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천(山泉) 김명희(金命喜)의 「다법수칙(茶法數則)」
지난 호에 추사와 대둔사 승려 향훈(香薰)과의 차에 얽힌 교유를 살폈다. 최근 필자는 추사의 동생 산천(山泉) 김명희(金命喜, 1788-1857)가 역시 향훈에게 보낸 친필인 「다법수칙(茶法數則)」을 구해보았다. 향훈에게 채다(采茶)와 제다법(製茶法)에 대해 6개 항목에 걸쳐 써준 내용이다. 초의의 『다신전(茶神傳)』과 함께 조선 차문화사의 대단히 중요한 글이다. 이제 이 글을 쓰게 된 전후 사정을 살펴보고, 원문을 소개한 후 자료가치를 검토해 보기로 한다.
새 자료 「다법수칙」에 대하여
「다법수칙」은 누가 언제 왜 쓴 것일까? 이 자료는 모두 7면에 걸쳐 경쾌하고 유려한 산천의 친필 행초체로 적혀 있다. 각면 끝에 면수를 작은 글자로 적어 놓았다. 필자가 보기에 원래는 위 사진 자료에서 보듯 긴 종이에 잇대어 쓴 것을 뒤에 한 장씩 잘라 따로 첩장한 것으로 보인다. 필자가 본 것은 복사본으로 원본의 소재는 현재 알 수가 없다.
내용은 채다(採茶)와 제다(製茶)에 관한 여섯 항목의 짤막한 글이다. 글 끝에는 다음과 같은 후기가 적혀 있다.
다법 몇 항목을 써서 견향(見香)에게 보인다. 이 방법에 따라 차를 만들어 중생을 이롭게 한다면 부처님의 일 아님이 없을 것이다. 산천거사.
茶法數則, 書贈見香, 要依此製茶, 以利衆生, 無非佛事耳. 山泉居士.
산천은 추사의 동생 김명희(金命熙)다. 김명희가 견향(見香), 즉 대둔사 승려 향훈(香薰) 스님에게 써준 것이다. 여기 적힌 방법대로 차를 만들어서, 이를 통해 중생을 이롭게 하고 나아가 부처님 전에 공덕을 쌓게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원래 글의 제목이 따로 없지만, 위 글 첫머리에 ‘다법수칙’이라 한 것을 표제로 삼는다.
여기에 적힌 여섯 항목의 내용은 김명희가 직접 지은 것이 아니다. 서유구(徐有榘, 1764-1845))의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권 27에 실린 『만학지(晩學志)』 권 5, 「잡식(雜植)」조의 차 관련 내용 중에서 간추렸다. 산천이 직접 중국 다서를 보고 베꼈다고도 볼 수 있겠지만, 원문을 대조해보니 서유구가 옮겨 적으면서 생략한 대목이나 원본과 다르게 적은 몇 글자가 동일한 것으로 보아, 서유구의 저술에서 추려 적은 것이 분명하다.
구체적인 내용을 살피기 전에, 산천이 인용한 항목별 서목을 잠깐 검토해본다.
1. 송 조길(趙佶), 『대관차론(大觀茶論)』 중 「채택(采擇)」조
2. 송 조여려(趙汝礪), 『북원별록(北苑別錄)』 중 「채다(採茶)」조
3. 명 허차서(許次紓), 『다소(茶疏)』 중 「채적(採摘)」조
4. 명 허차서(許次紓), 『다소(茶疏)』 중 「초차(炒茶)」조
5. 명 도륭(屠隆),『다전(茶箋)』 중 「채다(採茶)」조
6. 명 문룡(聞龍),『다승(茶箋)』 중 첫 항목
『대관차론』과 『북원별록』, 『다소』와 『다전』, 『다전(2)』 등 모두 5종 다서에서 6단락을 인용했다. 『대관차론』은 송나라 휘종황제 조길(趙佶)이 지었다. 차를 심는 일에서 찻잎 채취, 차 제법과 품상(品賞)에 이르는 내용을 담았다. 대관(大觀)은 휘종의 연호(1107-1110)다. 『북원별록』은 송나라 조여려(趙汝礪)가 지었다. 남송 효종(孝宗) 때 사람이다. 웅번(熊蕃)의 『선화북원공다록(宣和北苑貢茶錄)』을 보완하기 위해 지었다. 『다소』는 명나라 허차서(許次紓, 1549-1604))의 저술이다. 고금의 제다법을 참고하여 채다에서 음다까지 차문화의 제 방면을 간추려 저술했다. 『다전』은 명나라 도륭(屠隆)(1542-1605)가 지었다. 그의 저작인 『고반여사(考槃餘事)』 중의 일부분인데 따로 떼어 이렇게 부른다. 차의 주요 산지와 채다법, 보관법, 찻물론, 찻그릇, 그리고 차의 효능까지 정리한 글이다. 『다전(2)』는 명나라 문룡(聞龍)이 1630년 전후 하여 편찬한 다서다. .
이렇듯 산천의 『다법수칙』은 송대와 명대의 5종 다서에서 한 두 항목을 초록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1, 2, 3, 5는 모두 찻잎 따는 요령과 시기를 다룬 채다(採茶)의 내용이고, 4와 6은 차덖기에 관한 내용이다. 그밖에 보관이나 찻물, 차 끓이기에 관한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이는 이 글이 단지 차를 따서 덖는 과정에 도움을 주려고 필사된 것임을 말해준다.
추사는 이전부터 초의와 향훈에게서 차를 얻어 마시고 있었다. 그 차를 산천도 나눠 마셨다. 그런데 산천이 왜 새삼스럽게 차를 만들고 덖는 방법에 대해 글로 써서 향훈에게 보낸 걸까? 향훈이 바른 제다방법을 산천에게 물었거나, 아니면 향훈이 만든 차 맛에 부족한 점이 있는 듯하여, 제다법을 일러주려 했던 듯하다. 이 방법대로 만들라고 한 언표로 보아 당시까지도 차 만드는 방법이 온전하게 자리잡지 못했던 형편을 가늠할 수 있다. 이는 초의나 향훈 당시 조선에 이렇다 할 제다 이론이 없었고, 중국 다서를 참조하여 실험해보고 적용해보는 단계에 머물렀다는 뜻이 된다. 초의도 명나라 장원의 『다록』를 베껴서 『다신전』이란 제목으로 묶은 일이 있다. 이 또한 제다 이론의 정립 과정에서 근거로 삼기 위한 것이었다.
「다법수칙」의 채다법(採茶法)와 초다법(炒茶法)
이제 위 여섯 항목을 채다법과 초다법으로 나눠 차례로 살펴보기로 하자. 원문은 처음에 서유구가 중국 다서를 옮겨 적으면서 필요에 따라 일부 내용을 삭제한 것이 있다. 해당 원문 중 [ ] 부호로 표시한 것은 원전 상태를 보여준다. 전사 과정의 명백한 오자는 원문에서 바로 잡았다.
[1] 차를 따는 것은 동트기 전에 하여 해가 나면 그만 둔다. 손톱을 써서 싹을 끊어야지 손가락으로 짓무르게 하면 안 된다. 기운이 오염되고 내음이 스며 차가 깨끗하지 않게 될까 염려해서이다. 그런 까닭에 찻 일은 흔히 새로 길은 물을 뒤따르게 하여 싹을 따면 물에다 넣는다. 무릇 싹이 참새 혀나 낟알 같은 것을 투품(鬥品)으로 치고, 일창일기(一槍一旗)는 간아(揀芽)로 여기며, 일창이기(一槍二旗)는 그 다음이고, 나머지는 하품(下品)이다.
擷茶以黎明, 見日則止. 用爪斷芽, 不以指揉, 慮氣汚薰漬, 茶不鮮潔. 故茶工多以新汲水自隨, 得芽則投諸水. 凡芽如雀舌穀粒者爲鬥品, 一槍一旗爲揀芽, 一槍二旗爲次之, 餘斯爲下. -『大觀茶論』 중 「采擇」
찻잎 채취에 알맞은 시간과 채취 요령을 적었다. 찻잎의 채취는 해 뜨기 전에 시작해서 해가 뜨면 그만 둔다. 반드시 손톱으로 싹을 끊고, 손가락으로 짓무르게 하지 말라고 했다. 진이 나와 기운이 오염되고 잡내가 스미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특이한 점은 맑은 물을 길어 찻잎을 따는 즉시 물에다 담가 수분이 날아가는 것을 막게 한 것이다. 가장 상등품은 작설(雀舌) 즉 참새 혓바닥이나 곡식의 낟알처럼 이제 막 움터나 잎이 채 펴지도 않은 첫 싹을 꼽는다. 그 다음이 일창일기(一槍一旗)다. 일창일기는 찻잎이 처음 나올 때 창처럼 곧추서서 채 펴지 않은 잎과 그 옆에 깃발처럼 펴친 한 잎이 달린 상태를 말한다. 그 다음은 다시 일창 옆에 두 잎이 펴진 상태다. 산천의 원문은 ‘이창이기(二槍二旗)’라고 썼는데, 『대관차론』의 원문에 따른다. 서유구의 오자를 그가 그대로 베껴 쓴 결과다. 이로만 본다면 당시 서유구나 산천 또한 실제 찻잎의 모양이나 찻잎의 성질에 대한 깊은 이해가 부족했음이 드러난다. 이후 한 줄기에 여러 잎이 돋아나면 하품으로 친다.
이러한 구분은 지금도 크게 다를 것이 없다. 다만 찻잎을 채취할 때 맑은 물을 길어 찻잎을 따는 대로 물에 담그라고 한 점이 특이하다.
[2] 차를 따는 방법은 모름지기 새벽에 작업을 해서 해를 보게 하면 안 된다. 새벽에는 밤 이슬이 아직 마르잖아 차싹이 살지고 촉촉하다. 해를 보면 양기에 엷어지는 바가 되어, 싹의 기름진 것을 안에서 소모시키므로 물에 담궈도 선명하지 않게 된다.
采茶之法, 須是侵晨, 不可見日. [侵]晨則夜露未晞, 茶芽肥潤, 見日則爲陽氣所薄, 使芽之膏腴內耗, 至受水而不鮮明. -『北苑別錄』 중 「採茶」
이 글에서도 역시 찻잎 채취를 해 뜨기 전에 시작해서 마칠 것을 요구했다. 그 이유도 설명했다. 동트기 전에는 찻잎이 밤 이슬에 젖어 차싹이 수분을 머금고 있기 때문이다. 해가 뜬 뒤에는 양기(陽氣)가 왕성해져서 수분이 엷어진다. 그 결과 차싹의 기름기가 소모되어, 물에 담궈도 빛깔이 선명하지 않게 된다고 적었다.
[3] 청명과 곡우는 차를 딸 때이다. 청명은 너무 이르고, 입하는 너무 늦다. 곡우 전후가 가장 알맞은 때다. 만약 다시 하루 이틀 기간을 지체하면서 기력이 완전히 채워지기를 기다리면, 향기가 배나 더 짙어지고 거두어 보관하기가 쉽다. [매실이 익을 때는 덥지가 않아] 비록 조금 크게 자라더라도 여전히 여린 가지요 보드라운 잎이다.
淸明穀雨, 摘茶之候也. 淸明太早, 立夏太遲. 穀雨前後, 其時適中. 若肯再遲一二日期, 待其氣力完足, 香烈尤倍, 易於收藏. [梅時不蒸], 雖稍長大, 故是嫩枝柔葉也. -『茶疏』 중 「採摘」
이 항목은 1년 중 차를 따는 시기에 대해 언급했다. 청명과 입하 사이가 차를 따는 시기인데, 청명은 너무 이르고, 입하는 너무 늦으므로 곡우를 전후한 시기가 가장 적기라고 했다. 혹 날씨에 따라 찻잎에 기력이 충분치 않아 보이면, 곡우를 지나서도 오히려 하루 이틀 더 기다려 적절한 발육을 보일 때 채취해야 향이 더욱 짙고 보관도 용이하다고 적었다. 매실이 익을 무렵에는 아직 날이 찌지 않아, 찻잎이 크게 자랐다 해도 여전히 여린 잎이어서 차로 만드는데 문제가 없다고 했다.
다만 초의는 『동다송』의 주석에서 『만보전서』에서는 곡우 닷새 전이 가장 좋고, 닷새 뒤가 그 다음이며, 다시 닷새 뒤가 그 다음이라고 적은 내용을 소개하고 나서, 자신의 경험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경우는 곡우 전후는 너무 이르고, 입하 이후가 가장 좋다고 적고 있다. 또한 입하 이후에 밤새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 동트기 전 이슬 머금은 잎을 딴 것이 가장 좋고, 그 다음은 해가 났을 때 딴 것이며, 비올 때는 찻잎을 따면 안 된다고 적었다.
찻잎의 채취 시기는 각 지역의 기후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당연하다. 초의의 위 언급은 그가 중국 다서를 교조적으로 따르기만 한 것이 아님을 잘 보여준다. 실제 최근 들어서는 봄이 앞당겨져서 아예 청명 이전에 채취한 찻잎으로 만든 명전차(明前茶)까지 출시되는 것으로 보아, 채다 시기는 그때 그때 상황에 따라야 한다는 [3]의 언급은 매우 중요한 시사를 준다.
[5] 차를 딸 때는 너무 가는 것은 딸 필요가 없다. 가늘면 싹이 갓 움터서 맛이 부족하다. 너무 푸를 것도 없다. 푸르면 차가 쇠어서 여린 맛이 부족하다. 모름지기 곡우 전후에 줄기가 잎을 두르기를 기다려 옅은 녹색에 둥굴고 두터운 것이 상품이다.
采茶不必太細. 細則芽初萌而味欠足. 不必太靑, 靑則茶以老以味欠嫩. 須在穀雨前後, 覓成梗帶葉, 微綠色而團且厚者爲上. -『茶箋』 중 「採茶」
[5]는 찻잎을 채취할 때 유념해야 할 찻잎의 모양과 빛깔에 관한 내용이다. 너무 가는 잎은 맛이 충분히 배지 않았으므로 따지 말고, 푸른 것은 너무 쇠었다는 증거니 역시 따지 않는 것이 좋다고 했다. 곡우 전후에 일창이기, 일창삼기 쯤 되었을 때, 잎 빛깔은 연녹색을 띠고, 잎 모양은 둥글고 도톰한 것이 가장 상품이라고 적었다. 이점은 오늘날도 같다.
이상 네 항목의 채다법을 정리하면 이렇다.
첫째, 하루 중에는 동트기 전에 찻잎을 따야 한다.
둘째, 찻잎을 딸 때는 손톱으로 끊어야지 손가락으로 짓무르게 하면 안 된다.
셋째, 일년 중에는 곡우 전후한 시기가 채다의 가장 적기다. 시기가 좀 늦더라도 맛이 밴 뒤에 따야 향이 좋다.
넷째, 잎은 연녹색에 둥글고 도톰한 것이 상품이다.
다섯째, 채취한 찻잎은 맑은 물에 즉시 담궈 두는 것이 좋다.
이 가운데 다섯째 항목은 다소 논란의 여지가 있다.
나머지 두 항목은 차덖기에 관한 내용이다. 차례로 보자.
[4] 생차를 처음 따면 향기가 아직 스미지 않아 반드시 불의 힘을 빌어서 그 향기를 펴낸다. 하지만 성질이 힘든 것을 견디지 못하기에 오래 덖으면 안 된다. 너무 많이 가져다가 솥에 넣으면 손의 힘이 고르지가 못하다. 솥 가운데 오래 두면 너무 익어서 향기가 흩어진다. 심하여 타버리면 어찌 차를 끓일 수 있겠는가. 차 덖는 그릇은 신철(新鐵), 즉 새것의 쇠를 가장 싫어한다. 쇠 비린내가 한번 배면 향기가 다시는 나지 않는다. 더 꺼리는 것은 기름기이니, 쇠보다 해로움이 심하다. [모름지기 미리 솥 하나를 취해, 오로지 밥을 짓는데만 쓰고 따로 다른 용도로는 쓰지 않는다.] 차를 덖는 땔감은 나뭇가지만 쓸 수 있고 둥치나 잎은 쓰지 않는다. 둥치는 불의 힘이 너무 맹렬하고, 잎은 불이 쉬 붙지만 금세 꺼진다. 솥은 반드시 깨끗이 닦아 잎을 따는 즉시 바로 덖는다. 솥 하나 안에는 다만 4냥만 넣는다. 먼저 문화(文火) 즉 약한 불로 덖어 부드럽게 하고, 다시 무화(武火) 곧 센 불을 더해 재촉한다. 손에는 대나무 손가락을 끼고서 서둘러 움켜서 섞는다. 반쯤 익히는 것을 법도로 삼는다. 은은히 향기 나기를 기다리니, 이것이 바로 그때이다.
生茶初摘, 香氣未透, 必借火力, 以發其香. 然性不耐勞, 炒不宜久. 多取入鐺, 則手[力]不勻, 久于(於)鐺中, 過熟而香散[矣]. 甚且枯焦, 何堪烹點. 炒茶之器, 最忌(嫌)新鐵. 鐵腥一入, 不復有香. 尤忌脂膩, 害甚于(於)鐵. [須預取一鐺, 專用炊飯, 無得別作他用.] 炒茶之薪, 僅可樹枝, 不用幹葉. 幹則火力猛熾, 葉則易炎[燄]易滅. 鐺必磨瑩, 旋摘旋炒. 一鐺之內, 僅容(用)四兩. 先用文火[焙軟], 次加武火催之. 手加木指, 急急炒[鈔]轉, 以半熟爲度. 微俟香發, 是其候矣. -『茶疏』 중 「炒茶」
생차에는 차향이 배이지 않아, 불의 힘을 빌어서 향을 펴나오게 할 수 있다. 하지만 여린 찻잎이라 열기에 약하므로 오래 덖으면 향기가 다 흩어지고 만다. 또 한꺼번에 너무 많이 덖어도 안 된다. 손의 힘이 고르게 미칠 수 없기 때문이다. 심한 경우 차가 타기라도 하면 버린 물건이 된다. 가장 금기해야 할 것은 새 철의 날내가 배는 것이다. 차향에 쇠 비린내는 치명적이다. 또 차는 기름기를 몹시 꺼리므로, 차를 덖는 솥에는 기름기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으면 안 된다. 그러니 차를 덖는 솥에 밥 짓는 것 외에 다른 음식을 조리하지 말아야 한다.
그 다음은 차를 덖을 때 쓰는 땔감이다. 나뭇가지만 써야지 통나무나 잎을 쓰면 안 된다. 통나무는 화력이 너무 세서 찻잎을 태우기 쉽고, 잎은 너무 약해 금세 꺼지기 때문이다. 찻잎은 따는 즉시 묵혀 두지 말고 바로 덖어야 한다. 한 솥에는 4냥 이상을 넣으면 안 된다. 처음에는 약한 불로 기운을 부드럽게 하고, 센 불로 마무리를 한다. 손가락에 대나무를 가락지처럼 끼워 뜨거운 찻잎을 고루 섞어주어야 한다. 반만 익혀야지 푹 익히면 안 된다. 찻잎에서 은은한 향기가 코 끝에 훅 끼쳐오는 바로 그때가 덖기를 마쳐야 할 가장 적절한 시점이다.
[6] 덖을 때는 모름지기 한 사람이 곁에서 부채질을 해주어 열기를 없애야 한다. 뜨거우면 황색이 되어, 향과 맛이 모두 줄어든다.
炒時須一人從傍扇之, 以去熱氣. 熱則黃色, 香味俱減. -聞龍, 『茶箋』
[6]은 덖을 때의 주의사항을 추가했다. 차솥에서 김이 무럭무럭 오르면 곁에서 부채질을 해서 뜨거운 열기가 엉기지 않도록 한다. 너무 뜨겁게 되면 빛깔이 황색으로 변하고, 향과 맛이 그만큼 줄어든다.
초다법을 정리하면 이렇다.
첫째, 여린 잎을 오래 덖거나 한꺼번에 너무 많이 덖으면 안 된다.
둘째, 한 솥에 한꺼번에 덖는 분량은 4냥 이하가 적합하다.
셋째, 화기가 지나쳐서 태우면 절대로 안 된다.
넷째, 쇠솥의 날 비린내가 배거나 기름기가 스며도 안 된다.
다섯째, 찻잎을 덖을 때는 나뭇가지를 써야지 통나무나 잎을 쓰면 안 된다.
여섯째, 찻잎을 고루 섞어 주려면 손가락에 대나무를 깍지 끼워 쓰면 좋다.
일곱째, 차를 덖다가 향기가 올라 올 때 덖기를 멈추어야 한다.
여덟째, 곁에서 부채질을 해서 열기를 걷어내 주어야 한다.
이상 산천 김명희가 향훈 스님에게 준 「다법수칙」 6항목을 꼼꼼히 읽어 보았다. 내용은 찻잎 채취의 방법과 시기를 적은 채다법과, 찻잎을 덖을 때 주의 사항을 적은 초다법으로 구분된다. 이 글은 향훈에게 채다와 초다의 방법을 일러주기 위해 산천이 중국 차서의 내용을 옮겨 적은 것이다. 이는 앞서도 말했듯이 초의를 비롯하여 여러 승려들이 다투어 차를 만들고는 있었지만, 막상 이렇다 할 제다법이 정립되어 있지 않았던 당시 조선 차문화의 현주소를 말해준다.
정작 산천 자신은 제다에 경험이 전혀 없었을 뿐 아니라, 차의 생태나 성질도 잘 알지는 못했다. 하지만 중국의 다서를 읽음으로써 그 과정을 체득했고, 이를 향훈에게 요령있게 가르쳐 주어 그가 만든 차맛이 한결 더 높은 수준에 이르도록 기여한 공이 있다. 실제 산천은 서유구의 『임원경제지』를 다시 인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다만 그저 이론으로 섭렵한 데 그친 서유구에 비해 산천의 「다법수칙」은 바로 향훈에게 전해져서 실전에 적용되었다. 초의의 『다신전』과 함께 산천의 『다법수칙』이 차문화사에서 의미를 갖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다음 호에는 초의와 주고 받은 산천의 「사차(謝茶)」시와 초의의 답시, 그리고 그밖에 산천이 남긴 차시에 대해 살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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