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이야기

[스크랩] 남해 보리암(南海 菩堤庵)

차보살 다림화 2008. 2. 17. 19:22
남해 보리암(南海 菩堤庵)

巖茶라는게 있다. 말 그대로 큰 바위 차다.깎아지른 절벽위에 자라는 이 차나무는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그 잎을 딸 수가 없어 잘 훈련된 원숭이를 시켜 차를 따게 하는데
중국의 무이암차(武夷巖茶)가 그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는 암차가 있는가?...있다. 바로 남해 보리암에 있다.

우리나라에는 없는 것으로 알려진 이 암차가 바로 남해 금산(錦山) 보리암에 있었다.
깎아지른 절벽 바위틈에서 눈 아래 툭 트인 남해바다를 내려다 보고있는 보리암 절벽차.
한두그루가 절벽에 달랑달랑 매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군락을 이루고 있는 반가운 암차.

이 암차나무의 역사는 아무도 모른다. 어떤이는 김수로왕의 왕비인 허황후가 인도에서 김해로 갈 때 이 남해 금산에서 잠시 정박했었다는 설화를 가지고 있다. 이때 가지고 온 차씨를 이곳에 심은 것이라 하기도 하고 신라 때 원효 스님이 보리암을 세울 때부터 있었다는 구전이 아직도 내려 온다는 소리도 있다.
남해 금산이 해발 6백 81m이고 이 차나무가 자생하는 곳이 해발 6백 30m에 위치하고있다. 금산은 가파르기로 유명한 산이다. 정상 부근의 깎아지른 절벽위에 지은 듯한 보리암은 마치 제비집처럼 현기증이 나는 곳이다.

보리암 주지의 말을 들어 보면 "김수로왕의 일곱 왕자를 데리고 온 장유화상도 지리산 칠불암에 가기 전까지 여기서 공부하며 이 차를 마셨다고 하데요. 원효 스님도 이 차를 마셨고 태조 이성계가 이 위에서 기도를 하면서도, 또 사명대사도 여기서 공부하며 이 차로 모두 득도를 했다고 하지요."라 하고 "기록이 없으니 믿을 수 없다고 하면 그만이지만 뭐, 직접 현장에 가서 뿌리를 보면 수백년이 넘은 것임은 초심자라도 쉽게 알 수 있지요."

김수로왕의 왕비 허황옥(許黃玉)이 인도에서 가져온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기 위해 원효대사가 보리암을 창건할 때 세웠다는 삼층석탑이 아래로 보이는 보리암 요사채에서 왼쪽으로 가파르게 내려가면 절벽사이에서 흘러 나오는 물을 막아 만든 샘이 나온다.
그 주위는 울창한 대나무 숲이 에워싸고 있는데대낮이라도 초저녁 어둠이 깔린듯 하다.

서쪽 대나무숲 사이로보리암 가는 길이 있고 동쪽으로 북쪽으로 가로막힌 절벽의 갈라진 틈새에도 차나무는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다.
차나무 뿌리는 굵기가 어른의 팔둑만큼이나 굵다. 절벽의 이 암차를 따기는 쉽지 않으리라. 이 차의 향은 무겁고 그윽한 것이 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 한다.
그곳 스님들 말로는 딸 때의 고생한 것을 생각하면 손이 떨려 주전자에 차잎을 넣을 수 없을 지경이란다.
남해 보리암 암차...그야말로 영산(靈山)인 금산 절벽사이에서 흐르는 석간수에 우려낸,
생각만 해도 목구멍이 화~ 해져 오는 보리암 암차 아닌가.


수류화개(水流花開) 화개골(花開洞)

지리산 자락이 남으로 뻗어내려 그 위용을 자랑하며 무릉도원을 이룬 곳이 바로 화개동천...예로부터 숱한 시인 묵객의 발길을 잡아 끌었고 지금도 어김없이 많은 사람들의 발길을 사로잡는 화개골. 화개에서 쌍계사까지의 10리 길은 화개천을 따라 벚꽃이 피면 그야말로 인산 인해를 이루고 산기슭의 야생차가 새순을 뽑아 올려 차향을 풍기면 화개천을 따라 섬진강까지 흘러드는 그 차향때문에 이번에는 전국의 차인들이 구름처럼 모여드는곳....화개골.

<삼국사기> 흥덕왕 3년(서기 828년)에 보면 ***겨울 12월 사신을 당나라에 들여 보내어 조공하니 당나라의 문종이 인덕전에 불러 만나보고 잔치를 베풀었는데 층하가 있었다.
당나라에 들어갔다가 돌아온 사신 김대렴(金大廉)이 차씨를 가져오니 왕은 지리산에 심게 하였다. 차는 이미 선덕왕(서기 632~646) 때 부터 있었으나 이때에 이르러 성행 되었다.*** <삼국사기>의 기록인 대렴의 차를 지리산에 심었다는 구절을 두고 쌍계사쪽과 화엄사쪽은 서로가 고증을 대며 그 심은 장소가 자기네 쪽이라 주장하고 있다.

쌍계사 경내에 들어서면 국보 47호인 *진감국사(眞鑑國師)의 비석이 차인들에게는 귀중한 보물이다. 신라말 석학 고운(孤雲 최치원.857~ ?)이 교지를 받들어 지은 *진감국사대공탑비*에 "중국의 차를 공양하는 이가 있으면 섶나무로 돌솥에 불 때어 가루를 만들지 않고 차를 달여 말하기를, 나는 이 맛이 어떠한가를 가리지 않고 다만 배만 적실 뿐이라고 하였다. 참된 것을 지키고 속된 것을 싫어함이 다 이러한 등류다" 고 기록되어 있다
격식을 탈피한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스럽게 차생활을 한 진감국사의 차에 관한 이 몇줄의 비문 때문에 차인들에게는 쌍계사가 바로 차의 명소로 아낌을 받고 있다.

<다도학>의 저자 김명배 교수는 차소(茶所:차를 만들어 지정한 곳에 바치는곳)는 경남에서는 화개와 언양 등 2개소, 전라도에는 18개소나 있었는데 다만 화개는 화개부곡(花開部曲)이었으므로 신라시대부터 차소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 조선조 말 다성(茶聖)으로 추앙받고 있는 초의 스님의 <동다송>에도 화개는 전국 최대규모의 차밭으로 나타난다. *지리산 화개동에는 차나무가 40~50리나 잇따라 자라고 있는데 우리나라 차밭의 넓이로는 이보다 지나친 것을 헤아릴 수가 없다*고 쓰고 있다.

우리나라 차나무의 유래에 관해서는 두가지 외래설이 있다.
하나는 <삼국유사>에 가락국 시조 김수로왕비 허황옥이 인도에서 차씨를 가져와 김해 백월산에 심고 죽로차라 했다는 설이고 다른 하나는 신라 때 당나라에 갔던 김대렴이 가져와서 지리산에 심었다는 설이다.

화개의 석한 하상연(河相演)선생(2000년.5월 작고)은 이같은 외래설은 과학적 근거에 의한 정설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1천 9백 50년 전 인도 차종자나 1천 2백년 전 중국의 차종자는
말하자면 수입품종으로 재배된 것으로 볼 수 있을 뿐 우리나라 남부에는 원시 때부터 자생하는 차나무가 있다고 주장했다. 하상연 선생의 주장은
첫째 차나무의 생장 적지는 안개가 자주 끼고 산이 높고 골짜기가 깊은 데다 배수가 잘되며 가뭄을 이겨내는 난석토(欄石土:화강암 마사토)와 역석토(역석토:자갈이 섞인 땅)이다. 이같은 토질은 시생대나 원생대 고생대, 즉 중생대 이전의 부식질 토양으로 지구의 마지막 조산기(造山記)인 신생대, 즉 6천 5백만년 이후의 화산회토와 진흙땅에서는 자연생장이 부적합하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환태평양 화산지대와 히말라야 중동 알프스지대에는 자생할 수 없다.

우리나라는 백두산 분화구 일대와 제주도 울릉도 등 화산지대와 일부 해안선의 수성암 지대를 제외하면 국토의

9할 이상이 중생대 이전 신생대에 이르는 수억년이 넘은 지구상 가장 오래된 화강암 지대이다



둘째 차나무는 결코 열대와 아열대성 식물로는 볼 수 없다. 세계의 차나무 분포도를 보면 북위 45도선에서 남위 30도까지 북반구와 남반구의 폭넓은 온대지방에서 재배가능하다. 따라서 온대성 식물인 차나무는 지구상 식물 성장환경의 변천에 따라 남방으로 옮겨 가면서 중국 북부와 인도 등지는 홍차나 반발효차의 원료로 밖에 쓸 수 없는 거수(巨樹) 대엽종 차나무로 변환된 것으로 추정한다.

차나무는 냉해에 견딜 수 있는 한계선에서 가장 좋은 제품이 생산되며 이것을 원종으로 보고있다. 남방의 화산회토에 온난 다습한 지방에서 자라는 식물은 열매의 부피가 커지고 나무도 거대화 한다. 그러나 색과 향기와 맛이 질적으로 저하되고 토양이 함유하고 있는 희귀원소를 흡수하지 못하므로 우리나라와 같이 토질과 기후가 좋은 조건에서 생산된 농작물에 비해 질적 우수성을 견줄 수 없다. 현재 과일류인 사과 배 포도 감 밤 등 재배품종의 원종은 왜소하고 야생 하고배, 돌배, 산머루, 고염, 산밤 등이며 모든 작물은 인공을 가한 재배품종일수록 부피가 커지는 반면 성분 농도가 묽어지고 조직밀도가 낮아진다. 따라서 식물의 원종으로부터 재배품종에 이르는 과정과 북방에서 남방으로 옮아감에 따라 변하는 생태의 분석에 따라 중국 남부와 인도산 차의 대엽종을 원종이라 할 수 없다.

셋째 차에 대한 문헌이 대개 한문으로 되어 있어 다도나 다례, 차문화를 논하는 이들이 차문화의 발상지가 중국인 것처럼 여겨왔다. 육우의 <다경> 이전의 한자에 차(茶)자가 없는 것으로 보아 중국에 있어서의 차의 보급과 차생활의 일반화는 당(唐) 이후로 생각하고 있다.
이아(爾雅)는 유교경전에 있는 글자 중에서 뜻이 비슷하나 음이 다른 문자를 모아 해설한 자전(字典)으로 여기에 도자(도:씀바귀 도,字)가 있는데 그 해석이 고채(苦菜), 즉 씀바귀 풀이라고 했다. 육우가 <다경>을 지을 때 이 도(씀바귀 도)자를 따서 차(茶)라 했다. 따라서 차문화는 한족(漢族)으로 기원된 것이 아니고 그 실은 한족이 아시아 대륙의 중원을 점거하여 한문화를 형성하기 이전에 우랄 알타이계 어족(語族)인 몽고 퉁구스 터키 예맥 말갈 여진 한족(韓族) 버마 타이 월남 말레이시아 등 남만족, 그리고 인도북부의 산악족 등 한족(漢族)이 말하는 소위 중원을 둘러싸고 있는 4이(四夷), 즉 몽골리안이다.

차, 티, 차이, 테 등 발음은 몽고계어에서 유래했으며 한족어원(漢族語源)인 도(艸+余), 명(茗), 설(艸+設), 천, 가(木+賈)에서 나온 말이 아니다. 현재 세계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티, 차, 테 등 차를 의미하는 낱말은 그 어원이 몽고계인 것이 틀림없으므로 옛날 황해가 바다로 되기 이전 한반도와 중국의 산동반도가 연결되어 있었던 때를 상기할 때 차의 본고장은 지질 및 기후적으로 보아 한반도로 추정하고 있다.

넷째 신라화랑이 차를 마신 유적이나 선도(仙道)의 도맥이 단군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오랫동안 내려오는 차례(茶禮) 등 갖가지 관습과 풍습, 근래 가락 고분에서 출토된 차도구 등 모든 것을 비추어 현재 지리산에서 자생하고있는 차나무가 결코 외래종이 아니라고 하상연 선생은 주장하고 있다.

*화개에서 허가를 받고 처음으로 차를 만든 공장은 그 당시(1950년대 말∼1960년대 초)에 딱 두군데였다고 한다. 하나는 화개 입구에 있는 화개제다 홍소술(홍소술이)씨 공장이고 또 하나는 화개제다에서 4km 떨어진 쌍계사 입구의 조태연씨의 방산다장(方山茶庄-지금은 조태연家 죽로차로 바뀌었음)이었다. 지금이야 손꼽을 수 없을 만큼 많은 제다사가 자리잡고 각자의 노하우로 이름 있는 차를 제각기 만들어 전국에 보급하고 있지만 그 당시에만 해도 차가 너무도 안팔렸었던가 보다. 홍소술이씨는 59년 화개골에 자리를 잡고 처음 홍차를 만들다 녹차까지 만들고 있고 조태연씨 또한 비슷한 시기에 이곳에 자리를 잡고 녹차만을 고집해 왔다. 7, 80년대까지만 해도 차가 잘 팔리지 않아 고전을 면치 못했었는데 그래도 그 끈질긴 고집들이 오늘날 높이 평가받아 그런 대로 전국에서도 알아주는 제다사들이다.





출처 : 인천시무형문화재10호범패와작법무
글쓴이 : 모봉형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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