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일기

법주사 팔상전과 석등

차보살 다림화 2008. 11. 2. 23:02

 아! 만나고 싶었던 '팔상전'

1984년 화순의 쌍봉사 목탑이 불타버렸다는 비보를 들은 후

유일한 예로 남은 목탑이 팔상전이기에...

보통 사찰에 들어서면 대웅보전 앞에 석탑이 있기 마련이다.

탑은 부처님의 몸을 상징하기 때문에 사리 등을 봉안하게 된다.

법주사는 석탑이 없는 대신에 이 팔상전이 오층탑이 되는 것이다.

몇십 년 전에 스쳤던 팔상전을 늘 사진으로 소식으로 접하다가 드디어

석가모니 성도의 팔상의 과정을 참배하게 되었다. 물론 쌍계사, 선암사,

범어사에서도 볼 수 있었고, 다른 큰 사찰이라면 팔상도가 있기 마련이다.

모두 다 한 눈에 팔상도 전체를 조망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신라 553년 의신조사가 창건 이래 임란 때의 소실과 조선 인조 때 중건을 거쳐

1968년 무렵 해체 복원한 것으로 안다.

각 층마다 네 귀의 공포 조각은 꽃 같이 아름답고 목조 특유의 부드러움과

아늑함이 있어 친근하고 포근하다. 석가모니의 8 과정의 깨침을 뜻하여

팔 자는 깨칠 팔 자라 한다. 물론 여덟의 팔로도 통하기도 한다.

 각 층의 모서리에 귀면상을 붙여 모든 악을 물리치고 있다.

 

 

 

 법주사 팔상전은

 석가모니의 성도 과정인 팔상도를 한 눈에 다 볼 수 없게 되어 있다.

우선 팔상전 앞의 배례석에서 예의를 갖추고 육바라밀을 의미하는 여섯 계단을 올라

전각 안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한 눈에 팔상도를 다 볼 수 없다. 특이하게도 밖에서는 5층으로 되어 있으나

안에서는 한 통으로 되어 있다. 마치 금산사 미륵전이 밖에서는 3층인데 안에서는

한 통속인 것과 같다. 그리하여 가운데는 네모난 통기둥이 상륜부까지 이어져 있다.

네모난 가운데 벽의 한 면에 두 폭씩 석가모니의 상이 조성되어 있어, 팔상을 다 보려면

한 바퀴를 돌아야 하고 그리되면 자연히 탑돌이를 하게 된다. 그리고 두 면은 부처님의

법륜상이  앉아 있고 나머지 앞 면은 항마촉지인 상과 뒷면은 열반상이 누워 있다. 

 누워 있는 석가모니 열반상, 사진을 못 찍게 하여 초점이 흐렸다.

해설사의 말에 의하면 석가모니의 가르침의 핵인 진리에 이르는 다리가 되는

4성제와 6바라밀과 8정도가 한꺼번에 형상화된 전각이란 말이 실증되는 탑이 아닐 수 없다.

 

 2008년 7월, 쌍사자 석등의 사자 등에 핀 우담바라꽃 사진이다.

우담바라는 3천 년만에 핀다는 상상의 꽃이며 귀한 꽃이다.

인도에는 우담바라 나무가 있지만 꽃은 없다고 한다. 여래가 나타나거나

전륜성왕이 태어날 때 핀다고 한다. 과학적 사실은 알 수 없으나

사람 눈에 석 사자 등에 신귀한 꽃이 핀 것을 사람이 볼 수 있는 것은

상서로운 일인 것 같다. 

 이 가람에는 석등이 네 기나 있는 것도 또 하나의 특징이다. 한 시기 진리의 불빛이

그만큼이나 타 올랐다는 증좌가 되는 듯. 화사석과 옥개석이 기둥 쌍사자보다 커서

사자가 힘들어 보일 정도로 약간은 불안하지만 조각은 아름답다. 광주박물관 현관에

옮겨다 놓은 쌍사자 석등에 버금 가는 아름다움이 풍긴다. 진리의 불빛을 받들고 있는 쌍사자.

구례화엄사의 적멸보궁에 사사자석탑이 떠올려진다. 화업사의 각황전 뒤에는 긴 괘불함이 있는데

양 끝과 가운데를 이렇게  받들고 있다. 아무튼 사자는 진리의 으뜸을 상징하며 동물의 영웅인 것처럼

부처님을 모신 전각이 모두 대웅보전이다. 큰스님의 법문을 사자후한다고 말하는 것도 그런 맥락이다.

 

 

 

 희견보살이  큰 다기를 이고 공양하는 모습은 사람이 어떠한 어려움에도

지치지 말고 진리의 길을 가야 한다는 가르침과 위안을 주는 것이리라.

 

  희견보살이라 이름한 법주사의 석조 인물상은  보살상과는 거리가 멀다. 하급신상의 도상이라는 점에서 통일신라 때의 唐代의 곤륜노 형상의 영향을 받았음을 나타낸다. 향로를 머리에 인 '捧(봉)향로 공양자상'으로 부를 수 있으며 불법의 가르침을 얻기 위하여 공양을 드리는 모습으로도 해석한다. 일제시대의 사진을 보면, 당시에는 석조인물상의 앞쪽에 본래 미륵불상을 모셨던 전각(산호전, 용화전)이 있었다. 가람배치면에서 미룩불과의 관련성이 상정된다. 따라서 석조인물상은 미륵불을 향해 향을 공양하는 모습의 공양자를 표현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석등과 셕연지의 존재, 석조인물상 뒤에 석등, 석연지를 한 줄로 나란히 배치되 있었다. 이는 미륵불에 대한 일련의 공양 (향공양, 등공양, 정수공양)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불법의 가르침을 구함에 있어 공양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일종의 시각적 상징물이거나 불교적 의식과 관련하여 마련해 놓은  릴종의 구조물이었을 가능성도 배재할 수 없다. 이로써 미륵신앙의 전통을 특징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중창불사가 이루어질 때 이 석조인물상의 위치도 옮겨졌다고 보아야 하며 미룩불전도 없어진 대신에 지금의 청동미륵대불을 조성한 것으로 본다.
 

 고려 때 조성되었다는 철당간의 위용

당간은 마을의 솟대처럼 사찰의 행사 때 깃발을 달아 종파를 알리는 역할을 했다.

가람을 수호하는 피뢰침 역할도 하지 않았을까 싶다. 청주시에 있는 철당간이

국보인 것처럼 법주사의 철당간도 귀한 국보로써 보기 드문 당간이다. 이처럼

국토의 중앙에 위치한 충청도에 두 기의 철당간이 있는 것은 우리나라의

돛대 역할이라도 하는 것일까.  무심천에 떠 있는 배의 돛대 같은 역할을

한다는 청주시의 철당간처럼.

 법주사는 신라 시대에 창건한 의신조사의 뜻대로 속세를 떠나 인도로부터 가지고 온 불법의 진리를 펼

수 있는  터임에 틀림 없었던 것 같다. 천여 년의 세월을 넘기면서 소실되고 중창을 거처 지금의 모습이

되기까지 펼쳤던 불법의 진면목들이 있었다면 어디에서 구현되고 있을까. 속세를 떠나 깊은 산에서

불도를 닦으며 진리의 빛을 밝혔던 법력에 의해서 오늘날 이 세상이 이렇게 발전했을까. 천오백여 년 동안

세상은 변하여 조용하던 절집 문턱 앞까지 밀려들었다. 대형버스가 물밀듯 들어오며 오리숲길 앞에는

저자거리가 법석이다. 그야말로 야단법석이 따로 없구나. 번뇌가 곧 보리이며 중생이 부처이고,

승속이 하나가 된 세상이 된듯하다.  

법주사는 언뜻 보기엔 가람  배치가 어수선한 것 같지만 불교의 법 전체가 형상화된 것 같다.

일주문과 대웅보전까지 남북일직선 상 금강문과 사천왕문, 팔상전과 쌍사자 석등이 배치되고

옆으로 원통보전과 미륵불이 배치되어 있다.

대웅보전에 들어가서 예를 올렸다. 보통 대웅보전의 주불은 항마촉지인 상의 석가모니불인데,

주불을 비로자나불로 모시고 있다. 수인의 지권인도 왼손을 감싸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로 보아

'대적광전'이라고 하지 않은 까닭은 알 수 없지만,  이 사찰의 품은 광대한 것 같다. 화엄사상과 미륵

사상을 두루 다 나타내고 있지 않은가.

법주사는 다 이해하기 힘들지만, 삼라만상의 대응과 조화의 이치를 상징하는 것이고, 그와 같은 이치에

인간이 동참하는 것이야 말로 가장 이상적인 삶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나무모든아름다운생명들!

 청동미륵대불

머리 모양이 미륵보살 때와는 달리 부처로써 세상에 온 모습인 것 같다.

도솔천에서 사유하는 동안은 아직 부처가 아닌

보살이어서 아래의 부처상은 엄밀히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인 듯 하다.

 미륵보살반가사유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