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이야기

[스크랩] 다산의 걸명(乞茗) 시문

차보살 다림화 2014. 7. 3. 14:33

다산의 걸명(乞茗) 시문



다산은 명실 공히 우리 차 문화의 중흥조다. 그는 아득히 잊혀져 사라진 우리 차문화에 새 빛을 던졌다. 혜장과 초의의 제다법 또한 다산에게서 나왔다. 그렇다면 다산은 언제부터, 왜 차를 마셨을까? 이 글에서는 다산이 혜장에게 차를 청하며 보낸 걸명(乞茗) 시문을 통해 이 물음에 답해 보기로 한다.


다산의 초기 차생활

다산은 유배 이전에도 차를 마셨다. 21세 나던 임인년(1782) 봄에 지은 「춘일체천잡시(春日棣泉雜詩)」의 앞쪽에 이런 내용이 있다.

鴉谷新茶始展旗 백아곡의 새 차가 새 잎을 막 펼치니
一包纔得里人貽 마을 사람 내게 주어 한 포 겨우 얻었네.
棣泉水品淸何似 체천의 물맛은 맑기가 어떠한가
閒就銀甁小試之 은병에 길어다가 조금 시험 해본다네.

백아곡(白鴉谷)은 경기도 광주 검단산(黔丹山) 북쪽으로, 이곳에서 작설차가 난다는 원주가 실려 있다. 당시 검단산 인근에서도 채다(採茶)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체천은 당시 다산이 살고 있던 남대문 근처 창동의 지명이다. 상세한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 더 이상의 언급은 어렵다. 또 「미천가(尾泉歌)」의 뒷부분에도 차 마시는 일에 관한 언급이 있다.

爲試龍團治癖疾 시험 삼아 용단차(龍團茶)로 고질병을 다스리니
瑩如水精甘如蜜 해맑기 수정이요 달기는 꿀맛일세.
陸羽若來何處尋 육우가 온다하면 어디서 샘 찾을까
員嶠之東鶴嶺南 원교의 동쪽이요 학령의 남쪽이리.

이 또한 20대 서울 시절의 작품이다. 용단차(龍團茶)를 말한 것으로 보아 당시 다산이 단차(團茶), 즉 떡차를 마셨음을 알 수 있고, 약용으로 마신 것이 확인된다. 이런 시의 존재는 다산의 음다(飮茶)가 20대 초반부터 시작되었음을 잘 보여준다. 서울 생활에서 차 마시는 일을 언급한 몇 수의 시가 더 있지만 차의 효용에 대한 언급이나 구체적인 예찬은 따로 보이지 않는다. 차에 대한 관심이 있었다 해도 당시 서울에서 차를 구해 상음하기는 쉽지 않았을 터. 고질병을 다스린다는 언급으로 보아 당시의 음다는 떡차로 소량을 상비해 두었다가 이따금 약용으로 마시는 정도였을 것이다. 이밖에도 다산의 시문 속에는 음다 생활과 관련된 많은 언급이 보인다.


다산과 혜장의 만남과 걸명시

다산이 본격적으로 차를 마시기 시작한 것은 강진으로 유배 온 지 4년 후, 백련사에서 아암(兒菴) 혜장(惠藏, 1772-1811) 선사와 교유를 갖게 되면서 답답한 체증을 치료하기 위해서였다. 1801년 말에 강진으로 귀양 온 다산은 처음에 주막집 뒷방에 옹색한 거처를 정했다. 이곳을 다산은 동천여사(東泉旅舍)로 불렀다. 막상 혜장 선사와의 첫 만남은 그로부터 4년 뒤인 1805년 여름에 이루어졌다.


다산은 혜장이 대흥사에서 백련사로 건너 와 머물며 다산을 만나려고 애를 쓴다는 소문을 들었다. 다산은 어느 날 슬쩍 신분을 감추고 백련사로 놀러가 혜장과 한 나절 간 대화를 나누었다. 혜장은 그가 다산인 줄을 감쪽같이 몰랐다. 이윽고 작별하고 오는데 뒤늦게 그가 다산임을 안 혜장이 헐레벌떡 뒤쫓아 와서 말했다. “공께서는 어찌 사람을 이렇듯 속이십니까? 공은 정대부 선생이 아니십니까? 저는 밤낮으로 공을 사모해 왔는데, 공께서 어찌 차마 이렇게 하십니까?” 혜장이 막무가내로 붙드는 바람에 다산은 하는 수 없이 그의 방에서 묵어 자며 『주역』에 대한 토론을 벌였다.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다산 앞에서 만장의 기염을 토하던 혜장은 밤중에 잠자리에서 다산이 던진 단 한 차례의 질문에 압도되어 마침내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사제의 인연을 맺는다. 이날은 1805년 4월 17일이었다.


이후 다산과 혜장은 급격히 의기가 투합해서 서로 왕래가 잦았다. 두 사람은 수 십 수의 시를 서로 주고받았다. 혜장은 다산의 후원자 노릇을 자처하며 보은산(寶恩山) 고성암(高聲菴)의 보은산방에 거처를 마련해주었고, 오가다가 일부러 들러 함께 며칠 씩 머물다 가곤 했다. 이들은 『주역』을 공통 관심사로 삼아 토론을 거듭했다. 시를 지을 때조차 『주역』의 괘사(卦辭)를 운자로 삼았을 정도였다.


다음 시는 다산이 혜장과 처음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인 1805년 4월에 혜장에게 보낸 걸명시다. 원 제목은 「혜장상인에게 차를 청하며 부치다(寄贈惠藏上人乞茗)」이다. 최초의 걸명시다.

傳聞石廩底 듣자니 석름봉 바로 아래서
由來產佳茗 예전부터 좋은 차가 난다고 하네.
時當曬麥天 지금은 보리 익을 계절인지라
旗展亦槍挺 기(旗)도 피고 창(槍) 또한 돋아났겠네.
窮居習長齋 궁한 살림 장재(長齋)함이 습관이 되어
羶臊志已冷 누리고 비린 것은 비위가 상해.
花猪與粥雞 돼지고기 닭죽 같은 좋은 음식은
豪侈邈難竝 호사로워 함께 먹기 정말 어렵지.
秖因痃癖苦 더부룩한 체증이 아주 괴로워
時中酒未醒 이따금씩 술 취하면 못 깨어나네.
庶藉己公林 스님의 숲 속 차 도움을 받아
少充陸羽鼎 육우(陸羽)의 차 솥을 좀 채웠으면.
檀施苟去疾 보시하여 진실로 병만 나으면
奚殊津筏拯 뗏목으로 건져줌과 무에 다르리.
焙曬須如法 모름지기 찌고 말림 법대로 해야
浸漬色方瀅 우렸을 때 빛깔이 해맑으리라.

석름봉은 만덕산 백련사 서편 봉우리의 이름이다. 당시 다산은 섭생이 좋지 않았고 마음의 울결로 체증이 얹혀 고생이 심했다. 다산은 백련사 석름봉에 차나무가 많아 산 이름도 다아산(茶兒山) 또는 다산(茶山)이라 불린다는 말을 들었다. 이에 혜장에게 그곳에서 나는 차를 좀 구해줄 것을 부탁했다. 당시 다산은 비위가 약해 기름진 음식은 소화를 못 시키고 술을 마시면 좀체 깨지도 않았다. 속이 늘 더부룩하여 불쾌했다. 다산은 혜장에게 차를 보시해서 이 묵은 체증을 쑥 내려가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때가 마침 햇차가 날 시기였던 것이다.


끝의 두 구절에서는 ‘배쇄(焙曬)’ 즉 불에 익혀 햇볕에 말리는 절차를 반드시 방법에 따라 해야 나중에 차를 우렸을 때 빛깔이 해맑다고 했다. 다산이 혜장에게 차를 청하면서 차를 만드는 방법까지 꼼꼼하게 일러준 것이다. 앞서 본 여러 문헌이 한결 같이 증언하고 있는 대로 보림사의 죽로차 뿐 아니라 강진의 만불차를 구증구포의 제다법으로 처음 알려준 것이 다산이었음을 상기한다면, 혜장에게 구체적인 제다법을 알려준 것 역시 다산이었음이 분명하다. 혜장이 이전부터 차를 만들어 마셔왔을 수도 있겠지만, 혜장은 당시 차가 많이 나는 백련사로 건너와 머문 지가 얼마 되지도 않던 시점이었다.


『다산시문집』에 잇따라 실린 다음 시 또한 위 시와 같은 운자로 지은 걸명시다. 전후 사정이 재미있다. 긴 제목의 내용은 이렇다. 「혜장이 나를 위해 차를 만들어 놓고, 마침 그 문도인 색성이 내게 차를 주자 마침내 그만두고 주지 않았다. 그래서 원망하는 글을 보내, 줄 것을 요구하였다. 앞의 운을 쓴다(藏旣爲余製茶, 適其徒賾性有贈, 遂止不予. 聊致怨詞, 以徼卒惠. 用前韻).」

與可昔饞竹 옛날에 문여가(文與可)는 대를 탐했고
籜翁今饕茗 오늘날 탁옹(籜翁)은 차에 빠졌네.
況爾捿茶山 하물며 그대는 다산(茶山)에 사니
漫山紫箰挺 온 산에 자순(紫箰)이 돋아났으리.
弟子意雖厚 제자의 마음 씀은 저리 후한데
先生禮頗冷 선생의 예법은 매정도 해라.
百觔且不辭 백 근을 준데도 마다 않을 터
兩苞施宜竝 두 꾸러미 주는 게 뭐가 어때서.
如酒只一壺 만약에 술이 달랑 한 병뿐이면
豈得長不醒 어이해 깨지 않고 길이 취하리.
已空彦沖瓷 유언충(劉彦沖)의 찻그릇 이미 비었고
辜負彌明鼎 미명(彌明)의 돌솥도 쓸데가 없네.
四鄰多霍㿃 이웃에 설사병 걸린 이 많아
有乞將何拯 찾아오면 무엇으로 고쳐 주리오.
唯應碧澗月 오직 다만 벽간월(碧澗月)로 부응하여서
竟吐雲中瀅 구름 속 맑은 모습 토해내시게.

이때 다산의 지도로 혜장과 그 제자 색성 등이 찻잎을 따서 각자 차를 만들었던 모양이다. 제목에서 ‘혜장이 나를 위해 차를 만들어 놓고 藏旣爲余製茶’라고 했다. 다산의 요청을 받고 혜장이 일부러 찻잎을 따서 만든 것이다. 하지만 혜장은 제자인 색성이 차 한 포를 다산에게 주었다는 말을 듣고, 자신이 만든 차를 아까워하며 내놓지 않았다. 다산은 너무 야박한 것이 아니냐며 당초 약속대로 마저 내 놓으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화려한 도자기 그릇이건 질박한 돌솥이건 차가 있어야 끓일 게 아니냐고 하면서, 다산은 차를 좀 넉넉하게 나눠 주어야 설사병에 걸린 이웃의 병 고치는데도 쓸 수 있을 테니, 어서 차를 내놓으라고 윽박질렀다.


15구의 ‘벽간월(碧澗月)’은 혜장이 만든 차에 붙인 이름인 듯하다. 초의 스님의 『동다송』에 보이는 “건양과 단산은 푸른 물의 고장인데, 품제(品題)는 특별히 운간월(雲澗月)을 꼽는다네. 建陽丹山碧水鄕, 品題特尊雲澗月”라고 한 ‘운간월’과 비슷한 명칭이다.
한편 차를 보내준 색성에게는 고맙다는 뜻을 담아 따로 시 한 수를 지어 주었다. 원제는 「색성이 차를 부쳐준 것에 감사하며[謝賾性寄茶]」이다.

藏公衆弟子 장공의 여러 명 제자 중에서
賾也最稱奇 색성이 제일로 기특하다네.
已了華嚴敎 화엄의 가르침을 이미 깨치고
兼治杜甫詩 겸하여 두보 시를 배우는구나.
草魁頗善焙 초괴(草魁)를 볶아내는 솜씨가 좋아
珍重慰孤羇 고맙게도 나그네를 위로하였네.

5구의 초괴(草魁)는 서초괴(瑞草魁)의 줄인 표현이다. 상서로운 풀 가운데서 으뜸이란 뜻이다. 차의 별칭으로 쓴다. 당나라 때 두목(杜牧)이 지은 「제다산(題茶山)」의 첫 두 구절, “산은 실로 동오 땅이 아름다운데, 차를 일러 서초괴(瑞草魁)라 부르는구나. 山實東吳秀, 茶稱瑞草魁”라 한 구절에서 따왔다. 색성이 만든 차가 품질이 좋고, 고단한 나그네에 대한 마음 씀이 도타와 고맙다고 치하한 내용이다. 당시 색성은 『화엄경』을 다 읽고 나서 다산에게 왕래하며 두시(杜詩)를 배우고 있었던 모양이다.


다산의 「걸명소」

다산은 이렇게 해서 혜장과 색성 등에게서 차례로 차를 얻어 마셨다. 같은 해인 1805년 겨울에 다산은 다시 한번 혜장에게 차를 청하는 글을 보낸다. 앞서 초여름에 얻은 차가 진작에 동이 났던 것이다. 이번엔 장난스럽게 상소문의 형식을 빌었다. 이것이 유명한 「걸명소(乞茗疏)」다. 변려투의 문식(文飾)이 두드러진 글이다. 현행 『다산시문집』에는 어찌된 셈인지 빠져있다. 현재 원본의 소재가 묘연하여 실물을 확인하지 못했다. 현재의 통용본에는 원문에 미심쩍은 곳이 적지 않다. 제목만 하더라도 「걸명소(乞茗疏) 을축동(乙丑冬) 증아암선사(贈兒菴禪師)」로 된 것과 「이아암선자걸명소(貽兒菴禪子乞茗疏) 을축동재강진(乙丑冬在康津)」 두 가지로 전한다. 뿐만 아니라 본문의 글자나 배열도 조금씩 차이가 난다. ‘계호(洎乎)’가 ‘박호(泊乎)’로 된다든지, ‘효효(皛皛)’가 ‘정정(晶晶)’으로 바뀌거나, ‘서초지괴(瑞草之魁)’가 ‘초단지괴(草端之魁)’로 된 것 같은 경우가 그렇다. 이 글은 안팎으로 촘촘한 대우(對偶)를 이루고 있어, 안짝과 바깥짝의 대구가 삼엄하다. 구절의 차례가 뒤엉킨 것은 이것으로 대부분 바로잡을 수가 있다. 이에 몇 가지 통용본을 교감하여 아래와 같이 원문을 정리하고 새로 번역해 본다.

나그네는 요즘 들어 다도(茶饕) 즉 차 욕심쟁이가 된데다, 겸하여 약용(藥用)에 충당하고 있다네. 글 가운데 묘한 깨달음은 육우(陸羽)의 『다경(茶經)』 세 편과 온전히 통하니, 병든 숫누에는 마침내 노동(盧仝)의 일곱 사발 차를 다 마셔 버렸다오. 비록 정기를 고갈시킨다는 기모경(棊母㷡)의 말을 잊지는 않았으나, 마침내 막힌 것을 뚫고 고질을 없앤다고 한 이찬황(李贊皇)의 벽(癖)을 얻었다 하겠소. 아침 해가 막 떠오르매 뜬 구름은 맑은 하늘에 환히 빛나고, 낮잠에서 갓 깨어나자 밝은 달빛은 푸른 냇가에 흩어진다. 잔 구슬 같은 찻가루를 날리는 눈발처럼 흩어, 산 등불에 자순(紫筍)의 향을 날리고, 숯불로 새 샘물을 끓여, 야외의 자리에서 백토(白兎)의 맛을 올린다. 꽃무늬 자기와 붉은 옥으로 만든 그릇의 번화함은 비록 노공(潞公)만 못하고, 돌솥 푸른 연기의 담박함은 한자(韓子)보다 많이 부족하다네. 해안어안(蟹眼魚眼)은 옛 사람의 즐김이 한갓 깊은데, 용단봉단(龍團鳳團)은 내부(內府)에서 귀하게 나눠줌을 이미 다했다. 게다가 몸에는 병이 있어 애오라지 차를 청하는 마음을 편다오. 들으니 고해(苦海)를 건너가는 비결은 단나(檀那)의 보시를 가장 무겁게 치고. 명산의 고액(膏液)은 서초(瑞草)의 으뜸인 차만한 것이 없다고 들었소. 애타게 바람을 마땅히 헤아려, 아낌없이 은혜를 베풀어 주기 바라오.


旅人近作茶饕, 兼充藥餌. 書中妙辟, 全通陸羽之三篇, 病裏雄蠶, 遂竭盧仝之七椀, 雖浸精瘠氣, 不忘棊母㷡之言, 而消壅破瘢, 終有李贊皇之癖. 洎乎朝華始起, 浮雲皛皛於晴天, 午睡初醒, 明月離離乎碧澗, 細珠飛雪, 山燈飄紫筍之香, 活火新泉, 野席薦白兎之味, 花瓷紅玉繁華, 雖遜於潞公, 石鼎靑烟澹素, 庶乏於韓子. 蟹眼魚眼, 昔人之玩好徒深, 龍團鳳團, 內府之珍頒已罄. 玆有采薪之疾, 聊伸乞茗之情, 竊聞苦海津梁, 最重檀那之施, 名山膏液, 潛輸瑞草之魁. 宜念渴希, 毋慳波惠.

구문의 짜임새를 좀더 효과적으로 보이기 위해 대구에 맞춰 원문을 두 줄씩 짝지어 아래 위로 배열하면 이렇게 된다.

1. 旅人近作茶饕,∥書中妙辟, 全通陸羽之三篇,∥雖浸精瘠氣, 不忘棊母㷡之言,∥
2. 兼充藥餌.∥病裏雄蠶, 遂竭盧仝之七椀.∥而消壅破瘢, 終有李贊皇之癖.∥
1. 洎乎朝華始起, 浮雲皛皛於晴天,∥ 細珠飛雪, 山燈飄紫筍之香,∥
2. 午睡初醒, 明月離離乎碧澗.∥ 活火新泉, 野席薦白兎之味.∥
1. 花瓷紅玉繁華, 雖遜於潞公,∥蟹眼魚眼, 昔人之玩好徒深,∥玆有采薪之疾,∥
2. 石鼎靑烟澹素, 庶乏於韓子.∥龍團鳳團, 內府之珍頒已罄.∥聊伸乞茗之情,∥
1. 竊聞苦海津梁, 最重檀那之施,∥宜念渴希,
2. 名山膏液, 潛輸瑞草之魁.∥毋慳波惠.

1을 읽다가 ‘∥’표시가 있는 곳에서 아래쪽 2로 내려가 읽고, 다시 1로 올라오는 방식으로 읽으면 전체 글의 대구를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얼마나 정확하고 엄격한 대구로 이루어진 글인지 한 눈에 보인다.


글의 서두에서 스스로를 다도(茶饕)라 한 것이 재미있다. 도(饕)는 고대 상상의 동물인 도철(饕餮)이다. 탐욕이 많고 흉포한 성질을 가졌다. 천하에 맛보지 않은 차가 없다고 자부했던 청나라 때 원매(袁枚)도 자신의 별호를 다도(茶饕)라 한 바 있다. 차에 욕심이 많은 사람이란 뜻이다. ‘서중묘벽(書中妙辟)’은 공부를 하면서 느끼는 삼매의 경계가 육우가 『다경』에서 말한 경지와 상통한다는 뜻인 듯하다. 『대장경』 가운데 『공작왕주경(孔雀王咒經)』 1권에 『묘벽인당다라니경(妙辟印幢陀羅尼經)』이 있다. 묘벽이란 오묘한 깨달음이다.


‘병리웅잠(病裏雄蠶)’는 누에가 뽕잎을 먹고 최면기에 들어 한잠 자고 나서 다시 깨어난 상태를 말한다. 이때 누에의 몸은 극도로 쇠약하여 특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한잠에서 깨어난 숫누에는 욕심 사납게 다시 뽕잎을 갉아 먹는데, 여기서는 다산 자신이 마치 갓 깨어난 숫누에가 뽕잎 찾듯 차를 갈급한다는 의미로 썼다. 노동(盧仝)의 칠완(七椀)은 흔히 「칠완다가(七椀茶歌)」로 널리 알려진 「붓을 달려 맹간의가 햇차를 보내온 데 감사하다(走筆謝孟諫議寄新茶)」란 시의 내용을 두고 이른 말이다.


기모경(棊母㷡)은 당나라 때 우보궐(右補闕)의 벼슬을 한 사람이다. 차를 싫어 해 ‘척기모정(瘠氣耗精)’으로 차의 폐해를 지적하고 차에 지나치게 빠지는 것을 경계하는 「벌다음서(伐茶飮序)」란 글을 남겼다. 이찬황(李贊皇)은 본명이 이덕유(李德裕)다. 당나라 때 재상을 지냈고, 차에 남다른 조예가 있었다. 그는 특히 차를 끓일 때 혜산천(惠山泉) 물만을 고집해 역말을 이어 달려 혜산천의 물을 실어 날라 당시에 ‘수체(水遞)’란 말이 생겨날 만큼 차에 벽(癖)이 있단 말을 들었던 인물이다. 또 그는 촉 땅에 들어가 몽산의 떡차를 얻어 고기국에 넣고, 이튿날 열게 하여 고기 덩어리가 다 녹은 것을 보여주며 차가 지닌 소옹(消壅), 즉 체기를 내리는 효과를 증명해 사람들을 놀라게 한 일도 있다. 기모경의 경계에도 불구하고 다산 자신이 체기를 내리는 신통한 효과 때문에 이찬황이 그랬던 것처럼 차에 벽이 들었음을 말한 것이다.


‘세주비설(細珠飛雪)’과 ‘활화신천(活火新泉)’, `해안어안(蟹眼魚眼)’ 은 모두 소동파의 「시원전다(試院煎茶)」시에서 따왔다. 특히 ‘세주비설(細珠飛雪)’은 단차를 차맷돌에 갈아 찻가루가 눈가루처럼 흩날리는 형상을 묘사한 것이다. 다산이 당시 즐겨 마신 차가 떡차였음을 다시 한번 증언한다. ‘자순(紫筍)’과 ‘백토(白兎)’는 차의 이름이다. 자순차는 육우가 『다경』에서 이미 천하 제일의 명차로 일컬은 바 있다. 백토차는 월토차(月兎茶)를 변려문의 대우에 맞춰 색채어로 달리 표현한 것이다. 송나라 때 노공(潞公) 문언박(文彦博)에 얽힌 고사도 같은 시에 나온다. 문언박은 서촉(西蜀)에서 차 달이는 법을 배워 와서 정주(定州) 땅의 홍옥(紅玉)을 쪼아 만든 호사스런 화자(花瓷)로 차를 달여 마셨다. 석정(石鼎)과 한자(韓子) 운운한 것은 앞서 걸명시에서 본 한유(韓愈)의 「석정연구시서(石鼎聯句詩序)」에서 따온 말이다. 자신이 문언박의 도자기 찻잔의 호사스러움이나 한유의 돌솥의 담백함에는 못 미치지만 차를 아끼는 마음만큼은 그들에 못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
정작 혜장 선사의 『아암집(兒菴集)』에는 차에 관한 언급이 많지 않다. 다산과 만난 후 그와 『주역』을 논하며 주고받은 화답시인 「삼가 동천께 곤괘 육효의 운으로 화답하며(奉和東泉坤卦六爻韻)」란 시에서 처음으로 “패엽(貝葉) 불경 광주리에 가득하거니, 찻잎을 주머니에 담아 두었지. 貝葉曾盈篋, 茶芽更貯囊”라 한 구절이 있다. 동천(東泉)은 앞서도 말했듯 당시 다산이 머물던 강진 읍내 동문 밖 우물 옆 주막집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상 살펴본 차를 청하는 다산의 걸명 시문을 통해, 다산이 차에 관한 전문 지식이 상당히 깊었고, 생활화된 음차 습관은 물론, 차 제조에 대해서도 대단한 관심이 있었음을 본다. 또 한 가지, 당시 차의 용도가 단순히 기호 식품이 아닌 체증과 설사 등의 치료약으로서의 쓰임이 컸음을 이들 시문들은 한결같이 증언한다.


다산이 혜장에게 보낸 걸명 시문은 훗날 추사가 초의에게 보낸 일련의 걸명서(乞茗書)와 함께 우리 차 문화사의 특별한 장면을 보여준다. 이는 당시 차를 만드는 사람이 거의 없던 조선의 특수한 상황이 빚어낸 독특한 문화 현상이다. 다산의 걸명 시문 이래 걸명의 풍조는 하나의 유행처럼 번져갔던 듯하다. 이들 시문 속에는 선인들의 차 사랑과 풍류와 해학이 오롯이 살아 있다.

출처 : 漢詩 속으로
글쓴이 : 巨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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