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와 글 모음

봄은 겨울을 내쫓는다

차보살 다림화 2011. 4. 2. 20:13

 

 

 

 

 

 

 

 

세상의 떠들석한 소식과는 전연 상관없이 산속에서 홀로 피고 있는 엘레지처럼...

 

 

 

 

 

 

 

 

 

 

 

 

 

 

 

 

 

꽃봉오리

 

                                                                                                         조윤수

 

 

 

  모든 생명에게는 꽃피는 시절이 있다. 결혼식 때 찍은 하얀 드레스 속의 내 모습이 그렇게 멋지고 이쁠 수가 없다. 다른 사람을 보듯 드려다 본다. 이제 그것을 나라고 볼 수는 없다. 꽃들은 봉오리를 터트릴 때가 생명의 절정일 때이니, 그건 나도 천리향도 마찬가지다. 이제 꽃송이들은 새까맣도록 향을 자아내고 힘겹게 낙화한다. 유리문 사이로 들어오던 향기도 사라진다. 막 피어나는 꽃송이 같은 젊은이들이 어찌 어여쁘지 않으랴. 차를 마실 때조차 햇차의 첫잔을 상큼한 열여섯 처녀의 맛이라 비유하지 않던가.

 

시댁 큰백부님께서는 드디어 노인요양시설로 옮기셨다. 지난해에 우연히 동네에서 만나뵙 게 되어서 그간의 사연을 듣게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살아계시는 동안 듣고 싶었던 이야기도 있던 참이었다. 백모님이 돌아가신 뒤부터 넷째 아들네 집에 함께 계셨다.

“자네, 내가 올해 몇 살인지 아는가? 백 살이여 백 살. 마음 놓고 죽으려고 따로 독립했네.”

지난 6월에 네 차례 문화인류학을 전공하는 대학원생들을 대동하고 찾아뵌 적이 있었다. 우리나라 현대사의 민중사에 길이 남을 이야기 거리를 찾았던 것이다. 그 후로 차일피일 못 뵈었다. 나보다 정정하셔서 지팡이를 집고서 시내버스를 타고 다니셨다. 그런데 수전증이 있고 귀가 어두우셨다. 내가 통역을 하기에도 몹시 힘들었다. 백부님은 지금도 대통령께 건의서를 작성 중이셨고, 붓글씨를 배우러 오라고 하시기도 했다. 그런데 말하고 듣기가 거북하셔서 방문이 꺼려진다. 그러던 참에 시설로 옮기셨다는 소식을 접했다. 혼자 계시는 아파트에서 가끔 연기가 나는 일이 있었으니 위아래 층에서 민원이 들어왔다는 것이다.

 

  배우는 것은 젊은 선생한테 배워야 하고, 유치원생들도 바로 윗 언니들에게서 배워야 한다. 경험 많은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좋은 선생이 될 것 같지만 현대는 결코 그렇지 않다. 아이들도 젊은 언니들을 좋아한다. 나 자신을 생각해본다. 배우고 가르치기를 좋아했던 나도 이제는 스스로 배우고 가르치는 일은 하지 않는다. 나도 나이 들어가니 젊은이들이 좋아하지 않을 터. 일주일에 하루는 자원봉사 날이 있긴 하지만 그것은 순전히 내가 배우기 위해서다. 지난해부터는 노인복지관에 봉사하러 다니는 일을 졸업했다. 기관에서는 원했지만 나보다 더 어른들을 대하는 것은 내 힘도 딸렸던 것이다. 나도 생기를 받을 수 있는 젊은 친구들과 잘 놀지 않는가.

 

  오늘 햇살이 좋아 아파트 주위를 산책했더니, 별꽃 풀꽃이 양지바른 곳에 노닐고 담밖의 매화가지가 흐드러졌다. 향기 없는 꽃은 벌나비들도 찾지 않는다. 춘란화는 만개한 채로 끝까지 흩으러짐이 없다. 향기가 없으면 자태라도 고우면 그 화려함에 이끌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어찌 항상 꽃봉오리랴! 모두가 한 때인 것을!

 

 

  천리향은 이른 봄철의 전령이다. 열매를 맺는 나무는 잎보다 꽃이 먼저 피지만, 천리향은 사철 푸른 잎을 지니고 있다가, 한 자리에 쌀알만한 꽃이 대여섯 송이가 모여서 한 숭어리로 핀다. 향기가 다하면 까맣게 타서 떨어지고 열매는 맺지 않지만 그 자리에서 반드시 꽃잎 수만큼 새 잎을 피운다. 그 잎들 사이 가운데 점이 다음 해의 꽃자리가 된다.

 

  결국 백부님은 당신 뜻대로 혼자 끝까지 사실 수 없었다. 누군가의 보살핌이 있어야 했다. 손수 쓰신 주자가훈을 내게 주셨고 붓글씨로 쓴 작품도 주셨다. 특히 집안의 중조되시는 이목(李穆) 어른의 다부(茶賦)를 손수 쓰신 것도 남기셨다. 다부는 초의선사 다신전보다 300년 앞선 우리나라 최초의 차의 경전이니 의미가 있는 일이다.

 

 

  조선의 백수 선비들은 비난 받은 일이 가끔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사이비 선비들이었을 것이다. 올곧은 선비들은 생계는 여자들에게 맡기고 오로지 독서하고 글 쓰고 공부하였다. 아침부터 밤까지 부지런히 공부를 해야 했다. 대 문장가일수록 정규직에서 밀려나서 자유롭게 공부하는 것으로 자부했던 선비들이 많았다. 줄기차게 공부하면서 문장으로 어떤 역할을 했다. 최소한 자기 인생의 해석을 남에게 맡기지 않아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무언가의 노예가 되기 마련이었다. 이제 나도 쓸모없는 나이가 되어 가는 것인가. 볼일은 많지만, 남에게 맡길 수 없는 내 일이 있지 않은가. 아무것도 생산하는 일없이 세월을 낚는 일이 아니어야 할 터. 습관의 노예가 되지 않으려면 끝까지 정진해야 하리라.

 

  나는 그런 문장가는 되지 못할지언정 내 인생의 해석이라도 내가 책임지도록 해야 할 것 같다. 남은 소원이 있다면 죽는 전날까지 내 수발을 내가 손수 할 수 있으면 좋겠다. 누구라도 간절히 기도하면 이루어진다고 했으니 믿음으로 살 일이다. 죽도록 마음을 닦고 공부하여 내 인생은 내가 해석하고 책임지는 생활이기를 바란다.

 

  천리향의 새 잎자리에는 지난 봉오리시절과 미래에 올 꽃자리가 함께 있지 않은가. 언제라도 지금 이 자리가 좋다. 바야흐로 사방에서 꽃잔치가 벌어질 테니 우선 꽃피는 4월의 잔치에 귀한 손님이 될 일이다. (2011/4/1)

 

 

 

 

 

 

 

 

 

 

 

 

 

 

 

구노의 봄 /호세 카를라스


Gounod - Au printemps, song for voice and piano
 
Le printemps chasse les hivers
봄은 겨울을 내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