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일기

경기전에는 홍매가

차보살 다림화 2011. 3. 13. 05:50

 

 

 

 

그림이 뭉클한 편지를 받고

 

                                                                                                                 조윤수

 

 

  유목 생활 열흘 만에 베이스캠프에 돌아왔다. 베란다의 천리향이 그리운 향기 내뿜는 가운데 춘란의 꽃대도 수북이 올라와 있었다. 그 매섭던 추위를 뚫고 올라온 것이 갸륵하다. 우편물 중에 강원도의 눈사태를 헤치고 온 편지 한 장에도 그림이 담겨 있었다. 그리움을 그리면 그림이고 글이 된다던가.

 

   “책을 읽으면서 성님의 웃는 얼굴이 내내 어른거립디다. 걸릴 것 없이 터트려지는, 꽃순 터지는 소리가 들릴법한 맑고 투명한 그 웃음 말이요. 어여쁘신 언니이! 남은 햇살 받으며 그 많은 생명활동, 그 눈부신 도약에 박수를 보냅니다. / 우선 지가 그럭저럭 연명해온 인생을 소모해왔던 시절을 떠올리게 될 때마다 부끄럽고 면목이 없기도 합디다. 어쨌거나 올곧은 밧줄보다 조금 더 굳센 의지와 신념으로 탐구 탐색해온 오랜 공부 재주에 감동 받았다오. 지난 시간 함께 했던 마음수련들 떠밀어주셨고 이끌어 주셨던 우의를 참으로 감사하옵니다. / 5분만 걸어 올라가면 등대가 보이는 수평선, 망망대해 바다를 보고 만나면 왜 그리 두근거리는지. 날마다 시도 때도 없이 걷고 걸어 바다가 따라오는 기인 산책을 합니다.

  돈이 되는 글을 써보려고 몇몇 번씩 앉아봅니다만, 사실이나 진실을 옮겨 적는, 그러니까 감성을 만드는 아주 강력한 에너지가 고갈이 되었나 싶기도 하고요. / 우리가 어느 날 육체를 벗으면 인연의 시간이 멎어질 텐데요. 양분이 넘치고 일상의 편리가 자유로운 성님께서, 혹은 차보다 발이 더 빠르다고 하셨던 저가 잠시 여행을 나서볼까 하는 그리움이 뭉클 이 새벽의 여명을 눈물 나게 합니다. 고맙습니다. All being very well!”

 

  내 책과 차(茶)를 받은 답장이었다.

 

  서로의 얼굴을 본 지가 몇 년 째. 언제 어디 있어도 늘 만나는 것 같은 사람. 후배지만 스승 같은 친구. 서로를 이끌어주기도 하고 밀어주기도 하던 사람. 아름다운 생명활동을 아는 사람. 다음 세상에 몸 받지 않으려면 수행을 해야 한다고 강원도 양양에서 아득한 겨울 눈 속에 살고 있다는 소식이 더 아득했다. 우리에게 인연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일깨우고 있다.

 

  여행 차비를 하는 일이 점점 힘들어진다. 집안을 정리하고 짐을 챙겨서 오후 세시가 되어서야 겨우 전주역에 도착했다. 2월 23일 4개월 만이었다. 서울에서 볼 일들과 만날 사람들이 떠올려졌다. 딱히 머물 날짜와 시간은 정하지 않았다. 아들딸의 생일을 같아 보낼 일과 손녀의 초등학교 입학식. 3월 중에 끝나는 미술관 전시회가 두 건, 그리고 중앙박물관 기획전시 관람 등이 있었다.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 아련하게 보일 듯한 먼 행로까지 생각해봤다. 이 세상을 하직하고 저 세상으로 가는 여행도 그렇게 계획하고 볼 일 등을 기대하면서 떠날 수 있을까. 그 때는 꾸려야 할 짐이 없어 편하겠다. 마음도 무거우면 육체를 벗기가 힘들 것이려니. 삶은 세상에서 해내야 할 과제를 안고 왔기에 그것을 마무리해야 하는 임무가 있다. 삶의 여행을 잘 하는 일이 그 긴 여행을 하기 위한 짐 꾸리기가 될 것이다. 그 짐을 다 꾸려서 태우다가 재도 남지 않으면 어느 때인가 홀가분하게 떠날 차비가 되지 않을까.

 

 

 

 

 

 

 

 

 

 

 

 서울의 상징 '해치'마당이 지하철 광화문에서 바로 연결됨

 

 

 

 세종 갤러리에서  - 그림에 숨은 비밀 찾기 

중년 부인들이 가장 좋아한다는 구스타브 클림트의 <입맞춤>  절벽 위에서? 위험한 사랑을 예고?

 

 고흐의 <해바라기>

 

 모네의 소녀

 천지창조

 

 

 

 

 

 

  서울에서 볼 일을 다 마치고, 우리자매는 성묘도 할 겸 형부의 고향인 경남 거창으로 출발했다. 조카의 자동차로 갔다가 올라오면서 완주에 나를 내려놓고 가기로 했다. 남부로 내려간 지가 얼마였던지, 고속 국도가 잘 정비되어서 빨랐다. 함양을 거쳐 거창에서 볼 일을 다 보니 3시 반이었다. 전주 근방에 오면 큰언니는 순창고추장민속마을에 꼭 들른다. 친정집 같은 단골 집 주인이 우리를 반기면서 즉석에서 끓인 청국장과 각종 장아찌와 막걸리까지 차려 준다. 구제역으로 여행객이 뜸한데 우리들이 큰 손님이었다. 죽염고추장을 비롯해 필요한 제품들을 잔뜩 구입했다. 덤으로 주는 갓김치와 무김치 등이 아주 특별한 맛이었다.

 

  하루 종일 길 구경이었다. 마침 새로 건설 중인 광양고속도로가 개통되었다. 우리 아파트 입구에 상관 톨케이트가 생겼기 때문에 교통의 요지가 된 셈이다. 마치 천상의 길인 듯 슬치 고개를 넘는데 일곱 개의 터널이 연속으로 나타난다. 순창에서 상관까지 한 시간이면 충분했다. 우리 집에서 쉬었다가 밤 9시에 출발한 일행은 분당의 동생네까지 두 시간 만에 도착할 수 있었단다. 고속도로 톨게이트까지 가기 위해서 시내를 통하지 않아도 되니까 한 시간이 절약되었다. 산도 강도 길도 막힘이 없으니 중간에서 숙박할 필요도 없었다. 삼천대천세계가 있다는 무변 무한대의 하늘에도 영혼의 길이 있을까. 세월의 한계나 속도를 느낄 수가 있기나 할까. 어제 내린 춘설처럼 하늘을 나선형으로 빙글빙글 돌아다닐 수 있게 될까.

 

 

 국립중앙박물관 하늘마당에서 

 

 

 

 

 

  육체를 벗을 때 영혼의 옷이 있다면 고려의 수월관음도처럼 연꽃이 수놓인 투명한 사라를 입고 눈송이처럼 하늘을 유영하면 좋겠다. 그리하여 하늘 수행 끝에 연화로 피고 연실처럼 한 천 년 푹 자다가 연화장 세상에 다시 태어나는 황홀한 연상을 해본다.

 

  봄이 오는 서울의 거리에는 많은 사람들이 종종 걸음으로 꽃샘바람을 가르고 있었다. 물러서지 않으려는 듯 앙탈부리는 겨울바람도 만났고, 봄을 재촉하는 후줄근한 비도 종일 맞고, 춘삼월에 어김없이 내리던 함박눈도 보았다. 찬바람에 초등학생이 된 아이들 얼굴이 매화꽃잎 같았다. 달리기만 하는 것 같은 대도시에도 봄기운은 달려오고 있었다.

 

  할 일이 남은 내 캠프로 돌아왔으니 일상이 바쁘다. 사람은 세상 떠날 때를 알게 된다는데 그 때 쯤이면, 아직 많이 남은 것도 같지만 나이대로 느끼는 시간이라면 하루가 여삼추다. 인연의 시간이 멎어지기 전에 가슴 뭉클 하는 편지를 보내온 님을 만나야 할 일. 태어나는 봄을 맞을 설렘으로 벅차다. 천리향의 희망에 어찌 생의 기쁨이 솟구치지 않으랴!

  세상 여행 하듯 먼 여행도 때가 오면 겨울을 건너듯이 그렇게 건너면 될 것임에 이 봄을 충만하게 맞을 일이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일회성인 인생이라지만 죽음이 결코 끝이 아니고 생명의 순환 고리 중에 큰 마디 하나를 통과하는 일일 터임에. 인생 순례 길의 마지막 통과의례를 위하여 오늘에 몰입할 일이다. (2011/3/13)

 

 

 

 

경기전에 홍매가 피고 있어요. 사고 앞의 백 매화는 작은 봉오리를 맺고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