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일기

왕궁리 유적

차보살 다림화 2015. 6. 13. 18:15

 

 전주왈츠  - 유호 작사, 손석우 작곡, 송민도 노래

 

그대가 나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풍남문 종소리에 나를 깨워서

남고산성 달빛 아래 나를 재워주

(후렴)

아 - 아 -

덧없이 세월은  흘러가도

백제 서울 옛꿈은 마냥 새로워

 

그대가 홀로 지나가는 길손이라면

모악골 길목마다 정을 남기고

기린봉 넘어 울면서 가리

 

그대의 마음 말해주기 부끄럽다면

덕진 못 맑은물에 비쳐 주거나

한벽루의 옥돌처럼 간직해 두오.

(이 노래는 1960년 4월 11일 KBS 전주방송국 개국 1주년 기념으로 만든 노래로서 이날 밤, '시네마 오스카'에서 발표한 것임.

 

 

돌아가는 발길이 즐겁다. 아니, 자동차을 운전하는 마음이 가볍다. 흔들리는 자동차의 울림이 마음의 박자처럼 온몸에

어떤 기쁨을 주는 것 같다. 감동! 어떤 일에든 감동을 받는다는 것이 일상을 운용하는 원동력이 되는구나! 새삼스럽게 생각한다.

호기심이 몸을  활기있게 움직이게 하는 계기를 주고, 또 호기심의 발단을 추적한 뒤에 오는 감동이 더 나아갈 수 있는 에너지 역활을 한다.

자동차가 엔진의 힘으로 굴러가고 운용하는 사람의 마음이 운전자가 되듯 어떤 감동은 운전자의 마음을 생기있게 하는 에너지가 된다.

오늘, 그와 같은 감동이 새로운 활기를 생기게 한다. 바로 왕궁리 탑을 새로운 각도에 보게 되었다. 30여 년 전부터 가끔 봐 오던 탑이다.

처음에 보았을 때는 석탑이 주는 감동이라기보다는 어떤 신암심이 작용했지 싶다. 그 무렵부터 다도를 익히고 있었기 때문이지 싶다.

스님이 좋아하는 왕궁리 탑과 이웃에 있는 미륵사지 석탑에 우리 다도회원들은 가끔 헌다의례를 했다. 석탑이 부처의 사리를 묻고 있기

때문에 석탑은 부처 자체였다. 애초에 불교에서는 절집이 생기기 전에 부처의 사리를 모시는 탑을 먼저 조성했다.

그리하여 믿음이 있는 자는 석탑을 예배 대상으로 여겼다. 석탑의 조형미를 감상하기보다는 경회심을 가지고 탑에 차를 올리고 탑돌이를

했다.

 

옛날에는 탑주변은 온통 풀더미에 덮여 있던 주변이 잠자듯 신비에 가려져 있었다. 봄이면 탑 입구의 벗나무에 벗꽃이 필때는 탑의 아름다움도

덩달아 화하하게 빛났고 가을이면, 마른 풀 언덕에 홀로 우뚝 서 있는 5층 석탑은 쓸쓸하여 외로움의 더께를 한겹 더 입었다. 그리고 겨울이면

눈발을 받은 석탑은 오히려 따뜻하게 보일정도로 아늑하게 조용한 숨을 쉬는 듯도 했다.

옛날에는 문화유적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을 때다. 석탑 주위의 잔디밭에서 돌탑이 보초를 서는 듯, 안전한 거리에서 자리 깔고 쉬기도 했다.

돌을 어루만지며 경외심과 묵직한 알수 없는 믿음도 있었다. 아무도 눈여겨 봐주지 않을 때라, 마음놓고 사랑할 수 있었지 싶다. 왜 무엇이 그토록

석탑의 아름다움이 내 안에서 힘을 주었던지 알 수 없었다. 말할수 없는 예술인의 혼이 연결되었을까.

왕궁리 5층탑이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지점이 있다고 말해준 해설사의 인도로 우리는 그 장소를 찾아갔다.

탑의 서쪽 1.000여 미터의 거리에서 보는 석탑이다. 석탑 옆으로는 삼례에서 논산으로 가는 국도 1번의 대로가 있다. 그 길을 천천히 달리면 길 옆으로 탑의 전 모습이 보인다. 그 길을 아래로 지나서 서쪽 논 가운데로 간 거리에 차를 세우고 바라보았다.

미술사학자 강우방씨가 발견한 지점이란다.이 탑이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탑이라고 그는 자랑했단다. 백제의 탑. 통일신라에서 석가탑이 탑의 정형으로 가장 비례미가 아름답다고 했다. 석탑의 양식이 시대에 따라 변형해왔지만, 정형화된 탑 이전의 백제 탑이 아름답다고하는 것은 탑의 양식이 목탑의 모습에서 이어져 내려온 짜임새에서 오는 부드럽고 온화한 느낌이지 싶다. 가까이서 바라보면 장중하여 압도되지만 약간의 거리를 두고 바라본다면,

옥개석의 받침 수와 층층의 덮개 돌의 선과 몸돌의 어울림이 주는 형식 미가 아름다움과 어떤 조형미를 주는 것이다. 백제탑은 덮개돌의 면 끝이 버선코처럼 살짝 든, 마치 춤사위의 손끝 동작처럼 살풋 치켜들었다.

멀리서 아련하게 보이는 석탑은 날개를 접고 안전한 곳에 내려앉아 천년 세월을 지키고 있다. 백제인의 어떤 삶의 철학이 강직하기만 한

돌에 예술혼을 실었을까. 생명을 불어넣은 돌탑에서 어떤 정신을 발견해야 하는걸까. 옛 백제인의 삶의 철학과 이지를 통하여 오늘 내게

새로운 감동을 주는 것은 무엇일까. 천4백 년 전의 혼이 지금까지 전해내려오는 어떤 정신에 감동된 것일까. 어떤 감동이든 그 감동을 통하여 우리의 의식은 새로운 통로를 발견하는 것 같다. 생활의 활력이 되어서 행동의 변화도 일으키고, 보람찬 삶의 변화로 이어지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날로 새로운 감동의 날들을 얶어가면서 새로운 역사를 만들고 그 역사는 다음의 세대로 또 이어지리라.

 

 

 

 

 

망연히 처다보았다. 아직 모를 심지 않은 논에는 물을 받아놓았다. 몇겹의 논두럭을 넘어서 전보대도 보이고 시전이 닿은 끝에 산이 들러쳐져 있다

그 산의 높이에 탑의 상륜부가 닿았다. 탑 앞의 벗나무들이 숲으로 보이고 한 쪽으로 약간의 공간이 있는 가운데 뚜렸한 모습으로 보이는 석탑은

먼 산과 주위 숲이 어울려 신비한 감응을 구고 있다.  흘러가버린 세월을 품고 있는 석탑은 가까이 가면 그 세월을 풀어낼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저녁 이내가 내리는 시각, 안타까워 그리는 백제의 옛꿈을  말없이 말하고 있지 않은가. 아스라이 먼 것 같지만 또렷하게 어느 순간은 가까이 보던 때와 더 장중하게 다가오는 석탑.

 

 

 

 

 

 

근처의 고도리에는 석조여래입상 두 기가 200미터의 거리를 두고 마주 서 있다. 

언제부터 서 있었을까. 설명에는 고려시대 양식을 띄고 있다는데, 백제 이전의 마한시대부터 있었지 않을까. 마한시대의 금마지역을 수호하는

신처럼, 마치 절집의 일주문처럼 호위무사 같이 오랜 세월을 지키고 있다.

 

 

 

 

 

논에 모가 자라서 푸른 들판은 초록 융단을 깔은 듯하다. 비오는 어느날 다시 이 곳을 찾았다. 비오는 날은 그 석탑이 잘 보일까. 궁금했다.

카메라 줌을 끌어당기지 않은 거리. 초록 논을 넘어서 멀리서 더욱 또렷하게 탑이 보였다. 주위가 온통 안개가 끼어서 하늘은 회색빛인데,

석탑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뒤의 산그림이 모두 안개에 가려져 있기 때문에 오히려 석탑만 홀로 선명했다.

 

 

 

 

 

왕굴이 석탑 주몆은 발굴작업이 거의 끝나서 그 옛날에 왕성이었다는 것이 여실하게 드러났다. 한때는 왕궁이었다가 백제가 망한 뒤에는

왕궁 사찰지로 변환된 것이다. 혹자는 견원이 후백제 도읍지를 정할 때 이곳 왕굴리 유적을 생각했다는 설도 있다고 하는데, 그럴만한 곳이다.

비오는 날 고즈넉하게 궁성이었던 당시를 상상하며 석탑 뒤의 후원지까지 걸어보았다. 그때도 비오는 날이 있었을 것이며 바람이 부는 날도 많았으리라

겨울에는 눈도 왔으리라. 비를 피해서 또는 눈바람을 피해서 제각지 역할과 위치에 따라서 어느 전각 밑에서 생활을 하고 있었겠지, 때로는 빗장을

열어고보 언제 비가 그치나 하늘을 우러렀을 것이다.

이웃의 미룩사지 아래 용화산의 줄기가 끝나는 지점이라 했던가. 궁성을 쌓기 위해서 터를 높혔을까. 주위보다 언덕처럼 높은 곳에서 사방을 둘러보니

평화로운 논밭이 펼져져 있다. 아련한 세월 동안 묻혀있던 백제의 옛꿈이 새롭게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미륵사지를 비롯하여 이곳 왕궁리 유적은 공주, 부여, 익산 유적으로, 백제유적지구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는 쾌거를 덛었다.

말 그대로 백제의 옛꿈이 새롭게 열리는 계기를 맞았다.

 

그대가 나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풍남문 종소리에 나를 깨워서

남고산성 달빛 아래 나를 재워주

아 - 아 -

덧없이 세월은 흘러가도

백제 서울 옛꿈은 마냥 새로워

 

전주가 36년 간의 후백제 도읍지였다니, 백재의 옛꿈은 익산지역으로부터 시작하여 부흥하여 그 꿈이 키워졌지 싶다.

이제는 근업한 모습으로 경계를 둘러치고 있어서 옛날처럼 친근하게 다가갈 수도 없다. 우러러보고 그려가야 하리라. 백제인의 꿈이

천년 만년 이어지도록

왕굴리 유적의 전시관이 세워졌을 때, 좀 의아했다. 석탑 하나 덩그러니 있을 뿐인데 그 넓은 주차장에대 전시관이라니.

발굴하고 보니 그럴만한 유적이었다. 왕궁터였고 그 뒤 사찰지였다는 명와와 많은 유물이 나왔으니.  신비에 쌓여서 그리움만 키워왔던 옛꿈이

낱낱이 드러났다. 과연 탑 하나가 아우를 수 있는 유적지였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석탑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 아름다움의 정신이

앞으로 한국인의 생활 정서에 쌓여서 빛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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