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조선시대 옛 고운님의 이곳 한양 도성에서
출발 북한산행을 그당시 그 느낌으로 따라 가봅니다.
.때는 조선 중기 ..뭉클하고 찡하고 옛님의 숨결 진하게 전해져 오는군요..
조선시대 유광천님의 옛글입니다..
유광천은 승정원의 정3 품으로 오늘날로 보면 청와대 비서관급에 해당되겠네요..
1779 년 4 월 정확히 지금으로부터 298 년전이로군요..
임금곁에 늘 가까이 있다가 시간을 내어 다녀와
이 글 남겨두었던 옛 고운님아~~님의 발자취 따라 오늘 나 그대 기억 더듬으며 떠나렵니다..
아름다운 옛날로의 멋진 여행길 되셨으면합니다..
옛님의 숨결입니다..
↓ 2007 년 지금의 우리의 서울 중심가
우리의 옛서울입니다..
지금의 명동 입구 근처에서 종각쪽으로 난 대로변 남대문로 옛모습으로
1800년대 후반경으로 저멀리 북한산 준령 향로봉 비봉 보이고
파노라마처럼 문수봉 보현봉 가까이 손에 잡힐듯하고
북악산이 떡하니 자리하고 있네요..
왼쪽 저멀리 광화문과 경복궁의 전각들도 보이고..
햐~~세상에 저런 시절이 있었다니 상전벽해랍니다..
당시를 살다가신 한복 흰옷 차림의
우리네 선조님들 뵈오니 코끝이 찡해져옵니다..
↓ 1800 년대 후반 무렵 우리의 서울 보고 있으려니 콧등이 시큰거려 오네요
자 ~~ 이제 출발해 봅니다..
지금 이곳은 2007 년 대한민국 수도 서울 중심가
아득한 옛날로의 타임머신을 타고서 슈~우웅~~~
출발~~때는 조선시대 기해년 1779년 4월 15일 기사일로 거슬러 갑니다..~~~
한양에 놀러와 삼각산의 진면목을 보지 못하는 것은
동노인(東魯人)이 궐리(闕里) 의 행단(杏壇) 을 모르는 것과 거의 같다.
올해 봄 날짜를 정해 떠나기로 약속했던 자들이
여러 차례 이 일 저 일에 얽혀 어느덧 봄이 끝나갔다.
이에 초여름 보름에 갑자기 행장을 꾸리며 말하기를,
“푸른 그늘, 꽃다운 풀이 또한 꽃 피는 시절보다 낫지 않은가?” 라고 하였다.
↓ 창의문을 통과했을 옛 고운님 성곽 돌은 여전하고
창의문 바닥 돌은 또 얼마나 맨질맨질 닳았던지 일명 자하문이라고도 함
사간(司諫) 기국진(奇國鎭)과 정우(正宇) 시회(時晦) 이엽(李爗) 이
나란히 말을 타고 떠나서 시가를 뚫고 성을 나가니
먼지 기운이 차츰 멀어졌다.
창의문 밖 시냇가에 이르러 이시회가 말을 멈추고 돌아보며 말하기를,
“탕춘대(蕩春臺)와 세검정(洗劍亭)을 빠뜨리고 볼 수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 내가 웃으며 말하기를,
“내가 지난봄에 지은 시와 그림을 보면 충분할 것이니,
한가한 날에 청려장을 짚고 다시 오는 것도 괜찮을 것일세.”
라고 하였다.
한북문(漢北門)에 올라, 홍제원(弘濟院)을 지나가니,
사방 들녘에 보리가 익어 누렇고,
창포 노래에 쟁기 뒤척이니,
갑자기 고향 전사(田社) 의 정취가 일어났다.
↓ 그 옛날에 한북문으로 불리워졌던 지금은 홍지문으로 부른다
낮에 진관사(津觀寺)에서 쉬었다.
절이 쇠잔하고 승려도 적어서 별로 볼 만한 것이 없었지만
메마른 바위와 드문드문 있는 나무그늘, 폭포의 흰 물결을 보고있노라니
적이 속세에 찌든 뼈가 벌써 허물을 벗고 있음을 느끼겠다..
푸른 들에 나귀를 풀어놓고 시원한 서쪽 누각에서 쉬었다.
졸다 일어나니, 소반 가운데 채소가 향긋하고 차가 담박했다.
여기에서 청담(靑潭)은 다만 3,4후 (堠)정도 ##거리라고 한다.
해가 서쪽으로 지니 마음이 바빠져서
곧장 북루(北壘)로 향하니, 모든 맑은 흥취도 사라졌다.
이로부터 지세가 점점 높아지고 돌과 자갈이 서로 버티고 있으나,
필로(蹕路) 가 숫돌같이 평평하여 지팡이와
나막신을 번거롭게 할 필요 없었다.
대략 몇 리를 가서 성 밑에 이르러, 대서문(大西門)에 올랐다.
↓ 노적봉 아래 중흥사지 지나 청담..
지금의 초석뿐인 산영루 바로 앞 넓은 계곡이 청담이다
산이 삼면을 가리고 있어,
시야가 넓지 않았으나,
은빛 바다 일대에 푸른 산봉우리〔螺鬟〕
너머로 어슴푸레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은 물에 솟은 섬이었다.
↓ 경복궁 근정전 처마뒤로 북악산의 가을
누각을 내려와 말을 치달려 중성(重城)으로 돌아드니,
산은 더욱 빼어나면서 험준하고,
물은 더욱 맑으면서 세찼으며,
바위는 더욱 고우면서 기이했고,
아름다운 나무가 우거져 그윽한 새가 서로 지저귀었다.
절간과 불탑이 구름 사이에 솟아 있고,
소나무 울타리를 한 띳집에서 좁은 길을 끼고 밥을 짓고 있었다.
↓ 약수암 릿지 끝부분 염초릿지 말바위와 만나는말바위 암릉구간 풍경
맑은 여울이 돌아흐르는 곳에 우뚝 선 붉은 누각은 바로 산영루(山暎樓)였다.
↓ 이곳은 민지암 계곡으로 산영루로 이어지는 계곡이 너무 아름답다..
민지암 이곳 옛시 한구절이 다음과 같이 전해져 오네요...
숙종과 영조때 시인 국포(菊圃) 강박(姜樸; 1690-1742)이 민지암을 이렇게 노래했네요..
윗바위는 처마를 친듯하고 아랫바위는 상(床)과 같이 평평하네
맑은 샘물이 둘러 감싸고 주위의 흰돌은 찬란이 빛을 내네
민지의 옛 유터에 의지하여 노래하고 사방을 둘러보며 거니니
산새소리 끊이지 아니하고 숲속에선 꽃 행기가 절로나네
민지암 앞 흐르는 물 끝이 없고 산에 꽃은 피고 또 피니
잔들고 긴 휘파람 소리 민지여! 어이에 있느뇨
아로새긴 난간이 시내에 잠겨, 석양에 붉은 물결 일렁이고,
숲에 이내가 자욱하여 푸른빛이 성긴 창에 떨어지니,
일찍이 이 누각의 경물을 묘사한 시에 화답했었는데
, 올라보니 그 기이함을 곱절 더하다.
다시 오언율시를 지었다.
↓ 북한산 국녕사 대불
저녁에 중흥사(重興寺) 동쪽 방〔東寮〕에서 머무는데,
부질없이 흥이 나서 시를 지었다.
어떤 스님이 자신이 치영(緇營) 의 주인이라고 하니
, 바로 승려를 통솔하는 벼슬을 맡은 승려로서,
푸른 눈동자에 긴 눈썹을 지녔다.
죽순과 막걸리를 대접하면서 산중의 고사를 잘 갖추어 말해줬다.
↓ 북한산 산영루..아름다운 정자는 어디가고 지금은 초석만이 황량하다
북한산은 백제 온조왕의 옛 도읍으로 성을 쌓은 것은
숙종 신미년(1691년, 숙종 17년)이었다. 거주하는 백성은
7백여 호, 사찰은 대략 열한 곳인데,
상운사(祥雲寺), 진국사(鎭國寺), 보광사(普光寺), 태고사(太古寺)가
그 중 가장 뛰어난 곳이다.
↓ 북한산 인수봉 남쪽 사면 풍경
오영(五營) 의 곡식 창고가 절 앞에 늘어서 있는데,
군량미〔餉穀〕가 거의 만포(萬包)이다. 동남쪽에
‘장수가 올라서서 지휘하는 대〔將臺〕’를 만들고,
병장기는 관아 창고와 각 사찰에 나누어 보관했다.
경영(京營)에서 병기와 군량을 관리했고,
성을 담당하는 장수가 그 일을 맡았다고 한다.
↓ 왼쪽 끝에 백운대 정상이 보이는 북한산
다음날 아침 치영에 걸린 어제시판을 삼가 보고,
행궁(行宮)에 들렀다.
행궁은 나월봉(蘿月峯) 남쪽, 남장대(南將臺) 아래에 있었다.
이어 동장대(東將臺)에 오르니 절과 군영 건물이
손바닥 안에 있는 듯 뚜렷하고,
산의 형세는 삼면으로 절벽이 우뚝한데,
서쪽 한 모퉁이만 약간 평평했다.
↓지금은 무너져 없어진 옛 행궁지 잡초 덩쿨 아래 돌더미 흔적만이
물이 그 입구를 돌고, 석회로 바른 성가퀴〔粉堞〕와
층층이 지은 보루가 아득히 산 등성이를 에워싸고 있어,
산이 하늘처럼 둥글게 엎드린 것이 몇 굽이인지 모르겠다.
↓ 흔적만 남은 행궁지에서 바라다 본 빼어난 북한산...
왼쪽으로부터 노적봉 백운대 만경대
용암봉이 병풍 두른듯 웅장한 북한산이 너무 아름답다
절벽은 묶어 세운 듯 칼과 창처럼 빽빽하게 둘러서 있는데,
가장 우뚝 솟은 것이 세 봉우리이다.
공중에 떠서 하늘로 솟구친 것이 백운대(白雲臺)이고,
그 북쪽에 우뚝 선 것이 만경대(萬景臺)이며,
그 남쪽에 우뚝하게 서서 동쪽까지 뻗어 웅거한 것은 인수봉(印綬峯)이니,
이것을 삼각산이라고 한다.
바라보면 옥 같은 불탑〔玉浮屠〕이 높이 솟아 남쪽까지 뻗어가다
약간 낮아지다가, 갑자기 솟은 것이 바로 노적봉이다.
삼각산 중에 백운대가 가장 높다.
그 정상에 오르면 시야가 오(吳)나라와 초(楚)나라의 산과 바다까지 미친다고 한다.
산허리에 옛날부터 바위에 구멍을 뚫어 발을 댈 수 있는 곳이 있는데,
한 번 미끄러지면 천길 낭떨어지라 결코 목숨을 아끼는 자가 아니라야
감히 다리로 버틸 수 있다.
정신을 집중하고 올려다보는데, 오직 모골이 서늘질뿐이다.
바람이 불어오니 어느덧 하늘 높이 올라
삼청(三淸) 세계에 들어온 듯한 생각이 든다.
↓ 왼쪽으로 백운대와 우측으로 만경대 정상 풍경
대체로 우리나라 산은 기세가 높고 구불구불 내려오는데,
장백산(長白山)에서 가까이 솟은 것은 불암산(佛巖山)이고,
불암산이 뻗어서 수락산(水落山)이 되었고,
또 돌아서 도봉산(道峯山)이 되었으며,
기운이 서려 모였다가 둘러쳐진 장벽으로 배열되었다.
그 중 빼어난 것은 군대 앞에서 만마가 달리는 것 같은 암벽으로 솟았고,
오랜 시간 동안에 불탑이 층층이 서서 삼각산으로 많이 모여들었다.
↓ 가을 단풍 든 염초 릿지 구간 우측에 백운대 보이는 북한산
삼각산 대맥은 동쪽으로 돌아서 남쪽으로 뻗어 중앙을 둘러 안아
북한산 한 구역을 열었고, 문수봉(文殊峯) 한 갈래가 남쪽까지 뻗어
왕성(王城)의 북악(北嶽)이 되어 우리 억만년 왕실의 큰 복의 기반이 되었으니,
이는 참으로 하늘이 만든 서기(西岐) 이다.
아, 기이하도다. 서울 성시(城市)가 산봉우리에 가려
가까우나 보이지 않고, 눈 아래 상서로운 구름이 은은한데
아름다운 기운이 떠 있으니,
백악산(白岳山)과 종남산(終南山) 사이라는 것을 알겠다.
↓ 만가지 풍경을 볼수 있는 만경대 정상에서
사방을 둘러보니 ~~1603 년 9 월 선조 임금 당시 예조 판서였으며
시인 풍류객이었던 월사 이정구님의 옛글속으로 빠져듭니다....
.///...서남의 큰 바다가 멀리 푸른빛으로 가지런하고,
떠 있는 구름과 지는 해에 은빛 세상이 아득하였다.
눈을 부릅뜨고 바라보아도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알아볼 수 있는 것은 양주의 수락산(水落山)과
아차산(峨嵯山), 강 남쪽의 관악산(冠岳山)과 청계산(淸溪山),
개성의 천마산(天磨山)과 송악산(松嶽山), 성거산(聖居山) 등으로,
차곡차곡 개미집처럼 포개져 있었다.
양평의 월계협(月溪峽)에 물길이 터져 있는데,
놀란 물결이 서쪽으로 퍼붓듯 달리고 있었다.
한강 한 줄기가 완전히 얼음같이
흰 비단을 풀어놓은 듯 뻗어 있었다.
구불구불, 굽이굽이 도성을 에워싸고 흘렀다.
먼 곳의 봉우리들과 어지럽게 놓인 섬들이
구름 가에 어른거렸다.
승려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나에게 저기는 무슨 산이고, 여기는 무슨 강이라고 일러주었다.
나는 이때 황홀해서 알아보지도 못하고
“그렇군, 그렇군” 하였을 뿐이다.
도성의 백만 채 가옥이 너무 가까워서 보이지 않았다.
그저 발아래 밥 짓는 연기가 연출하는 생생한 그림 한 폭만 보였다.
구름 틈으로 상투처럼 생긴 것이 하나 드러나 보이는데, 바로 남산이었다
. 동남쪽으로 끝까지 쳐다보니 끝이 없어,
긴 강은 명주를 펼쳐 놓은 듯하고,
먼 산봉우리에서 고운 연기가 나니,
완연히 수놓은 비단을 펼쳐놓은 듯한 산수였다.
내가 이에 사방을 바라보고 탄식해서 말하기를,
“이 곳에 오른 자가 무슨 한이 있겠는가?
스스로 높이 올라 본 자가 아니라면 누가 이렇게 대단한 경관임을 알겠는가?”
라고 하였다.
↓ 우측 태극기 보이는곳이 백운대 정상 옛 고운님의 느낌 알수 있겠다
이어서 옛날에 강국이라고 불렀던 동한(東韓)을 생각하니,
큰 당나라의 병력으로도 살수 서쪽에서 머뭇거리다가
칼날을 거두어 돌아간 것은 그 지세가 절벽으로 막히고,
성의 해자가 험준하고 좁았기 때문이다.
↓ 백운대 정상에서 인수봉 바라다 본 모습
. ↓ 염초봉 말바위 하강후 바라다 본 인수봉 정상 대동문(大東門)을 나와 말을 놓고 걸어갔다.
돌비탈길이 험하여 마른 다리가 비틀거리니,
가면서 ‘행로난(行路難)’을 길게 읊조렸다.
조계(曹溪)의 뛰어난 경치를 손으로 가리키며 보는 중에 피곤이 심해졌다.
또 가뭄 끝이라 폭포의 물이 많지 않을 것 같아서 시로써 빚을 남기니,
매우 아쉬웠다.
↓ 숨은벽 꼭대기.. 계곡에서 올려다본 풍경 고개를 내려와 기 노인(奇老人) 은 바로 돌아가고,
나는 도원(道院)으로 향하여, 장난삼아 ‘오말루원(午抹樓院)’이라는 시를 짓고,
서계(西溪)로 향하여 세이정(洗耳亭)에서 쉬었다.
청절사(淸節祠)를 방문하니,
바로 매월당 김시습의 영혼을 모신 곳이다.
진상(眞像)에 절을 올리고, 느낀 바를 절구 두 수에 붙였다.
해질녘에 도봉산으로 들어가니 골짜기 안은 구름이 걸친 숲으로 이미
속세의 기운이 아니었다.
푸른 벽에 붉은빛으로 ‘도봉동문(道峯洞門)’ 네 개의 글자가
커다랗게 새겨져 있다.
↓ 바윗길이 아름다운 북한산 도봉 서원에 이르러 다만 사당 앞에서 배알하고, 이리저리 둘러보니,
강당이 널찍하고 사롱(紗籠) 속에 어필로 ‘
도봉서원’이라고 쓴 큰 액판(額板)이 걸려 있었다.
위에 우암 송시열 선생의 ‘개(開)’ 자 칠언절구가 있고, 서쪽 문미에는
‘계개(繼開)’라고 썼으며, 동쪽 익실(翼室) 에는 ‘의인(依仁)’이라 편액했고,
서쪽 익실에는 편액이 없다
.↓ 도봉산 천축사 동쪽에 ‘광풍당(光風堂)’이 있는데,
관을 쓴 자와 동자 4, 5인이 마루에서 글을 읽고 있었다.
↓ 아름다운 우리의 산하..
북한산 위문 옆 스타바위 2007 년 10 월 21 일 단풍으로 곱게곱게 물든 모습
서쪽 모퉁이의 작은 문에 ‘영귀(咏歸)’라고 써 있다.
남쪽으로 물이 쏟아져 내리고 푸른 병풍을 친 듯한 숲 위에
누각 하나가 날아갈 듯 서 있는데,
오른쪽은 ‘침류(枕流)’라고 편액했고, 왼쪽은 ‘제월(霽月)’이라고 편액했다.
뜰 가운데 늙은 괴나무와 우거진 오동나무가 늘어서 있는데,
‘침류당’에서 잠시 쉬노라니,
번거로움과 시끄러움이 저절로 사라져 가슴속이 후련했다.
시냇가로 걸어나와 돌아보니 천길 되는 봉우리 하나가 우뚝 솟았는데,
큰 맥 하나가 일어나 삼각산으로 달려나가 왼쪽 한 자락으로 서려 포부를 편 듯 의젓하여,
마치 도를 깨우친 자가 단정히 손을 모으고 있는 기상과 같으니 ‘도봉(道峯)’이란 이름에 알맞다.
백 줄기 맑은 시냇물이 발원하여 진수를 하나의 골짜기로 쏟아내니,
바위에 부딪쳐 물살이 거세지고, 소용돌이치다
폭포로 흐른다. 침류헌 밖으로 폭포가 웅장하여,
뿜어낸 것은 푸른 무지개와 같고,
소리는 우레가 들끓는 것 같으며, 물방울은 구슬을 흩뿌린 것 같았다.
물이 콸콸 흘러 아홉 구비에 옥 부딪는 소리 울리고,
물을 끼고 어지러운 바위가 이가 어긋난 것처럼 여기저기 있는데,
어떤 것은 넓고 커서 앉을 만하고,
어떤 것은 구불구불하여 하나로 잇기 어렵다
. 마치 용이 웅크리고 범이 걸터앉고 거북이가 엎드리고,
새가 나는 것 같은데 물이 스며든 곳에 바위가 쌓여 물이 넘실거리고
부대끼어 색이 밝고 미끄러워 하나하나가 유리를 땅에 깔아놓은 것 같다
.↓ 뒤로 도봉산 만장봉 보이고 천축사 가을 풍경이 아름답다 바위 위에 힘찬 필치로 몇 구를 붉게 새겼는데,
바로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동춘(同春) 송준길(宋浚吉) 두 분 선생과
도암(陶菴) 이재(李縡) 선생이 쓴 것이라고 한다.
아, 우암 선생이 먹으로 쓴 시의 흔적을 어루만지니
그 당시 모습이 떠오르는 듯했다.↓ 양천 궁산에서 한강 너머 저멀리 북한산 바라다 본 풍경 사모하는 보잘것없는 이 마음을 사당 앞에
‘다만 후인이 와서〔唯有後人來〕’라는 싯구에 붙이니,
혹자는 뒤에 온 사람이 추배될 시참으로,
도봉산 아래 이렇게 맑고 훌륭한 신선 마을〔洞府〕을 연 것은 은연중
우리 도가 맑고 깨끗한 기운을 모아 길러 영령이 함께 흠향받기를
기다리기 때문이라고 했다.
만약 산악의 바른 기운이 도학의 진원이라면
천년토록 오랫동안 보존될 것이니,
또한 기이하지 않은가?
↓ 숨은벽 최고 끝부분으로
바로 앞 길다란 바위 좌우 아래로 천길 낭떠러지 구간임 저녁이 다되어 근원을 찾을 방도가 없었다.
골짜기 북쪽에 옥천사(玉泉寺)가 있는데,
역시 올라 보지 못했으니 아쉽다.
밤에 ‘의인재’에서 묵으면서 등불을 돋워 시를 지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산에 구름이 일어나고 비가 장난했다.
해질녁 하늘이 열리는 것에 관심이 있었는데,
하늘이 내가 돌아가려는 것을 안다는 것에 문득 기뻤다.
흥이 나서 서둘러 안장을 준비하고 골을 나오니,
구름이 엷고 바람이 가벼웠다.
↓ 성철 스님의 길상사 극락전 한번 동소문으로 들어오니 옛날처럼 가벼운 먼지 속의 객인데
옷깃에 가득한 노을과 이내가 아직 옷자락을 스치는 것을 알겠다.
마침내 기록해서 훗날 볼 것에 대비한다. ..
.이상 여기까지 옛 고운님의 글이었습니다..느낌이 조금은 와 닿으셨는지요 ?
FONT style="FONT-WEIGHT: bold; LINE-HEIGHT: 160%; TEXT-DECORATION: underline" face=굴림체 color=#ff0000 size=3>↓ 경복궁 경회루의 가을 경복궁의 북문인 신무문 오랜시간 굳게 닫혀
출입이 불가는했던 신무문 지금은 자유로이 출입이 가능하답니다..
저문 들어서면 곧바로 앞에 명성황후와 고종임금의 처소로 사용했던 건청궁
옥호루입니다..
그 앞에는 향원정이 있구요.
.↓ 청와대 앞 경복궁의 북문인 신무문의 가을 고즈넉하고 풍경이 있었던 아득한 과거로의 여행길~~
타임머신 타고서 거슬러 거슬러 다녀오신 고우신 님들
오늘 2007 년 10 월 28 일 휴일날로 되돌아 나오셨습니다..
아름다운 가을날 되세요..
사랑해요..^*^ 들녘에서 씀..
출처 : 그냥바람 마음
글쓴이 : 그냥바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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