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일기

미륵사지

차보살 다림화 2009. 2. 2. 01:12

 

 
 
 "아.... 미치도록 내 발길을 붙드는 백제탑이여....

그대는 어쩌자고 남의 나라에 짓밟혀 그 젊은 나이로 요절했느뇨..... " 

 

 

                                                                                                                        CHO YOON SU

 

 
  교통이 발달된 2008년 여름, 나는 옛 신라 땅, 경주 근처 후포리 광도사에 가기 위하여 버스를 두 번 갈아타야 했다. 가을에 오라고 하신 스님 말씀을 실행하지 못하고 해를 넘겼다.  아직도 전주에서 경주까지 직행버스도 직행 열차도 없다.
  지금도 부산에 한 번 가기가 그리 쉽지 않다. 신라 땅에서 태어나서 어찌하여 이 백제 땅에 와서 살게 되었는고! 고속 버스가 부산까지 바로 가는 것이 있긴 하지만 기차를 타려면 대전까지 가서 갈아타야 한다. 내가 고등학교 시절 방학 때마다 부산엘 가려면 그렇게 밤을 기차에서 새워야 했다. 근데 그 옛날 백제의 땅 익산에서 경주까지 어떻게 그런 러브스토리가 있을 수 있었는지. 어찌 익산에서 경주까지 서동이 마를 캐어 팔러 갔을꼬. 그런 노래까지 지어서 말이다. 실지로 군사정권 때 이런 사람들이 많이 죽고 감옥살이 하지 않았나?  그 시대이기 망녕이지!
 
善化公主主隱(선화공주주은)
他密只嫁良置古(타밀지가량치고)
薯童房乙(서동방을)
夜矣卯乙抱遣去如(야의묘을포견거여)
선화공주님은
남 몰래 정을 통해 두고
맛동(서동) 도련님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 
<scRIPT type=text/javascript></scRIPT>  
 

 1982년 무렵, 헌다공양을 올리기 위하여 우리 차스님과 차를 배우는 회원들이 가끔 미륵사지와 이웃 왕궁리 오층석탑에
왔었다. 그 때는 한 쪽이 무너져 조각난 탑돌들이 주위에 즐비하게 누운 채 안타깝게 제 짝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부서져
깨어진 부처의 몸들이었다.
우리는 차를 우려 차반에 받쳐 들고 탑을 돌곤 했다. 폐사지  허전한 들판에 한 편이 떨어져 나간 몸을 지탱하며 서 있는
 탑을 올려다보며 부처의 진신을 모신 듯 그저 경건한 마음이 되어 탑돌이를 하고 돌아오는 발걸음이 고요해졌었다.
 사지 주변은 논두럭이 그대로, 시골 농촌 풍경이 그러하듯 길도 진입로도 어수선했었지만, 그것이 더욱 사라져간
미륵사와 백제의 마지막 비원을 그대로 품고 있는 것 같아 처절하게 아름다웠다.
 


 

 

 

  

미륵사지 담 밖에 이렇게 당간을 복원해 놓아 당간지주를 이해할 수 있다.

 

 

 탑으 기단부의 내부 십자형 통로 가운데 심초석이 보인다.

 탑을 지키는 수인상
 

 

 방향과 위치를 새긴 돌의 이름표
 

 탑이 해체되기 전의 무너진 탑돌은 모아져 이렇게 보존하고 있다. 시멘트 부분의 짝을 맞출 때 여기서 찾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연못 뒤의 박스 형의 건물 안에 서탑이 해체되어 있다. 1400여 년의 백제인의 삶과 한의 무게를 더 이상 지탱하지 못하고 후세인들에
의하여 복원되는 고통을 인내해야 한다.  한많은 서탑이 창고 안에 갇힌 이래 난 더 이상 가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가 2008년 봄에 박물관
자원봉사자팀이 익산답사공부에 나섰던 것이다. 창고를 다 둘러보고 늘어 놓은 돌들을 보자 너무나 아득하였다. 저 돌들이 모두 제 자리를
찾을 수 있을까. 각각의 돌은 이름, 층수, 위치, 방향 등을 치밀하게 기록한 표식을 주렁주렁 달고 자리를 찾을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상층부는 모두 해체되었고 1층 옥개석과 기단부분만 남아 있고 네 귀퉁이의 수인상이 울상을 짓고 있는 듯했다.
 
  그런데 2009년 1월 19일  드디어 마지막 기단부의 심초석에서 사리기와 사리봉안기 등 유물이 쏟아졌다는 뉴스가 떠들석했다. 흥미로웠다.
그간 논란이 많았던 서동과 선화공주의 설화를 밝히는 단초가 증명되었다. 심증은 있으나 물증이 없었던 역사가들의 수사 결과에
반증을 주게되었다. 앞으로 전라북도는 가려진 옛 백제의 부흥을 맛볼 수 있는 길이 열리지 않을까 싶다.
 

 옛날부터 있었던 이 연못 가에 앉아 그려본다.  왕과 왕비가 사자사에 가는 도중 이 연못(?) 에서 미륵삼존불이 나타나
예를 올렸다. 그후 이곳에 미륵사 탑을 조성하자는 원을 가지고 639년 탑이 조성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미륵사의 창건 연대는 그보다 앞 서 있을 것으로 추증되고 있다.
 

 창고 안을 나오면서 나는 못내 아쉬운 마음을 금치 못했다. 헌다례를 행하러 다녔을 때의 모습이 그리웠다.
그리도 아름다웠던 폐사지의 풍경은 저런 내용을 담고 끊임없이 땅 속에 갇혀 소리 없는 소리를 뿜어내고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1991년(?) 복원된 미륵사 동탑의 전경
아래의 서탑의 옛모습과 비교하자면, 기계제품과 수제품의 차이라고나 할까?
정이 생기지 않아 한 번도 가까이 간적이 없었지만 오늘 가까이 가 보고 옛날의 영화를 그려 보는 정취에 젖어 본다. 그것은  말할 수 없는 그리움의 궤적이었을까.
 
 
 

 

 서쪽 당간지주와 동탑 앞의 당간지주는 90미터 간격을 두고 여전히 옛날의 위용을 느끼게 한다. 

 

 

                          위의  심초석에서 아래의 사리봉안기와 사리기를 수습하다.

 

 

 

 

 

 

 거의 기록과 흔적이 없었던 백제의 역사. 심증은 있으나 물증이 없었기에 기를 펴지 못했었다. 백제시대의 유적이나 유물이 발굴될 때마다 신문지상은 난리가 났었다. 부여 능산리에서 '백제금동대향로'가 발굴되었을 때, 공주 무령왕릉의 발굴 과정은 나라가 들썩거렸다. 한성백제의 유구가 그랬고, 지난 2007년 부여의 왕흥사지에서 또 하나의 사리기가 발견될 때도 그랬다. 절집에서도 대형 사진을 걸어두기도 했다. 국립전주박물관에 전시된 왕궁리오층석탑의 사리기와 왕흥사지의 것과 이번의 미륵사지의 사리장엄들은 모두 같은 백제의 비원을 담고, 닮은 점이 많은 것 같다. 바야흐로 백제의 르네상스가  살아나오고 있다.
 

 왕후의 비원의 선근으로 대왕폐하의 수명이 산악 같고 치세가 창대하기를 바람이었지만, 석탑이 조성된 2년 후에
무왕의 생은 마감되었고, 백제에는 서서히 어둠의 장막이 내리게 될 줄이야! 하지만 비장의 원력은 1400여 년 지하에서 숨쉬었고 이제 살아나는 것인가.

                                                             노을 빛에 서 있는 왕궁리 오층석탑의 실루엣
 

 이 오층석탑을 홀로 만나러 다닐 때, 나는 옛연인을 만나러 가는 묘한 설레임조차 일었다. 탑을 돌아보고 면석을 어루만져도 보고,
 풀밭에 누워보기도 하며 무한한 아늑함에 안도의 숨을 내쉬기도 하여, 때때로는 거석이 주는 위압감에 숙연해지기도 했다. 왕궁터가 발굴되어 왕궁리란 이름의 물증을 제시하였다. 사방의 성벽을 여실히 드러냈다. 그러나 해체 되기전의 모습이 왜 이렇게 그리운지 모르겠다. 탑이 보이는 입구에 서면 자연 의 흙길이 열려 있고 양 옆으로 100여 년 가까이 된 벚나무가 줄 서 있었으며, 왼쪽은 지금도 여전히 벚나무 숲이다. 흙길 끝에 하늘을 당당히 떠 받치고 서 있는 탑은 슬프도록 아름다웠다.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 요조숙녀 같이 단아하고 우아한 자태.
미륵사 탑은 200여 년의 전성기를 누렸던 목탑의 시대가 끝나고
영원하게 변하지 않을 석탑의 시원인 탑이기에 그 의미가 깊다.
한 번 돌탑을 조성한 백제의 석공은 나무를 주무르듯 이렇게
조각미가 아름다운 정림사지탑과 왕궁리 오층석탑을 만들었다.
"아! 미치도록 내 발길을 붙드는 아름다운 백제탑이여!"
이는 국립중앙박물과 관장을 지내셨던 소재구 박사님의 탄성이다.

찬란한 통일신라의 탑. 구례 화엄사 적멸보궁 자리의 사사자석탑과 공양상인 석등 .  아름다움의 차이가 드러난다. 장중하기 그지 없고 강력한 힘이 느껴지는, 복합적인 문화미를 모두 갖춘 한국 석탑 미의 절정인지도 모르겠다.
 
 


 

 

 

'영상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백제금동대향로  (0) 2009.02.08
봄소식  (0) 2009.02.03
인간의 사계절  (0) 2009.01.03
북두로 은하수를 길어  (0) 2008.12.12
성묘길에서  (0) 2008.1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