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이야기

[스크랩] 한국의 차문화/ 점필재의 함양다원과 한재의 차 노래

차보살 다림화 2008. 2. 17. 18:46
조선 건국(1392) 이후 차생활문화는 확실히 쇠퇴했다. 그러나 직전까지 성행했던 것이 하루 아침에 눈 녹듯 사라질 수는 없었다. 드러나지 않을 뿐 찾아보면 곳곳에서 유속(遺俗)을 발견할 수 있다. 무엇보다 차공(茶貢) 제도는 그대로 이어져 차 생산이 없는 지역 백성들을 괴롭혔다.

이같은 사실은 성종 때의 문신(文臣) 점필재( 畢齋·金宗直1431∼1492)가 자상하게 들려준다. 성종2년 신묘(1471)에 함양군수로 내려간 그는, 당시 함양군에 차 생산은 없음에도 차를 상공하는 제도는 남아있어 민원의 대상이 되고있음을 알고 다원(茶苑)을 만들어 이를 시정했다.

…함양에 부임하여보니 함양군에서는 나지도 않는 차를 해마다 백성들에게 부과하여, 백성들은 멀리 전라도에 가서 비싼값에 차를 구해온다. 쌀 한 말에 차 한 홉의 비율로 사 온다. 이 폐단을 알고난 후 백성들을 몰아치지않고 관(官)에서 구해 상공(上貢)하였다. 내 일찌기 삼국사(三國史)를 읽었으되, 신라 때 당나라에서 차 종자를 얻어 지리산에 심게했다는 기록을 보았는데, 함양이 지리산 아래이니 어찌 신라 때의 것이 남아있지 않으랴 생각되어 늙은이를 만날 때마다 물어보았다. 그 결과 엄천사(嚴川寺) 북쪽 대나무 숲에서 몇 그루의 차나무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몹시 기뻐서 곧 그곳에다 다원(茶園)을 설치했다. 근방에 있는 백성들의 밭을 다 사서 다원을 넓혔다. 몇 해 지나지않아 차나무는 잘 번식해서 다원 안에 가득해 졌다…

차공(茶貢)이 함양군에까지 있었다면 그 아래 지역에는 모두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전라도에 가면 값은 비싸지만 얼마든지 차를 구할 수 있다고 했다. 점필재의 이러한 회고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차가 토공물(土貢物)인 곳이 32개 군과 현이고, 토산품(土산品)인 곳은 3곳으로 표시되어 있다. 모두 오늘날에도 차가 많이 생산되는 전라도 경상도 지방이다. 그러나 함양의 경우처럼 차가 산출되지 않음에도 차공은 있었다는 것은 세종실록지리지가 발로 쓴 것이 아니라 전세(前世)에서 이어받아 정리한데 불과함을 알려준다 할 수 있다.

점필재에 이어서 한재(寒齋) 이목(李穆1471∼1498)의 차 노래(茶賦)는 또 다른 각도에서 우리 정서를 건드린다. 한재는 점필재가 함양군수로 부임하던 해에 태어났고, 점필재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다. 후일 유학의 거두가 된 한훤 김굉필, 일두 정여창, 탁영 김일손 등과 동문수학했다. 19세에 초시 갑과에 합격한 뒤 성균관의 유생이 되었는데 이때부터 그의 강한 기개는 세인의 관심을 끌었다.

임금(成宗)이 병이 나서 차도가 없자 이를 염려한 대비가 하루는 무녀를 불러 명륜당 뒤 벽송정(碧松亭)에서 굿을 하도록 하였다. 한재는 태학생들을 이끌고 가 그 무당을 매질하여 내쫒아 버렸다. 크게 노한 왕비는 임금의 병세가 차도있기를 기다려 사실을 왕에게 말하였다. 이에 성종은 그 명단을 적어올리라고 불호령을 내렸다. 모두들 사색이 되어 숨으려 하였으나 한재는 책임을 자담하고 결과를 기다렸다. 얼마 후 성종이 내린 것은 처벌이 아닌 격려였다.

한재의 의협심은 도처에서 강한 소리를 내었다. 기개(氣槪)있는 선비였던 그는 불의(不義) 앞에서는 상대가 누구이든 간에 한 치의 양보없이 과감하게 맞섰다. 강하면 부러진다는 속담은 한재를 두고 한 말과도 같았다. 그해 영의정 윤필상의 졸정(拙政)을 상소하며 간귀(奸鬼)로 지목한 것이 화근이 되어 귀양을 갔다가, 3년 후 풀려나 문과에 장원하여 다시 관직에 올랐으나 무오사화에 임하여 끝내 윤필상의 모함을 받고 처형되니 당시의 나이 28세였다.

너무 젊었다는 점에서 그의 사상과 생애를 논하기는 조심스러운 일이나, 그가 남긴 전문 1332자의 차노래(茶賦)는 우리를 잠시 침묵하게 만들 정도의 것이다. 그는 서문에 다부를 짓는 뜻을 이렇게 밝혔다.

…나는 차를 알지 못하고 지냈는데, 육씨 책(茶經)을 읽고 그 성품을 안 뒤로 마음 깊이 보배로 삼았다. 옛날 중산(中散)은 거문고를 좋아하여 노래를 지었고, 팽택(彭澤)은 국화를 사랑하여 노래를 남겨 그 아름다움에 공헌했는데, 하물며 차의 공덕이 으뜸인데 아직 칭송한 이가 없으니 어진 벗을 버린 것과 무엇이 다를까. 이에 그 이름을 살펴보고 품질의 상하와 공덕을 노래 글로 지어본다. 혹 누가 있어 "차는 세금으로 들이니 백성에게 병폐인데 무엇을 말하려는가"하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답하리라. "그것이 어찌 하늘의 본뜻일까. 사람이 정한 일이요 차의 일은 아닐 것이다…

한재는 다부에서 ▲차의 종류와 생산지를 일별(一瞥)하고 ▲차밭의 풍광을 두루 논한 뒤 ▲차의 오공(五功) 육덕(六德)을 예찬하고 ▲결론 부분에서는 스스로 체득한 차의 진수와 그 현묘함을 간결하게 다루고 있다.

…다섯가지 공(功)이 있으니 첫째는 갈증을 해소시켜 주는 공이요, 둘째는 화가 치밀 때 울분을 달래주는 공이다. 세째는 상대와 정답게 대화를 나누도록 하는 공이요, 네째는 몸 안의 삼충(三蟲)을 몰아내어 건강하게 하는 공이고, 다섯째는 주독(酒毒)을 풀어주는 공이다.

또 여섯가지 덕(德)이 있으니 하나는 장수를 누리게 하는 것이요, 둘은 덕을 짓게 하는 것이요, 셋은 병을 낫게 하고, 넷은 기운을 맑게 하고, 다섯은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여섯은 예의롭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한재의 글에는 낯선 것이 많다. 차의 종류와 산지를 논함에 있어서 조선의 것은 포함되지 않았고, 문체 또한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노숙한 흠이 있다. 결론 부분의 한 구절을 보자

…기꺼이 노래로 이르리라. 내가 세상에 남에 풍파가 모질도다. 양생(養生)에 뜻을 두니 너를 외면하고 어느 것을 구하리…

이는 학문의 조숙함과는 성격이 다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경륜이 받침되지 않고는 쉽지않은 글이라는 말이다. 그가 다부를 지은 것이 연경(燕京:北京)을 다녀온 이듬해, 즉 25세 전후라고 보면 아무래도 격에 어울리지않는 글로 보이는 것이다.

게다가 서두에 밝히기를 …내가 차를 알지 못하고 지냈는데 육씨 책을 읽고 그 성품을 안 뒤로 마음의 보배로 삼았다… 하였으니 차를 알게 된 것 또한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그렇다면 그의 상식은 독서(讀書)에 바탕한 것이요, 다부는 글 재주의 발휘일 뿐이다. 얼마간 차생할을 하긴 했겠지만 노래로 표현된 그의 다론(茶論)은 크게 깊이를 갖는 것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다만 그가 살았던 시대에 차생활이 흔하지 않았음을 느끼게는 한다. 억불숭유(抑佛崇儒)의 조정 분위기에서 생산에 대한 장려 없이 부세(賦稅)로 거두어 들이기만하여 일부 식자들이 병폐로 여겼던 사실을 한구절 드러내 보이고 있는 것도 관심을 끈다. 아울러 조선이 차를 멀리했지만 민간의 다풍은 남아있었음도 전해준다.


궁중의 차 마시는 풍습은 전혀 엉뚱한 데서 전해지고 있었다. 조정 중신들의 다풍은 고려시대보다 더 격을 갖추었던 일면도 보인다. 예로써 "다시(茶時)"라는 말은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말인데 그 유속을 보자.

사헌부(司憲府:法院) 관원들이 등청(登廳)하여 회자(會座)하는 것을 다시라 하였는데, 이는 공정한 판결을 위하여 매일 일정한 시간 차 마시며 토론을 벌리는 자리였다. 이 "다시(茶時)" 기록은 태종 5년(1405) 7월 기유조에 시작하여 고종 19년 6월의 승정원 일기에까지 보인다.

다시(茶時)는 일반 선비사회에도 있었던 것 같다. 어른들이 모여 마을 의 여러가지 일을 의논하는 것도 다시라고 했던 것이다. 다시는 또 야다시(夜茶時)라는 은어(隱語)를 낳았다.

재상 이하 누구든지 간사하거나 세금을 많이 거두어 백성을 착취하거나 재물을 탐내어 깨끗하지 못한 자가 있으면 여러감찰들이 밤을 이용하여 그 사람의 집에가서, 그 탐오(貪惡)함을 논죄하고 흰판자에다 적어서 대문 위에 거는 것을 야다시라 하였는데, 이렇게 한번 야다시를 당하면 형사적인 구속은 받지 않지만, 선비사회에서 명예적인 파문을 당해 다시는 의관반열(衣冠班列)에 참여하지 못하는 기물(奇物) 취급을 받았다.

이러한 풍속은 다시(茶時)를 영어로 말할 때 "Tea Time"이 된다는 데서 묘한 여운을 흘린다. 영국이 자랑하는 티 타임 역사는 1760년경, 한 공작부인이 "일상의 무기력한 기분"에서 벗어나보려는 노력으로 매일 오후 5시 차와 과자를 내놓았던 데서 시작되었다. 그것이 다듬어지고 발전하여 세계인이 선망하고 모방하는 제도로 부각되었다. 우리의 티 타임은 무려 600년의 역사를 갖고 있지만 후손도 그 사실을 모를 정도로 역사 속에 묻혀 버렸다. "단순한 휴식 이상의 기능"을 갖추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좋은 점을 발전시키지 못했던 것이다.


15세기 후반과 16세기는, 그렇게 우리 차문화가 쇠퇴일로를 걷던 시기였고 일본에서는 다도로 성문화된 시기였다.

차에 대한 상식이 얼마만큼 급격히 쇠퇴했는가는 임진왜란이 끝나가는 무술년 6월, 선조(宣祖)와 명장(明將) 양호(楊鎬)의 일화가 전해준다. 선조실록에 의하면 양호는 남원(南原)에 주둔할 때 품질좋은 토산차(土産茶)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선조를 접견할 때 그는 이 차를 진정(進呈)하며 아뢰기를,

"이 차는 남원에서 구한 것인데 품질이 상품입니다. 귀국에 이와같이 좋은 차가 있는데 어찌 마시지를 않습니까?" 하였다.

이에 선조가 답하기를, 조선의 습속이 본래 차를 마시지 않는다고 하자, 양호는 다시,

"이 차를 요동(遼東)에 가져 가 팔면 10근에 은 1전을 받을 수 있으니 국익에 큰 보탬이 될 수 있습니다. 서번인(西蕃人:女眞人)은 고유(膏油)를 먹기 때문에 하루라고 차를 마시지 않으면 죽습니다. 중국은 차를 팔아서 1년에 만여필의 전마(戰馬)를 구합니다"하였다.

선조가 또 이르기를 "이는 육안차(六安茶)의 류(類)가 아니고 작설차(鵲舌茶)요" 하고 말하자 양호는 또 말했다.

"이것도 차입니다. 조선인이 인삼차를 마시나 이것은 차가 아니고 탕입니다. 인삼차를 마시면 속이 번열(煩熱)하여져 차를 마시는 것 같이 상쾌하지 못합니다. 귀국인이 차를 마시면 마음이 열리고 기운이 나서 백사(百事)를 다 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양호가 이렇게 조선인의 유뢰(柔瀨)한 것을 풍자하자, 이를 귀담아 들은 선조는 며칠 후 군신(君臣)을 별전(別殿)에 불러 양호의 다풍자담(茶風刺談)을 그대로 옮기며 의견을 물었다.

"양대인(楊鎬)이 접견할 때마다, 조선인은 성품이 이완(弛緩)하여 일을 잘 처리하지 못한다고 말하더니, 전일에는 남원차 2포를 가져와 하는 말이 귀국에 좋은 차가 산출되는데 왜 음용하지도 않고 팔지도 않는가를 물었소. 그리고 덧붙이기를 귀국 군신이 차를 마시면 기운이 나서 일을 잘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데, 군신의 의견은 어떻소?"

그러자 정탁(鄭琢)이란 대신이 아뢰기를,

"참으로 희롱하고 모욕하는 말입니다. 차를 말한 것이 아니라 조선이 일을 잘 경영하지 않음을 빗대서 한 말인줄 아옵니다. 태만한 성질이 어찌 차 마시는 것으로 고쳐질 수 있겠습니까"했다고 한다.

이 기록만을 놓고 본다면 조선의 차 마시는 습속은 완전히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다. 왕실이나 조정에서 사라짐은 물론, 점필재의 함양다원(茶園)이나 다시(茶時) 이야기도 근거를 잃고 만다. 함양다원 일화에서 임진왜란까지 약 120년이라는 공간이 있기는 하다. 약 120년 - 그 정도면 근원적인 문화 하나가 충분히 사라질 수 있는 세월일까? 과연 그 사이에 차생활 풍속이 그렇게 까마득히 사라졌 버릴 수 있는 것일까.


어쨌든 7년이나 계속된 전쟁에서 조선 천지는 크게 황폐화하고 말았다. 백성들은 도탄(塗炭)에 빠졌으며 정치 문화 경제 사상 등 각 방면에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전화(戰禍)로 인한 농촌의 황폐, 국가질서의 문란만으로도 민심은 흉흉했는데, 그 위에 질병의 만연까지 겹쳐 혼란을 더욱 가중시키고 있었다.

여기 또 하나의 감당하기 어려운 난제(難題)가 겹치고 말았다. 명이 전쟁을 도와준 대가로 요구한 세폐에 조선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많은 양의 차가 포함된 것이다. 양호(楊鎬)의 입김이 작용했을 것이었다.

조정은 어려운 상태가 되었다. 생산을 장려한 일도 없고 점차 잊혀져가는싯점에서 차를 마련하는 일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점필재가 했던것처럼 늦게라도 다원(茶園)을 조성하는 것으로 대책을 삼았으면 되었을일을 그런 쪽으로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가 순리와 상식을 존중하는 합의체일 때 세상은 비로소 평온해지는 법이다. 정치에 기술자가 있어서도 안되는 일이지만 백성을 담보로 하는 일에 임시대처라든가 오기를 부리는 일은 더더욱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조정은 장기 대책은 거론하지도 않고 발 등에 떨어진 불만 우선 끄고보자는 식으로 강제를 발동하고 말았다.

야생(野生)하는 차나무가 있는 호남과 지리산 남쪽의 백성들은 특별한 고초(苦楚)를 겪어야만 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새벽부터 불려나가, 농사는 전폐하고 하루종일 찻잎 따기에 시달려야 했다. 견디다 못한 백성들은 이윽고 차나무가 있는 산에 불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차는 은혜의 식물이 아니라 원수 덩어리였다. 인정(人情)의 나눔이 아니라 "애물"이었다. 불을 지른 사람은 계속 붙잡혀 가 형벌을 받았지만, 백성들은 차라리 그 형벌을 택했다. 역사의 한 페이지라지만 그 정황이란 상상만으로도 얼마나 비참(悲慘)했을 것인가.

이러한 때에 허준(許浚)의 동의보감(東醫寶鑑)이 편찬되고 (선조 30년인 1597년 편집에 착수하여 1611년, 광해군 3년에 완성되었다) 차 대용음료가 성행하기 시작한다. 인삼즙·쌍화탕·결명자·율무·구기자 등등, 그때까지 약으로 전래되던 탕·즙들이 동의보감에 힘입어 차 대용음료로 백성들의 사랑을 받게되고, 본래의 차는 더욱 더 깊히 숨게 되었다.

차는 고유명사임에도, 마시는 음료의 대명사인양 오해되고, 커피도 차의 일종인양 여기게되는 "무식"은 이렇게하여 싹트기 시작하였다. 아무 것이나 다 차라고 불렀다. 심지어 이때 수입된 담배까지도 "연차(煙茶)"라고 부르며 나눠 피웠을 정도였다.

이같은 사실들은 차생활이 얼마나 뿌리깊은 습속인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단면일 수도 있다. 외부 조건의 변화에 따라 널리 성행하기도 하고 쇠퇴할 수 있지만, 단절될 수는 없는 토착문화임을 피부로 느끼게 하는 사례들인 것이다.

잘못 먹어 보챈 애기
작설 멕여 잠 재우고,
큰아기가 몸살나면
작살 멕여 놀게 하고,
엄살많은 시애비는
작설 올려 효도하고…

차와 함께 차 노래도 숨었다. 민요란 민중들 사이에서 저절로 생겨나서 전해지는, 민족의 정서를 가장 잘 함축하고 있는 노래이다. 저절로 생겨난 것은 또 저절로 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을 뜻한다.

다만 분명한 것은 생겨나는 데는 오랜 세월이 걸리지만, 사라지는 것은 잠깐일 수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출처 : 인천시무형문화재10호범패와작법무
글쓴이 : 모봉형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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