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향(暗香)
조윤수
황사 속에 맞는 봄이 영 을씨년스럽다. 그래도 오늘 차 마시는 자리에 매화 몇 송이를 옆에 둘 수 있어 아늑하다. 춘삼월 들어서면서 따뜻했던 날씨 덕분에 남녘의 매화소식통은 일찍부터 떠들썩거렸다.
매향은 한 두 그루의 나무가 바라보는 이와 약간의 거리를 두고 바람결에 살풋 스쳐 지날 때 가장 고귀한 것 같다. 만해 한용운의 기념관에서 그랬다. 만해 선생의 '님의 침묵'에 젖어 있던 다음이어서 더욱 애틋하였을까. 만해 사당으로 들어서니 바람결에 날려오는 암향이 달보드레하게 말을 건네는 것 같았다. “……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양쪽 돌담 가에 활짝 피어 있는 청매화의 꽃가지를 감상하시는 선생님이 매화의 운치를 더했다. 일상에서 매화 사치를 할 겨를이 있으셨는지 모르지만 어쩐지 매화와 잘 어울리시는 것 같다. 역시나 매향은 바람결에 실려야 제 맛이다. 그럼에도 기어이 콧등을 들이대 보며, 사진도 찍어보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인가.
섬진강 매화마을의 매화가 아무리 흐드러져도 매화의 아취는 토종 고매(古梅)의 옹이진 가지에서 불쑥 솟은 꽃 몇 송이가 아니던가. 선암사의 고매가 유명하지만, 유난히도 지리산 동남쪽 산청지방에는 고매가 많다. 산청에는 삼고매(三古梅)가 있다. 남명매와 정당매 그리고 남사마을의 원정매다. 그만치 고고했던 선비들과 충절들이 많아서였던가 싶다.
산청매
지리산 천왕봉을 올려다 볼 수 있는 산청매
매화 사랑으로도 유명한 안동의 퇴계 선생과 산청의 남명 선생은 영남학파의 쌍벽을 이루지만 서로 다른 삶을 살았다. 남명은 젊은 날, 문과에 장원급제한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올라가 살았지만, 기묘사화 때 조광조와 함께 작은 아버지 조언경이 처형되고, 아버지도 파직이 되는 참상을 겪었기에 그 무렵의 벼슬살이가 어떤 것이란 것을 처절히 보았으리라. 서로 편지로만 교류하다 1571년 퇴계가 남명보다 한 해 먼저 세상을 떠났단다. 소식을 들은 남명은 “같은 해, 같은 경상도에서 태어나 평생을 사는 동안 한번도 만나지를 못한 것도 운명이로구나." 하고 애통해 마지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퇴계가 ”내 영정에는 처사(處士)라고만 쓰도록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는 말에는 일침을 가했다고 한다. “하고 싶은 벼슬 다 한 사람이 감히 처사라니, 진정한 처사야말로 내다." 라고. 퇴계 선생을 두고 그런 말을 남겼다니 그의 성정이 과연 어떠하였는지 짐작할 만하지 않는가. 그렇지만 선생도 퇴계가 멋모르고 벼슬길에서 헤맨 3, 40대의 15년 세월을 늘 후회하였으며, 묘지명에 '퇴도만은(退陶晩隱)'으로 기억되고 싶다는 심정은 알았으리라. 천왕봉을 올려다보는 듯한 남명매를 바라보자니 선생이 옷고름에 매달고 다녔다는 그 유명한 성성자(性性子)의 쇠방울 소리가 들리는 듯하며, 경의검(敬意劍) 칼날이 연상되어 스스로 옷깃을 여미게 된다.
문화유산 답사로 유명한 유홍준 씨는 지리산 동남쪽 답사라면 단연 '단속사지' 라고 했단다. 말 그대로 속세를 끊는 절. 옛 금당터 앞에 서 있는 동서 한 쌍의 3층 석탑만 남아 통일신라 시절의 융성했던 규모를 증언이나 하듯 그 쓸쓸함이 고적한 아름다움을 자아내고 있다. 주위에 여념집들이 동네를 이루어 절터의 흔적들을 가리도록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어 안타깝다. 당간지주를 지나 골목길로 들어가면 정당매라 불리는 고매 한 그루가 있다. 민망하게도 유명세를 과시하는 표지석이 너무 커서 고매를 힘들게 하는 것 같다. 무엇이 주인인지 알 수가 없을 지경이다. 더 이상 매화에 대한 감회가 어떻다고 나는 말하고 싶지 않다. 이토록 후대의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칭송을 받는 매화를 부러워해야 할지….
남사마을 원정매
산청 야매
선암사 고매
단속사지 앞의 정당매
정당매는 강희안의 조부인 통정공 강회백이 소년시절 글공부를 하며 손수 심어놓은 것이라 한다. 현존하는 한국의 최고(最古)의 매화로 알려진다. 연대는 대략 700년 수령이라는데…. 윗둥이 잘려 그저 나지막한 키에 지팡이 짚고 서 있는 노인의 모습이 연상된다. 한 때 웅장한 나무에 가지들마다 봄이면 어김없이 화사한 모습으로 암향을 날렸으리라. 몽둥이 같은 등걸의 곁가지에서도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다. 홀로 서서 단속사의 흥망의 과정을 지켜봤을 것을 생각하면 수많은 사람들의 입질로 오히려 고고한 순향에 탁기(濁氣)를 덧칠할까봐 몹시 저어되는 심정이다.
관광객들의 칭송과 시선을 받는 고매들은 우리들을 어떤 심정으로 바라보는지 알 수 없다. 기계적인 삶의 구조와 단절된 인간관계 속에 살아야 하는 이 시대의 어떤 거리에서 암향을 지닌 처사들을 또 만나볼 수 있을는지. 요즘같이 쉽게 헤어지고 자기만의 욕구를 채우려는 마음이 급급한 세상에서 매화잠(梅花簪)을 뒷머리에 꽂아 일부종사의 미덕을 나타낸 여인의 아리따운 모습을 어디에서 만날 것이며, 외세의 억압에도 굽히지 않고 불의에 물들지 않으며 오히려 맑은 향을 주위에 전하기 위하여 매화를 심었던 옛 선비다운 분들을 얼마나 만날 수 있을 건가.
다음 봄에 그 고매를 다시 보고 싶은 욕심을 결코 내지 않으리라. 대신 남명선생의 쇠방울과 단검을 내 마음에서 찾아볼 일이다. 영남학파의 두 봉우리도 같은 지방에 살면서도 한 번도 만나지 않았던 운명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 알았다. (2007년 4월)
진해 벚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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