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이야기

[스크랩] 한국의 차문화/ 손탁의 커피하우스와 조선의 차와 선

차보살 다림화 2008. 2. 17. 18:31
혜장(惠藏)과 다산(茶山)에 의해 다시 등장한 차 이야기는 유산(酉山) 운포(耘逋)에게로 내려와 추사(秋史)와 초의(艸衣), 해거(海居), 학고(學皐)도인 등으로 동호인을 늘려가며 다시금 이 땅에 문화로 피어날 듯 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당대 판서 승지를 지냈거나 임금의 부마 등으로 큰 영향력을 가진 문사들이어서, 마음만 먹었으면 차 산업을 일으킬 수 있고 부흥시킬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찌된 영문인지 그 기운은 조짐으로 만 끝나고 말았다. 다산이 가꾸던 차밭이며, 추사와 초의가 만든 제주도 다원을 보면, 그때 쯤은 여러 사람이 생산에도 관심을 가졌던 것 같은 데, 그러나 그들의 관심은 그저 동호인끼리나 즐겼던 정도로 끝나 버렸다. 왜일까. 다공(茶貢) 제도가 백성의 원성을 사던, 그런 때였기 때문이었을까. 개화기 차생활의 그림자는 무학재 밖 홍제원(弘濟院)에 끽다점이 생겨 서북에서 걸어오는 객들의 휴식처 구실을 하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초의가 입적한 해(1866)는 병인년으로 "병인양요(丙寅洋擾)"가 일어난 해였다. 조선에 들어온 천주교는 신유사옥(1800)으로 한번 큰 환난을 겪었으나 이때에 와서 천주교는 다시 신자를 늘려가고 있었다. 고종 3년으로 대원군 섭정시대였다. 천주교를 묵인하던 대원군이 이 해에 돌변하여 천주교 탄압령을 내리고 무려 8,000여명의 신자들을 일거에 죽여 버렸다. 간신히 탈출한 리델 신부는 중국 천진에 주둔하고 있던 프랑스 극동함대에 대학살을 알렸고, 프랑스 함대는 조선 정벌을 결의했다. 이 사실이 청을 통해 대원군의 귀에 들어오자, 조선 내의 천주교 탄압을 더욱 심해졌다. 이 해 9월 프랑스 전함 3척은 리델 신부와 조선인 3명의 안내로 인천 앞바다를 거쳐 서강나루까지 처들어 왔다. 조선은 힘들게 이들을 물리치긴 하였으나, 그러나 이 사건으로 새롭게 열강의 주목을 받는 나라가 되고 말았다. 독일 러시아 미국 일본 등은 틈만 보이면 다가와서 힘으로 통상을 요구했다. 일본이 어느 나라보다 집요했다. 10년 후인 1876년 조선은 더 버티지 못하고, 그만 힘에 밀려 한일수호조규(병자수호조규)에 조인하니, 이후 조선 땅은 순식간에 외세가 회오리치는, 열강의 각축장이 되고 말았다. 차 이야기는 다시 어디론가 숨어버렸다. 신유사옥과 더불어 다시 피어났던 차 이야기가, 병인양요로 사라지게 되는 것은 무슨 역사의 아이러니일까. 그 무렵 우리나라에 커피가 들어왔다. 첫 선을 보인 것은 1885년 경으로 프랑스 여성 손탁(Sontag)에 의해서였다. 그녀는 소설 "마지막 수업(授業)"의 무대로 유명한 알자스·로렌(Alsace·Lorraine)지방 태생이었다. 그녀는 때로 독일인 행세를 하기도 했는데, 이는 그 지역이 프랑스와 독일 사이 분쟁지역으로서 서로 빼앗겼다 탈환하기를 최근까지 거듭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러시아영사의 처형(妻兄), 즉 러시아 영사의 가족 일원으로 한국에 왔다. 동생이 중국 천진에 근무하던 러시아 영사 웨벨과 결혼하였는데, 1885년 웨벨이 한국으로 전임됨에 따라 함께 온 것이다. 고종 22년의 일이요, 그녀의 나이 32세 때였다. 손탁은 아름다운 용모, 부드러운 태도에다 음악과 미술에도 재능이 뛰어나 당시 서울 주재 외교관들 사이에 평도 좋고 인기도 있었다. 당시 조선의 궁중은, 몇 해 사이에 갑자기 서양사람이 많아져 이들 접대나 의전문제에 두통을 앓고 있었다. 이러한 때에 웨벨이 부임하면서 민비에게 손탁을 소개했다. 민비는 손탁을 접견한 뒤 그녀에게 궁중 내에서의 외국인 접대를 맡기게 되었다. 손탁은 임무에 충실한 틈틈이, 서양에 대해 별로 아는 것이 없는 민비에게 풍속, 습관에서부터 그림, 음악, 요리에 이르기까지 자세하게 알려주었다. 창덕궁 안의 서양식 응접실, 실내장식 등이 모두 손탁의 지휘로 이루어졌고, 서양 요리가 본격 도입되면서 커피도 들여왔던 것이다. 민비는 손탁을 무척 아꼈다. 민비가 친로파(親露派)로 성격지어지는 데는 손탁의 영향이 적지않았다. 만약 민비가 좀 더 오래 살았다면 조선의 진로는 지금과는 다른 모습이 되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민비는 1895년, 일본인들에 의해 시해되고 말았다. 일본은, 조선 진출에 우위를 차지하기 위한 전쟁이었던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기분에 들뜬 나머지, 하늘을 거역하는 잔학한 일을 저질렀다. 일본 입장에서 청 다음의 상대는 러시아였다. 청을 이긴 김에 아예 친로책을 강경하게 주장하고 있는 민비를 제거함으로써 "검은 야욕(野慾)"을 백일하에 드러낸 것이었다.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 갑자기 휘몰아친 외세 바람은 조선 조정을 당황하게 했다. 각 처에서 의병이 일어나고 중신들은 더욱 친로 성향으로 기울게 되었다. 1897년(고종34년) 고종은 조선왕조가 살아있음을 보여주기라도 하려는 듯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연호를 광무(光武)라 했다. 그러나 갖은 방법을 다해 조선을 유린하려고 작정한 일본의 모사는 거침없이 계속되었다. 98년 2월 흥선대원군의 죽음에 이어 8월에는 독다(毒茶) 사건까지 터졌다. 변혁의 소용돌이 한 가운데서 고종(高宗)은 손탁이 가져온 커피를 즐겼는데, 하루는 그 커피에 누군가 독을 탄 것이다. 다행히도 고종은 커피가 이상하다고 마시지 않았다. 그러나 그냥 마신 태자(훗날의 순종)는 그 자리에서 토하며 쓰러졌다. 하마터면 고종도 당할 뻔 한 일이었다. 조정이 발칵 뒤집혀 수사를 벌린 결과 러시아어(語) 통역관 출신인 김홍륙(金鴻陸)이 꾸민 일이라하여 그 일당이 처형되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고종을 시해하려들만한 동기가 없었다. 결국 독다사건의 진상은 미궁에 빠진 셈으로 지금까지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당시의 정세로 보아 진짜 범인들은 따로 있어, 러시아 관련자들에게 누명을 씌웠던 것으로 보인다. 태자는 이 사건으로 인하여 건강에 치명적 손상을 입었으며, 특히 이가 다 빠져 평생을 틀니로 생활해야 했다. 민비를 잃은 손탁은 그 발랄하고 재능많은 매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쓸쓸하게 지냈다. 일본인들이 러시아를 우습게 여기며 기세부리는 것도 그녀에게는 아픔이었다. 그녀는 조선을 제3의 조국이라 했을만큼 조국과 러시아 다음으로 사랑했다. 특히 민비로부터 총애를 받았던 이상으로 민비에게 의지했다. 그러나 민비는 가 버리고 러시아 세(勢)는 일본에 밀리고 있었다. 그녀는 우울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 모습을 측은히 여긴 고종은, 정동 29번지의 왕실 소유 대지 184평과 집 한 채를 하사했다. 경운궁 건너편이 었는데, 외교관들의 집회소 구실을 하던 집이었다. 청일전쟁 뒤에는 미국이 주축이 되어 조직한 정동구락부(貞洞俱樂部)로 사용되고 있었다. 손탁은 1902년 10월, 그 집을 헐고 이층 양옥(洋館)을 지어 "손탁호텔"로 경영하였는데 2층은 귀빈 객실, 아래층은 보통 객실과 식당, 커피하우스를 꾸미니,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커피하우스다. 이토(伊藤博文)가 조선에 왔을 때 이 호텔에 숙박하였으며, 러일전쟁 때는 윈스턴 처칠(W.Churchill)이 하룻밤 묵어가기도 하였다. 이 건물은 1917년 이화학당이 사들여 교실과 기숙사로 사용하다가 22년 이를 헐고 프라이홀(Frey Hall)이라는 붉은 벽돌의 3층 건물을 새로 지었다. 1905년 10월 노·일 전쟁에서 이긴 일본은 그 기세로 11월 제2차 한일협약, 즉 을사조약은 추진했다. 그리고 1910년에는 한일합방 조약을 완성(?)했다. 이후 조선은 35년 동안이나 일본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고 차생활 문화는 지방과 산골로 꼭꼭 숨어 버렸다. 차생활의 뿌리는 깊으나 문화로 다듬지 못한 우리에 비해, 일본의 다도는 그 뿌리야 어떻든지 간에 문명국의 상징으로 자라나 있는 때였다. 그런 일본이 조선 국토까지 강번하게 되었으니, 명맥뿐인 조선의 차를 무시한 것은 자연스런 일일 수 있었을 것이다. 이후 우리 국민 중에는, 차생활은 고사하고 차 자체를 모르는 인구가 늘어나게 되었다. 커피도 차의 일종이라는 혼돈이 일반화되어간 것이다. 반면 일본은 차를 세계에 수출(?)하며 아울러 다도를 대표적 문화로 내세웠다. 다만 한국에만은 들여오지 않았다. 벼룩도 낯짝이 있다는 속담처럼 우리가 근원을 캐기 시작하면 복잡해질 것을 경계한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덕분에 한국은 "차의 세계에서만큼은 철저하게 무식한 사회"가 되어갔다. 1930년대 사람들은 모든 마시는 음료를 통칭하는 단어가 "차"라고 여기게 되었고, 심지어 쥬스 코코아까지도 차의 일종으로 여기는 상식이 보편화 되어갔다. 그런 가운데 일부에서는 커피에 대한 기호도를 높혀갔다. 1914년 문을 연 조선호텔에서도 커피를 팔았다. 이어 청목당, 금강산 등이 생겨났고, 1930년 초에는 종로 2가에 멕시코 끽다점이 문을 열었는데 간판으로 큰 주전자를 내걸었지만 커피를 팔았다. 런던의 모자점이 큰 모자를, 장갑 가게가 큰 장갑을 내걸었던 것을 모방한 것이었다. 또 지금 프라자호텔 자리에 "낙랑"이라는 끽다점이 생겨 공예가 이순석(李順石)씨가 경영했고, 소공동에는 유치진(柳致眞)씨가 "플라타누"를 개설, 음악을 들려주며 커피와 홍차를 팔았다. 명동의 제일다방은 당시 경성일보 기자가 부업으로 했던 것인데 조선에서 "다방"이란 단어를 처음 사용한 끽다점이었다. 서울역 앞의 "돌체"는 고전음악을 들려주는 음악다방의 원조였다. 발 빠른 일본인들은 자연 한일합방과 더불어 한국에 진출했다. 이때 오사끼(尾崎)라는 한 일본인이 현해탄을 건너왔다. 광산을 개발하겠다고 온 그는 그러나 무등산 증심사 주변에서 야생하는 양질의 차나무를 먼저 발견했다. 그는 조선의 차를 추적했다. 그 결과 사찰 주변에 다촌(茶村)이 번성했었던 사실을 알아냈다. 그는 목적을 바꿔 무등산에 주거를 마련하고 이 일대를 임대해 다원으로 가꾸었다. 그리고 나주 불해사(佛海寺), 장흥 보림사(寶林寺)에도 손을 뻗어 다엽(茶葉) 채취권을 독점한 뒤 곧 차 생산을 기업화 했다. 그는 큰 돈을 벌고 성공했다. 그가 만든 차는 일본에 공급되어 최상품으로 품질을 인정받았다. 이때 오사끼가 경영한 무등산 차밭이 광복 후 의재(毅齋) 허백련 화백이 춘설차(春雪茶)를 만들어 낸 삼애다원(三愛茶園)이다. 오사끼(尾崎) 이후 조선의 차에 관심을 갖는 일본인들이 생겨났다. 조선의 차 산지와 음다 풍속을 책으로 엮어내기도 하였다. 그들은 한결같이 놀라움과 의문을 동시에 나타냈다. 조선에 품질좋은 차가 있는 사실에 대한 놀라움이요, 그런데 왜 조선에 차생활 습속은 없느냐는 의문이었다. 일본인으로서 조선의 차에 가장 관심을 보였던 이는 "조선의 차와 선(朝鮮の茶の禪)"을 공동 저술한 이에이리 가즈오(家入一雄)와 모로오까 다모쓰(諸岡·存1879∼1946)였다. 현지 조사나 자료 수집은 가즈오가 했지만 내용은 다모쓰의 의도대로 만들어졌기에 보통은 모로오까 다모쓰의 저서라 하기도 한다. 유명한 온천지 사가현(佐賀縣)이 고향인 그는 나가사끼의 미션스쿨인 스틸 칼리지(東山學院)에서 공부한 뒤 구주대학(九州大學)의과를 졸업, 진화론(進化論)과 신경학(神經學)을 연구했는데, 그가 차에 관심을 갖게된 것은 2년간의 영국 유학이 동기였다. …영국인들은 노련한 솜씨로 세계 각지의 문물을 수집하고 있었다. 특히 이상한 것은 영국에서는 나지도 않는 차를 아침 저녁으로 마신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은 인도산 아편을 중국에 팔아 얻은 은으로 차를 사서 마셨다. 차 마시는 풍습이 도시 농촌 가릴 것 없이 전국에 퍼져 생활의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시내에는 도처에 찻집이 있을 뿐만 아니라, 어떠한 행사에도 차 세레모니를 곁들이고 있었다. 차를 확보하기 위해 인도에는 중국산 차나무를, 실론에는 미얀마의 차나무를 심어 대단위 다원을 만들어 놓기도 하였다. 호기심이 일어 역사를 연구해보니 앵글로 색슨 족의 문명이라는 것이 차가 수입되면서, 차생활에 의해 키워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닥터 사무엘 존슨의 "영문학을 중심으로한 영국의 다도"는 청년 문화인에게 강한 자극을 주는 것이었다… 귀국 후 그는 차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끽다양생기" "차와 그 문화" "다경평석" 등 여러권의 차에 관한 책을 지었다. 그는 조선의 차와 선을 엮은 동기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했다. …1938년 11월 이래 여러번 조선을 방문할 기회를 얻었는데, 광주의 산림기사인 이에이리가즈오(家入一雄)씨를 만난 것이 행운이었다. 함께 깊은 산속을 뒤져 지금까지 숨겨져 있던 조선 사원의 덩어리차 만들기를 실제로 견학 조사할 수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많은 귀중한 자료가 가즈오씨에 의해 수집되어 있었다. 그 자료를 통해 비로소 "다"에 적혀있는 당대(唐代)의 단차(團茶) 만들기, 달이기, 마시기를 자세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가 곧 40년 10월에 발행된 "조선의 차와 선"이다… 다모쓰가 펴낸 조선의 차와 선은, 당시 차에 관한 기록이 이능화(李能和1869∼1943)가 조선불교통사에 수록한 것과 문일평(文一平1888∼1939)의 차고사(茶故事)정도에 불과했던 시점에서 상당한 주목을 끌었고, 지금도 차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귀중한 자료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그 책은 조선을 무시했던 전형적 일본인의 색깔을 담고 있다. 앞에 공저(共著)라 하였듯 책의 주요한 부분은, 전라남도 산림과에 근무하던 이에이리 가즈오의 조사와 현지 답사, 자료 수집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가즈오는 사실 다모쓰를 알기 이전부터 조선의 차를 찾아 다녔다. 때문에 그의 자료만으로 책을 엮었다면 보다 순수한 자료가 되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의 자료를 훑어본 당시 동양차의 권위자 다모쓰는 가즈오의 조사보고 - 조선의 차 분포와 현장에 대한 조사 보고 - 만으로는 조선차의 존재를 소개하는 소개하는 데 불과하다면서 자신이 조선의 역사를 뒤져 차 이야기를 보충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에 다모쓰의 사관(史觀)이 삽입되는 것이다. 그는 앞에서 말한 놀라움의 표시와 의문 제기 외에, 의도적으로 조선을 비하(卑下)하는 표현을 심심치 않게 담고 있다. 조선의 존재를 중국과 일본을 연결해 주는 하나의 매개체로 밖에 보지 않았다. 모든 사물과 풍속의 근원을 기본적으로 중국에 두고, 주요한 문화 향유(享有)는 일본의 것을 모방하고 있다는 따위, 소위 식민사관(植民史觀)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머리말을 쓴 가즈시케나 간지로우가 자료를 제공한 가즈오 쪽에 비중을 두어, 그의 공로를 더 치하하고 있는 점도 주목할만 하다. 먼저, 1927년 조선총독 임시대리가 되고 31년부터 36년까지 총독을 지낸 - 그래서 조선을 잘 알고 있는 - 우가끼 가즈시게(宇桓一成)의 머리말을 보자. …일본이 당송(唐宋)의 문화를 수입한 것은 조선이라는 좋은 매개체가 있었기 때문이다. 차나무 씨나 차 마시는 습관도 어쩌면 조선으로부터 건너온 것인지 모른다. 예부터 조선인은 차를 즐겼다. 차마시는 습관이 단절된 것은 조선시대부터이다. 차에 눈을 뜨게 되면서, 차가 인간에게 활력을 준다는 것을 알고 즐기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에 좋은 차가 있다는 것은 모르고 지냈다. 이에이리(家入)씨는 조선의 전라도에 좋은 종류의 자생차가 개발되지 않은 채 있는 것을 유감으로 여기고, 실제로 답사하고 자세히 조사하여 그 실태를 기록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에 다시 동양차에 관한 과학적 연구의 권위자인 모로오까(諸岡) 박사는 조선의 차가 예로부터 선문(禪門)의 사원과 승려에 의해서 계승되어 온 사적(史蹟)을 조사하여 원류를 밝혔다. 이로써 역사와 실제에 맞게 접목한 것이 바로 이 책이다… 다음은 1940년대 상공장관과 국무대신 등을 역임한 후지와라 간지로우(藤原銀次郞)의 머리말 중 발췌이다. …오늘날 흥아(興亞)라는 큰 사업으로 보더라도 차라는 음료는 매우 중요하다. 중국 만주 몽고 주민 대부분은 하루라도 차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조선에 자못 좋은 종류의 자생차가 있다는 사실을 등한히 했었다. … 전라도 산림과의 이에이리 가즈오 군은 이것을 유감으로 여기고, 숨은 자원의 개발과 조선인이 막걸리나 탁주와 같은 술을 즐기는 폐단을 차마시기의 좋은 습관으로 인도할 염원에서, 좋은 차 산지인 전라남도 광주 일원의 자생차(自生茶)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고 현지답사를 통해 일일이 확인했다. 조선인에게는 진실을 숨기는 습관이 있음을 잘 알고 있는 이에이리 군은 산림을 헤치고 들어가 때론 민가에 묵으면서 그들과 무릎을 맞대고 수집한 것이다. 여기 녹차 연구의 1인자인 모로오까 다모쓰 박사는 조선차의 근원을 풀어서, 차 마시기가 선원(禪院)에서 발달된 역사를 온갖 자료에 의해서 조사함으로써 오늘날 차의 유래를 밝히게 되었다. … 예부터 조선은 중국문화를 일본에 전한 중개역이었던 까닭에 지금까지 지나(支那:중국의 옛이름)에서도 모르고 일본에서도 몰랐던 당(唐) 송(宋) 시대의 차문화 일단이 뜻밖에도 이 책에 의하여 밝혀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기쁘고 상쾌한 일이다. 살피건대, 차 마시기는 모든 국민을 각성시키는 원동력이다. 더구나 일본의 국수(國粹)인 다도에서 예부터 가장 존중되어온 명물 찻주발의 8할 이상이 조선의 도기라는 사실에 의해서도 조선의 차에 깊은 관심을 쏟지 않으면 안된다 … 조선에 예부터 좋은 종류의 자생차(自生茶)가 있으며, 그 재배가 자못 유망하다는 것이 발견된 것은 다도라는 취미상의 기쁨에 머무르지 않고 산업상 가장 유쾌한 일이다 … 글의 중간 중간에 자생차(自生茶)라든가, 예부터 조선인은 차를 즐겼다, 중국도 모르고 일본도 몰랐던 당송(唐宋)의 차문화 일단이 조선의 차와 선에서 밝혀질 수 있게 되어 기쁘고 상쾌하다… 같은 표현들은 어쩔 수 없이 우리의 눈길을 끈다. 그러나 본문에 들어가서 모로오까 박사는 이런 여운들을 여지없이 잘라 버린다. …조선의 차는 신라 흥덕왕 시절 당(唐)에서 전래되었다. 일본의 차는 송(宋)에서 전래되었다. 오늘날 일본의 차는 그처럼 성행하는 반면, 조선차란 귀에 설다. 옛날에는 조선의 물이 좋아서 차가 따로 필요치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보건대 당나라 차의 씨앗은 지리산에서 널리 퍼졌으나, 다도는 선종의 스님만이 알 뿐이다… …조선의 흡연 풍습은 일본으로부터 들어왔다. 담배 피우는 풍습이 퍼진 것은 매우 슬퍼할 노릇으로 아편을 마시는 나쁜 습관 같은 것도 실은 여기서 길들여진 것이다. 나쁜 습관이 좋은 습관을 몰아낸 것이다. 술은 불교에서 금하는 것이다. 오계(五戒)의 하나이고 팔관재(八關齋) 중의 한 계율이다. 그러니 불교가 성하면 술은 차에 의해서 다소 다스려질 것이다. 고려시대 선종의 신도였던 이규보(李奎報)가 "다행히 건계 차는 있으니, 어찌 날마다 술에 취하랴"한 데서 엿볼 수 있듯 술독에 빠진 무리들도 차로써 술의 해독에서 벗어나려 했었다. 그렇지만 지금의 조선에서는 막걸리가 차를 대신하고 있으니 도리를 벗어난 일이다. 허울좋은 이름으로 숨어서 술을 마신 파계승도 많았다. 이를테면 전주 서방산 봉서사(鳳棲寺)의 진묵일옥(震默一玉)이라는 선승은 술을 즐겼는데, 술 이라 하면 안 마시고, 곡차(穀茶)라 하면 마셨다. 술을 곡차라 하는 것은 여기서 유래되었다… 진묵(震默1562∼1633)은 7세에 출가하였는데 머리가 좋고 술을 잘 마시며 신통력을 가져 이적을 많이 행했던 기인(奇人)이다. 이에이리 가즈오와 모로오까 다모쓰의 공저 조선의 차와 선은, 방대한 자료를 조사 수록하는 등 노력한 면도 없지않으나, 근본적으로 조선의 역사를 가볍게 여기는 시각에서 엮어나간 것인만큼 업적에 버금가는 오점도 남긴 셈이 되었다. "조선의 차와 선"은 잘 살펴서 취할 부분만 취해야 하는 책임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출처 : 인천시무형문화재10호범패와작법무
글쓴이 : 모봉형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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