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일기

설야 (새해 선물)

차보살 다림화 2013. 1. 3. 02:18

 

 

 

 

 

 

 

 

 

 

 

 

 

 

 

 

 

설야(雪夜)

 

 

 

                                                                              조윤수

 

 

 

  한밤중에 산중의 뜰을 거닐듯이 눈비에 취해서 걸었다. 아파트 주위를 돌아 큰 길까지 두어 바퀴 돌아다녔다. 개미 한 마리도 없고 가로등만 시름을 달래는 듯 깜박거리고 있었다. 누가 봤다면 몽유병 환자 같았을까? 몽환적 그리움에 설레며 가쁘게, 사뿐히 새 신부처럼 걸었다. 정적이 온 세상에 깔려 있고 대로에 혼자 하얀 길을 자박자박 걷는 맛이 말할 수 없는 감회에 젖게 했다. 내 마음의 공간에도 눈비가 차곡차곡 쌓이는 것 같았다. 시를 아는 사람이라면 이런 밤 저절로 김광균의 <설야>를 떠올릴 것이다.

  ...... 하이얀 입김 절로 가슴에 메여 / 마음 허공에 / 등불을 키고 / 내 홀로 밤 깊어 뜰에 내 리면 / 먼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 / 희미한 눈발 / 이는 어느 잊혀진 추억의 조각이기 에/ 싸늘한 회한, 이리 가쁘게 설레이느뇨 …….

 

  초저녁에 집에 돌아와서 따뜻한 매트에 등을 누이고 있었다. 자동차 속에 시장바구니를 놓고 온 것이 생각났다. 방한복을 입고 현관 밖을 나갔더니 몇 시간 만에 설국이 건설된 것이 아닌가. 길바닥의 검은 틈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란히 줄 선 자동차들도 백설 도포로 뒤집어쓰고 고요히 잠들었고, 나무들은 가지마다 눈꽃을 피우고 아름다운 꿈을 꾸는 듯 보였다.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갈 것을 잊고 나는 무작정 아파트 주위를 걸었다. 새벽까지 잠 못 이루고 불이 켜진 창이 더러 있었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사람처럼 자꾸만 걸었다. 뽀드득 뽀드득 발자국 소리가 이야기 소리 같았다. 모든 상처를 다 덮어버린 새하얀 세상을 누리고 싶었다. 하룻밤에 만리장성을 쌓듯이.

  눈 오는 밤 지기를 찾아 밤새워 친구 집에 당도했는데 그 집 앞에서 돌아서고 말았다는 옛날 사람이 생각났다. 약속도 없이 찾아가는 동안 친구와 나눌 대화가 끝나버렸던 것일까. 새삼 집 앞에 당도하고 보니 가는 동안 일었던 감흥이 사라졌던 것이 아닐까.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도 눈경치를 즐기러 밤새 산길을 ‘미친 듯 거니느라 잠을 잊었다(狂走或忘眠)’고 하였단다. 지금 사람이라고 옛사람 같은 설야의 정서를 못 가지겠는가. 집으로 들어오는 길목의 눈바람이 세찼다. 친구 집 앞에 당도했으면서도 뒤돌아선 옛사람 같은 심사로 집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뜨거운 차를 우리면서 그 감흥의 뒷맛을 음미한다. 설국 같은 평화의 세상을 기원하며. 한 잔 두 잔 마시다 보니 옛사람의 흥이 절로 일어난다. 이런 밤 눈 녹인 물로 차를 달이며 하얀 밤의 만흥을 노래했던 옛 다인(茶人). 때마침 지인이 보내준 한시(漢詩)에 그 구절이 눈에 띈다.

 

 

  一夜寒威特地多 간밤 내내 추위가 유난하더니

  晩來風力拳漁저녁 찬바람 어부의 도롱이 젖힌다.

  强將雪水添茶鼎 눈을 녹인 물로 차를 달이노라니

  奈此千山暮景何 천산의 저녁 눈경치를 어이할거나

 

 

  창밖에는 눈비가 하염없이 내리고 / 방안에는 붉디붉은 게발선인장은 꽃잎 터트리네.

  먼 곳 여인의 옷 벗는 소리가 아니라 내 방의 선인장 꽃잎 벗는 소리였다. 하얀 밤에 붉은 꽃잎을 벌리며 귓가에 속삭인다. 창밖에 눈비가 내리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메마른 사막 속을 서툰 옆걸음으로 더디 걸어오다가 드디어 눈 오는 밤을 맞이한다. 찬 겨울이어서 더욱 정열적인 불꽃. 언제 얼마큼 여는지 그 봉오리의 숨소리가 눈비 내리는 소리 같을까 알 수가 없다.

   겨울 초입에 세 번이나 큰 눈이 내렸으니 납전삼백(臘前三白)이라고 상서로운 기운의 상징이라고 한다. 눈 속에 길도 덮이고 모든 것이 한데 묻혀 가깝게 보인다. 흉터도 보이지 않는 하얀 세상에 볼을 스치는 눈바람은 알싸하지만 마음은 따뜻해지는 것 같다. 눈에 감싸인 세상은 포근하게 보이지 않는가. 따끈한 차를 나눌 수 있는 마음으로 서로의 체온을 나눌 수만 있어도 평화로운 세상이 유지될 수 있을 텐데. 한 해를 보내면서 남아 있는 앙금 같은 것이 있다면 눈 속에 다 녹여버리고 새로 출발할 수 있기를 바란다. 설야는 분명 새해의 선물이리라.

  ‘채찍 휘둘러 말 빨리 몰지 말라. 둑길의 앞 수레가 미끄러져 비틀거린다.’ 이렇듯 자동차가 없던 옛날에도 말이나 수레 길은 눈 온 날은 위험했나보다. 날이 새면 교통 걱정이 되겠지만 온정이 샘솟는 세상을 마음에 먼저 담을 일이다. 상서로운 기운을 받아 새해에는 희망을 채워가는 날들이 이어지기를 바란다.

  相識滿天下(상식만천하) 서로 알고 지내는 자가 천하에 가득하다 해도

  知心能幾人(지심능기인) 마음까지 알아주는 자가 그 몇이나 되겠는가?

(2013년 새 해를 맞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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