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의 원료는 오직 차나무 이파리이다. 아무 이파리나 다 차가 되는 것이 아니고 봄을 맞아 가지 끝에 새로 돋아난 작은 이파리만을 취해 차로 한다. 긴 동면에서 깨어나 막 세상에 나온 연록색의 여린 이파리가 그것인데, 모양의 부드럽고 예쁘기가 참새의 혀(舌)와 같다하여 선조들은 여기 작설(雀舌)이란 이름을 붙였고, 크기에 따라 세작(細雀) 준세작(準細雀) 중작(中雀) 대작(大雀)이라 구분하는 등 참새 작(雀)자를 단위로 삼아 품질을 구별했다. 미소를 짓게 하는 조크(Joke)도 생겼다.
…차 이름이 참새(雀)의 혀(舌)라, 스님이 마실 지 의심스럽네.
우리나라 기후에서는 4월 20일 경인 곡우(穀雨)를 전후해 진품(珍品)을 얻을 수 있는데 곡우 전 것을 우전(雨前)이라하여 극상품으로 쳤고, 곡우 이후의 것은 세작(細雀)으로 분류했다. 5월 초순에 상품(上品)인 준세작(準細雀)을 얻고, 중순에 딴 것으로는 중품(中品)을 삼았다. 하순에 얻는 것은 하품(下品)으로 일상적 음료인 엽차(葉茶)가 그것이다. 5월이 지나면 차를 만들지 않았다. 진주농림전문대학의 김기원(金基元) 교수가 함양 마천에서 채집한 민요에 차 따기가 있다.
초엽 따서 상전 주고, 중엽 따서 부모 주고
말엽 따서 남편 주고, 늙은 잎은 차약 찧어
봉지 봉지 담아 두고, 우리 아이 배 아플 때
차약 먹여 병 고치고, 무럭 무럭 자라나서
경상 감사 되어 주소
차나무의 종류는 잎의 크기를 기준, 소엽종(小葉種)과 중엽종(中葉種)·대엽종(大葉種)으로 나눌 수 있고 원재배지 기준으로는 중국종·버마종(샨종)·인도종(아샘종)으로 분류한다. 본디 중엽종이란 말은 없고 중국 것에 소엽종과 대엽종이 있는데, 중국 대엽종이 인도 대엽종에 비하면 중간 크기에 불과하기에 편의상 그렇게 나눠본다. 버마종은 중국 대엽종과 비슷하여 함께 중엽종으로 분류한다.
소엽종(小葉種)은 녹차(綠茶)용이다. "차"하면 녹차를 일컫듯이 차나무 하면 일단 소엽종을 일컫는다. 중엽종(中國大葉種)으로는 반발효차(半醱酵茶)를 만든다. 중국과 대만의 오룡차(烏龍茶)가 반발효차를 대표하지만 인도 버마 파키스탄 등에서도 적지않은 양이 생산되고 있다. 홍차(紅茶)는 차잎을 완전 발효(醱酵)시킨 것인데 잎의 크고 작음에 관계없이 어떤 종류로도 가능하다. 인도(印度) 스리랑카 등 아열대 지방의 차나무 잎에 타닌 함량이 많아 홍차(紅茶)용으로 인기가 높다. 지구촌에서 가장 많이 소비되는 차가 이 지역에서 생산되는 홍차이다. 개량종을 대표하는 것으로는 일본의 야브기타종(種)을 들 수 있다. 녹차용인데, 이것이 우리나라에 수입되어 보성, 장성 강진 해남 등 호남의 일부와 제주도에 대단위 다원으로 조
성되어 있다.
우리나라 야생(野生) 차나무는, 분류상으로는 소엽종에 해당된다. 그러나 자세히 비교하면 중국 것보다 훨씬 작음을 알 수 있다. 본디 우리 토종은 작고 향기가 짙으며 육질이 치밀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아고베(사과)·머루(포도)·산밤(밤)·고염(감)·돌배(배) 등을 보아도 모두 그렇다. 산삼이나 은행도 마찬가지이다. 크기는 작으면서 성분과 효능은 세계인이 군침을 삼킬 정도로 뛰어난 것이다. 이 책의 차 이야기, 차나무 이야기는 이러한 우리 야생차 중심인데 어쩌면 야생(野生)보다 자생(自生)이 옳은 표현인지 모른다.
식물학적 측면으로 접근하면 차나무는 고생대 식물로 아종도 없는 단과 단일종이며, 인도와 중국 남부에는 자생지라 할만한 토양이 없다. 천산산맥 일부와 흥한령 우랄산맥 일부가 고생대 산맥일뿐이다. 반면 우리나라는 제주도와 울릉도를 빼고는 모두 고생대 지층에 속한다.
차나무 자생의 북방한계선을 34도 정도로 보는 것도 근거가 없다. 일본 아오모리현(40도), 소련 그라스노빌(42도), 우라지보스톡(40도)에서도 차나무는 재배되고 있다. 북방의 차나무일수록 색향미가 남방보다 월등하다. 추위에 약한 것은 일본의 개량종 야브기타인데, 이는 야생 차나무와 근본부터가 다른 것이다.
동서 교류가 시작되면서 서양의 학자들은 동양의 모든 것에 서양식의 이름을 붙이고, 새롭게 분류하는 작업을 했다. 학명(學名)이 그것이다. 차나무(tea plant)에는 1753년 데아 시넨시스(Thea sinensis)라는 학명이 붙여졌다. 스웨덴 식물학자 C.V.린네가 붙인 것으로 산차과(山茶科)의 상록활엽관목(常綠闊葉灌木)임을 뜻한다. 이후 다른 학자에 의해 카멜리아 시넨시스, 즉 동백과로 재분류되었다가 다시 산차과로 되돌려졌다.
밑둥에서 가지가 퍼져 올라와 옆으로 벌어지며 자라는데 키는 60-90cm 정도이며, 잎은 갸름하고 윤기가 있는 것이 전체적인 모양은 어린 동백나무와 비슷하다. 연평균 기온이 13도C 이상, 강우량 1천5백미리미터 이상의 지역이면 비탈진 땅에서도 얼마든지 생육이 가능하고 안개가 자주끼는 곳이면 더욱 적지(適地)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지리산 남향의 산간지를 중심으로, 영호남 일대가 차나무 자생이나 재배에 좋은 땅이 된다. 이러한 전제에서 학자들은 차나무가 자랄 수 있는 북방한계를 대개 충청남도까지로 보고 있다. 그러나 조선 중기 기록에는 한강변인 서울 남산의 양지 쪽에 차나무가 무성한데 이타방(지금의 이태원) 사는 지나인(支那人)들이 그것으로 차 양식을 삼았다는 기술도 있다.
중국 학자들은 이러한 차나무가 양자강 상류, 즉 티베트 고원에 인접한 중국 남부지방에서 제일 먼저 발견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발견(發見)은 그렇다 해도 기원(起源)에는 여러 전설(傳說)이 있다. 차나무 기원에 관한 여러 전설 중 가장 오랜 것은 염제신농(炎帝神農)씨 발견설이다. 다소 신비적인 예언서인 한(漢)의 위서(緯書)에 의하면 신농씨는 기원전 2,700년대 중국 삼황(三皇)의 한분으로, 몸은 사람이나 머리는 소 또는 용의 모습이었으며, 백성들에게 농업과 양잠 의약을 가르쳤고, 불의 사용법을 알려주었고, 또 오현금(五絃琴)도 발명했다고 한다.
신농씨와 관련이 있을법 하지만 저자나 제작연대가 확인되지 않고 원본도 없는 상태에서 전해지고 있는 신농본초경(神農本草經)에는 365종의 약물이 상품 중품 하품의 3품으로 나뉘어 기술되어 있는데, 상품 120종은 불로장생의 약물로 차나무를 비롯하여 단사(丹砂:朱砂) 인삼 감초 구기자나무 사향 등을 포함하고 있고, 중품 120종은 보약으로 석고(石膏) 갈근 마황 모란 녹용 등을, 하품 125종은 치료약으로 대황(大黃) 부자(附子) 파두(巴豆) 도라지 거머리 등 인체의 생리작용을 촉진하는 것들이 포함되어 있
다. 또 서문에는 약의 성질과 용법 등이 정확하게 기술되어 있어 한방의 기초가 한(漢)나라 때이거나 그 이전에 이미 완성되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신농씨는 야생의 풀을 일일어 씹어서, 그렇게 자세하게 성질과 용법을 기술했다고 하는데, 하루는 독초(毒草)를 씹어 독이 온몸에 번져 죽음 직전에 이르게 되었다. 이때 눈 앞에 나무도 풀도 아닌 가지 하나가 손짓하듯 너울 거리므로 그 잎을 따 씹으니 순식간에 해독이 되고 살아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에 신농은 그 나무를 차(茶)나무라 이름하고, 해독(解毒)을 제일의 효능으로 전하게 되었다. 풀 초(艸)와 나무 목(木) 사이에 사람 인(人)이 있는 차(茶)라는 글자는, 이때 신농씨를 죽음에서 살려낸 데 기인(基因)하여 만들어진 것이라 전한다.
다음은 전국시대(戰國時代) 명의(名醫)였던 편작(扁鵲)에 얽힌 일화다. 편작은 여관 종업원들을 감독하며 평범하게 살던 중 장상군(長桑君)이라는 의술에 능한 도인을 만나게 되고, 그에게서 금방(禁方)의 구전(口傳)과 의서(醫書)를 물려받아 의술을 터득한 뒤, 이웃나라의 다 죽어가는 태자를 살려내어 천하명의가 되었다.
편작은 모두 8만4천가지 병에 대한 약방문(處方)을 알고 있었는데, 절반도 채 안되는 4만 가지 약방문 정도를 제자들에게 전수했을 때, 너무 유명한 것이 화근이 되어 경쟁자의 흉계에 의해 암살되고 말았다. 이에 제자들이 선생의 무덤가에서 백 일을 슬퍼하니 편작의 무덤에서 한 나무가 솟아 올랐다. 그것이 차나무였는데 하도 신기하여 제자들이 그 나무를 이리저리 관찰하고 연구해보니, 그 잎에 담긴 여러 성분들이 신비한 효능을 보여 나머지 4만4천의 약방문을 얻게 하더라는 것이다. 차가 만병통치의 불로초처럼 회자되는 것은 이들에 의해서라고 한다.
또 하나의 설은 달마(達磨) 이야기다. 달마는 6세기 초 서역(西域)에서 당나라로 건너와 낙양(洛陽)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는데, 참선 중 자꾸만 졸음이 오자 "눈시울이 있어 잠을 불러 들인다"며 양 눈의 눈시울을 뚝 뚝 떼어내 뒷뜰에 버렸다. 이튿날 그 자리에 한 나무가 솟았는데 잎을 씹으니 금세 머리가 맑아지고 잠은 멀리 달아나더라는 것이다. 차를 수도용 음료로 삼는 것은 달마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위에 소개한 세 가지 기원설의 공통점은 모두 차의 뛰어난 효능을 이야기하는 데 있다. 또 관련 인물이 하나같이 생몰(生沒) 연대가 확인되지 않는, 전설적인 인물들이라는 점도 같다. 놀라운 것은 그들이 전하는 차의 그 어떤 효능도 결코 과장(誇張)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화학 식물학 약학 임상학 식품영양학 등 과학화된 현대 학문에 의해서 밝혀진 성분과 효능은 전설이 전하는 내용보다 더 신비성이 풍부한 것으로 발표되고 있다. 여기 힘입어 차는 더욱 지구상에 비교할 것 없는 유익한 음료의 지위를 튼튼히 해 가고 있다.
세 가지 기원설 중에서 신농씨 발견설과 편작에 얽힌 전설은 내용도 그럴듯 할뿐더러 "차는 처음에 약용(藥用)이었다가 나중에 음료가 되었다"는 주장을 훌륭하게 뒷받침한다. 차도비서(茶道秘書)에 "차는 약초라고 하지만 병을 치료하지는 못한다. 다만 예방이나 식독을 없애는 효능은 뛰어나다. 그 성분이 완만하기 때문인데, 그래서 매일 마셔도 부작용은 없다"고 한 것을 보아도 약용에서 음료가 된 차의 변천은 자연스러운 것임을 읽을 수 있다.
숙제는 달마(達磨) 설이다. 우리는 물론 기인(奇人) 괴승(怪僧)으로 알려진 달마대사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차의 기원에 관련된 달마는 인물(人物)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의문이다.
달마의 또다른 해석은 인간생활에 질서를 주는 법이랄까, 관념이다. 산스크리트어(梵語)에서의 달마(dharma)는 "자신은 그대로 있으면서 다른 모든 존재를 활동하게 하는 질서의 근거"를 나타내는 용어이다. 처음에 이 용어를 번역한 지나(支那/中國의 옛이름)의 학자들은 음(音)을 따서는 달마(達磨)로 적고, 뜻은 법(法)이라고 옮겼다. 따라서 베다 시대(BC 1200년경)의 달마는 "하늘의 질서로서 나타나는 리타 브라다"와 함께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인 용어로 이해되었었다.
브라마나시대(BC 800년경)로 넘어오면서 달마는 신적(神的) 의지로서의 리타 브라다에 비해, 보다 인간적인 쪽으로 독립하게 되었고, 이윽고 신(神)의 위에 - 인간에게는 더 가까운 곳에 - 올려졌다. 아무리 약자라도 달마를 지니면 강자를 누를 수 있게된다는 식의 "최고의 존재"인 동시에, 만물이 그 힘의 정도에 구애없이 공존할 수 있는 질서의 진리가 또한 달마였던 것이다.
때문에 불과 백년전만 해도 달마 이야기는 그 존재가 불분명한 전승설화로 취급되었었다. 그러나 20세기 들어와 돈황(敦煌)에서 발견된 어록에서 뜻밖에도 달마의 행적 기록이 발굴되었다. 독자적인 선법(禪法)이나, 제자들과 나눈 문답 내용을 보면 그는 분명하게 실존했던 인물이었다. 그가 소림사(小林寺)에 있을 때, 후일 소림의 제2조(祖)가 되는 혜가(慧可)가 찾아와 답을 구하는 대화도 그 안에서 나왔다.
혜가: 마음이 불안합니다. 제발 제 마음을 가라앉혀 주십시오.
달마: 그럼 그대의 불안한 마음을 내게 한번 보여 주게나. 그래야 가
라앉혀줄 수 있지않는가.
혜가: 어떻게 보여 드리나요. 어디를 찾아봐도 발견이 안됩니다.
달마: 그러면 되었네. 나는 이미 그대의 마음을 가라앉혀 준 것이네.
불교가 번거로운 철학체계로 기울어진 그 시대에 달마는, 벽이 그 무엇도 접근시키지 않듯이, 본래의 청정한 자성(自性)에 눈 뜨면 바로 성불(成佛)할 수 있다는 선법(禪法)을 평이한 구어로 전파한 종교운동가였다. 우리가 자주 접하는 직지인심 현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 자기를 바로 봄으로서 본래 부처였음을 깨닫는 것)이, 곧 당시 달마의 교의(敎意)를 집약한 한마디였다.
참선(參禪)을 수행(修行)의 으뜸으로 여긴 달마가 수마(睡魔)와 싸우는 처절한 모습을 상상해 보는 것은 그리 어렵지않다. 전하는 이야기대로 눈시울을 떼어낼 수 있고, 그렇게 함으로서 몰려오는 졸음을 물리칠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떼고 또 떼어 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 수 있을까? 눈시울 버린 자리에서 차나무가 솟아올랐고 그 잎을 먹으니 머리가 맑아지고 잠이 달아나더라는 대목도 돌려서 생각하면 가슴에 와 닿을만큼, 간절하기 이를 데 없는 소망으로 들린다. 기원(起源)이 아니라 기원(祈願)이라 하는게 더 잘 이해될 것 같다.
시기로 보아도 이 때는 차생활이 한참 번져있는 상태여서 기원(起源)이란 단어를 사용하기 어렵다. 그의 활동시기가 6세기 초라면 지나(支那)는 진(晉)에서 수(隋)로 이어지는 남북조(南北朝)로서, 분열과 병합이 거듭되며 정변과 살륙이 휘몰아치던 때였다. 그 혼란의 가운데에서 차나무가 기원했다는 것은 아무리 전설이라 해도 수긍하기 어렵다.
6세기 초 기원설을 받아들인다면 후한말을 배경으로 시작되는 삼국지(三國志)가 우스워진다. 수호전(水滸傳) 서유기(西遊記) 금병매(金甁梅)와 함께 중국 사대기서(四大奇書)의 하나로 꼽히는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는 유비가 어머니께 드릴 한줌의 차(茶)를 구하러 멀고 위험한 여행을 떠나는 것으로 시작되는데, 년대를 추정해보면 달마대사 시대에서 적어도 3백년 이상 거슬러 올라간다. 그렇다면 차의 기원설에 나오는 달마(達磨)는 인물이 아니라는 확신이 생긴다. 달마는 질서의 근거이자 사람들이 구하는 새 불교의 이상이었다.
그것은 참으로 절묘한 조화였다. 신농씨(神農氏)와 편작(扁鵲)의 약초(藥草)설 위에, 질서의 근거이자 새 불교의 이상(理想)인 달마설을 첨가하면서 차는, 기원(起源)에서부터 인류사회(人類社會)에 없어서는 안될 반려(伴侶)로서의 기초(基礎)를 훌륭하게 다지는 것이다
…차 이름이 참새(雀)의 혀(舌)라, 스님이 마실 지 의심스럽네.
우리나라 기후에서는 4월 20일 경인 곡우(穀雨)를 전후해 진품(珍品)을 얻을 수 있는데 곡우 전 것을 우전(雨前)이라하여 극상품으로 쳤고, 곡우 이후의 것은 세작(細雀)으로 분류했다. 5월 초순에 상품(上品)인 준세작(準細雀)을 얻고, 중순에 딴 것으로는 중품(中品)을 삼았다. 하순에 얻는 것은 하품(下品)으로 일상적 음료인 엽차(葉茶)가 그것이다. 5월이 지나면 차를 만들지 않았다. 진주농림전문대학의 김기원(金基元) 교수가 함양 마천에서 채집한 민요에 차 따기가 있다.
초엽 따서 상전 주고, 중엽 따서 부모 주고
말엽 따서 남편 주고, 늙은 잎은 차약 찧어
봉지 봉지 담아 두고, 우리 아이 배 아플 때
차약 먹여 병 고치고, 무럭 무럭 자라나서
경상 감사 되어 주소
차나무의 종류는 잎의 크기를 기준, 소엽종(小葉種)과 중엽종(中葉種)·대엽종(大葉種)으로 나눌 수 있고 원재배지 기준으로는 중국종·버마종(샨종)·인도종(아샘종)으로 분류한다. 본디 중엽종이란 말은 없고 중국 것에 소엽종과 대엽종이 있는데, 중국 대엽종이 인도 대엽종에 비하면 중간 크기에 불과하기에 편의상 그렇게 나눠본다. 버마종은 중국 대엽종과 비슷하여 함께 중엽종으로 분류한다.
소엽종(小葉種)은 녹차(綠茶)용이다. "차"하면 녹차를 일컫듯이 차나무 하면 일단 소엽종을 일컫는다. 중엽종(中國大葉種)으로는 반발효차(半醱酵茶)를 만든다. 중국과 대만의 오룡차(烏龍茶)가 반발효차를 대표하지만 인도 버마 파키스탄 등에서도 적지않은 양이 생산되고 있다. 홍차(紅茶)는 차잎을 완전 발효(醱酵)시킨 것인데 잎의 크고 작음에 관계없이 어떤 종류로도 가능하다. 인도(印度) 스리랑카 등 아열대 지방의 차나무 잎에 타닌 함량이 많아 홍차(紅茶)용으로 인기가 높다. 지구촌에서 가장 많이 소비되는 차가 이 지역에서 생산되는 홍차이다. 개량종을 대표하는 것으로는 일본의 야브기타종(種)을 들 수 있다. 녹차용인데, 이것이 우리나라에 수입되어 보성, 장성 강진 해남 등 호남의 일부와 제주도에 대단위 다원으로 조
성되어 있다.
우리나라 야생(野生) 차나무는, 분류상으로는 소엽종에 해당된다. 그러나 자세히 비교하면 중국 것보다 훨씬 작음을 알 수 있다. 본디 우리 토종은 작고 향기가 짙으며 육질이 치밀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아고베(사과)·머루(포도)·산밤(밤)·고염(감)·돌배(배) 등을 보아도 모두 그렇다. 산삼이나 은행도 마찬가지이다. 크기는 작으면서 성분과 효능은 세계인이 군침을 삼킬 정도로 뛰어난 것이다. 이 책의 차 이야기, 차나무 이야기는 이러한 우리 야생차 중심인데 어쩌면 야생(野生)보다 자생(自生)이 옳은 표현인지 모른다.
식물학적 측면으로 접근하면 차나무는 고생대 식물로 아종도 없는 단과 단일종이며, 인도와 중국 남부에는 자생지라 할만한 토양이 없다. 천산산맥 일부와 흥한령 우랄산맥 일부가 고생대 산맥일뿐이다. 반면 우리나라는 제주도와 울릉도를 빼고는 모두 고생대 지층에 속한다.
차나무 자생의 북방한계선을 34도 정도로 보는 것도 근거가 없다. 일본 아오모리현(40도), 소련 그라스노빌(42도), 우라지보스톡(40도)에서도 차나무는 재배되고 있다. 북방의 차나무일수록 색향미가 남방보다 월등하다. 추위에 약한 것은 일본의 개량종 야브기타인데, 이는 야생 차나무와 근본부터가 다른 것이다.
동서 교류가 시작되면서 서양의 학자들은 동양의 모든 것에 서양식의 이름을 붙이고, 새롭게 분류하는 작업을 했다. 학명(學名)이 그것이다. 차나무(tea plant)에는 1753년 데아 시넨시스(Thea sinensis)라는 학명이 붙여졌다. 스웨덴 식물학자 C.V.린네가 붙인 것으로 산차과(山茶科)의 상록활엽관목(常綠闊葉灌木)임을 뜻한다. 이후 다른 학자에 의해 카멜리아 시넨시스, 즉 동백과로 재분류되었다가 다시 산차과로 되돌려졌다.
밑둥에서 가지가 퍼져 올라와 옆으로 벌어지며 자라는데 키는 60-90cm 정도이며, 잎은 갸름하고 윤기가 있는 것이 전체적인 모양은 어린 동백나무와 비슷하다. 연평균 기온이 13도C 이상, 강우량 1천5백미리미터 이상의 지역이면 비탈진 땅에서도 얼마든지 생육이 가능하고 안개가 자주끼는 곳이면 더욱 적지(適地)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지리산 남향의 산간지를 중심으로, 영호남 일대가 차나무 자생이나 재배에 좋은 땅이 된다. 이러한 전제에서 학자들은 차나무가 자랄 수 있는 북방한계를 대개 충청남도까지로 보고 있다. 그러나 조선 중기 기록에는 한강변인 서울 남산의 양지 쪽에 차나무가 무성한데 이타방(지금의 이태원) 사는 지나인(支那人)들이 그것으로 차 양식을 삼았다는 기술도 있다.
중국 학자들은 이러한 차나무가 양자강 상류, 즉 티베트 고원에 인접한 중국 남부지방에서 제일 먼저 발견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발견(發見)은 그렇다 해도 기원(起源)에는 여러 전설(傳說)이 있다. 차나무 기원에 관한 여러 전설 중 가장 오랜 것은 염제신농(炎帝神農)씨 발견설이다. 다소 신비적인 예언서인 한(漢)의 위서(緯書)에 의하면 신농씨는 기원전 2,700년대 중국 삼황(三皇)의 한분으로, 몸은 사람이나 머리는 소 또는 용의 모습이었으며, 백성들에게 농업과 양잠 의약을 가르쳤고, 불의 사용법을 알려주었고, 또 오현금(五絃琴)도 발명했다고 한다.
신농씨와 관련이 있을법 하지만 저자나 제작연대가 확인되지 않고 원본도 없는 상태에서 전해지고 있는 신농본초경(神農本草經)에는 365종의 약물이 상품 중품 하품의 3품으로 나뉘어 기술되어 있는데, 상품 120종은 불로장생의 약물로 차나무를 비롯하여 단사(丹砂:朱砂) 인삼 감초 구기자나무 사향 등을 포함하고 있고, 중품 120종은 보약으로 석고(石膏) 갈근 마황 모란 녹용 등을, 하품 125종은 치료약으로 대황(大黃) 부자(附子) 파두(巴豆) 도라지 거머리 등 인체의 생리작용을 촉진하는 것들이 포함되어 있
다. 또 서문에는 약의 성질과 용법 등이 정확하게 기술되어 있어 한방의 기초가 한(漢)나라 때이거나 그 이전에 이미 완성되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신농씨는 야생의 풀을 일일어 씹어서, 그렇게 자세하게 성질과 용법을 기술했다고 하는데, 하루는 독초(毒草)를 씹어 독이 온몸에 번져 죽음 직전에 이르게 되었다. 이때 눈 앞에 나무도 풀도 아닌 가지 하나가 손짓하듯 너울 거리므로 그 잎을 따 씹으니 순식간에 해독이 되고 살아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에 신농은 그 나무를 차(茶)나무라 이름하고, 해독(解毒)을 제일의 효능으로 전하게 되었다. 풀 초(艸)와 나무 목(木) 사이에 사람 인(人)이 있는 차(茶)라는 글자는, 이때 신농씨를 죽음에서 살려낸 데 기인(基因)하여 만들어진 것이라 전한다.
다음은 전국시대(戰國時代) 명의(名醫)였던 편작(扁鵲)에 얽힌 일화다. 편작은 여관 종업원들을 감독하며 평범하게 살던 중 장상군(長桑君)이라는 의술에 능한 도인을 만나게 되고, 그에게서 금방(禁方)의 구전(口傳)과 의서(醫書)를 물려받아 의술을 터득한 뒤, 이웃나라의 다 죽어가는 태자를 살려내어 천하명의가 되었다.
편작은 모두 8만4천가지 병에 대한 약방문(處方)을 알고 있었는데, 절반도 채 안되는 4만 가지 약방문 정도를 제자들에게 전수했을 때, 너무 유명한 것이 화근이 되어 경쟁자의 흉계에 의해 암살되고 말았다. 이에 제자들이 선생의 무덤가에서 백 일을 슬퍼하니 편작의 무덤에서 한 나무가 솟아 올랐다. 그것이 차나무였는데 하도 신기하여 제자들이 그 나무를 이리저리 관찰하고 연구해보니, 그 잎에 담긴 여러 성분들이 신비한 효능을 보여 나머지 4만4천의 약방문을 얻게 하더라는 것이다. 차가 만병통치의 불로초처럼 회자되는 것은 이들에 의해서라고 한다.
또 하나의 설은 달마(達磨) 이야기다. 달마는 6세기 초 서역(西域)에서 당나라로 건너와 낙양(洛陽)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는데, 참선 중 자꾸만 졸음이 오자 "눈시울이 있어 잠을 불러 들인다"며 양 눈의 눈시울을 뚝 뚝 떼어내 뒷뜰에 버렸다. 이튿날 그 자리에 한 나무가 솟았는데 잎을 씹으니 금세 머리가 맑아지고 잠은 멀리 달아나더라는 것이다. 차를 수도용 음료로 삼는 것은 달마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위에 소개한 세 가지 기원설의 공통점은 모두 차의 뛰어난 효능을 이야기하는 데 있다. 또 관련 인물이 하나같이 생몰(生沒) 연대가 확인되지 않는, 전설적인 인물들이라는 점도 같다. 놀라운 것은 그들이 전하는 차의 그 어떤 효능도 결코 과장(誇張)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화학 식물학 약학 임상학 식품영양학 등 과학화된 현대 학문에 의해서 밝혀진 성분과 효능은 전설이 전하는 내용보다 더 신비성이 풍부한 것으로 발표되고 있다. 여기 힘입어 차는 더욱 지구상에 비교할 것 없는 유익한 음료의 지위를 튼튼히 해 가고 있다.
세 가지 기원설 중에서 신농씨 발견설과 편작에 얽힌 전설은 내용도 그럴듯 할뿐더러 "차는 처음에 약용(藥用)이었다가 나중에 음료가 되었다"는 주장을 훌륭하게 뒷받침한다. 차도비서(茶道秘書)에 "차는 약초라고 하지만 병을 치료하지는 못한다. 다만 예방이나 식독을 없애는 효능은 뛰어나다. 그 성분이 완만하기 때문인데, 그래서 매일 마셔도 부작용은 없다"고 한 것을 보아도 약용에서 음료가 된 차의 변천은 자연스러운 것임을 읽을 수 있다.
숙제는 달마(達磨) 설이다. 우리는 물론 기인(奇人) 괴승(怪僧)으로 알려진 달마대사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차의 기원에 관련된 달마는 인물(人物)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의문이다.
달마의 또다른 해석은 인간생활에 질서를 주는 법이랄까, 관념이다. 산스크리트어(梵語)에서의 달마(dharma)는 "자신은 그대로 있으면서 다른 모든 존재를 활동하게 하는 질서의 근거"를 나타내는 용어이다. 처음에 이 용어를 번역한 지나(支那/中國의 옛이름)의 학자들은 음(音)을 따서는 달마(達磨)로 적고, 뜻은 법(法)이라고 옮겼다. 따라서 베다 시대(BC 1200년경)의 달마는 "하늘의 질서로서 나타나는 리타 브라다"와 함께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인 용어로 이해되었었다.
브라마나시대(BC 800년경)로 넘어오면서 달마는 신적(神的) 의지로서의 리타 브라다에 비해, 보다 인간적인 쪽으로 독립하게 되었고, 이윽고 신(神)의 위에 - 인간에게는 더 가까운 곳에 - 올려졌다. 아무리 약자라도 달마를 지니면 강자를 누를 수 있게된다는 식의 "최고의 존재"인 동시에, 만물이 그 힘의 정도에 구애없이 공존할 수 있는 질서의 진리가 또한 달마였던 것이다.
때문에 불과 백년전만 해도 달마 이야기는 그 존재가 불분명한 전승설화로 취급되었었다. 그러나 20세기 들어와 돈황(敦煌)에서 발견된 어록에서 뜻밖에도 달마의 행적 기록이 발굴되었다. 독자적인 선법(禪法)이나, 제자들과 나눈 문답 내용을 보면 그는 분명하게 실존했던 인물이었다. 그가 소림사(小林寺)에 있을 때, 후일 소림의 제2조(祖)가 되는 혜가(慧可)가 찾아와 답을 구하는 대화도 그 안에서 나왔다.
혜가: 마음이 불안합니다. 제발 제 마음을 가라앉혀 주십시오.
달마: 그럼 그대의 불안한 마음을 내게 한번 보여 주게나. 그래야 가
라앉혀줄 수 있지않는가.
혜가: 어떻게 보여 드리나요. 어디를 찾아봐도 발견이 안됩니다.
달마: 그러면 되었네. 나는 이미 그대의 마음을 가라앉혀 준 것이네.
불교가 번거로운 철학체계로 기울어진 그 시대에 달마는, 벽이 그 무엇도 접근시키지 않듯이, 본래의 청정한 자성(自性)에 눈 뜨면 바로 성불(成佛)할 수 있다는 선법(禪法)을 평이한 구어로 전파한 종교운동가였다. 우리가 자주 접하는 직지인심 현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 자기를 바로 봄으로서 본래 부처였음을 깨닫는 것)이, 곧 당시 달마의 교의(敎意)를 집약한 한마디였다.
참선(參禪)을 수행(修行)의 으뜸으로 여긴 달마가 수마(睡魔)와 싸우는 처절한 모습을 상상해 보는 것은 그리 어렵지않다. 전하는 이야기대로 눈시울을 떼어낼 수 있고, 그렇게 함으로서 몰려오는 졸음을 물리칠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떼고 또 떼어 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 수 있을까? 눈시울 버린 자리에서 차나무가 솟아올랐고 그 잎을 먹으니 머리가 맑아지고 잠이 달아나더라는 대목도 돌려서 생각하면 가슴에 와 닿을만큼, 간절하기 이를 데 없는 소망으로 들린다. 기원(起源)이 아니라 기원(祈願)이라 하는게 더 잘 이해될 것 같다.
시기로 보아도 이 때는 차생활이 한참 번져있는 상태여서 기원(起源)이란 단어를 사용하기 어렵다. 그의 활동시기가 6세기 초라면 지나(支那)는 진(晉)에서 수(隋)로 이어지는 남북조(南北朝)로서, 분열과 병합이 거듭되며 정변과 살륙이 휘몰아치던 때였다. 그 혼란의 가운데에서 차나무가 기원했다는 것은 아무리 전설이라 해도 수긍하기 어렵다.
6세기 초 기원설을 받아들인다면 후한말을 배경으로 시작되는 삼국지(三國志)가 우스워진다. 수호전(水滸傳) 서유기(西遊記) 금병매(金甁梅)와 함께 중국 사대기서(四大奇書)의 하나로 꼽히는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는 유비가 어머니께 드릴 한줌의 차(茶)를 구하러 멀고 위험한 여행을 떠나는 것으로 시작되는데, 년대를 추정해보면 달마대사 시대에서 적어도 3백년 이상 거슬러 올라간다. 그렇다면 차의 기원설에 나오는 달마(達磨)는 인물이 아니라는 확신이 생긴다. 달마는 질서의 근거이자 사람들이 구하는 새 불교의 이상이었다.
그것은 참으로 절묘한 조화였다. 신농씨(神農氏)와 편작(扁鵲)의 약초(藥草)설 위에, 질서의 근거이자 새 불교의 이상(理想)인 달마설을 첨가하면서 차는, 기원(起源)에서부터 인류사회(人類社會)에 없어서는 안될 반려(伴侶)로서의 기초(基礎)를 훌륭하게 다지는 것이다
출처 : 인천시무형문화재10호범패와작법무
글쓴이 : 모봉형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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