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일기

가화

차보살 다림화 2011. 9. 26. 16:27

가화(佳禾)

                                                                                  조윤수

 

 

  태풍 뒤의 폭우로 인하여 정읍시가 물바다가 된 듯하다. 영상 전면이 물에 잠긴 논이다. 다 자라가는 쌀나무들이 물에 휩쓸린 논 위로 떠오르는 한 사람이 있다. 남원에 사는 통일댁이라고 불리는 여인이다.

 

   ‘벼꽃 같은 두 분 어머니’

  96세이신 친정어머니와 90세 되신 시어머님을 손수 돌봐야 하는 그녀의 입장에 대한 글을 읽었다. ‘행복을 창조하는 법’을 주제로 한 민용태 교수의 강의를 듣던 날, 나란히 앉아서 두 분 어머니를 어떻게 꽃으로 보아야 할까를 이야기 한 적이 있었다. 언젠가 그녀는 친정어머니께 이런 말도 한 적이 있었다고 했다. 스스럼없이 “엄마! 엄마는 왜 안 죽어˜어?” 하고 말이다. 어머니의 심정이 어떠하였을지 짐작할 수 있으리라. 그리고 그녀가 어머니를 돌보면서 느끼는 각가지 상념들도 함께 가늠할 수 있다.

  그녀는 자신이 행복해지기 위해서 두 분을 무슨 꽃으로 보아야 할까를 생각한 것 같다. 벼꽃은 꽃 같지도 않고 일반인은 언제 피는지도 모르지만 가장 소중한, 없어서는 안 될 존재다. 벼꽃 같은 두 분 어머니, 그녀다운 창조다.

 

 

  6,70년대, 서울 시청 앞 광장 근처의 골목에 가화(佳禾)다방이 있었다. 가화다방에는 많은 예술인들이 드나들었는데 나도 퇴근길에 자주 들렸다. 음악도 좋고 분위기도 아주 좋았다. 그때 아름다운 벼꽃이란 글자를 알게 되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벼꽃이지만 예쁜 다방이름이라고만 생각했다. 벼꽃은커녕 벼에 대하여는 피난 때 아버지 고향에 가서 참새를 쫓으러 논에 간 적이 딱 두어 번 있었던 기억만 있을 뿐이다. 그렇게 먹을 것이 없어 힘들었다는 시기에도 우리 자매들은 그 쌀의 소중함을 몰랐으니, 통일댁과 어머니들을 생각하면 참 철없었다. 쌀값이 우리 생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도 모른 채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다. 그건 저마다 궁구해야 하는 삶의 포인트가 다를 뿐이지 어떤 비교도 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나보다 몇 년이나 더 젊은데도 내가 몰랐던 내 할머니의 삶을 상상하게 해준다. 통일벼라는 상표의 쌀이 나오던 때에 시집오게 되어서 통일댁이라 불린단다. 그녀가 시집온 70년대 초에 나도 혼인을 해서 전주로 오게 되었다. 드넓은 곳이라곤 바다만 자주 보았던 나에게 그 너른 김제 들녘은 감격에 겨운 놀라움이었다. 여름엔 초록빛 바다 평야, 가을엔 황금빛 물결이었다. 금빛 물결이 출렁대는 김제 만경 들판은 흰 거품을 품어내는 부산 앞바다의 파도를 떠올리게 했다. 지금도 지평선까지 퍼지는 평야 바다를 바라볼 때마다 수평선도 함께 그린다.

지금 한창 벼꽃이 필 때이고 벼꽃이 수정되어야 쌀알이 영근다는데 흙탕물에 휩쓸린 벼이삭들은 수정을 못해서 낭패라는 농심이다. 사실 나는 벼꽃이 어떻게 수정되는지도 몰랐다. 요즈음은 벌이 많이 없어져서 배과수원 아저씨는 직접 인공수정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한 적은 있었지만, 벼꽃이 벌이나 다른 곤충들에 의해서 수정된다면 실낱같은 벼꽃은 문드러지고 말 것이 아닌가. 언제 먹어도 질리지 않아야 할 밥이기에 달콤한 꿀보다도 격이 다른 단맛을 지닌 벼꽃이어야 한다. 제꽃가루받이를 하는 순결한 꽃이다. 아무리 가까이 보아도 암술과 수술이 보이지 않는다. 마치 다른 꽃가루나 쌀가루가 벼이삭에서 묻어나오는 듯 보인다. 그래서 배부른 꽃이 아니었을까. 보고만 있어도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밥맛이 입안에 도는 듯한.

 

 

  김제 만경 들판을 알게 된 연후에야 어찌하여 가화(佳花)라고 했는지를 알게 되었다. 왜 벼꽃을 아름다운 꽃이라고 불리고 다방 이름을 가화라고 했는지를. 그곳엔 가화 같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많이 다녔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뒤에 했다. 가화다방은 내가 전주로 시집온 뒤 서울에 다니러 갔을 때까지는 그곳에 있었지만 이내 높은 빌딩의 거리가 되었다. 아름다움의 척도도 많이 변했던 것이다.

아이들을 키울 때 정말 통일벼가 나왔다가 사라지고 지금은 유기농 기능 쌀이 유행하는 시대. 통일댁은 쌀값이 터무니없게 떨어지고 농부들조차 쌀을 귀히 여기지 않게 되어 걱정이다. 농사지을 사람이 없어 생명을 지탱하는 먹을거리의 첫째인 쌀을 천대하다가 우리는 혹독한 시련을 겪게 될 것이라고 염려한다. 지금은 먹을 것이 너무 많아져서 희귀한 병도 생기는 것을 보면 옛날의 고생이 헛된 것 같아 얼마나 허탈할 것인가. 여자들은 만나면 살이 쪄서 걱정이란 푸념이나 하고 건강을 위한 다이어트 상품까지 난무한 시대를 살고 있으니 선인들이 어찌 혀끝을 가만 둘 수 있겠는가.

 

  벼꽃이 보고 싶다. 두 분 어머니를 벼꽃으로 보게 된 그녀도 벼꽃이다. 농부의 아낙으로, 직접 농부로 살아온 그녀의 눈물어린 정성을 먹고 자란 벼꽃이 아닌가. 쌀나무가 흘리는 땀방울과 눈물이 방울방울 영글어 쌀알이 되는 눈물꽃. 노구를 이끌고 지금도 논바닥의 벼꽃이 되고 싶은 어머님들. 원 없이 어머니를 오래 모시고 볼 수 있고, 여전히 생명의 뿌리인 대지에 탄탄히 서서 땅심과 밥심으로 행복을 창조하는 그녀가 아름답다. 삶의 배경도 다르고 맡은 바 역할은 다르지만 같은 생의 길에서 우리의 밥을 대신 하는 것 같다. 참 고맙다 그녀가. 눈물꽃 같은 가화(佳禾)를 보러가야겠다.

(20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