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사(聖住寺)
달마(達磨.?~528)로부터 시작된 중국의 선불교는 8대 조사인 마조 도일(馬祖道一.707~786) 9대 조사 마곡 보철(麻谷 寶徹.? ~ ?)에 이어 10대는 신라의 무염국사(無染國師.801~888)로 그 맥이 이어진다. 무염은 중국의 선맥 뿐 아니라 차와 선이 둘이 아니라는 茶禪不二의 차풍도 이어와 이 땅에 뿌리내리게 하였다.
서기 845년 중국에서 선종의 법맥을 받아 귀국한 무염은 지금의 충남 보령 만수산 북쪽 기슭에 신라 구산선문의 하나인 성주산선문을 연다. 지금 성주사터에 남아있는 최치원이 쓴 *낭혜화상비(朗慧和尙碑)*나 동국대학교가 소장하고 있는 김립지(金立之;무염국사와 동시대 신라의 학자)가 쓴 <성주사사적기>에는 차인들이 목마르게 찾고 있는 茶字가 나온다.
차는 향과 더불어 스님에게 올리는 최고의 예물이었다. 무염의 일생이 기록된 낭혜화상탑비에는 차와 향을 뜻하는 *명발*이라는 글자가 나온다.
당시 문성왕은 아직 임금이 되기 전이었던 헌안왕과 동생 김양을 중국에서 갓 귀국한 무염에게 보내 제자의 예를 갖추고 차와 향을 올리도록 했다는 구절이 바로 그것이다.
<성주사사적기>에는 성주사 낙성법회가 성대히 열릴 때 차와 향을 두 손으로 높이 받들어 올렸다는 *다향수(茶香手)*라는 글자가 또렷하다.
강남의 풍치는 승가에 있는데
바위위에서 마시는 죽리차(竹裡茶), 그 청향을 듣는다
탈속한 스님이면 이 운치를 더 깊이 아련마는
차 마시고 향에 젖을수록 옷깃에 차향만 가득하네
중국 고승전에 나오는 무염의 스승인 마곡 보철의 시다.
이 시에 나오는 탈속한 스님, 즉 무염명승(無染名僧)이라는 귀절은 세상을 초탈한 속세를 버린 탈속한 스님으로 도가 높은 고승을 지칭한 것이나 일각에서는 마곡이 제자인 무염을 염두에 두고 이런 표현을 남겼다는 해석도 있다.
마곡은 누구인가? 단순한 마실거리에 지나지 않았던 차를 선(禪)에다 접목시켜 선의 화두(話頭)로 끌어 들인 8대 조사 마조 도일(馬祖道一)의 제자이다.
마조의 문하에는 걸출한 차의 달인들이 많이 배출됐다. 불전이나 사원의 각종 의식에 차를 올리게 하면서 사원 차례의 바탕이 된 <백장청규(百丈淸規)>를 남긴 백장 회해(百丈懷海.749~814), 또 *차나 한잔 하고 가게*라는 공안(公案)의 주인공인 조주(趙州.778~
897) 등 무염은 당대의 걸출한 선배조사들의 차풍을 고스란히 신라로 가져와 그 뿌리를 내렸던 것이다. 중국의 당나라 서울 낙양(洛陽) 불광사에서 마조의 법손인 여만(如滿)이 무염을 처음보고 "내가 사람을 많이 보았지만 이 신라인과 같은 이는 드물다. 뒷날 중국이 선을 찾는다면 장차 동이(東夷)에게 묻게 될 것"이라고 했다.
성주사 대가람은 임진왜란 때 불탄 후 폐허로 남아있다. 국보로 지정된 낭혜화상탑비를 보호하기 위한 비각과 석탑3기, 돌미륵상은 을씨년스럽다.
입적하기 전 무염 국사는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법문을 남겼다.
"마음이 비록 몸의 주인이지만 몸이 마음의 사표가 되어야 한다. ...저 사람이 마신 물로 내 목마름을 해소할 수 없고 저 사람이 먹은 밥으로 내 굶주림을 구하지 못한다. 어찌 스스로 마시고 먹지 아니 하느냐."
달마(達磨.?~528)로부터 시작된 중국의 선불교는 8대 조사인 마조 도일(馬祖道一.707~786) 9대 조사 마곡 보철(麻谷 寶徹.? ~ ?)에 이어 10대는 신라의 무염국사(無染國師.801~888)로 그 맥이 이어진다. 무염은 중국의 선맥 뿐 아니라 차와 선이 둘이 아니라는 茶禪不二의 차풍도 이어와 이 땅에 뿌리내리게 하였다.
서기 845년 중국에서 선종의 법맥을 받아 귀국한 무염은 지금의 충남 보령 만수산 북쪽 기슭에 신라 구산선문의 하나인 성주산선문을 연다. 지금 성주사터에 남아있는 최치원이 쓴 *낭혜화상비(朗慧和尙碑)*나 동국대학교가 소장하고 있는 김립지(金立之;무염국사와 동시대 신라의 학자)가 쓴 <성주사사적기>에는 차인들이 목마르게 찾고 있는 茶字가 나온다.
차는 향과 더불어 스님에게 올리는 최고의 예물이었다. 무염의 일생이 기록된 낭혜화상탑비에는 차와 향을 뜻하는 *명발*이라는 글자가 나온다.
당시 문성왕은 아직 임금이 되기 전이었던 헌안왕과 동생 김양을 중국에서 갓 귀국한 무염에게 보내 제자의 예를 갖추고 차와 향을 올리도록 했다는 구절이 바로 그것이다.
<성주사사적기>에는 성주사 낙성법회가 성대히 열릴 때 차와 향을 두 손으로 높이 받들어 올렸다는 *다향수(茶香手)*라는 글자가 또렷하다.
강남의 풍치는 승가에 있는데
바위위에서 마시는 죽리차(竹裡茶), 그 청향을 듣는다
탈속한 스님이면 이 운치를 더 깊이 아련마는
차 마시고 향에 젖을수록 옷깃에 차향만 가득하네
중국 고승전에 나오는 무염의 스승인 마곡 보철의 시다.
이 시에 나오는 탈속한 스님, 즉 무염명승(無染名僧)이라는 귀절은 세상을 초탈한 속세를 버린 탈속한 스님으로 도가 높은 고승을 지칭한 것이나 일각에서는 마곡이 제자인 무염을 염두에 두고 이런 표현을 남겼다는 해석도 있다.
마곡은 누구인가? 단순한 마실거리에 지나지 않았던 차를 선(禪)에다 접목시켜 선의 화두(話頭)로 끌어 들인 8대 조사 마조 도일(馬祖道一)의 제자이다.
마조의 문하에는 걸출한 차의 달인들이 많이 배출됐다. 불전이나 사원의 각종 의식에 차를 올리게 하면서 사원 차례의 바탕이 된 <백장청규(百丈淸規)>를 남긴 백장 회해(百丈懷海.749~814), 또 *차나 한잔 하고 가게*라는 공안(公案)의 주인공인 조주(趙州.778~
897) 등 무염은 당대의 걸출한 선배조사들의 차풍을 고스란히 신라로 가져와 그 뿌리를 내렸던 것이다. 중국의 당나라 서울 낙양(洛陽) 불광사에서 마조의 법손인 여만(如滿)이 무염을 처음보고 "내가 사람을 많이 보았지만 이 신라인과 같은 이는 드물다. 뒷날 중국이 선을 찾는다면 장차 동이(東夷)에게 묻게 될 것"이라고 했다.
성주사 대가람은 임진왜란 때 불탄 후 폐허로 남아있다. 국보로 지정된 낭혜화상탑비를 보호하기 위한 비각과 석탑3기, 돌미륵상은 을씨년스럽다.
입적하기 전 무염 국사는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법문을 남겼다.
"마음이 비록 몸의 주인이지만 몸이 마음의 사표가 되어야 한다. ...저 사람이 마신 물로 내 목마름을 해소할 수 없고 저 사람이 먹은 밥으로 내 굶주림을 구하지 못한다. 어찌 스스로 마시고 먹지 아니 하느냐."
출처 : 인천시무형문화재10호범패와작법무
글쓴이 : 모봉형진 원글보기
메모 :
'차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진교 새미골 요(窯) (0) | 2008.02.17 |
---|---|
[스크랩] 남해 보리암(南海 菩堤庵) (0) | 2008.02.17 |
[스크랩] 제다법에 의한 분류 (0) | 2008.02.17 |
[스크랩] 차 수행법 (0) | 2008.02.17 |
[스크랩] 차의 응용 (0) | 2008.02.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