날(5월 25일 경)이, 한 해 차 농사를 마치는 때이니, 이 날을 택하자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경천 사상을 고취하기로 말한다면 차나무에 잎이 돋기 시작하는 4월 15일 전후가 더 적절할 듯 싶건만 왜 추수의 개념으로 차 농사 끝내는 싯점을 택했는지는 아무도 이유를 설명하지 않고 있다. 어쨌든 박종한 사무국장이 자료를 모으고 최범술 회장은 선언문을 작성하기까지 했지만, 그러나 행사를 갖기 전에 한국다도회가 해체되어 선포식은 자동 연기되었다.

그런데 이 일 이후 이상한 변화가 일어났다. 그래도 이때까지는 - 기 거론된 인사들 명단에서 짐작할 수 있듯 - 차운동을 남성들이 주도했었다. 그런데 우연일까, 한국다도회가 해체되면서 치마바람이 서서히 다계(茶界)에 침투하기 시작했다.

이와함께 왜색시비가 갑자기 드세지기 시작했다. 사실상 걸러지지않은 일본의 다도가 치마바람과 함께 거침없이 곳곳을 침투했고, 한편에선 이에 대한 거부의 소리가 높아졌다.

센리큐(千利休)의 후손인 교토(京都) 천종실(千宗室) 우라셍케(裏千家)로 대표되는 일본의 엄격한 말차도(抹茶道)가 거침없이 공공 장소에서 시연되었다. 그리고 이를 주도한 인사들은 전차(煎茶) 예절에 상당부분에 일본의 이러한 말차도를 편입시켜 버렸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게다 신은 일본인처럼 종종 걸음을 걷는 해프닝도 심심찮게 벌어졌다.

주인을 팽주(烹主), 손님을 팽객(烹客), 차 넣기를 투차(投茶), 물 끓이기를 숙수(熟水)라고 하는 따위 용어들도 인식이 돌변하여 거부감 조성에 한몫했다. 그것은 사실 일본의 다도용어들이었다. 효당의 글을 통해 익히 알려진 용어들이었으나, 분위기가 달라지니 받아들이는 자세도 달라져 버렸다. 행차는 남녀 구분보다 좌장(座長)의 의무이자 권리임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무시되고 여성들이 팽주석(烹主席)을 독점하다시피 했다.

치마바람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과정보다 결과를 중시하는 풍조가 생겨, 인품이나 덕망보다 차를 언제부터 마셨느냐로 선후배를 가리게 되었다. 무엇보다 차 정신, 차 철학, 다인의 자세보다 예절을 앞세우기 시작했다. 심성을 순화하자는 운동이 여성들의 예절운동으로 둔갑하여 절하기 한복 바르게 입기 등의 생활교육을 겸하게 되었다. 그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차생활의 필요성을 역설하던 성균관 대학의 이상일 박사 등 석학(碩學)들의 소리는 이때를 전후하여 슬그머니 커튼 뒤로 물러가 버렸다.


차생활 예절의 시도(?)는 그렇게 여성들에 의해 창안되고 이루어졌다. 그들을 움직이게 한 것은 역시 일본의 다도였다. 차예절 운동의 선구자 중 한 분인 명원 김미희 씨는 일본 방문에서 다도를 접하고, 우리에게도 그런 예절이 필요하다고 생각되어 한국인의 움직임을 바탕으로 차의 예절을 만들었다고 하였다.

예지원 설립자 강영숙 원장 역시 일본인들이 하는 모습을 보고 그 필요성을 느껴 관심을 갖기 시작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중에는 교토에서 다도 사범학교를 나온 광주요 윤규옥 씨 같은 분도 있었고, 어깨넘어로 본 것을 토대로 혼자 만들어 "고유의 차예절"이라고 주장한 사람도 있었다.

차생활 예절 열기는 이들에 의해 무수히 많은 다도학원을 만들게 하였다. 그러자 꽃꽂이(花道)계 여류인사들이 대거 다도로 몰려 들었고, 꽃꽂이에서처럼 학원마다 수료증·사범증을 만들어주는 무질서한 사태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그래도 70년 대는 밖으로까지 그런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한 발 물러나 밖에서 보는 차운동은 - 태풍 전야의 고요함처럼 - 오히려 평온하고 아름답게만 보였었다




출처 : 인천시무형문화재10호범패와작법무
글쓴이 : 모봉형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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