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차(茶)의 궁금증을 풀게 한 이기윤의 소설『한국의 차문화』에 부쳐
작가 이기윤(李起潤)이 차문화를 연구해온 업적의 하나로 소설『한국의 차문화』를 상재했다. 작가의 짧지 않은 차 생활과 그 연구 실적이 이 한 권의 저서 속에 모조리 담겨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책이 많은 이들에게 필독서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은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우리 차에 대해서 궁금하게 여기고 있었던 의문점을 소상하게 풀어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언뜻 차라고 하면 현대인은 서양의 음차물인 홍차를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동양인이 즐기는 음차는 중국인이나 일본인이 마시는 차를 떠올리는 게 상식이었다. 근자에 인기를 끌고 있는 이른바 녹차는, 그것이 우리 차이고 또한 전통차라고 홍보되고 있으나 어느 때부터 전해져 온 것인지 알지 못하는 까닭에 생소한 느낌을 안고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우리 전통차가 오랜 역사를 지닌 것이라고 한다면 어째서 중국차나 일본차처럼 이어져 내려오지 못하고 단절되었는지, 또한 현대에 이르러 생활화·일반화 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모두 궁금하게 생각하는 점일 것이다. 이러한 의문을 하나 하나 이 책은 소상하게 풀어주고 있다. 중국 사회나 일본 사회에선 생활화 된 차문화가 우리에게 없는 것은 무슨 까닭이며, 과거에 선인들이 중국이나 일본 못지않게 차생활을 즐겼다면 무슨 이유로 언제 그같은 훌륭한 풍습이 없어지게 된 것인지, 이런저런 궁금증을 간결한 문체로 흥미진지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은 그의 책 제목이『소설·한국의 차문화』로 되어 있는 점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소설이란 일반이 흔히 알고 있는 문학의 한 장르로서의 '소설' 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소설의 일반적 해석은 시, 희곡과 같은 창작의 한 장르를 일컫는 것이지만, 그의 책에서 말하는 소설이란 가령 고려시대 문호인 이규보(李奎報)의 백운소설(白雲小說)처럼 일종의 수필체 형식의 평설(評說)을 말하는 것으로, '작은 해설서'라는 겸손한 뜻을 지니고 있다고 이해하면 될 것이다.
이기윤은 책 서두에 차의 유래라고 할 수 있는 기원설(起源說)부터 풀어놓고 있다. 차의 기원을 찾아 기원전 2,700년 신농씨(神農氏)까지 더듬어 올라가고 있다. 신농씨는 농업과 양잠·의약을 가르쳤고 불의 사용법을 알려주었으며 오현금(五絃琴)까지 발명했다 하니, 차를 발견했다는 설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 신농씨는 차나무를 해독제·볼로장생의 약물로 기록하여 후세에 전했다면서 차가 처음에 약으로 사용되다가 차차 음료가 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명의(名醫) 편작(扁鵲) 역시 차를 약초라 했다 한다. 그가 죽은 후 그의 무덤에서 차나무가 솟아났다는 전설을 전하는가 하면, 달마대사(達磨大師)가 참선 중 졸음이 오자 눈시울을 뚝 떼어 뒤뜰에 버린 것이 차나무로 솟아났다는 이야기도 하고 있다. 그 차나무 잎을 씹으니 잠이 멀리 달아나더라는 것이다. 이 같은 기원설은 모두 상징성을 띤 약초로서의 차나무 출현을 뜻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주자학(朱子學)을 일으킨 주자의 이기설(理氣說)에 차의 철학이 가미됨으로써 주자의 학문이 순리(順理)의 도(道)를 찾아갈 수 있었다고 저자는 논파하고 있다. 약용이었던 차가 고급한 놀이 음료로 예술의 영역에 들어간 것은 '도교(道敎)'의 영향이라고 했다. 다도(茶道)는 마음을 비우는 작업이기에 최종 깨달음의 단계인 도(道)와 순리로 가는 길이며, 생각하는 생활을 통하여 검소하면서도 우아한, 불완전을 인정하고 사랑하면서도 보다 순수하고 아름다워지려는 소망을 담고 있는 것이 차생활의 본뜻이라는 것이다.
"다도(茶道)가 지향하는 심미주의의 선(禪)이란, 늘 부족하기만 한 인생에서 그 부족한 것을 사랑하고 나아가 그 안에서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노력 같은 것"이라면서 아름다움의 추구와 함께 "마음에 빈 공간(虛)를 가지려는 사람이 택하는 최선의 수단"이 곧 다도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저자는 "차는 좋은 물을 더욱 고급스럽게 마시는 수단이기에 멋을 아는 민족만이 택할 수 있는 지혜의 산물"이라고 쉽게 풀이하며 부담없는 접근을 권하고 있다.
우리나라 차 역사는 가락국(駕洛國)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한다. 가락국 시조(始祖) 김수로왕의 왕비가 된 허황옥(許黃玉)이 아유타(印度)에서 올 때 가져온 금·은·비단 등 예폐물 속에 차나무씨도 넣어 가져왔다는 것이다. 이 때에 차가 있었다는 사실은 수로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거등왕이 즉위년인 서기 199년 제정한 세시풍속에 떡·밥·차·과일 등을 갖추어 다례(茶禮)를 지내도록 한 데에서 확인이 된다. 차 역사와 함께 허왕후 이야기는 설화처럼 이어진다. 허왕후가 출산한 10남 2녀 중 거등왕을 비롯한 9남 1녀의 행적은 상세히 전해지는데, 유독 한 명의 왕자와 한 명의 공주 행방은 없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고대국가 야마토(邪馬臺)를 세웠음을 밝힌다. 히미꼬 여왕과
여왕을 도와 나라를 다스린 남동생이 그들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이때 히미꼬가 ― 어머니 허왕후가 인도에서 가져온 차나무씨를 ― 일본으로 가져다 심었을 것이라고 한다. 일본에 처음 차나무가 전해진 것이 이때라는 것이다.
중국에서 출간된 고서『사대명산지(四大名山誌)』구화산 편에보면 차가 중국에서 건너오기 전, 신라에서 중국에 전파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신라 33대 성덕왕(聖德王)의 장남이 24세에 출가하였는데, 당나라로 건너가 구화산(九華山)에서 성불하여 지장보살이 되었음은 역사가 입증하는 그대로다. 지장스님이 이때 신라의 차나무를 가져다 구화산에 심었다는 것이다. 이는 서기 730년의 일이니 다경(茶經)』을 쓴 육우(陸羽)가 갓 태어날 무렵이고 견당사 대렴이 차나무씨를 들여오기 1백년 전의 일이었다고 한다.
가락국이 신라에 합병된 후 경덕왕과 충담선사(忠談禪師)의 다회 이야기가 자못 흥미롭게 전개된다. 그런데 그것도 연대를 보면 대렴이 당에서 차씨를 가져와 왕이 지리산에 심게 했다는 흥덕왕 3년(828년)보다 63년 전의 일임을 밝힌다. 그렇다면 신라에는 성덕왕 이전부터 차가 있었다는 사실이 입증된다 하겠으며, 당에서 차나무씨를 가져오기 전 우리에게 토산차가 있었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이규보의 차시 가운데는 원효(元曉)를 기리는 시도 보여주고, 신라 최고의 학자 최치원(崔致遠)이 중국에 있을 때 고향의 어머니께 인편 있을 때마다 차를 보내드린 일화도 소개된다. 고려시대에는 주요 국가행사에 반드시 진차(進茶) 의식이 있었고, 차 농사만 전담하는 다촌(茶村)이 번성했다고도 했다.
책 속에서 자주 작가가 강조하는 하나는, 차에 종교색을 가미하지 말라는 것이다. 고려시대에 차문화가 화려하게 꽃피기는 했어도 그것이 불교와 연관하여 비롯된 것은 아니다. 차와 불교는 각각 존재하다 신라 통일 무렵에 만남이 이루어졌을뿐이다. 흥덕왕 때 차나무씨를 가져온 견당사(遣唐使) 대렴도 승려가 아니었고, 또 이를 지리산에 심게 한 흥덕왕도 불자는 아니었다.
다만 이 시대에는, 차가 수도자에게 있어 잠을 쫓아주고 소화를 돕고 정신을 맑게 하여주는 효능으로 좌선(坐禪)의 유적현묘(幽寂玄妙)함을 도와주어 선승(禪僧)의 아낌을 받은 것이라고 했다. 이와 함께 신라인들은 "차는 군자의 기질과 덕을 지니고 있어 맑고 곧은 예지와 함께 관용의 미덕을 기르게 하는 것"이라 하였고, 맑은 인격과 고매한 학덕과 예(藝)를 고루 갖춘 인물을 '다인(茶人)'이라 칭했는데, 이 명칭이 선비 사회에서 가장 이상적인 관칭대명사로 인식되어 명정(銘旌)에 기록되는 것을 최상의 영예로 여기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저자는 여기서 또하나 간과해선 안될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신라에서 성행한 차생활이 고구려와 백제에는 왜 기록조차 없느냐는 것이다. 고구려는 북쪽에 위치하여 차의 재배 생산이 어려웠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지만, 그러나 5세기 경에는 온조백제가 충남 공주·부여 쪽으로 밀려 내려가 차령산맥 일대가 고구려 땅이 되었으므로 그 지역에서 차생산이 있었을 것이란 점과, 그게 아니라도 육로이건 뱃길이건 중국에서 차를 들여올 수 있었지 않느냐고 의문을 제기한다. 백제의 경우는 그 의문이 몇배 더 커진다. 지금도 그렇지만 옛날에도 호남지역이 차 산출의 최대 적지이기 때문이다. 차나무 많은 곳에 차생활이 없었다는 것은 어떻게도 설명이 어렵다. 이러한 의문에 대하여 저자는 재야(在野) 사학자가 역설해놓은 비류백제설로 연계시키고 있는데, 그럴듯 하면서도 가락국 왕녀 히미꼬 설과 함께 엉켜서 비약을 보이고 있다. 이는 기존의 역사를 일단 부정해놓고 그 합의 하에 성립돼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하므로 차 이야기를 그렇게까지 가설로 몰고 간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라고 볼 수 없다. 차 이야기의 한계를
너무 껑충 뛰어넘지 않는 것이 좋을 듯하다.
작가는 이어, 신라의 차생활 습관이나 승려의 다례의식 관행이 고려로 이어지며 더욱 발전했음을 알게 한다. 주요 국가행사는 반드시 진차의식으로부터 시작하였고, 다방(茶房)이라는 차 전담 관청이 있어 궁중 연회가 있을 때마다 다과(茶果)를 담당하였으며, 승려들의 차 사랑이 더욱 깊고 넓어져 절 주변에 차 농사를 전문으로 하는 다촌이 성행하게 되었다고 한다. 봄의 연등회(燃燈會)나 가을의 팔관회(八關會)때 진차의식이 가장 화려했다고 한다.
이러한 고려인의 차생활은 이규보의 유차시(孺茶詩)에도 잘 그려져 있고, 시인 이인로(李仁老), 또 그와 함께 '해좌칠현(海佐七賢)'으로 알려진 고결한 문사들인 오세재(吳世才), 임춘(林椿), 조통(趙通), 황보항(皇甫杭), 함순(咸淳), 이담(李湛) 등도 모두 훌륭한 차시(茶詩)를 남기고 있다. 차 마시는 일을 제일가는 멋으로 즐겼던 고려 사회 ― 왕실에선 다분히 의식적이었고, 절간에서는 다섯가지 불공의 첫째였고, 선승에게는 수도용 음료, 일반 선비사회에서는 격식없는 자유분방함 속에 음차를 통하여 인생을 다듬고 되돌아보며 반성하기조차 했다는 것이다. 이숭인(李崇仁), 정몽주(鄭夢周), 이색(李穡) 등도 한결같이 차와 그들의 학문이 일체가 되어 있음을 보여준 학자들이었다.
그런데 이렇듯 널리 민중의 사랑을 받았던 차가 조선조에 접어들면서 급격히 쇠퇴한 것은 무슨 이유에서였을까? 그것은 '척불숭유(斥佛崇儒)'라고 하는 그 시대 정치 사회 사조가 불교 활동을 위축시키면서 비롯된 일로 보인다. 절 주변 다촌의 차 생산이 급격히 감소되어간 것도 물론 같은 원인이다. 온 나라 사람이 즐기던 음료에 종교색이 있을리 만무지만 유교를 숭상한 조선의 위정자들은 차를 불교적인 것으로 몰아 쇠퇴의 길을 걷게 한 것이다. '차의 기원'에서 살펴 보았듯이 차는 처음에 약용이었다가 차차 음용이 되었다. 신라도 초기에는 불교국이 아니었다. 6세기 초 이차돈의 순교 이후 불교를 받아들였고 통일신라에 이르러서 뿌리를 내렸다. 다만 불교를 국교로 삼았던 고려에서만은 이 진귀한 초록빛 음료를 부처님께 공양하고, 국가 의식에 사용하고, 또 온 백성이 모두 즐겨마셨다. 이는 지극히 자연스러웠던 일이다. 그것을 불교색이라 하여 배척하고 쇠퇴시킨 것은 조선시대의 올바른 처사일 수 없다. 라고 작가는 개탄하고 있다. 유교사상의 기둥인 주자학이 척불을 주도했다지만, 그러나 알고보면 주자학이야말로 주자가 차의 본고장에 앉아, 차생활을 통해 윤기있게 다듬은 학문이었다면서, 껍데기 도덕 만을 정치사회 규범으로 받아들인 조선 위정자의 실책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조선 사회에 있어서도 예외는 얼마든지 있다. 성종 때의 문신 김종직(金宗直)이 담양군수 시절, 차는 생산되지도 않는데 차세는 남아있어 민원의 대상이 되고 있음을 알고 다원(茶園)을 조성했는가 하면, 이목(李穆)은 차노래(茶賦)를 지을 정도로 특별한 정서를 누리기도 했다. 하지만 생산의 장려없이 거두어 들이기만 했다는 데서 차생활은 차차 역사 속에 묻혀버리게 되었다고 한다.
1800년을 전후하여 백련사 혜장선사,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 초의 장의순 등에 의해 차문화 부활 조짐이 잠시 일었으나 피지는 못했고, 일제에 35년간 강점당한 이후는 뿌리까지 뽑힌 듯 단절된 양상을 보이게 되었다.
그러나 작가는 말한다. 차문화는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 근원상징에 해당되는 문화이기 때문에 아무리 외부 여건이 힘들어 보인다 해도 단절될 성질은 못 된다면서, 표면에서 완전히 사라진 듯 해도 어느 계곡엔가 차나무는 자라고 있고, 어느 산골에선가 차 마시는 습속은 이어져 오게 되어있다고 했다. 과연 식민지 시대 하에서, 영남은 효당 최범술 선생, 호남은 의재 허백련 선생에 의해 맥이 살아나, 오늘날 차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그 세계가 넓어졌다는 것이다.
작가는 이 과정에서 일부 극성스런 유한 여성들이 치맛바람을 일으켜 차생활 부흥 운동의 참뜻을 왜곡시켰는가 하면, 일부 승려들이 차와 다기를 만들어 팔면서 값을 껑충 뛰게 하는 등 차생활 대중화를 저해시켜 전체적으로 운동을 공전시켰음도, 놓치지 않고 소상하게 꿰뚫어 밝히며 반성을 촉구했다.
이제까지 막연하게 짐작하고 있던 우리 차의 좋은 점과 뿌리에 대한 이해를 도와주고 눈을 트이게 해준다는 점에서 작가 이기윤(李起潤)의 이 노작(勞作)은, 차 문화 연구서 가운데서도 특별한 가치를 인정받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차 문화에 대한 이해를 이만큼 집대성하여 정립시켜준 예가 없다는 사실에서, 또한 그 통쾌한 효험과 공헌에서 그야말로 소중한 필독서임을 인식시켜 주고 있다고 하겠다.<김양수/문학평론가>
작가 이기윤(李起潤)이 차문화를 연구해온 업적의 하나로 소설『한국의 차문화』를 상재했다. 작가의 짧지 않은 차 생활과 그 연구 실적이 이 한 권의 저서 속에 모조리 담겨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책이 많은 이들에게 필독서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은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우리 차에 대해서 궁금하게 여기고 있었던 의문점을 소상하게 풀어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언뜻 차라고 하면 현대인은 서양의 음차물인 홍차를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동양인이 즐기는 음차는 중국인이나 일본인이 마시는 차를 떠올리는 게 상식이었다. 근자에 인기를 끌고 있는 이른바 녹차는, 그것이 우리 차이고 또한 전통차라고 홍보되고 있으나 어느 때부터 전해져 온 것인지 알지 못하는 까닭에 생소한 느낌을 안고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우리 전통차가 오랜 역사를 지닌 것이라고 한다면 어째서 중국차나 일본차처럼 이어져 내려오지 못하고 단절되었는지, 또한 현대에 이르러 생활화·일반화 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모두 궁금하게 생각하는 점일 것이다. 이러한 의문을 하나 하나 이 책은 소상하게 풀어주고 있다. 중국 사회나 일본 사회에선 생활화 된 차문화가 우리에게 없는 것은 무슨 까닭이며, 과거에 선인들이 중국이나 일본 못지않게 차생활을 즐겼다면 무슨 이유로 언제 그같은 훌륭한 풍습이 없어지게 된 것인지, 이런저런 궁금증을 간결한 문체로 흥미진지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은 그의 책 제목이『소설·한국의 차문화』로 되어 있는 점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소설이란 일반이 흔히 알고 있는 문학의 한 장르로서의 '소설' 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소설의 일반적 해석은 시, 희곡과 같은 창작의 한 장르를 일컫는 것이지만, 그의 책에서 말하는 소설이란 가령 고려시대 문호인 이규보(李奎報)의 백운소설(白雲小說)처럼 일종의 수필체 형식의 평설(評說)을 말하는 것으로, '작은 해설서'라는 겸손한 뜻을 지니고 있다고 이해하면 될 것이다.
이기윤은 책 서두에 차의 유래라고 할 수 있는 기원설(起源說)부터 풀어놓고 있다. 차의 기원을 찾아 기원전 2,700년 신농씨(神農氏)까지 더듬어 올라가고 있다. 신농씨는 농업과 양잠·의약을 가르쳤고 불의 사용법을 알려주었으며 오현금(五絃琴)까지 발명했다 하니, 차를 발견했다는 설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 신농씨는 차나무를 해독제·볼로장생의 약물로 기록하여 후세에 전했다면서 차가 처음에 약으로 사용되다가 차차 음료가 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명의(名醫) 편작(扁鵲) 역시 차를 약초라 했다 한다. 그가 죽은 후 그의 무덤에서 차나무가 솟아났다는 전설을 전하는가 하면, 달마대사(達磨大師)가 참선 중 졸음이 오자 눈시울을 뚝 떼어 뒤뜰에 버린 것이 차나무로 솟아났다는 이야기도 하고 있다. 그 차나무 잎을 씹으니 잠이 멀리 달아나더라는 것이다. 이 같은 기원설은 모두 상징성을 띤 약초로서의 차나무 출현을 뜻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주자학(朱子學)을 일으킨 주자의 이기설(理氣說)에 차의 철학이 가미됨으로써 주자의 학문이 순리(順理)의 도(道)를 찾아갈 수 있었다고 저자는 논파하고 있다. 약용이었던 차가 고급한 놀이 음료로 예술의 영역에 들어간 것은 '도교(道敎)'의 영향이라고 했다. 다도(茶道)는 마음을 비우는 작업이기에 최종 깨달음의 단계인 도(道)와 순리로 가는 길이며, 생각하는 생활을 통하여 검소하면서도 우아한, 불완전을 인정하고 사랑하면서도 보다 순수하고 아름다워지려는 소망을 담고 있는 것이 차생활의 본뜻이라는 것이다.
"다도(茶道)가 지향하는 심미주의의 선(禪)이란, 늘 부족하기만 한 인생에서 그 부족한 것을 사랑하고 나아가 그 안에서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노력 같은 것"이라면서 아름다움의 추구와 함께 "마음에 빈 공간(虛)를 가지려는 사람이 택하는 최선의 수단"이 곧 다도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저자는 "차는 좋은 물을 더욱 고급스럽게 마시는 수단이기에 멋을 아는 민족만이 택할 수 있는 지혜의 산물"이라고 쉽게 풀이하며 부담없는 접근을 권하고 있다.
우리나라 차 역사는 가락국(駕洛國)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한다. 가락국 시조(始祖) 김수로왕의 왕비가 된 허황옥(許黃玉)이 아유타(印度)에서 올 때 가져온 금·은·비단 등 예폐물 속에 차나무씨도 넣어 가져왔다는 것이다. 이 때에 차가 있었다는 사실은 수로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거등왕이 즉위년인 서기 199년 제정한 세시풍속에 떡·밥·차·과일 등을 갖추어 다례(茶禮)를 지내도록 한 데에서 확인이 된다. 차 역사와 함께 허왕후 이야기는 설화처럼 이어진다. 허왕후가 출산한 10남 2녀 중 거등왕을 비롯한 9남 1녀의 행적은 상세히 전해지는데, 유독 한 명의 왕자와 한 명의 공주 행방은 없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고대국가 야마토(邪馬臺)를 세웠음을 밝힌다. 히미꼬 여왕과
여왕을 도와 나라를 다스린 남동생이 그들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이때 히미꼬가 ― 어머니 허왕후가 인도에서 가져온 차나무씨를 ― 일본으로 가져다 심었을 것이라고 한다. 일본에 처음 차나무가 전해진 것이 이때라는 것이다.
중국에서 출간된 고서『사대명산지(四大名山誌)』구화산 편에보면 차가 중국에서 건너오기 전, 신라에서 중국에 전파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신라 33대 성덕왕(聖德王)의 장남이 24세에 출가하였는데, 당나라로 건너가 구화산(九華山)에서 성불하여 지장보살이 되었음은 역사가 입증하는 그대로다. 지장스님이 이때 신라의 차나무를 가져다 구화산에 심었다는 것이다. 이는 서기 730년의 일이니 다경(茶經)』을 쓴 육우(陸羽)가 갓 태어날 무렵이고 견당사 대렴이 차나무씨를 들여오기 1백년 전의 일이었다고 한다.
가락국이 신라에 합병된 후 경덕왕과 충담선사(忠談禪師)의 다회 이야기가 자못 흥미롭게 전개된다. 그런데 그것도 연대를 보면 대렴이 당에서 차씨를 가져와 왕이 지리산에 심게 했다는 흥덕왕 3년(828년)보다 63년 전의 일임을 밝힌다. 그렇다면 신라에는 성덕왕 이전부터 차가 있었다는 사실이 입증된다 하겠으며, 당에서 차나무씨를 가져오기 전 우리에게 토산차가 있었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이규보의 차시 가운데는 원효(元曉)를 기리는 시도 보여주고, 신라 최고의 학자 최치원(崔致遠)이 중국에 있을 때 고향의 어머니께 인편 있을 때마다 차를 보내드린 일화도 소개된다. 고려시대에는 주요 국가행사에 반드시 진차(進茶) 의식이 있었고, 차 농사만 전담하는 다촌(茶村)이 번성했다고도 했다.
책 속에서 자주 작가가 강조하는 하나는, 차에 종교색을 가미하지 말라는 것이다. 고려시대에 차문화가 화려하게 꽃피기는 했어도 그것이 불교와 연관하여 비롯된 것은 아니다. 차와 불교는 각각 존재하다 신라 통일 무렵에 만남이 이루어졌을뿐이다. 흥덕왕 때 차나무씨를 가져온 견당사(遣唐使) 대렴도 승려가 아니었고, 또 이를 지리산에 심게 한 흥덕왕도 불자는 아니었다.
다만 이 시대에는, 차가 수도자에게 있어 잠을 쫓아주고 소화를 돕고 정신을 맑게 하여주는 효능으로 좌선(坐禪)의 유적현묘(幽寂玄妙)함을 도와주어 선승(禪僧)의 아낌을 받은 것이라고 했다. 이와 함께 신라인들은 "차는 군자의 기질과 덕을 지니고 있어 맑고 곧은 예지와 함께 관용의 미덕을 기르게 하는 것"이라 하였고, 맑은 인격과 고매한 학덕과 예(藝)를 고루 갖춘 인물을 '다인(茶人)'이라 칭했는데, 이 명칭이 선비 사회에서 가장 이상적인 관칭대명사로 인식되어 명정(銘旌)에 기록되는 것을 최상의 영예로 여기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저자는 여기서 또하나 간과해선 안될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신라에서 성행한 차생활이 고구려와 백제에는 왜 기록조차 없느냐는 것이다. 고구려는 북쪽에 위치하여 차의 재배 생산이 어려웠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지만, 그러나 5세기 경에는 온조백제가 충남 공주·부여 쪽으로 밀려 내려가 차령산맥 일대가 고구려 땅이 되었으므로 그 지역에서 차생산이 있었을 것이란 점과, 그게 아니라도 육로이건 뱃길이건 중국에서 차를 들여올 수 있었지 않느냐고 의문을 제기한다. 백제의 경우는 그 의문이 몇배 더 커진다. 지금도 그렇지만 옛날에도 호남지역이 차 산출의 최대 적지이기 때문이다. 차나무 많은 곳에 차생활이 없었다는 것은 어떻게도 설명이 어렵다. 이러한 의문에 대하여 저자는 재야(在野) 사학자가 역설해놓은 비류백제설로 연계시키고 있는데, 그럴듯 하면서도 가락국 왕녀 히미꼬 설과 함께 엉켜서 비약을 보이고 있다. 이는 기존의 역사를 일단 부정해놓고 그 합의 하에 성립돼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하므로 차 이야기를 그렇게까지 가설로 몰고 간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라고 볼 수 없다. 차 이야기의 한계를
너무 껑충 뛰어넘지 않는 것이 좋을 듯하다.
작가는 이어, 신라의 차생활 습관이나 승려의 다례의식 관행이 고려로 이어지며 더욱 발전했음을 알게 한다. 주요 국가행사는 반드시 진차의식으로부터 시작하였고, 다방(茶房)이라는 차 전담 관청이 있어 궁중 연회가 있을 때마다 다과(茶果)를 담당하였으며, 승려들의 차 사랑이 더욱 깊고 넓어져 절 주변에 차 농사를 전문으로 하는 다촌이 성행하게 되었다고 한다. 봄의 연등회(燃燈會)나 가을의 팔관회(八關會)때 진차의식이 가장 화려했다고 한다.
이러한 고려인의 차생활은 이규보의 유차시(孺茶詩)에도 잘 그려져 있고, 시인 이인로(李仁老), 또 그와 함께 '해좌칠현(海佐七賢)'으로 알려진 고결한 문사들인 오세재(吳世才), 임춘(林椿), 조통(趙通), 황보항(皇甫杭), 함순(咸淳), 이담(李湛) 등도 모두 훌륭한 차시(茶詩)를 남기고 있다. 차 마시는 일을 제일가는 멋으로 즐겼던 고려 사회 ― 왕실에선 다분히 의식적이었고, 절간에서는 다섯가지 불공의 첫째였고, 선승에게는 수도용 음료, 일반 선비사회에서는 격식없는 자유분방함 속에 음차를 통하여 인생을 다듬고 되돌아보며 반성하기조차 했다는 것이다. 이숭인(李崇仁), 정몽주(鄭夢周), 이색(李穡) 등도 한결같이 차와 그들의 학문이 일체가 되어 있음을 보여준 학자들이었다.
그런데 이렇듯 널리 민중의 사랑을 받았던 차가 조선조에 접어들면서 급격히 쇠퇴한 것은 무슨 이유에서였을까? 그것은 '척불숭유(斥佛崇儒)'라고 하는 그 시대 정치 사회 사조가 불교 활동을 위축시키면서 비롯된 일로 보인다. 절 주변 다촌의 차 생산이 급격히 감소되어간 것도 물론 같은 원인이다. 온 나라 사람이 즐기던 음료에 종교색이 있을리 만무지만 유교를 숭상한 조선의 위정자들은 차를 불교적인 것으로 몰아 쇠퇴의 길을 걷게 한 것이다. '차의 기원'에서 살펴 보았듯이 차는 처음에 약용이었다가 차차 음용이 되었다. 신라도 초기에는 불교국이 아니었다. 6세기 초 이차돈의 순교 이후 불교를 받아들였고 통일신라에 이르러서 뿌리를 내렸다. 다만 불교를 국교로 삼았던 고려에서만은 이 진귀한 초록빛 음료를 부처님께 공양하고, 국가 의식에 사용하고, 또 온 백성이 모두 즐겨마셨다. 이는 지극히 자연스러웠던 일이다. 그것을 불교색이라 하여 배척하고 쇠퇴시킨 것은 조선시대의 올바른 처사일 수 없다. 라고 작가는 개탄하고 있다. 유교사상의 기둥인 주자학이 척불을 주도했다지만, 그러나 알고보면 주자학이야말로 주자가 차의 본고장에 앉아, 차생활을 통해 윤기있게 다듬은 학문이었다면서, 껍데기 도덕 만을 정치사회 규범으로 받아들인 조선 위정자의 실책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조선 사회에 있어서도 예외는 얼마든지 있다. 성종 때의 문신 김종직(金宗直)이 담양군수 시절, 차는 생산되지도 않는데 차세는 남아있어 민원의 대상이 되고 있음을 알고 다원(茶園)을 조성했는가 하면, 이목(李穆)은 차노래(茶賦)를 지을 정도로 특별한 정서를 누리기도 했다. 하지만 생산의 장려없이 거두어 들이기만 했다는 데서 차생활은 차차 역사 속에 묻혀버리게 되었다고 한다.
1800년을 전후하여 백련사 혜장선사,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 초의 장의순 등에 의해 차문화 부활 조짐이 잠시 일었으나 피지는 못했고, 일제에 35년간 강점당한 이후는 뿌리까지 뽑힌 듯 단절된 양상을 보이게 되었다.
그러나 작가는 말한다. 차문화는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 근원상징에 해당되는 문화이기 때문에 아무리 외부 여건이 힘들어 보인다 해도 단절될 성질은 못 된다면서, 표면에서 완전히 사라진 듯 해도 어느 계곡엔가 차나무는 자라고 있고, 어느 산골에선가 차 마시는 습속은 이어져 오게 되어있다고 했다. 과연 식민지 시대 하에서, 영남은 효당 최범술 선생, 호남은 의재 허백련 선생에 의해 맥이 살아나, 오늘날 차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그 세계가 넓어졌다는 것이다.
작가는 이 과정에서 일부 극성스런 유한 여성들이 치맛바람을 일으켜 차생활 부흥 운동의 참뜻을 왜곡시켰는가 하면, 일부 승려들이 차와 다기를 만들어 팔면서 값을 껑충 뛰게 하는 등 차생활 대중화를 저해시켜 전체적으로 운동을 공전시켰음도, 놓치지 않고 소상하게 꿰뚫어 밝히며 반성을 촉구했다.
이제까지 막연하게 짐작하고 있던 우리 차의 좋은 점과 뿌리에 대한 이해를 도와주고 눈을 트이게 해준다는 점에서 작가 이기윤(李起潤)의 이 노작(勞作)은, 차 문화 연구서 가운데서도 특별한 가치를 인정받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차 문화에 대한 이해를 이만큼 집대성하여 정립시켜준 예가 없다는 사실에서, 또한 그 통쾌한 효험과 공헌에서 그야말로 소중한 필독서임을 인식시켜 주고 있다고 하겠다.<김양수/문학평론가>
출처 : 인천시무형문화재10호범패와작법무
글쓴이 : 모봉형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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