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이야기

추사와 다선(茶禪) 향훈(向薰)

차보살 다림화 2013. 2. 13. 23:16

 

추사와 다선(茶禪) 향훈(向薰)

 

추사가 초의 외에도 만휴(卍休) 자흔(自欣, 1804-1875), 취현(醉玄) 향훈(向薰), 그리고 쌍계사의 관화(寬華)와 만허(晩虛) 스님 등에게서 차를 구해 마셨던 일은 앞서도 살펴보았다. 이 중 취현 향훈은 초의의 제자 항렬 스님이다. 완호(玩虎) 윤우(倫佑, 1758-1826)와 환봉(喚峰) 경민(景旻)의 법맥을 이었다. 그의 이름은 추사가 초의에게 보낸 걸명서(乞茗書)에 몇 차례 등장한다. 하지만 생애는 물론 생몰연대조차 분명히 알 수가 없다. 최근 필자는 향훈 스님과 관련된 자료 몇 가지를 새로 접하게 되어, 앞으로 2회에 걸쳐 이 자료를 소개하기로 한다. 조선 후기 차문화사에서 향훈의 위치도 새롭게 자리매김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추사의 편지와 향훈의 차

 

먼저 『완당전집』 권 5에 실린 「초의에게 주다[與草衣]」제 29를 읽어 본다.

병중에 연거푸 스님의 편지를 보니, 한결 같이 혜명(慧命)을 이어주는 신부(神符)라 하겠소. 정수리를 적셔주는 감로(甘露)라 한들 어찌 이보다 더하겠소. 보내주신 차는 병든 위장을 시원스레 낫게 해주니 고마운 마음이 뼈에 사무치오. 하물며 이렇듯 침돈(沈頓)한 중임에랴! 자흔과 향훈 스님도 각각 먼데까지 보내주니, 그 뜻이 진실로 두텁구려. 날 대신해서 고맙다는 뜻을 전해 주시구려. 향훈 스님이 따로 박생에게 준 잎차는 소동파의 추차(麤茶)의 싹에 못지않게 향기와 맛이 아주 훌륭합디다. 다시금 날 위해 한 포를 청해주는 것이 어떻겠소? 마땅히 앓는 중에라도 따로 졸서로 작환(雀環)의 보답을 할 터이니, 향훈 스님에게 이러한 뜻을 알려 즉시 도모해 주시구려.

 

病枕連見禪椷, 是一續慧命之神符. 灌頂甘露, 何以多乎? 茶惠夬醒病胃, 感切入髓. 況際此沈頓之中耶? 自欣向熏之各有遠貽, 其意良厚. 爲我代致款謝也. 熏衲之另贈朴生之葉茶, 恐不下於坡公麤茶芽. 香味絶佳, 幸更爲我, 再乞一包如何. 當於病間, 另以拙書爲雀環之報. 並及此意於熏衲, 而卽圖之.

 

병중에 초의와 자흔, 향훈이 각각 보낸 차를 한꺼번에 받고서 기쁨을 못 이겨 쓴 편지다. 편지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면 수신자는 비록 초의지만, 용건은 향훈과 관련된 것이 대부분이다. 특히 향훈이 박생을 위해 따로 준비한 잎차[葉茶]를 맛 보고는 소동파의 추차(麤茶)보다 향미(香味)가 훨씬 뛰어나다고 칭찬했다. 이번에 보내준 것 말고 잎차 한 봉을 따로 더 보내주도록 부탁해달라고 당부하기까지 했다. 덮어 놓고 공짜로 달라는 것이 아니라 향훈에게 자신이 글씨로 보답할 테니, 즉시 부탁한다고 적었다.

 

이로 보아 향훈은 차 만드는 데 있어 초의만큼이나 공력이 높았었던 승려였음을 알 수 있다. 그는 통상적으로 만들던 떡차 외에 잎차도 잘 만들었다. 남에게 가는 것을 슬쩍 맛본 추사가 대번에 한 봉만 따로 구해서 보내달라고 간청을 넣을 정도였다.

 

소동파의 추차(麤茶) 운운한 대목은 전거를 분명히 알 수가 없다. 그가 황주(黃州)로 귀양가 있을 때 생활이 몹시 곤궁했다. 이를 딱하게 여긴 그곳의 마정경(馬正卿)이란 이가 관부에 요청해서 한 구역의 황량한 땅을 얻어 주었다. 동파(東坡)라고 부른 이 언덕빼기 땅에다가 소동파는 엉뚱하게 차나무를 심었다. 소동파의 추차, 즉 거친 차는 바로 이 황량한 땅에서 소출한 차를 말한 것인 듯하나 분명치가 않다.

 

위 편지를 보내고 나서도 향훈의 차는 도착하지 않았다. 추사는 답답해져서 다시 초의에게 편지를 썼다.

육차(六茶)가 이 갈급한 폐를 적셔 줄 수 있으나, 너무 적구려. 또 향훈 스님과 더불어 진작에 차를 주기로 한 약속을 정녕하게 하였는데, 일창일기(一槍一旗)를 보내주지 않으니 안타깝소. 모름지기 이러한 뜻을 전달하여 그 차 바구니를 뒤져서라도 봄 안으로 보내주면 좋겠소. 인편이 바빠 글쓰기가 어려워 예를 갖추지 못하오. (중략) 새 책력을 부쳐 보내오. 다만 대숲 속의 일월을 보내시구려. 호의(縞衣)는 별고 없는지요. 자흔과 향훈 또한 잘 지내고 있겠지요. 각각 책력을 넣었으니, 또한 나눠 전해 주시구려.

 

六茶可以霑此渴肺, 但太略. 又與熏衲曾有茶約丁寧, 不以一槍一旗相及, 可歎. 須轉致此意, 搜其茶篋, 以送於春禠, 爲好爲好. 艱草便忙, 不式.......新蓂玆奉寄, 第作竹中日月也. 縞衣無恙. 自欣向薰亦安好. 却有蓂及, 分傳.

 

초의가 보낸 육차(六茶)를 받고는 대뜸 양이 너무 적다고 투덜댔다. 또 향훈이 일창일기로 만든 잎차를 보내 주겠다 해놓고, 종내 보내지 않으니, 그의 차 바구니를 직접 뒤져서라도 여름 전에 차를 보내달라고 했다. 이들을 위해 따로 새 책력을 챙겨 넣어주는 배려도 잊지 않았다.

 

여기서 말한 육차(六茶)는 원래 육안과편(六安瓜片)이라고도 불리는 편차(片茶)를 가리킨다. 중국 안휘성 육안현(六安縣)에서 생산되므로 이런 이름을 얻었다. 향이 짙은 청색 녹차 종류로, 심목(心目)을 맑게 하고 칠규(七竅)를 통하게 하며, 정신을 상쾌하게 하는 작용이 있다고 한다. 이 차에 대해서는 당나라 때 이덕유(李德裕)의 고사가 따로 전한다. 그는 한 주전자의 육안차를 끓여, 찻물에 고기 덩어리를 함께 담아 두었다. 밀폐한 후 이튿날 열어 보았더니 고기 덩어리는 이미 물로 변해 있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육안차가 고기 먹고 체한데에 특효가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기도 했다. 추사가 초의차를 육차로 부른 것은 그 품질이 최고급임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혹 녹차임을 주목한 것으로 볼 수도 있겠다.

 

햇차는 몇 근이나 따시었소. 남겨두었다가 장차 내게 주시겠소? 자흔(自欣)과 향훈(向熏) 등 여러 스님의 처소에서도 일일이 뒤져내어 빠른 인편에 함께 보내주시오. 혹 한 스님 것만 보내주어도 괜찮겠소. 김세신도 편안하겠지요? 궁금합니다. 계절 부채를 부쳐 보내오. 나누어 가지시구려.

新茗摘來幾斤. 留取將與我來耶. 欣熏諸衲處, 一一討出, 並寄速便. 或專送一衲, 未爲不可耳. 金世臣亦安, 念念. 節箑寄去, 分之留之.

 

여전히 자흔과 향훈의 차까지 내놓으라는 으름장이다. 두 사람의 것이 안 된다면 둘 중 어느 한 사람 것만이라도 구해달라고 슬쩍 한발 물러섰다. 단오 부채 여러 자루를 써서 보내 이들에게 선물로 주기도 했다. 추사는 끊임없이 글씨 선물을 보내면서 차에 대한 요구를 계속했다. 반복해서 자흔과 향훈의 차를 함께 보내 달라고 한 것을 보면, 당시 대둔사의 승려들이 각자 저마다 차 항아리를 가지고서 따로 차를 만들었고, 각자의 소용 외에 경향의 지인들에게 선물하였던 사정을 짐작할 수 있다. 자흔과 향훈의 차 만드는 솜씨는 수준이 꽤 높았던 듯하다.

또 「초의에게 주다[與草衣]」 제 36의 끝 부분을 보자.

 

대략 졸서(拙書)가 있길래 부쳐 보내니 거두어 주시구려. 우전차의 잎은 몇 근이나 따시었소? 언제나 이어 보내주어 이 차에 대한 욕심을 진정시켜 주시려는가? 날마다 간절히 바라고 바란다오. 이만 줄이오. 향훈에게도 한 장을 허락하니 전해주시면 고맙겠소.

 

略有拙書寄副, 收入也. 雨前葉, 揀取幾斤耶? 何時續寄, 鎭此茶饞也. 日以企懸. 不宣. 向熏許一紙, 幸轉付.”

초의에게 차를 받고 감사를 표하면서, 답례로 써준 여러 장 글씨 중에 향훈에게도 한 장을 나눠 주라고 말한 내용이다. 차를 받자마자 우전차를 계속 만들어 보내달라는 얌체같은 당부도 서슴지 않았다.

 

「초의에게 주다[與草衣]」 제 37의 끝에는 “병든 천한 몸은 그 사이에 설사병을 앓아 진기를 다 빼앗기고 말았소. 세상 길의 괴로움이 이러하단 말이오! 다행이 차의 힘을 빌어 목숨을 연장할 수 있었소. 이는 한결같이 사방에 없는 무량한 복덕이라 하겠소. 가을 뒤에 계속 부치는 것은 싫증 없는 바람이오. 향훈이 만든 차 또한 인편에 따라 보내주면 좋겠소. 마침 가는 인편이 있길래 대략 적을뿐 자세히 적지는 못하오. 이만 줄이오.(賤痒間經糗寫, 眞元

 

敓下, 世趣之苦, 乃如是耶. 幸因茗力, 得延煖觸. 是一四方空之無量福德. 秋後繼寄, 是無厭之望. 熏製亦使隨及爲可. 適因轉禠, 略及不能悵皇, 姑不宣.)라고 한 같은 내용이 있다.

 

이렇듯 향훈의 이름은 초의에게 보낸 추사의 편지 속에 무려 다섯 차례나 등장한다. 지난 호, 가야사 탑에서 나온 용단승설차를 설명하면서 새롭게 소개한 추사의 편지 속에도 “게다가 너무도 기쁜 것은 차일 뿐이외다. 다만 산중 초목의 세월이 티끌 세상의 몰골보다는 나은 듯 하니, 향훈(向熏) 스님을 데리고 한번 오실 수는 없겠소? (且其喜甚者茶耳. 第山中艸木之年, 似勝於塵土形骸, 未可以携得熏衲飛錫一來耶.)”라고 한 것까지 치면 무려 6번이나 보인다. 추사는 초의차와 함께 번번이 향훈의 차를 얻어 마셨고, 답례로 자신의 글씨를 보내주곤 했다.

 

향훈에게 준 추사의 게송

 

추사는 향훈에게 계속 차를 요구하기가 미안했던 지, 그를 위해 게송(偈頌)을 지어 주었다. 문집 권 7, 잡저(雜著)에 실려 있다. 제목은 「견향게를 향훈 스님에게 주다[見香偈贈香薰衲]」이다.

 

茫茫大地 망망한 대지에

腥濁逆鼻 비리고 탁한 내음 코 찌른다.

眼中妙香 눈 속의 묘한 향기

誰發其祕 그 신비를 뉘 발할까?

木犀無隱 목서(木犀)는 숨김 없고

天花如意 천화(天花)는 내 맘 같네.

光音互用 빛과 소리 서로 쓰니

文殊不二 문수(文殊)의 불이(不二)일세.

 

법명 향훈(向薰)을 추사는 즐겨 향훈(香薰)으로 바꿔 부르곤 했다. 그리고는 두 글자 모두 향기란 뜻인지라, 법호를 견향(見香)이라 하고, 게송을 지어준 것이다. 견향(見香)은 ‘향기를 본다’는 의미다. 불가에서 흔히 ‘관음(觀

音)’이니, ‘문향(聞香)’이니 하는 공감각적 표현과 맥을 같이 한다. 향을 본다는 말은 부처님의 향기를 깨달아 증득(證得)한다는 뜻이다.

 

모두 4언 8구로 된 게송에서 추사는 향훈에게 이렇게 축복했다. 망망한 대지 위에 풍기는 것은 온통 피비린내 아니면 탁하고 역한 악취 뿐이다. 그렇다면 부처님 눈 속의 오묘하고도 신비로운 향기를 그 누가 맡을 수 있을까? 바로 그대뿐이다.

 

이렇게 덕담을 건넨 뒤, 추사는 5구에서 ‘목서무은(木犀無隱)’의 고사를 들고 나왔다. 전거가 있다. 『나호야록(羅湖野錄)』에 나온다. 송나라 때 황산곡이 황룡산에 살면서 회당(晦堂) 스님과 가깝게 지냈다. 한번은 회당 스님이 뜬금없이 황산곡에게 물었다. “공자께서 제자들에게 ‘내가 감추겠는가? 나는 감춘 것이 없다’고 하시었지요. 청컨대 공께서 무슨 말씀인지 풀이하여 주시겠습니까?” 황산곡이 설명했지만 회당은 수긍하지 않았다. 황산곡은 화가 나서 아무 말도 못한 채 침묵하고 있었다. 때는 마침 가을이어서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회당이 말했다. “저 목서(木犀), 즉 계수나무 꽃 향기를 맡았습니까?” “맡았습니다.” 황산곡의 무심한 대답이 끝나자 마자 회당 스님이 대뜸 무찔러 왔다. “나는 아무 감춘 것이 없습니다.” 그 한 마디 말에 황산곡은 그 자리에서 한 소식을 얻었다.

선가(禪家)의 공안(公案)으로 널리 알려진 예화다. 행간의 깊은 뜻이야 짐작할 수만 있을 뿐 언어적 설명 밖의 문제다. 다만 여기서는 묘향(妙香)을 맡을 사람은 그대 뿐이라는 자신의 말이 조금도 거짓이 아니란 의미로 썼다. 견향(見香)의 별호에서 착안하여 이렇게 하나의 화두를 던진 것이다. 그리하여 천화(天花)의 향기를 마음대로 맡아, 광음(光音)을 초월하여 문수사리의 불이법문(不二法門)을 성취하기 바란다는 뜻으로 축원했다. 향훈에 대한 추사의 깊은 애정이 담겨있다.

 

향훈에게 보낸 편지와 ‘다선(茶禪)’의 호칭

 

이어 살필 글은 추사가 향훈에게 보낸 편지 한 통이다. 문집에는 실려 있지 않은 일문(佚文)이다. 처음 공개된 것은 2005년 11월 과천문화원에서 개최한 제 8회 과천향토사료전『붓 천 자루와 벼루 열 개를 모두 닳아 없애고』란 전시회에서였다. 전시도록에 이 편지가 초의에게 보낸 편지 한 통과 나란히 수록되었다. 이후 지난 『차의 세계』 2009년 4월호에 「추사 김정희가 초의와 향훈 선사에게 차를 청하는 글」이 수록 소개되면서, 이 자료의 가치가 새롭게 음미되었다. 다만 당초 도록의 번역에 적지 않은 문제가 있어, 편지의 본래 의미가 충분히 전달되지 못했다. 이번에 함께 꼼꼼히 읽고, 찬찬히 따져 보기로 한다.

 

해남 인편에 편지와 차를 부쳐 왔구려. 이는 장차 한량 없는 복덕(福德)일 것이외다. 초탈하여 차삼매(茶三昧)에 드니, 화장법계(華藏法界) 안이 온통 차 향기로 가득하여, 석가모니께서도 또한 마땅히 파안(破顔)하시리이다. 그때 초의 노장이 인장(吝障)을 녹이고 인업(忍業)을 파함이 없었던 것처럼, 스님이 따신 향을 취하길 청했지만 얻지 못했을 뿐이오. 새 책력을 부쳐 보내오. 이만 줄입니다. ‘다선(茶禪)’이란 글자는 다음 부칠 때 보내리다. 다 갖추지 않소. 향훈 스님께 답장함.

 

海人便, 寄書寄茶來. 是將无量福悳. 超脫入茶三昧, 華藏法界中, 摠聞茶香, 老瞿曇亦當破顔. 其時如艸老, 無以銷吝障破忍業, 乞取衲之踐香, 不得耳. 新莢付去. 都留. 茶禪字再寄時. 不式. 香薰衲回展.

짧지만 경쾌한 사연을 담았다. 글씨는 편지를 보내놓고 부본으로 남겨둔 것이다. 역시 추사가 쓴 「초의에게 주다」 제 34와 함께 나란히 적혀 있다. 이 편지는 다음과 같다.

 

편지만 있고 차는 아예 보이지도 않는구려. 생각건대 산 속에 바쁜 일이 필시 없을 터인데 세상 인연과 어울리지 않으려 하여, 내가 이처럼 간절한데도 먼저 금강(金剛)으로 내려가 버리시는 겐가? 다만 생각해보니 늙어 머리가 다 흰 나이에 갑작스레 이와 같이 하니 참 우습구료. 기꺼이 사람을 양단간에 딱 끊기라도 하겠다는 겐가? 이것이 과연 선(禪)에 맞는 일이요? 나는 대사는 보고 싶지도 않고, 대사의 편지 또한 보고 싶지 않소. 다만 차에 얽힌 인연만은 차마 끊어 없애지 못하고, 능히 깨뜨릴 수가 없구려. 이번에 또 차를 재촉하니 보낼 때 편지도 필요 없고, 단지 두 해 동안 쌓인 빚을 함께 보내되 다시 지체하거나 어긋남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오. 그렇지 않으면 마조의 할과 덕산의 몽둥이를 받게 될 터이니, 이 한 번의 할과 한 방의 몽둥이는 수백 천겁이 지나도 피해 달아날 도리가 없을게요. 다 미루고 이만 줄이오.

 

有書而一不見茶, 想山中必無忙事, 抑不欲交涉世諦. 如我之甚切, 而先以金剛下之耶. 第思之, 老白首之年, 忽作如是, 可笑. 甘做兩截人耶? 是果中於禪者耶? 吾則不欲見師, 亦不欲見師書. 唯於茶緣, 不忍斷除, 不能破壞. 又此促茶, 進不必書, 只以兩年積逋並輸. 無更遲悞可也. 不然馬祖喝德山棒, 尙可承當. 此一喝此一棒, 數百千劫, 無以避躱耳. 都留不式.

 

초의에게 놓은 으름장은 읽으면 빙그레 웃음이 지어진다. 위 편지로 볼 때, 당시 초의는 향훈이 추사에게 보낼 차를 싸는 것을 보고, 자신의 차는 아껴서 보내지 않았던 듯하다. 그러자 추사는 왜 안 하던 짓을 하느냐, 나와는 이제 인연을 아주 끊을 참이냐, 좋게 말로 할 때 그간 밀린 차까지 한꺼번에 다 보내라, 그렇지 않으면 절대로 가만 있지 않겠다고 무시무시한(?) 공갈과 협박을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는 차를 보내준 향훈에게는 갑자기 다정한 말씨로 무량한 복덕(福德)이 따로 없다고 하고, 그 차를 마셔 차삼매에 빠져 드니, 갑자기 온 세상이 화장법계(華藏法界)로 변해 버려 차향으로 가득 차 버리니, 이 향기를 맡고서는 석가모니 부처님도 기뻐서 파안대소 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바로 초의의 인장(吝障), 즉 인색함의 장벽을 녹이지 못하고, 인업(忍業) 곧 차 한 줌 나눠줄 줄 모르는 잔인한 업(業)을 깨뜨리지 못했다고 장황한 말을 늘어 놓았다. 말을 길게 꼬아서 했지만, 줄여 말하면 인색하기 짝이 없는 초의에게서 차를 끝내 빼앗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래서 향훈에게 차를 나눠달라고 부탁했는데, 지난번엔 그나마도 얻지 못해 안타까웠노라고 적었다. 그러다가 문득 차를 받게 되었으니, 그 반가움이 어떠했겠는가? 이어 책력을 부쳐 보낸 일을 말하고 글을 맺었다.

그런데 끝에 덧붙인 한 구절이 아주 흥미롭다. 추사가 향훈에게 ‘다선(茶禪)’이란 글자는 이번에는 못 써 보내고, 다음 인편에 부쳐 주겠노라고 약속하고 있는 것이다. 잘 알려진대로 추사는 초의에게 ‘명선(茗禪)’이란 대자(大字) 글씨를 백석신군비의 필의로 써준 적이 있다. 이번 이 편지를 통해 향훈에게는 ‘다선(茶禪)’이란 글씨를 써주려 했음이 새롭게 확인된다. 이 또한 차에 대한 답례였을 텐데, 향훈이 추사에게 직접 이 두 글자를 요구했을 수는 없고, 추사가 초의의 명선과 나란히 그에게 다선의 칭호를 부여하려 했던 사정이 짐작된다. 추사가 향훈에게 끝내 이 두 글자를 써주었는 지는 현재 남은 기록이 없어 확인할 수 없다. 다만 앞서 본대로 추사가 「초의에게 주다」 제 36에서 향훈에게도 글씨 한 장을 허락하니 전해주기 바란다고 한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추사는 약속을 지켰던 듯하다. 이뿐 아니라 앞서의 편지를 통해서 볼 때, 추사는 향훈에게 ‘다선’ 말고도 글씨를 쓴 부채 등 여러 장의 작품을 향훈에게 선물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조선 후기 차문화사에서 걸명(乞茗)과 사차(謝茶)의 아름다운 전통은 다산과 혜장, 추사와 초의, 추사와 향훈 등 수많은 글로 남아 있다. 차를 통해 서로 마음이 오가고, 정을 주고 받던 훈훈한 풍경들이 이 속에 오롯이 담겨 있다.

논의를 마무리 하자. 우연히 부본으로 남은 한 통 편지를 통해 우리는 차 문화사에서 향훈이란 이름을 좀더 음미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추사에게 ‘다선(茶禪)’의 칭호를 들었으리만큼 차에 조예가 있었던 인물이다. 지금까지는 초의에게 보낸 추사의 편지 속에서만 이름이 거론되었으나, 그는 차에 있어서 초의 못지않게 일가견을 지녔던 승려였음이 분명하다.

최근 필자가 추사의 동생 산천(山泉) 김명희(金命喜, 1788-1857)가 역시 향훈에게 보낸 친필인 「다법수칙(茶法數則)」을 구해보았다. 향훈에게 채다(采茶)와 제다법(製茶法)에 대해 여러 항목에 걸쳐 자세히 써준 내용인데, 초의의 『다신전』과 함께 차문화사의 대단히 중요한 글이다. 다음 호에서는 산천이 향훈에게 준 「다법수칙」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