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일기

가을, 환상교향곡

차보살 다림화 2010. 10. 24. 16:14

가을, 환상교향곡

                                                                         

 

 

  가슴이 뛰었다.
  타오르는 꽃불에 매료되고 말았다. 예정대로 가던 길을 접고 가슴이 뛰는 대로 달렸다. 웬만한 사진을 보고도 그렇게 가슴이 뛰지는 않았다. 꺼질 듯한 재에서 불꽃이 튀었다고나 할까. 언제 그리도 치열했던 여름이 있었던가 싶게 가을 문 앞에서 좀은 쓸쓸하고 허전하였다. 해내야만 할 일이 아무것도 남지 않은 것 같은. 에스텔이란 여인은 방년 18세의 베를리오즈의 가슴을 뛰게 했다. 순수했던 음악가는 오랫동안의 짝사랑으로 그 뛰던 가슴속이 사랑의 환상으로 가득 찼었다고 한다.

 

 

 

  가을이 오고 있다. 가을은 분명 수확과 결실이 주는 풍요로운 계절이다. 허지만 격렬했던 여름을 겪어낸 뒤의 서늘함은 가을의 길목을 주춤거리게 한다. 결실의 마무리가 끝나면 추위와 더불어 오면 반드시 가야 한다는 사연이 절실한 철이기 때문일까. 흰구름도 아름다운 무늬를 자아내면서 파란 하늘을 유영하다 사라지는 게 아닌가. 그래서 오방색 중에 흰색이 가을의 상징인가 .

 

 

 

 

   맑고 높은 하늘 아래 누런 들녘을 지나자니 잔잔한 감동이 밀려 왔다. 찬란하게 빛나는 영광 고을을 지나고 불갑산 입구부터 나를 당겼던 것 같은 꽃불의 전주곡이 울리고 있었다. 추석이 지났지만 이제야 들녘은 본격적으로 무르익고, 불갑산으로 들어가는 길의 가로수 밑은 꽃불이 번지고 있었다. 높은 둑이 먼저 하늘을 막아섰다. 드넓은 호수가 펼쳐져 있고 호수 공원이 예뻤다. 이곳은 영광군민을 먹이는 저수지며, 불갑수변공원이다. 제방의 모양이 영어의 W자를 흘리게 쓴 듯한 곡선이어서 특이했다. 이곳부터 호수 변을 따라 상류는 불갑산에서 내려오는 불갑천의 물이 내를 이루고 주변 일대는 새로운 공원 사업이 진행 중이다. 가는 발길마다 가을 들꽃과 누런 들판에 새빨간 꽃무릇의 조화가 환상적이었다.

 

 

 

 

 

 

 

 

 

 

 

 불갑사 일주문에서부터 사찰 주변이 온통 꽃불이 활활 타오르는 듯하다. 불결에 데일까 싶어 우선 절 뒤편으로 올라갔다. 불갑산으로 오르는 등산로 입구에도 불갑산을 에워싼 호수가 있다. 등산로 반대편의 숲 속을 산책했다. 색색의 잉어들이 물 속에서 놀고 물가에는 흰 빛과 연분홍 빛의 여귀들이 자주빛 물봉선화 무리와 서로 어깨를 짜고 꽃무릇과 어울려 있었다. 풀벌레들의 사랑까지 합주할 수 있는 고즈넉한 숲 속이었다. 예이츠의 이니스프리가 떠올랐다. "나는 일어나 지금 갈거야, 이니스프리로 갈거야, 조그마한 오두막을 거기에 지을 거야…… 벌 소리 잉잉대는 숲에서 홀로 살 거야 / 나는 일어나 지금 갈 거야, 왜냐면 항상 밤낮으로 호숫물이 나지막이 찰싹이는 소리가 들리니까……."

  그런 숲이 쭉 이어져 있었다.

 

 

 

 

 

 

 

 

 

   성보박물관에 먼저 들려 불갑사의 면모를 살폈다. 보물 급 불교 문화재가 많이 전시되어 참배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고요해졌다. 불갑사는 인도 승 마라난타 존자가 백제에 최초로 불법을 전하고 지었다고 한다. 그래서 불(佛)갑(甲)이다. 여러 차례 중창을 거듭한 후 지금의 전각들은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이다.  대웅전과 목조삼세불좌상이 보물로 지정되었다. 내가 관심이 있는 것은 이 대웅전의 꽃살문이다. 내소사의 꽃살문은 퇴색한 대로 그냥 두어 더욱 진한 그리움의 색조를 나타내지만 이곳의 꽃살문은 몇 년 전에 색을 입혀서 화려하다. 바람이 불면 꽃사태가 날 듯하다. 연꽃과 국화꽃 문양도 있지만 뭇 생명을 보호한다는 금강저 무늬가 특이한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육각의 작은 테두리 안에 절제와 강건함까지 꽃문양으로 조각하였다. 불교에서는 부처님께 올리는 최고의 공양물 중의 하나가 꽃이다. 꽃은 부처의 보신불의 상을 나타내는 권화(權化)의 한 부분일 수도 있다. 또한 중생들의 소원과 환희심을 담은 공양화일 수도 있다.  꽃살문에 손을 대면 꽃이 튀어나올 듯하고 등을 대면 부처의 꽃덤불에 안기는 기분이다. 불갑사 대웅전의 삼존불도 전각의 방향으로 앉아 있지 않다. 측면 문으로 들어가야 정면으로 볼 수 있다. 이곳 불갑사의 정면은 서향이니, 부처님은 남향으로 돌아앉아 있다. 대웅전 용마루 가운데 작은 보탑이 있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대웅전 앞에 주로 있는 석탑이 없고 전각이 사면을 두른 ㅁ 자 모양의 마당에 괘불석주만 댕그르니 놓여 있는 것이 또한 이 절의 특징이다. 해서 현대에 세운 5층탑과 석등이 높은 곳에 따로 세워져 있었다. 고색이 짙은 건물 한 채가 절집의 역사를 대변하는 듯 했다. 스님들의 선방의 이끼 낀 담장 가에도 붉은 꽃무릇들이 줄 서서 키 발을 세우고  있으니……. 못 본 채 돌아서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