茶에 종교색을 가미해 멀리한 것은 참으로 어리석고 가벼운 처사였다. 그것은 특정 종교의 산물이 아니라 이 땅, 이 민족의 생활음료였기 때문이다.
바람 바람 봄바람아, 작설(雀舌)낳게 불지 마라.
이슬 먹은 작설 낳게, 불지 마라 봄바람아
한 잎 두 잎 따서 모아, 인적기도 멀리한 날
앞 뒤 당산 신령님께 비나이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바람 할매 비나이다.
민요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차는 생활에 없어서는 안될 민족의 필수품이었다는 사실이다. 조선 초만해도 서민사회에서 "아무개 집에 차항아리 비었다"는 말은 집안이 망해 조상 제사에 올릴 차 한 잔 없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이름없는 선비들은 대세에 아랑곳하지 않고 청빈을 차생활에 비유하여 노래를 남겼다.
내 집 초당 삼간, 세사는 바히 없네
차 달이는 동 탕관과 고기 잡는 낙대로다
뒷뫼에 절로난 고사리 그뿐인가 하노라
이렇게 뿌리깊은 생활문화를 의도적으로 외면할 수 있었다는 자체에서 조선의 건조한 조정 분위기는 더 거론할 것이 없어진다.
비슷한 위기가 커피사(史)에도 있었다. 커피 이야기를 들어보면 조선에 지혜있는 중신이나 성군이 없었다는 점이 더 큰 아쉬움으로 다가온다.
차와 쌍벽을 이루는 또하나의 기호음료 커피(Coffee)도 본디는 회교승들의 수도용 음료였다. 커피의 유래도 차와 마찬가지로 정확히 밝혀지는 것은 없는데, 18세기 로마대학에서 언어학 교수를 지낸 화이토스 나이론의 설에 이런 내용이 있다.
…먼 옛날 이디오피아의 초원에서 산양을 몰던 목동이, 자기의 산양이 어느 지점에 이르기만 하면 펄쩍펄쩍 뛰고 이상하게 흥분하는 것을 이상히 여겨 가까운 수도원 원장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수도원장이 원인을 조사해 보니 그곳에 있는 한 식물의 열매를 먹은 탓이라는 것을 알았다. 수도원장은 자신도 열매를 먹어보았는데 조심스러워 끓여 마셨다. 그랬더니 졸음이 사라지고 형언할 수 없이 기분이 상쾌해지는 것을 느꼈다. 커피는 이 수도원장에 의해 알려지기 시작했다 …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아라비아 회교승에 의해 발견되고, 수도용 음료로 오래동안 애음되다, 오스만제국(터키)의 아라비아 침략을 게기로 세상에 전해진 것으로 알려진다.
…예멘에 사는 회교승 세이크 오마가 하루는 산길을 걷는데 배가 고팠다. 무언가 먹을 것 없을까 찾아보니 새들이 한 나무의 열매를 쪼며 즐거워하는 것이 보였다. 본콤(ban cam)이란 나무에 열린 본(ban)이란 열매였다. 오마는 새들이 먹는 것이니 괜찮겠지, 하며 이 열매를 먹었다. 그랬더니 기분이 상쾌해지고 힘이 솟는 것 같았다. 오마는 호기심에서 열매를 잔뜩 따 가지고 가 이리저리 살펴본 후, 이 열매의 놀라운 효능을 알게 되었다. 그 후 오마는 여러 사람에게 커피의 존재와 음용법을 가르쳐주어 성자(聖者)로 불리우게 되었다…
커피의 음용이 사실로서, 기록을 통해 이야기되는 것은 서기 1000년 경 아라비아 회교사원에서 시작한다. 편작만큼이나 유명했던 바그다드의 의사 라셈이 있어 "커피는 탕제로서 피로를 없애주고 졸음을 방지하고 소화를 돕는다"고 발표한 바 있지만, 어쨌든 이를 일상적으로 음용한 것은 회교승들이었다.
알라신을 유일신으로 삼아 엄격한 수행이 요구되는 수도승들에게 커피는, 자칫 나른해지기 쉬운 자세를 바짝 긴장하게 하는 비상의 약으로 사랑받았다. 세계 최초의 커피하우스인 "뷰도·알·카파"가 아라비아의 성지 메카에서 문을 연 것도, 회교 전도를 목적으로 하는 회교승들에 의해서였다. 그들은 메카를 찾아온 순례자들에게는 물론, 상인, 일반인에게까지 커피를 나누어 주었다.
처음 아라비아에서 커피를 일컫던 명칭은 열매를 "방", 나무를 "방감"이라하여 이디오피아와 같이 발음했다. 그러나 차츰 "카파"라고 부르게 되었다. 카파는 아라비아어로 알콜 음료를 총칭하는 것이었는데 음주가 허용되지 않는 승려들 사이에서 은어(隱語)처럼 생겨나 곧 정착되었다. 불교사회에서 곡차(穀茶) 운운 하는 내력과 비슷한 의미가 "카파"였던 것이다.
이러한 카파가 유럽에 전파된 것은 터키인에 의해서였다. 16세기에 전성기를 맞는 이슬람왕조 터키(오스만제국)는 1517년 이집트 정복과 동시에 성도(聖都) 메카·메디나의 보호권을 획득하였고, 이어 26년 헝가리를 굴복시키고 29년에는 빈을 포위 공격하면서 유럽의 정국에 큰 영향을 끼쳤다. 지중해 방면에서는 38년 에스파냐·베네치아·로마교황의 연합함대를 프레베자 바다에서 무찌르고 튀니지·알제리도 합병하였으며, 동방에서는 바그다드·바스라의 지배권까지 확립하여 메소포타미아를 억압하였다. 지중해·흑해·홍해·페르샤만의 제해권과 동서남북으로 펼쳐진 국제무역로를 온통 오스만제국이 장악해 버린 시기였다. 그 중심은 이스탄블(콘스탄티노플)이었다.
커피는 오스만제국 군인들의 발길을 따라 유럽에 소개되었다. 아라비아의 커피하우스를 흉내내서 1552년 유럽 최초의 커피하우스가 이스탄블(콘스탄티노플)에서 문울 열었고, 이어 옥스포드·베를린·빈·런던·마르세이유·파리·함부르크 등의 순으로 커피하우스들이 생겨났다.
커피를 즐겨 마시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그것이 마치 예술품 같이 완성된 음료로 인기를 모아가자 기독교 사회 지도자들은 커피 금지령을 내리고 박해를 시작했다. 이단자인 회교도가 마시는 "악마의 음료"를 기독교도가 마셔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커피 금지령에는 오스만제국에 대한 원한서린 감정이 포함되었을 수도 있었다. 커피를 마시다 붙잡힌 사람은 혀를 뽑았고, 원두를 암거래하다 붙잡힌 사람은 커피포대에 넣어 물 속에 처넣는 극형이 여기 저기서 서슴없이 행해졌다. 그러나 커피의 마력은 한 번 그것을 마신 사람을 그것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했다.
커피 논쟁이 피를 부를 정도로 뜨거워지자 마침내 교황의 결재가 필요하게 되었다. 커피를 마신 교황은 클레멘스 8세였다. 생전 처음 커피를 맛 본 교황은 침묵 속에서 충분히 음미한 후 기운찬 목소리로 말했다.
"악마의 음료가 이렇게 훌륭한가. 이런 음료를 이교도들만 즐겼다는 것은 차라리 애석한 일이다. 내가 커피에 세례를 주어 기독교인의 음료가 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할 터이니, 앞으로는 커피 박해를 금하도록 하라"
이리하여 커피는 교황으로부터 의식을 갖춘 세례를 받게 되었고 사람들은 다투어 커피를 받아들였다. 루이 14세의 명언(?)은 이런 일이 있은 후에 나온 것이다. .
"커피가 없이는 아무리 진수성찬이라도 훌륭하다고 할 수 없다"
커피 하우스는 단순히 기호음료를 마시는 장소가 아니라, 지식인·정치가들의 집회소 또는 토론장으로 애용되면서 사회발전에 긍정적인 많은 기여를 했다. 프랑스 혁명도 "커피 하우스의 토론"에서 시작되었다.
이와같은 커피 이야기를 돌아보며, 조선이 차를 불교인의 음료라 하여 끝내 배척만 했던 우리 역사를 비교하면 가슴이 아파오기까지 한다. 필자의 가슴이 유난히 여린 탓일까.
우리에게서 이렇게 차가 멀어져갈 때 이웃 일본에서는 선종(禪宗)의 헌차(獻茶)의식이 심미적(審美的)인 종교(宗敎)로 발전하면서 다도(茶道)를 완성해 갔다.
일본에 차마시는 풍습이 생겨난 시기는 난보꾸조우(南北朝1336∼1392) 후기부터 무로마찌(室町1338∼1573) 초기로 보고 있다. 연대가 겹치는 것은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가 북조(北朝)를 평정하고 무로마찌에 바쿠후(幕府)를 세운 뒤에도, 약 60년간 난조우(南朝)만은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무로마찌 바쿠후의 3대 장군 요시미쓰(足利義滿)는 무인세력의 통합을 주장하면서 잔존하던 남조를 1392년 소멸시켜 버렸다. 그리고 그 시대에 차 재배가 주로 이루어졌던 큐우수(九州)·기나이(畿內)·간또우(關東)을 손아귀에 넣으면서 차에 대한 관심은 새롭게 생겨났다.
6대 장군 요시노리(足利義敎)때에 노우아미(能阿 1397∼1471)가 다구(茶具)의 감별법, 점다법(點茶法)을 창안했고, 이어 8대 장군 요시마사(足利義政)때에 게이아미(藝阿 1431∼1485)·소우아미(相阿 ?∼1525)가 서원(書院)의 장식법을 추가하고 점다법을 보완하면서 이윽고 다도는 형성되기 시작했다. 히가시야마(東山)류가 된 이들의 점다법은 선종(禪宗)이 수도생활에서 지켜야 할 규범에다 무가(武家)의 법식을 섞어 만든 것이었다.
같은 무렵, 아시카가 요시마사(足利義政)의 다도사범이었던 무라다슈코(村田珠光1433∼1502)에 의해 나라(奈良)류가 형성되는데, 이것이 오늘날 일본문화를 대표하는 다도(茶道)의 초석(礎石)이었다.
무라다의 가장 큰 공헌은 사방 한 길(方丈)의 다실(茶室)제정이었다. 당시의 엄격한 사회에서 그는 "평등(平等)의 다법(茶法)"을 실현시켰다. 귀인용과 하인용을 구분해야 하는 출입문을 다실에서는 누구나 허리를 굽히고 들어가는 "겸손의 문"으로 일원화 시켰다. 그는 차생활을 통한 자득(自得:陀), 즉 깨달음을 제창하며 불완전을 사랑하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워낙 문화적 기반이 취약한 상태였고, 게다가 무로마치 바쿠후도 세력이 약해 1467년 이후는 전국시대(戰國時代)라는 혼란기에 접어들고 말았다. 바쿠후에서 임명한 슈고(守護)가 다이묘(大名:領主)가 되고, 그들이 독립하여 새로운 지배계급을 형성하면서 서로 다투고 하극상(下剋上)이 난무하는 사회가 되어버린 것이다. 살아남기 위한 다이묘(領主)들은 독자적인 법을 만들고 강대한 군사집단(家臣團)을 편성해 영내의 모든 것을 보다 확실히 지배하는 다이묘료고쿠(大名領國)를 형성해야만 했다. 음모와 배신
이 난무하여 육친이라 할지라도 믿지 못하던 전국시대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중앙 진출에 이어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1536∼1603)가 등장, 통일의 대업을 이룩함으로써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그것이 1590년의 일로, 일본의 문화는 이때부터 다시 피어나기 시작했고, 주체는 귀족화한 무사(武士)들이었다. 자연 무사들의 거친 심성을 순화시키는 일 - 즉, 사무라이 정신으로부터 문화운동은 시작되어야 했다.
이때쯤 무라다슈코(村田珠光)의 다도는 다께노 조우오우(武野紹鷗1502∼1555)를 거쳐 센리큐(千利休1522∼1591)에 이어져 완성되고 있었다. 리큐는 어려서부터 차 공부를 하였다. 처음에는 노우아미의 풍류를 이어받은 기다무끼(北向)로부터 서원(書院)의 차를 배우다가, 그의 소개로 조우오우의 제자가 되어 15년간 사사하였다. 스승을 잃은 뒤 그는 한동안 참선(參禪)으로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여러 고장을 돌아다니며 다기구 제작을 연구하다 "오다 노부나가"의 다두(茶頭)패에 가담하게 되었다. 그리고 노부나
가가 죽은 뒤 히데요시 진영의 다두(茶頭)로 자리를 옮겼다.
이렇게 히데요시와 리큐가 만난 것은 1582년의 일로, 히데요시가 리큐에게 요구한 것은 "불안해 하는 서민들의 마음을 가라앉히고, 거칠기만할 뿐 우아함을 모르는 무사들의 마음을 순화시키고, 나아가 두 계층의 화합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히데요시의 지원은 파격적이었고 리큐는 다두(茶頭)로써 히데요시에게 모범적 충성을 보였다.
리큐는 검소와 불완전을 사랑하도록 가르쳤다. ▲어느 장소에서나 조화를 해치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했고 (和) ▲자연은 물론 사물에 대해서까지도 경건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했으며 (敬) ▲심성이 깨끗해야 한다고 했고 (淸) ▲검소한 자세로 자기를 늘 반성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寂)
…다도는 일상생활의 소박한 살림살이 가운데 있는 아름다움을 칭찬하고 떠받드는 것을 기조(基調)로 하는 예법(禮法)입니다. 함께 살아가는 조화(共存), 자비스런 마음에서 생겨나는 신비스런 사랑의 힘, 그리고 낭만주의적 질서관을 논하며 가르치는 것입니다. 불완전을 존중해야 하는 이유는 인생이란 마음대로 되지않는 상황 하에서 가능한 한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는 시도이기 때문입니다. 다도의 철학은 일반이 이야기하는 심미주의(審美主義)는 아닙니다. 윤리(倫理)와 종교(宗敎)가 융합하여 인간과 자연의
총체(總體)를 어떻게 볼 것인가를 깨우치는 노력입니다…
종교에서는 아름다움(藝術)이 인생의 배후에 있다고 하지만, 참다운 예술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 앞에 영원히 함께한다고 하면서, 스스로 아름답지 못하면 아름다움에 접근할 수 없음을 주지시켰다.
이러한 리큐의 다론(茶論)은 미국 보스톤박물관 동양학부장을 지낸 오가꾸라 덴싱(岡倉天心)이 1900년에 발표한 "The Book of Tea"에 잘 정리되어 있다.
…다인(茶人)들은, 예술이란 그 예술을 실 생활에 반영할 수 있는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라며 수련을 거듭했습니다. 다실에서 도달할 수 있었던 고도의 세련된 정신으로 일상생활까지 규제하는 노력을 하였습니다. 어떠한 경우라도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도록 인내(忍耐)를 익혔고, 대화는 주위와의 조화(調和)를 손상하지 않도록 훈련하였으며, 옷의 모양이나 색은 물론 자세, 걸음걸이까지도 가볍게 여기지 않는 것을 생활화하도록 하였습니다. 스스로를 먼저 아름답게 가꾸어야 아름다움에, 진실로 접근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결국 다인들은, 순수한 예술 이상의 것, 나아가 "예술" 그 자체가 되려고 하였습니다. 그것이 곧 다도(茶道)에서 말하는 심미주의(審美主義)의 선(禪)입니다…
…다인들은 수수한 색상의 옷을 입도록 가르쳤고 꽃을 가까이 하는 정신을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항상 간소(簡素)를 애호(愛好)하라고 강조하며 겸양(謙讓)의 아름다움을 시범하여 주었습니다. 거센 파도(波濤)가 휘몰아치는 해원(海原)을 헤쳐가야 하는 인생에는, 스스로 자기를 바로잡는 비결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을 터득하지 못하는 사람은 허공 속에서 행복과 만족을 추구하다 보잘 것 없는 인생을 마치고야 맙니다. 마음의 안정을 유지하려고 하면 더욱 비틀거리고, 수평선에 떠 있는 구름은 폭풍 전 징후처럼 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 거센 파도가 영겁(永劫)을 향하여 전진하고 있음을 알게 되면, 거기엔 환희와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물결치는 파도에 몸을 던져보지 않으렵니까. 아름다운 것과 더불어 살아온 사람만이 아름답게 죽을 수 있습니다…
전국이 통일되었다고는 하나 세상은 여전히 음모와 배신이 난무하여, 사람들은 육친이라 할지라도 신용하지 않는 시대였지만, 차(茶)는 다인들의 가르침을 통하여 착실히 침투되어 갔다. 위대한 다인들의 종언(終焉)은 그 생애처럼 영묘전아(靈妙典雅)하게 다듬어져 우주의 리듬에 실려졌다.
리큐에 의해 완벽하게 정리된 차의 철학은, 놀랍게도 "죽음의 미학(美學)"으로 발전했다. 허(虛)를 삶의 술(術)로 삼은 뒤, 죽음에 대하여 열린 생각을 갖게 함으로서 인생을 송두리채 예술화 하는 시도로 발전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종교 이상의 것이었다.
리큐(千利休)의 인기는 치솟아 히데요시의 권위를 능가하게 되었다. 리큐는 히데요시의 비위나 맞춰주는 알랑쇠는 아니었기에 공공연한 장소에서 의견을 달리하는 일도 많았다. 하지만 히데요시 또한 장군이었다. 작은 의견 차이에 신경쓰지 않았다. 그러나 리큐에게도 "사랑은 사랑을 낳고, 칼른 칼을 부른다"는 하늘의 법칙이 찾아온다. 죽음의 미학을 완성한 그에게, 죽음의 미학을 몸소 실천해 보이라는 명령이 떨어지고 마는 것이다.
음모와 배신에 성역은 없었다. 일단의 정적(政敵)들은 히데요시에게 그가 권좌를 노린다고 모함을 했다. 어느 순간 리큐가 내미는 초록빛 음료에 치명적인 독이 있어, 히데요시를 쓰러뜨릴 것이라고 귓속말로 전했다. 분노한 히데요시는 리큐에게 스스로 생명을 끊을 것(自決)을 명령해 버렸다. 리큐는 반항하지도 않았고 비굴한 모습을 보이지도 않았다. 담담하고 호방하게 받아들였다. 정해진 자해(自害)의 날이 되자, 리큐는 아끼는 문인(文人)들과 최후의 다회를 가졌고, "사라지지않는 빛"과 같은 교훈을 후배들에게 남겼다.
…그 날 리큐는 아끼는 문인들을 최후의 다회에 초청했습니다. 약속한 시간에 손님들은 슬픔에 잠긴 얼굴로 대합실에 모였습니다. 뜰을 바라보니정원수(庭園樹)들이 떨고 있었습니다. 나뭇잎 팔랑거리는 모습은 망자(亡者)들의 속삭임 같았습니다. 어둠이 내리는 가운데 석등(石燈)은 저승의 보초인병인양 엄숙한 모습으로 서 있었습니다. 묘한 향기가 다실을 에워싸고 있었습니다.
"들어오십시오"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손님들은 차례로 들어가 정해진 자리에 앉았습니다. 이윽고 주인도 자리에 앉았습니다. 천천히, 찻잔이 돌려졌습니다. 손님들은 묵묵히 마셨습니다. 최후로 주인이 잔을 비웠습니다. 순서에 따라 손님들은 도구(道具)의 배견(拜見)을 원했습니다. 리큐는 다실 안의 모든 도구를 손님들 앞에 내놓았습니다. 손님들이 하나씩 도구의 아름다움을 칭찬하니 리큐는 하나 하나를 마지막 다회의 기념으로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마셨던 찻잔만이 그의 손에 남았습니다. 리큐는 말했습니다.
"불행한 자의 입에 더럽혀진 찻잔은 다른 사람이 써선 안 됩니다"
리큐는 찻잔을 깨뜨렸습니다.
다회를 마친 손님들은 눈물을 참으면서 최후의 이별을 고하고 다실을 나왔습니다. 리큐는 오직 한사람, 가장 각별한 친구에게만 남아서 최후를 지켜봐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정결한 다실에 둘만 남았을때, 리큐는 다회복을 벗었습니다. 그러자 이제까지 가려져 있던 순백의 치장(壽衣)이 드러났습니다. 그는 단정히 앉아 자기 생명을 끊을 단도의 번쩍임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중얼거렸습니다.
오너라 그대여, 영원의 칼이여…
이윽고 그는 만면에 웃음을 띤채 영원한 나라로 떠났습니다.
리큐가 가버리자 정신적 지주를 잃은 민심(民心)은 하루가 다르게 흉흉해졌다. 무례와 난폭을 잠재웠던 다도는 마치 리큐와 함께 사라져버린듯 했다. 무사들의 거친 심성은 되살아나 여기저기에서 시비가 일고 다툼이 벌어졌다. 새로운 분열의 조짐이 도처에서 접수되었다.
히데요시는 불안해졌다. 리큐의 자리를 대신할 인물이 필요했다. 그러나 찾아지지 않았다. 리큐를 모함한 자까지 처단하였으나 그것으로 문제가 해결되진 않았다. 어떻게든 민심을 수습할 방법이 시급했고, 리큐 없는 다도에 새로운 바람이 필요했다.
히데요시는 이 기로에서 절묘하게도 조선 침략을 택했다. 임진왜란은 그렇게, 센리큐(千利休)가 죽은 이듬해 일어난 또하나의 "차(茶) 전쟁"이었다. 살상과 파괴를 일삼으면서 한편에선 도자기문화를 송두리채 앗아가려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와비(陀)로 대표되는 일본의 다도는 그렇게, 정치성을 내포하면서 정립되어졌다. "불완전 속의 아름다움을 찾아 숭배하는 의식"으로 뿌리를 내리면서 예술의 감상에 있어서는 "암시의 가치"를 극대화 시켰고, 인생에 있어서는 죽음도 삶의 연장이라는 열린 생각을 갖게 하였다. 불완전 속의 완전을 추구하는 것이지만, 완전에 도달한다 해도 심미주의에서는 불완전한 것이어야 했다.
…삶과 죽음이 범천(梵天)의 낮과 밤일진대, 죽음은 왜 탄생처럼 반기지 않는가?…
낡은 것이 사라져야 신생(新生)은 가능해진다. 생명은 흘러가는 것이며 죽음은 만물에 찾아온다. 지향(指向)하는 것이 무엇이 되었든 저 끝에서 기다리는 것은 파괴(破壞)이다.
그들은 "무정하지만 생각하기 따라서는 자비로울 수 있는 신"인 죽음을 여러 가지 명목으로 숭배하게 되었다. 자위(自慰)·자족(自足)의 수단으로서가 아니었다. 불완전 숭배는 오히려 반대로 신에게 내미는 도전장같은 것이었다. 불완전한 인생들이 불완전한 세계에서 완전을 찾고 이룩해보려는 갸륵한 시도이기도 했다. 느끼려고만 하면 아름다움은 도처에 있는 것 아니던가.
다도는 차츰 배반적인 것까지 수용해 가면서 이윽고 "두 얼굴의 일본"을 낳았다. 모든 것이 "불완전 숭배"로 합리화될 때 "두 얼굴"은 태어났다. 교양과 풍류라는 이름 아래 잔학행위를 서슴없이 저지르고 신에게 제물을 바치기 위해 자연을 황폐케 하는 일까지 벌이게 되었다.
"아아, 뜰에 말없이 서 있는 꽃이여. 너를 꺽어들면 나의 손은 더러워진다. 그러나 이것이 너의 운명인 것을"
그들은 주저없이 꽃을 꺾어 밑둥을 자르고 불에 지진 뒤 도꼬노마(床の間)에 올려놓고는 아름다움에 대한 봉헌(奉獻)을 함께 하자고 하였다.
…아름다움에 대한 봉헌을 함께 하자는 것…
다도에서 비롯된 이 논리는 후일 침략과 약탈을 일삼으며 대동아공영을 함께 이루자고 부르짖는 행위나 같은 것이었다.
꽃을 함부로 꺾는 것은 죄이지만, 미리 마음에 그림을 그리고 꼭 필요한 부분만을 자르는 것으로 "속죄(贖罪)"는 이루어진다고 멋대로 생각했다.
그들은 정말 손 닿는대로 자르는 것을 금기로 여겼다. 하나의 작은 가지일망정 필요 이상 자르는 것을 큰 수치로 여겼다.
리큐에 의하여 다도(茶道)의 작법(作法)이 완성되면서 꽃꽂이(花道)도 눈부시게 진보했다. 리큐의 후계인 오다우라쿠(織田有樂), 후루다오리베(古田織部), 고보리엔슈(小握遠州), 가다기리세키슈(片桐石州)도 꽃꽂이의 새로운 조형을 창조하는데 적지않은 노력을 하였다.
그러나 다인들에 의한 꽃 숭배는 다도의 심미적 예법 중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다실 내의 다른 예술품과 마찬가지로 전체 장식체계의 일부일 뿐이었다. 따라서 유별나게 눈에 띠는 꽃은 다실에 놓여질 수 없었고 다실을 떠나 독립적인 감상의 대상도 될 수 없었다.
바람 바람 봄바람아, 작설(雀舌)낳게 불지 마라.
이슬 먹은 작설 낳게, 불지 마라 봄바람아
한 잎 두 잎 따서 모아, 인적기도 멀리한 날
앞 뒤 당산 신령님께 비나이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바람 할매 비나이다.
민요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차는 생활에 없어서는 안될 민족의 필수품이었다는 사실이다. 조선 초만해도 서민사회에서 "아무개 집에 차항아리 비었다"는 말은 집안이 망해 조상 제사에 올릴 차 한 잔 없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이름없는 선비들은 대세에 아랑곳하지 않고 청빈을 차생활에 비유하여 노래를 남겼다.
내 집 초당 삼간, 세사는 바히 없네
차 달이는 동 탕관과 고기 잡는 낙대로다
뒷뫼에 절로난 고사리 그뿐인가 하노라
이렇게 뿌리깊은 생활문화를 의도적으로 외면할 수 있었다는 자체에서 조선의 건조한 조정 분위기는 더 거론할 것이 없어진다.
비슷한 위기가 커피사(史)에도 있었다. 커피 이야기를 들어보면 조선에 지혜있는 중신이나 성군이 없었다는 점이 더 큰 아쉬움으로 다가온다.
차와 쌍벽을 이루는 또하나의 기호음료 커피(Coffee)도 본디는 회교승들의 수도용 음료였다. 커피의 유래도 차와 마찬가지로 정확히 밝혀지는 것은 없는데, 18세기 로마대학에서 언어학 교수를 지낸 화이토스 나이론의 설에 이런 내용이 있다.
…먼 옛날 이디오피아의 초원에서 산양을 몰던 목동이, 자기의 산양이 어느 지점에 이르기만 하면 펄쩍펄쩍 뛰고 이상하게 흥분하는 것을 이상히 여겨 가까운 수도원 원장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수도원장이 원인을 조사해 보니 그곳에 있는 한 식물의 열매를 먹은 탓이라는 것을 알았다. 수도원장은 자신도 열매를 먹어보았는데 조심스러워 끓여 마셨다. 그랬더니 졸음이 사라지고 형언할 수 없이 기분이 상쾌해지는 것을 느꼈다. 커피는 이 수도원장에 의해 알려지기 시작했다 …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아라비아 회교승에 의해 발견되고, 수도용 음료로 오래동안 애음되다, 오스만제국(터키)의 아라비아 침략을 게기로 세상에 전해진 것으로 알려진다.
…예멘에 사는 회교승 세이크 오마가 하루는 산길을 걷는데 배가 고팠다. 무언가 먹을 것 없을까 찾아보니 새들이 한 나무의 열매를 쪼며 즐거워하는 것이 보였다. 본콤(ban cam)이란 나무에 열린 본(ban)이란 열매였다. 오마는 새들이 먹는 것이니 괜찮겠지, 하며 이 열매를 먹었다. 그랬더니 기분이 상쾌해지고 힘이 솟는 것 같았다. 오마는 호기심에서 열매를 잔뜩 따 가지고 가 이리저리 살펴본 후, 이 열매의 놀라운 효능을 알게 되었다. 그 후 오마는 여러 사람에게 커피의 존재와 음용법을 가르쳐주어 성자(聖者)로 불리우게 되었다…
커피의 음용이 사실로서, 기록을 통해 이야기되는 것은 서기 1000년 경 아라비아 회교사원에서 시작한다. 편작만큼이나 유명했던 바그다드의 의사 라셈이 있어 "커피는 탕제로서 피로를 없애주고 졸음을 방지하고 소화를 돕는다"고 발표한 바 있지만, 어쨌든 이를 일상적으로 음용한 것은 회교승들이었다.
알라신을 유일신으로 삼아 엄격한 수행이 요구되는 수도승들에게 커피는, 자칫 나른해지기 쉬운 자세를 바짝 긴장하게 하는 비상의 약으로 사랑받았다. 세계 최초의 커피하우스인 "뷰도·알·카파"가 아라비아의 성지 메카에서 문을 연 것도, 회교 전도를 목적으로 하는 회교승들에 의해서였다. 그들은 메카를 찾아온 순례자들에게는 물론, 상인, 일반인에게까지 커피를 나누어 주었다.
처음 아라비아에서 커피를 일컫던 명칭은 열매를 "방", 나무를 "방감"이라하여 이디오피아와 같이 발음했다. 그러나 차츰 "카파"라고 부르게 되었다. 카파는 아라비아어로 알콜 음료를 총칭하는 것이었는데 음주가 허용되지 않는 승려들 사이에서 은어(隱語)처럼 생겨나 곧 정착되었다. 불교사회에서 곡차(穀茶) 운운 하는 내력과 비슷한 의미가 "카파"였던 것이다.
이러한 카파가 유럽에 전파된 것은 터키인에 의해서였다. 16세기에 전성기를 맞는 이슬람왕조 터키(오스만제국)는 1517년 이집트 정복과 동시에 성도(聖都) 메카·메디나의 보호권을 획득하였고, 이어 26년 헝가리를 굴복시키고 29년에는 빈을 포위 공격하면서 유럽의 정국에 큰 영향을 끼쳤다. 지중해 방면에서는 38년 에스파냐·베네치아·로마교황의 연합함대를 프레베자 바다에서 무찌르고 튀니지·알제리도 합병하였으며, 동방에서는 바그다드·바스라의 지배권까지 확립하여 메소포타미아를 억압하였다. 지중해·흑해·홍해·페르샤만의 제해권과 동서남북으로 펼쳐진 국제무역로를 온통 오스만제국이 장악해 버린 시기였다. 그 중심은 이스탄블(콘스탄티노플)이었다.
커피는 오스만제국 군인들의 발길을 따라 유럽에 소개되었다. 아라비아의 커피하우스를 흉내내서 1552년 유럽 최초의 커피하우스가 이스탄블(콘스탄티노플)에서 문울 열었고, 이어 옥스포드·베를린·빈·런던·마르세이유·파리·함부르크 등의 순으로 커피하우스들이 생겨났다.
커피를 즐겨 마시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그것이 마치 예술품 같이 완성된 음료로 인기를 모아가자 기독교 사회 지도자들은 커피 금지령을 내리고 박해를 시작했다. 이단자인 회교도가 마시는 "악마의 음료"를 기독교도가 마셔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커피 금지령에는 오스만제국에 대한 원한서린 감정이 포함되었을 수도 있었다. 커피를 마시다 붙잡힌 사람은 혀를 뽑았고, 원두를 암거래하다 붙잡힌 사람은 커피포대에 넣어 물 속에 처넣는 극형이 여기 저기서 서슴없이 행해졌다. 그러나 커피의 마력은 한 번 그것을 마신 사람을 그것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했다.
커피 논쟁이 피를 부를 정도로 뜨거워지자 마침내 교황의 결재가 필요하게 되었다. 커피를 마신 교황은 클레멘스 8세였다. 생전 처음 커피를 맛 본 교황은 침묵 속에서 충분히 음미한 후 기운찬 목소리로 말했다.
"악마의 음료가 이렇게 훌륭한가. 이런 음료를 이교도들만 즐겼다는 것은 차라리 애석한 일이다. 내가 커피에 세례를 주어 기독교인의 음료가 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할 터이니, 앞으로는 커피 박해를 금하도록 하라"
이리하여 커피는 교황으로부터 의식을 갖춘 세례를 받게 되었고 사람들은 다투어 커피를 받아들였다. 루이 14세의 명언(?)은 이런 일이 있은 후에 나온 것이다. .
"커피가 없이는 아무리 진수성찬이라도 훌륭하다고 할 수 없다"
커피 하우스는 단순히 기호음료를 마시는 장소가 아니라, 지식인·정치가들의 집회소 또는 토론장으로 애용되면서 사회발전에 긍정적인 많은 기여를 했다. 프랑스 혁명도 "커피 하우스의 토론"에서 시작되었다.
이와같은 커피 이야기를 돌아보며, 조선이 차를 불교인의 음료라 하여 끝내 배척만 했던 우리 역사를 비교하면 가슴이 아파오기까지 한다. 필자의 가슴이 유난히 여린 탓일까.
우리에게서 이렇게 차가 멀어져갈 때 이웃 일본에서는 선종(禪宗)의 헌차(獻茶)의식이 심미적(審美的)인 종교(宗敎)로 발전하면서 다도(茶道)를 완성해 갔다.
일본에 차마시는 풍습이 생겨난 시기는 난보꾸조우(南北朝1336∼1392) 후기부터 무로마찌(室町1338∼1573) 초기로 보고 있다. 연대가 겹치는 것은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가 북조(北朝)를 평정하고 무로마찌에 바쿠후(幕府)를 세운 뒤에도, 약 60년간 난조우(南朝)만은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무로마찌 바쿠후의 3대 장군 요시미쓰(足利義滿)는 무인세력의 통합을 주장하면서 잔존하던 남조를 1392년 소멸시켜 버렸다. 그리고 그 시대에 차 재배가 주로 이루어졌던 큐우수(九州)·기나이(畿內)·간또우(關東)을 손아귀에 넣으면서 차에 대한 관심은 새롭게 생겨났다.
6대 장군 요시노리(足利義敎)때에 노우아미(能阿 1397∼1471)가 다구(茶具)의 감별법, 점다법(點茶法)을 창안했고, 이어 8대 장군 요시마사(足利義政)때에 게이아미(藝阿 1431∼1485)·소우아미(相阿 ?∼1525)가 서원(書院)의 장식법을 추가하고 점다법을 보완하면서 이윽고 다도는 형성되기 시작했다. 히가시야마(東山)류가 된 이들의 점다법은 선종(禪宗)이 수도생활에서 지켜야 할 규범에다 무가(武家)의 법식을 섞어 만든 것이었다.
같은 무렵, 아시카가 요시마사(足利義政)의 다도사범이었던 무라다슈코(村田珠光1433∼1502)에 의해 나라(奈良)류가 형성되는데, 이것이 오늘날 일본문화를 대표하는 다도(茶道)의 초석(礎石)이었다.
무라다의 가장 큰 공헌은 사방 한 길(方丈)의 다실(茶室)제정이었다. 당시의 엄격한 사회에서 그는 "평등(平等)의 다법(茶法)"을 실현시켰다. 귀인용과 하인용을 구분해야 하는 출입문을 다실에서는 누구나 허리를 굽히고 들어가는 "겸손의 문"으로 일원화 시켰다. 그는 차생활을 통한 자득(自得:陀), 즉 깨달음을 제창하며 불완전을 사랑하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워낙 문화적 기반이 취약한 상태였고, 게다가 무로마치 바쿠후도 세력이 약해 1467년 이후는 전국시대(戰國時代)라는 혼란기에 접어들고 말았다. 바쿠후에서 임명한 슈고(守護)가 다이묘(大名:領主)가 되고, 그들이 독립하여 새로운 지배계급을 형성하면서 서로 다투고 하극상(下剋上)이 난무하는 사회가 되어버린 것이다. 살아남기 위한 다이묘(領主)들은 독자적인 법을 만들고 강대한 군사집단(家臣團)을 편성해 영내의 모든 것을 보다 확실히 지배하는 다이묘료고쿠(大名領國)를 형성해야만 했다. 음모와 배신
이 난무하여 육친이라 할지라도 믿지 못하던 전국시대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중앙 진출에 이어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1536∼1603)가 등장, 통일의 대업을 이룩함으로써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그것이 1590년의 일로, 일본의 문화는 이때부터 다시 피어나기 시작했고, 주체는 귀족화한 무사(武士)들이었다. 자연 무사들의 거친 심성을 순화시키는 일 - 즉, 사무라이 정신으로부터 문화운동은 시작되어야 했다.
이때쯤 무라다슈코(村田珠光)의 다도는 다께노 조우오우(武野紹鷗1502∼1555)를 거쳐 센리큐(千利休1522∼1591)에 이어져 완성되고 있었다. 리큐는 어려서부터 차 공부를 하였다. 처음에는 노우아미의 풍류를 이어받은 기다무끼(北向)로부터 서원(書院)의 차를 배우다가, 그의 소개로 조우오우의 제자가 되어 15년간 사사하였다. 스승을 잃은 뒤 그는 한동안 참선(參禪)으로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여러 고장을 돌아다니며 다기구 제작을 연구하다 "오다 노부나가"의 다두(茶頭)패에 가담하게 되었다. 그리고 노부나
가가 죽은 뒤 히데요시 진영의 다두(茶頭)로 자리를 옮겼다.
이렇게 히데요시와 리큐가 만난 것은 1582년의 일로, 히데요시가 리큐에게 요구한 것은 "불안해 하는 서민들의 마음을 가라앉히고, 거칠기만할 뿐 우아함을 모르는 무사들의 마음을 순화시키고, 나아가 두 계층의 화합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히데요시의 지원은 파격적이었고 리큐는 다두(茶頭)로써 히데요시에게 모범적 충성을 보였다.
리큐는 검소와 불완전을 사랑하도록 가르쳤다. ▲어느 장소에서나 조화를 해치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했고 (和) ▲자연은 물론 사물에 대해서까지도 경건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했으며 (敬) ▲심성이 깨끗해야 한다고 했고 (淸) ▲검소한 자세로 자기를 늘 반성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寂)
…다도는 일상생활의 소박한 살림살이 가운데 있는 아름다움을 칭찬하고 떠받드는 것을 기조(基調)로 하는 예법(禮法)입니다. 함께 살아가는 조화(共存), 자비스런 마음에서 생겨나는 신비스런 사랑의 힘, 그리고 낭만주의적 질서관을 논하며 가르치는 것입니다. 불완전을 존중해야 하는 이유는 인생이란 마음대로 되지않는 상황 하에서 가능한 한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는 시도이기 때문입니다. 다도의 철학은 일반이 이야기하는 심미주의(審美主義)는 아닙니다. 윤리(倫理)와 종교(宗敎)가 융합하여 인간과 자연의
총체(總體)를 어떻게 볼 것인가를 깨우치는 노력입니다…
종교에서는 아름다움(藝術)이 인생의 배후에 있다고 하지만, 참다운 예술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 앞에 영원히 함께한다고 하면서, 스스로 아름답지 못하면 아름다움에 접근할 수 없음을 주지시켰다.
이러한 리큐의 다론(茶論)은 미국 보스톤박물관 동양학부장을 지낸 오가꾸라 덴싱(岡倉天心)이 1900년에 발표한 "The Book of Tea"에 잘 정리되어 있다.
…다인(茶人)들은, 예술이란 그 예술을 실 생활에 반영할 수 있는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라며 수련을 거듭했습니다. 다실에서 도달할 수 있었던 고도의 세련된 정신으로 일상생활까지 규제하는 노력을 하였습니다. 어떠한 경우라도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도록 인내(忍耐)를 익혔고, 대화는 주위와의 조화(調和)를 손상하지 않도록 훈련하였으며, 옷의 모양이나 색은 물론 자세, 걸음걸이까지도 가볍게 여기지 않는 것을 생활화하도록 하였습니다. 스스로를 먼저 아름답게 가꾸어야 아름다움에, 진실로 접근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결국 다인들은, 순수한 예술 이상의 것, 나아가 "예술" 그 자체가 되려고 하였습니다. 그것이 곧 다도(茶道)에서 말하는 심미주의(審美主義)의 선(禪)입니다…
…다인들은 수수한 색상의 옷을 입도록 가르쳤고 꽃을 가까이 하는 정신을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항상 간소(簡素)를 애호(愛好)하라고 강조하며 겸양(謙讓)의 아름다움을 시범하여 주었습니다. 거센 파도(波濤)가 휘몰아치는 해원(海原)을 헤쳐가야 하는 인생에는, 스스로 자기를 바로잡는 비결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을 터득하지 못하는 사람은 허공 속에서 행복과 만족을 추구하다 보잘 것 없는 인생을 마치고야 맙니다. 마음의 안정을 유지하려고 하면 더욱 비틀거리고, 수평선에 떠 있는 구름은 폭풍 전 징후처럼 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 거센 파도가 영겁(永劫)을 향하여 전진하고 있음을 알게 되면, 거기엔 환희와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물결치는 파도에 몸을 던져보지 않으렵니까. 아름다운 것과 더불어 살아온 사람만이 아름답게 죽을 수 있습니다…
전국이 통일되었다고는 하나 세상은 여전히 음모와 배신이 난무하여, 사람들은 육친이라 할지라도 신용하지 않는 시대였지만, 차(茶)는 다인들의 가르침을 통하여 착실히 침투되어 갔다. 위대한 다인들의 종언(終焉)은 그 생애처럼 영묘전아(靈妙典雅)하게 다듬어져 우주의 리듬에 실려졌다.
리큐에 의해 완벽하게 정리된 차의 철학은, 놀랍게도 "죽음의 미학(美學)"으로 발전했다. 허(虛)를 삶의 술(術)로 삼은 뒤, 죽음에 대하여 열린 생각을 갖게 함으로서 인생을 송두리채 예술화 하는 시도로 발전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종교 이상의 것이었다.
리큐(千利休)의 인기는 치솟아 히데요시의 권위를 능가하게 되었다. 리큐는 히데요시의 비위나 맞춰주는 알랑쇠는 아니었기에 공공연한 장소에서 의견을 달리하는 일도 많았다. 하지만 히데요시 또한 장군이었다. 작은 의견 차이에 신경쓰지 않았다. 그러나 리큐에게도 "사랑은 사랑을 낳고, 칼른 칼을 부른다"는 하늘의 법칙이 찾아온다. 죽음의 미학을 완성한 그에게, 죽음의 미학을 몸소 실천해 보이라는 명령이 떨어지고 마는 것이다.
음모와 배신에 성역은 없었다. 일단의 정적(政敵)들은 히데요시에게 그가 권좌를 노린다고 모함을 했다. 어느 순간 리큐가 내미는 초록빛 음료에 치명적인 독이 있어, 히데요시를 쓰러뜨릴 것이라고 귓속말로 전했다. 분노한 히데요시는 리큐에게 스스로 생명을 끊을 것(自決)을 명령해 버렸다. 리큐는 반항하지도 않았고 비굴한 모습을 보이지도 않았다. 담담하고 호방하게 받아들였다. 정해진 자해(自害)의 날이 되자, 리큐는 아끼는 문인(文人)들과 최후의 다회를 가졌고, "사라지지않는 빛"과 같은 교훈을 후배들에게 남겼다.
…그 날 리큐는 아끼는 문인들을 최후의 다회에 초청했습니다. 약속한 시간에 손님들은 슬픔에 잠긴 얼굴로 대합실에 모였습니다. 뜰을 바라보니정원수(庭園樹)들이 떨고 있었습니다. 나뭇잎 팔랑거리는 모습은 망자(亡者)들의 속삭임 같았습니다. 어둠이 내리는 가운데 석등(石燈)은 저승의 보초인병인양 엄숙한 모습으로 서 있었습니다. 묘한 향기가 다실을 에워싸고 있었습니다.
"들어오십시오"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손님들은 차례로 들어가 정해진 자리에 앉았습니다. 이윽고 주인도 자리에 앉았습니다. 천천히, 찻잔이 돌려졌습니다. 손님들은 묵묵히 마셨습니다. 최후로 주인이 잔을 비웠습니다. 순서에 따라 손님들은 도구(道具)의 배견(拜見)을 원했습니다. 리큐는 다실 안의 모든 도구를 손님들 앞에 내놓았습니다. 손님들이 하나씩 도구의 아름다움을 칭찬하니 리큐는 하나 하나를 마지막 다회의 기념으로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마셨던 찻잔만이 그의 손에 남았습니다. 리큐는 말했습니다.
"불행한 자의 입에 더럽혀진 찻잔은 다른 사람이 써선 안 됩니다"
리큐는 찻잔을 깨뜨렸습니다.
다회를 마친 손님들은 눈물을 참으면서 최후의 이별을 고하고 다실을 나왔습니다. 리큐는 오직 한사람, 가장 각별한 친구에게만 남아서 최후를 지켜봐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정결한 다실에 둘만 남았을때, 리큐는 다회복을 벗었습니다. 그러자 이제까지 가려져 있던 순백의 치장(壽衣)이 드러났습니다. 그는 단정히 앉아 자기 생명을 끊을 단도의 번쩍임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중얼거렸습니다.
오너라 그대여, 영원의 칼이여…
이윽고 그는 만면에 웃음을 띤채 영원한 나라로 떠났습니다.
리큐가 가버리자 정신적 지주를 잃은 민심(民心)은 하루가 다르게 흉흉해졌다. 무례와 난폭을 잠재웠던 다도는 마치 리큐와 함께 사라져버린듯 했다. 무사들의 거친 심성은 되살아나 여기저기에서 시비가 일고 다툼이 벌어졌다. 새로운 분열의 조짐이 도처에서 접수되었다.
히데요시는 불안해졌다. 리큐의 자리를 대신할 인물이 필요했다. 그러나 찾아지지 않았다. 리큐를 모함한 자까지 처단하였으나 그것으로 문제가 해결되진 않았다. 어떻게든 민심을 수습할 방법이 시급했고, 리큐 없는 다도에 새로운 바람이 필요했다.
히데요시는 이 기로에서 절묘하게도 조선 침략을 택했다. 임진왜란은 그렇게, 센리큐(千利休)가 죽은 이듬해 일어난 또하나의 "차(茶) 전쟁"이었다. 살상과 파괴를 일삼으면서 한편에선 도자기문화를 송두리채 앗아가려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와비(陀)로 대표되는 일본의 다도는 그렇게, 정치성을 내포하면서 정립되어졌다. "불완전 속의 아름다움을 찾아 숭배하는 의식"으로 뿌리를 내리면서 예술의 감상에 있어서는 "암시의 가치"를 극대화 시켰고, 인생에 있어서는 죽음도 삶의 연장이라는 열린 생각을 갖게 하였다. 불완전 속의 완전을 추구하는 것이지만, 완전에 도달한다 해도 심미주의에서는 불완전한 것이어야 했다.
…삶과 죽음이 범천(梵天)의 낮과 밤일진대, 죽음은 왜 탄생처럼 반기지 않는가?…
낡은 것이 사라져야 신생(新生)은 가능해진다. 생명은 흘러가는 것이며 죽음은 만물에 찾아온다. 지향(指向)하는 것이 무엇이 되었든 저 끝에서 기다리는 것은 파괴(破壞)이다.
그들은 "무정하지만 생각하기 따라서는 자비로울 수 있는 신"인 죽음을 여러 가지 명목으로 숭배하게 되었다. 자위(自慰)·자족(自足)의 수단으로서가 아니었다. 불완전 숭배는 오히려 반대로 신에게 내미는 도전장같은 것이었다. 불완전한 인생들이 불완전한 세계에서 완전을 찾고 이룩해보려는 갸륵한 시도이기도 했다. 느끼려고만 하면 아름다움은 도처에 있는 것 아니던가.
다도는 차츰 배반적인 것까지 수용해 가면서 이윽고 "두 얼굴의 일본"을 낳았다. 모든 것이 "불완전 숭배"로 합리화될 때 "두 얼굴"은 태어났다. 교양과 풍류라는 이름 아래 잔학행위를 서슴없이 저지르고 신에게 제물을 바치기 위해 자연을 황폐케 하는 일까지 벌이게 되었다.
"아아, 뜰에 말없이 서 있는 꽃이여. 너를 꺽어들면 나의 손은 더러워진다. 그러나 이것이 너의 운명인 것을"
그들은 주저없이 꽃을 꺾어 밑둥을 자르고 불에 지진 뒤 도꼬노마(床の間)에 올려놓고는 아름다움에 대한 봉헌(奉獻)을 함께 하자고 하였다.
…아름다움에 대한 봉헌을 함께 하자는 것…
다도에서 비롯된 이 논리는 후일 침략과 약탈을 일삼으며 대동아공영을 함께 이루자고 부르짖는 행위나 같은 것이었다.
꽃을 함부로 꺾는 것은 죄이지만, 미리 마음에 그림을 그리고 꼭 필요한 부분만을 자르는 것으로 "속죄(贖罪)"는 이루어진다고 멋대로 생각했다.
그들은 정말 손 닿는대로 자르는 것을 금기로 여겼다. 하나의 작은 가지일망정 필요 이상 자르는 것을 큰 수치로 여겼다.
리큐에 의하여 다도(茶道)의 작법(作法)이 완성되면서 꽃꽂이(花道)도 눈부시게 진보했다. 리큐의 후계인 오다우라쿠(織田有樂), 후루다오리베(古田織部), 고보리엔슈(小握遠州), 가다기리세키슈(片桐石州)도 꽃꽂이의 새로운 조형을 창조하는데 적지않은 노력을 하였다.
그러나 다인들에 의한 꽃 숭배는 다도의 심미적 예법 중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다실 내의 다른 예술품과 마찬가지로 전체 장식체계의 일부일 뿐이었다. 따라서 유별나게 눈에 띠는 꽃은 다실에 놓여질 수 없었고 다실을 떠나 독립적인 감상의 대상도 될 수 없었다.
출처 : 인천시무형문화재10호범패와작법무
글쓴이 : 모봉형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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