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일기

경주 남산 금오봉

차보살 다림화 2014. 3. 31. 21:31

신라인의 의지와 이상향

 - 경주 남산

 

출발지로 다시 돌아왔다. 버스에서 내리니 비바람이 몰아쳤다. 풍우에 짖은 가을이 어두운 밤길을 잃은 듯 했다. 언뜻 최북의 그림 <풍성야귀인>이 떠올랐다. '눈보라 치는 겨울밤 나그네는 무사히 짐에 돌아왔을까' 눈보라는 아니지만 겨울을 재촉하는 늦가을 비바람이었다. 길가의 은행잎들이 풍우에 쏠려서 갈 길을 잃고 있었다.  오래전부터 꿈꾸던 경주 남산에 들어보기 위하여 컴컴한 새벽에 나섰던 날이었다. 무사히 하루의 답사를 끝내 보람이 가을 풍우에도 돌아오는 길은 안도감에 아늑했다만, 남산의 부처들은 무사할까? 하늘 밑의 지붕 없는 절집에서 말이다. 안부가 궁금하여 뒤돌아봐진다.

경주 남산은 노천 박물관, 뚜껑 없는 박물관으로 이름 지어져 있지 않은가. 경주의 시내의 고대 유적을 여기 저기둘러 보면서 언젠가는 남산에 오르리라 마음먹었지만, 기회가 닿지 않았다. 혼자라도 날 받아 가려고 마음까지 먹고 있었던 차에 지인의 소개로 산악회의 일원으로 2013년 11월 24일 문화탐방의 날에 참여할 수 있었다.

나에게 여행이나 답사는 현실을 따나고 싶은 마음도 아니고 상상도 아니다. 현실을 떠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 속의 다른 현실을 살아내는 일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나의 현실을 떠나서 만난 다른 현실이 그대로 나에게 주어진다 해도 그 현실을 살아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삼릉골 입구에서 하차하여

송림으로 들어간다.

 

 

 

가끔 영상에서 보았던대로 눈에 익은 삼릉골 입구로 들어서니 배병우의 사진처럼 제멋대로 자유롭게 자라서 구불구불한 몸매를 지닌 소나무 숲 너머 삼릉이 자리하고 있었다. 마치 작은 산의 능선이 이어진 것 같았다. 무덤의 곡선이 부드러운 여체로 보였다. 누구의 능인지 정확하게 밝혀진 것은 아니지만 몰라도 신라의왕의 무덤인 것만은 확실하리라 싶었다. 누가 되었던 천 년 전의 누구인가 살았던 사람의 흔적이 지금의 내 발걸음과 만난 것은 감회가 깊은 일이었다. 대부분 이 삼릉은 제8대 아달라왕, 53대 신덕왕과 경명왕의 능이라고 알고 있다.

 

 

 

 

먼저 만난 부처상은 머리와 두 손이 잘린 몸둥이가 그래도 당당한 좌상이다. 목의 삼도 주름이 그대로 선명하고 왼쪽 어깨부터 가슴으로 흘러내린 가사에 꽃매듭 문양도 선명하여 세월의 흐름에 따라 그 무엇이 돌부처의 영혼이라도 흠칠 생각이었을까. 무릎을 덮은 가사에도 매듭 끈이 애교스럽다. 이렇게 예쁜 매듭 끈으로 장식한 가사를 입고 수많은 사람들의 기원을 들었던 부처의 머리와 손은 어떻게 해서 잘라졌을지

가사 자락을 들취볼 수도 없어 안타까울 뿐이다. 바위 면을 캔버스로 삼아 현대의 추상화 같이 선각으로 여러 부처상을 그려냈다. 삼존불과 협시 부처님까지 육존불 같아 보인다.

 

 

 

 

 

머리 없는 불상에서 왼쪽으로 40여 미터 올라가면 미스 신라라 불리는 관음보살상이 있다는데, 갈 수 없었다. 일생은 고위봉을 목표로 하고 앞서 갔기 때문이다. 나를 위해 친절한 안내를 해준 회원 한 분과 천천히 불상과 남산의 유적을 감상하기로 하고 금오봉을 넘기로 했다.

 

 석불 좌상 한 구가 여행 객을 기다리고나 있는 듯이 당당하게 연꽃 대좌에서 근엄한 표정을 하고 있다. 금방이라도 일어설 듯 가부좌한 한 쪽

다리가 들석일 것 같다.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으니 석가모니 부처다. 이 세상을 구체하기 위한 현생 부처가 아닌가. 자세히 보니 광배 한 부분이 새 돌로 보수가 되었다. 얼굴의 코, 눈 부분도 복원이 되어 완전한 상을 이루었다. 마음으로 이향향을 만들고자 한 신라인들의 꿈을 오늘

우리는 구현하고 있는지 생각해본다.

 

 

 

 

늦가을이지만 땀으로 온 몸이 젖는다. 가는 길 초에 부처들이 기원하고 맞아주니 일시에 땀을 식히기도 하고 새 마음을 다져보면서 길을 올랐다. 온 산에 돌과 바위가 즐비하다. 돌덩이 하나마다 모두 유물과 부처로 보일 정도이다. 소나무가 많은 남산은, 남산 위에 저 소나무들이 청청하기만 하다. 신라인의 꿈이 저리도 청청했으리라.

 

 

 

 

 

 

석불좌상이 신라의 외곽을 응시하고 있듯 나도 멀리 산 아래로 펼쳐지는 신라 땅을 내려다 보며 그들의 꿈을 오늘에 이루었나를 생각했다.

 

정상으로 오르기 전에 암자 하나가 나타났다. 상선암이란다. 여기서 잠깐 숨 돌리기도 하고 예불도 한다.

 

 

드디어 정상이 가까워 온다.

 

 

히말라야 정상을 간 만큼이나 내게는 귀한 걸음이었다.

 

 

냉골 바위산은 금송정이 있던 터란다. 경덕왕 때 옥보고가 가야금을 타고 놀았던 터라고 삼국사기에 기록하고 있다고 한다.

어떤 바위인들 이 남산의 바위는 모두 부처의 다른 모습이지 않을까. 소나무든 그 부처들의 호위 무사로서 신선한 바람을 맞고

부처를 보호했던 것이 아닐지.

 

 

 

남산을 오를 때는 반드시 도시락을 지참해야 한다. 이렇게 정답게 가다가 배고프면 부처님께 공양올리듯 서로에게 공양을 해야 한다.

 

소나무 뿌리들이 발걸음을 보호해주고 다리가 되기도 한다. 한 뿌리에서 마디 마디 작은 뿌리를 땅으로 내딛고 나무 전체를 받쳐준다.

기이하기도 한 생태이지 않은가.

 

 

 

 

 

앞서 가는 나의 안내자는 평걸음인데 나로서는 숨가쁘게 땀을 흘리며 가고 있다.

 

마애불이 서방정토를 그리는 것인지 서방의 보호를 기원하는지 거대한 마애불이 보수 중이지만

놀라울 뿐이다.

 

 

 

 

소나무 뿌리들이 큰 바위 틈을 비껴서 뻗어 나가고 있다. 그 뿌리들을 우리는 밟기도 하고 걸터 앉는 벤취 역할도 해주었다.

서민들의 애환이 서린 이 남산에는 불상들이 거의 미완성인 것이 많았단다. 신라의 왕족과 귀족들은 천황사, 황룡사 등

큰 사찰에 다녔지만 이 남산에는 이름 없는 신라의 석공들이 부처를 조각하고 그들의 소박한 꿈을 기원했으므로 서민들의

불공터였으리라. 통일을 이루어낸 신라의 꿈과 이상이 이 남산 기슭에도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번성기 때 경주에는

탑들이 기러기가 날아가는 것처럼 줄지어 있는 것 처럼 보였다지 않는가. 이 남산골만 해도 절터가 122개 정도였으며, 석불만은 50여 개가

넘었단다.

 

 

 

 

 

 

 

 

해발 468미터 인 금오봉 정상에 도착했다. 작은 산이지만 정상을 올라보믄 기분이 이렇던가.

등산에 재미 붙은 사람들이 산악회를 통하여 산행을 하는 마음을 알 것 같다.

 

금오산을 노래함

높고도 신령스런 금오산이여!

천년왕도 웅혼한 광채 품고 있구나

주인 기다리며 보낸 세월 다시 천년 되었으니

오늘 누가 있어 능히 이 기운 받을런가?

 

노래비 앞에서 읋어보며 능히 내가 오늘 이 기운을 받고 가노라!

 

 

 

 

 

 

 

 

 

남산에는 40여 골짜기가 있다는데, 우리는 고위봉을 오르기로 한 등산객들과 달리 금오봉에 이르러

용장골로 내려가기로 했다.

 

용장계곡은 금오봉과 고위봉 사이 골짜기로 남산에서 가장 큰 계곡이며 용장사지 등 18개소의 절터와 7기의 석탑, 그리고 삼륜대좌불 등 5구의 불상이 남아 있다. 이곳에서 400미느 아래로 내려가면 용장사차가 있는데 용장사는 이 계곡에서 가장 큰 사찰이었다. 용장사터 동쪽 높은 바위 위에는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삼층석탑이 우뚝 솟아 장관을 이루고 삼층석탑 아래에는 삼륜대좌불과 마애여래좌상이 자리 잡고 있다.

茸長寺용장사는 통일신라시대 법상종을 개창한 大賢스님이 거주한 곳이며 조손 세조 때 대학자이자 승려인 설잠 스님(매월당 김시습)이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를 집필한 곳이다. 대현 스님이 삼륜대좌불을 돌면 부처도 머리를 돌렸다고 한다. 뒤 쪽에 바위에 새겨진 마애여래좌상은 지금도 따뜻한 미소로 사바세계를 내려다 보고 있다. (경주국립공원 재공)

 

 

 

 

 

 

 경주를 슬기롭게 답사하는 방범은 코스를 몇 개로 나누되 그것을 문화사적 단계로 더듬어보는 것이다.’ 1코스는 서라벌이 향기라 할 고분시대의 유적으로 반월성과 왕릉을 순차적으로 답사하는 것. 2코스는 고신라문화의 전성기인 황룡사터, 분황사, 첨성대, 삼화령 애기부처, 감실부처, 진평왕를 등 건덕여황 시절 유물들을 답사하는 것. 3코스는 신라가 통일국가의 건설에 국가적 국민적 총력을 기울였던 때의 힘찬 기세의 유물을 보아야 한다고 했다. 그것은 감은사탑, 고선사탑, 황복사탑, 불국사 석가탑에서 영지에 이르는 삼층석탑순례가 될 것이고, 4코스는 8세기 중엽 전성기 통일신라 문화의 조화적 이상미를 살려보는 불국사, 석굴암, 안압지, 에밀레종 등으로 이어진다. 그 다음 불국토를 구현하려 했던 신라인의 의와 이상을 경주 남산의 핵심적 유물로 더듬어보아야 한다.‘고 했다.

  그간에 경주를 여러 차례 산발적으로 다녀오면서 대충 신라의 문화유적을 이해하였다. 경주박물관을 통해서도 좀은 이해할 수 있었다. 이제 남산으로 관심이 가게 된 것이다. 앞으로 다시 남산의 다른 코스를 다녀볼 꿈을 키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