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실과 응접실
우선 여러분을 다실로 초대합니다. 여러분 중에 다실과 응접실을 혼동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서입니다. 하긴 차문화가 쇠퇴하여 차(茶)가 무엇인지조차 모호해진 마당에 응접실에서 차를 마신들 누가 뭐라 하겠습니까. 다만 차 이야기를 하려하니 다실의 존재의미를 되새겨볼 필요가 있어 꺼내는 이야기입니다.
응접실은 손님을 맞이하고 접대하는 방입니다. 주인의 경제형편이나 취향에 따라 얼마든지 호화롭게 꾸미고 치장 할 수 있는 방입니다. 의복이나 악세서리 착용에 구애받을 일이 없으며 기호품도 마음대로 선택하여 즐길 수 있습니다.
다실은 차 마시기 적합하게 꾸며진 방입니다. 차를 마시는 공간은 소박하고 단조로운 분위기가 좋습니다. 복잡한 업무, 분주한 마음 등 여러가지 생활잡념에 쫒기는 사람들이 잠시 모든 것을 잊고 쉬어갈 수 있도록 편안하고 여유로와야 합니다.
마음모아 차 한 잔 우려 마시며 명상을 통해 자기를 돌아보는 시간 - 화병에 꽂힌 한송이 꽃에 자기 모습을 비쳐보고 음악이나 바람소리에 마음을 실어보는 시간 - 그것은 인생을 아름답게 가꾸고 다듬는 훈련의 시간입니다. 그래서 차는 혼자 마시는 것을 선(禪)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때로 가족과 벗과 이웃을 통해 확인됩니다. 마찬가지로 다인들은 다실에서 만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심미안을 기르고 기쁜 소식을 전하며 양식(良識)을 나누고 슬픈일들을 위로합니다. 결코 고루지 못한 말을 던지거나 남을 비웃는 행위를 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다실은 혼자 있을 때는 선방(禪房)이요, 둘 이상이 되면 세파에 때묻고 거칠어진 마음을 순화시키는 도량(道場)이 됩니다.
어렵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사람이란 평소 길들이기 나름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좋은 말만 하기. 좋은 습관 갖기. 상대의 좋은 점만 발견하기. 좋은 향기 가까이하기를 반복하면 어떤 결과가 올까요. 아마도 삶 자체가 하나의 예술이 될 것입니다. 다실은 이렇게 아름다워지는 훈련을 통해 자연과 예술과 인간심성의 삼위 일체를 구하는 방입니다.
차를 일컫는 이름들
이제 차(茶)를 소개합니다. 그런데 차에 대해서도 혼동하는 분이 많습니다. 마시는 음료는 모두 차라고 말합니다. 오렌지 쥬스나 코코아도 차요, 심지어 커피도 차의 일종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응접실을 다실이라 말하는 것보다 더 큰 무지(無知)입니다.
커피는 커피나무 열매가 원료요 세계 어디를 가나 커피라고 부릅니다. 마찬가지로 차는 차나무 잎이 원료이며, 지구촌 어디에서나 '차'라고 부릅니다. 둘 다 고유명사인 것입니다.
중국 남부지방 방언에 차를 '떼'라고 하는 곳이 있는데, 그 발음이 사차지로(絲茶之路:실크로드)를 타고 유럽으로 건너 가 티(Tea)라는 발음을 만들었을 뿐입니다. 폴란드에서 차를 "테"라고 하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시베리아나 몽골, 말레이나 인도네시아에서도 테라고 부릅니다. 일본 사람들은 앞에 경칭을 붙여 오차(御茶)라고 부릅니다. 건강을 좌우하는 음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라고도 부르고 "차"라고도 부릅니다.
'티(Tea)'하면 홍차를 연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녹차를 마시지않는 지역에서는 블랙티를 줄여서 그냥 티라고 부릅니다. 본디는 "블랙티(Black Tea)"입니다. 블랙티의 유래는 17세기 차가 유럽에 처음 소개될 때의 일화가 있습니다. 동양의 차가 네델란드 상선에 실린 것은 17세기 초입니다. 당시는 운하가 없어 적도를 넘고 희망봉을 돌아 다시 적도를 통과해 유럽에 닿았습니다.
처음 배에 실을 때는 녹차였지만 운반되는 사이 완전 발효되어 새까맣게 변했습니다. 선주는 낙심천만이었습니다. 기왕 버릴 것 뜨거운 물에 우려나 보자며 넣으니 우리니 빨갛게 우러나는 것이 맛이 괜찮았습니다. 그들은 서둘러 차에 블랙티란 이름을 붙여 팔았습니다. 그것이 홍차입니다. 동양에서는 진작부터 발효차가 있었고 우린 물이 붉다하여 홍차(紅茶)라 불렀습니다. 결국 육로로 건너간 차는 Tea가 되었고 해로로 전해진 차는 Black Tea가 된 셈입니다.
커피를 브라질産 콜롬비아産으로 분류하듯 차도 산지별로 분류하기는 합니다. 또 나라마다 차에 붙이는 특징있는 대명사가 있습니다.
하지만 커피나무 열매가 아닌 것을 커피라고 하지않듯 차나무 잎이 아닌 것을 차라고 하는 나라는 없습니다. 차와 커피는 동양과 서양의 구별 만큼이나 뚜렷하게 대립되는 상징 같습니다만, 알고보면 커피 소비량은 많지않습니다. 차의 소비가 월등히 많고 선진 사회는 물론 원시적 생활을 하는 아프리카인까지 차를 마시지 않는 민족은 없습니다. 건강과 정서 생활에 없어서는 안 되는 음료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차의 대명사는 작설(雀舌)
차를 생산하는 나라들에는 나름대로 대명사가 있다고 했습니다.
오룡차(烏龍茶)는 타이완이요, 용정(龍井)·철관음(鐵觀音)은 중국이고, 옥로차(玉露茶)는 일본, 립톤 하면 영국입니다. 우리나라 차의 대명사는 작설(雀舌)입니다. 차 만들기 적합한 잎의 부드럽고 연하기가 참새 혀와 같다하여 작설차(雀舌茶)라 이름하고, 품질을 논할 때도 참새작(雀)자를 써서 세작(細雀), 준세작(準細雀), 중작(中雀) 하는 식으로 등급을 매겼습니다.
차나무는 산차과(山茶科)의 상록활엽관목(常綠闊葉灌木)으로 따뜻하고 습기가 많은 곳에서 잘 자랍니다. 연평균 기온이 13℃이상, 강우량이 년 1,500mm 이상이어야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지리산을 중심으로 영호남의 남쪽지방이 자생이나 재배에 적합합니다.
키 작은 동백나무를 연상케하는 차나무는, 여느 관목이 다 그렇듯 밑둥에서 가지가 올라와 옆으로 퍼지는데, 높이는 60 - 90cm 정도이며 잎은 갸름하고 윤기가 있습니다. 뿌리는 직근성이서 밑으로 곧게 뻗습니다. 그래서 옮겨 심으면 살지 못하기에 우리 옛 사회에서 여성에게는 정절, 남자에게는 불사이군 충절의 상징이었습니다.
이러한 차나무의 잎에 현대 과학도 가려내지 못하는 신비한 성분이 가득하여, 우려 마시면 여러 면에서 우리 삶을 육체적으로 건강하게 하고 정신적으로 윤택하게 합니다. 성현들은 모두 차를 벗 삼았습니다. 때론 약용으로, 때론 수도용 음료나 의식용으로, 때론 풍류로 즐겼습니다.
커피나무에 열매가 열려야 하듯, 차나무 잎이라 아무 것이나 다 원료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봄 - 즉, 4-5월에 새로 돋아나는 잎이어야 차가 될 수 있습니다. 그중 덕(德:효능)이 뛰어난 차는 곡우(穀雨)를 전후해 채취되는 순(荀:芽)과 같은 어리고 여린 잎입니다. 이때의 잎은 정말 참새 혀처럼 곱고 연해서 작설차(雀舌茶)란 이름이 실감됩니다.
일반적으로는 작설차라 했지만 다른 이름을 붙이기도 했습니다.
대나무 숲에서 차나무가 잘 자랍니다. 대나무 이슬 먹은 차는 죽로차(竹露茶)라 하고, 차는 지혜를 준다하여 반야차(般若茶)라 이름하기도 했습니다. 설록차(雪綠茶)·춘설차(春雪茶)는 여기저기 잔설이 남아있는 이른 봄에 따서 만든 녹차를 연상하게 하는 이름들입니다.
이제 이해가 되실 겁니다. 이런 부름들이 인삼차 생강차 쌍화차 하고 부른는 것과 같을 수는 없습니다. 인삼은 인삼즙, 쌍화는 쌍화탕이라는 바른 명칭이 있습니다. 차나무 잎이 원료가 아닌 것을 차라고 부르는 나라는 지구촌 어디에도 없습니다.
인류 문화사는 곧 차문화사
문화사란 인간의 지혜가 밝아져 미개에서 벗어나 발전해 온 기록입니다. 불을 이용해 물을 끓이는 것도 시작의 하나입니다.
목이 마를때 짐승처럼 물가에 엎드려 마시던것을 용기(用器)를 이용해 떠 마시게 되었고 다시 그 물을 끓이거나 음식을 익히고 데쳐 먹으면서 식문화도 발달했습니다. 특히 음료가 인류사에 미친 영향은 매우 큽니다. 전쟁같은 굵은 사건만 열거해도 미국의 독립전쟁. 영국과 청나라 같 아편전쟁, 이 땅의 임진왜란 등이 차 때문에 일어났습니다. 생활문화·예술 측면에서보면 도자기·건축·의복·문학 ·서화·음악·예절 등이 차를 매개로 꽃을 피웠습니다.
억지가 아닙니다. 좋은 사람을 만나면 우선 차 한 잔 나누고 싶어지는게 본능입니다. 기왕이면 멋있는 공간에서 훌륭한 그릇에 차를 담아 나누고 싶어집니다. 분위기에 어울리는 잔잔한 음악이 있으면 더욱 좋고 꽃이 한편에 있으면 더욱 좋을 것입니다. 이런 차를 누구 시키지않고 직접 낸다면 상대방은 더욱 좋아할 것입니다. 차 내는 모습이 반듯하고 정성스러우면 그만 상대방은 감동하고 말 것입니다. 상대에게 감동을 주는 만남처럼 기분좋은 일이 또 있겠습니까. 자연스럽게 몇가지 이야기하였지만 차를 중심으로 보면 연결되지않는 문화·예술이 없습니다. 심지어 철학까지도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는 차에 무식한 국민이 되어버렸지만 반만년 찬란한 역사에는 차의 향기가 흥건합니다. 차를 모르고 고려청자와 조선백자를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집에 오신 손님 정성껏 대접하고 가시는 손님 뒤가 안보일때까지 배웅하는 우리의 미풍양속 또한 차를 외면하고 성립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차가 없었다면 차례(茶禮) 지낸다는 말도, 일상다반사(日常茶飯事)라는 말도 없었을 것이며, 다산 정약용선생이 '음다흥음주망(飮茶興飮酒亡)'을 외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차에 관심을 기울여 보십시오. 다도(茶道)라고 엄숙하게 부르지 않아도 좋습니다.다례(茶禮)라고 주장하며 번거롭게 행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냥 '차 놀이'한다고 정감있게 부르며 생활화하면 어떻습니까.
차를 배운다는 것은 사고의 폭을 넓히자는 것이요, 차를 행한다는것은 아름다움을 가꾸고 다듬자는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차는 여성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오히려 남성에게 절실한 우리 문화입니다.
우선 여러분을 다실로 초대합니다. 여러분 중에 다실과 응접실을 혼동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서입니다. 하긴 차문화가 쇠퇴하여 차(茶)가 무엇인지조차 모호해진 마당에 응접실에서 차를 마신들 누가 뭐라 하겠습니까. 다만 차 이야기를 하려하니 다실의 존재의미를 되새겨볼 필요가 있어 꺼내는 이야기입니다.
응접실은 손님을 맞이하고 접대하는 방입니다. 주인의 경제형편이나 취향에 따라 얼마든지 호화롭게 꾸미고 치장 할 수 있는 방입니다. 의복이나 악세서리 착용에 구애받을 일이 없으며 기호품도 마음대로 선택하여 즐길 수 있습니다.
다실은 차 마시기 적합하게 꾸며진 방입니다. 차를 마시는 공간은 소박하고 단조로운 분위기가 좋습니다. 복잡한 업무, 분주한 마음 등 여러가지 생활잡념에 쫒기는 사람들이 잠시 모든 것을 잊고 쉬어갈 수 있도록 편안하고 여유로와야 합니다.
마음모아 차 한 잔 우려 마시며 명상을 통해 자기를 돌아보는 시간 - 화병에 꽂힌 한송이 꽃에 자기 모습을 비쳐보고 음악이나 바람소리에 마음을 실어보는 시간 - 그것은 인생을 아름답게 가꾸고 다듬는 훈련의 시간입니다. 그래서 차는 혼자 마시는 것을 선(禪)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때로 가족과 벗과 이웃을 통해 확인됩니다. 마찬가지로 다인들은 다실에서 만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심미안을 기르고 기쁜 소식을 전하며 양식(良識)을 나누고 슬픈일들을 위로합니다. 결코 고루지 못한 말을 던지거나 남을 비웃는 행위를 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다실은 혼자 있을 때는 선방(禪房)이요, 둘 이상이 되면 세파에 때묻고 거칠어진 마음을 순화시키는 도량(道場)이 됩니다.
어렵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사람이란 평소 길들이기 나름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좋은 말만 하기. 좋은 습관 갖기. 상대의 좋은 점만 발견하기. 좋은 향기 가까이하기를 반복하면 어떤 결과가 올까요. 아마도 삶 자체가 하나의 예술이 될 것입니다. 다실은 이렇게 아름다워지는 훈련을 통해 자연과 예술과 인간심성의 삼위 일체를 구하는 방입니다.
차를 일컫는 이름들
이제 차(茶)를 소개합니다. 그런데 차에 대해서도 혼동하는 분이 많습니다. 마시는 음료는 모두 차라고 말합니다. 오렌지 쥬스나 코코아도 차요, 심지어 커피도 차의 일종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응접실을 다실이라 말하는 것보다 더 큰 무지(無知)입니다.
커피는 커피나무 열매가 원료요 세계 어디를 가나 커피라고 부릅니다. 마찬가지로 차는 차나무 잎이 원료이며, 지구촌 어디에서나 '차'라고 부릅니다. 둘 다 고유명사인 것입니다.
중국 남부지방 방언에 차를 '떼'라고 하는 곳이 있는데, 그 발음이 사차지로(絲茶之路:실크로드)를 타고 유럽으로 건너 가 티(Tea)라는 발음을 만들었을 뿐입니다. 폴란드에서 차를 "테"라고 하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시베리아나 몽골, 말레이나 인도네시아에서도 테라고 부릅니다. 일본 사람들은 앞에 경칭을 붙여 오차(御茶)라고 부릅니다. 건강을 좌우하는 음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라고도 부르고 "차"라고도 부릅니다.
'티(Tea)'하면 홍차를 연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녹차를 마시지않는 지역에서는 블랙티를 줄여서 그냥 티라고 부릅니다. 본디는 "블랙티(Black Tea)"입니다. 블랙티의 유래는 17세기 차가 유럽에 처음 소개될 때의 일화가 있습니다. 동양의 차가 네델란드 상선에 실린 것은 17세기 초입니다. 당시는 운하가 없어 적도를 넘고 희망봉을 돌아 다시 적도를 통과해 유럽에 닿았습니다.
처음 배에 실을 때는 녹차였지만 운반되는 사이 완전 발효되어 새까맣게 변했습니다. 선주는 낙심천만이었습니다. 기왕 버릴 것 뜨거운 물에 우려나 보자며 넣으니 우리니 빨갛게 우러나는 것이 맛이 괜찮았습니다. 그들은 서둘러 차에 블랙티란 이름을 붙여 팔았습니다. 그것이 홍차입니다. 동양에서는 진작부터 발효차가 있었고 우린 물이 붉다하여 홍차(紅茶)라 불렀습니다. 결국 육로로 건너간 차는 Tea가 되었고 해로로 전해진 차는 Black Tea가 된 셈입니다.
커피를 브라질産 콜롬비아産으로 분류하듯 차도 산지별로 분류하기는 합니다. 또 나라마다 차에 붙이는 특징있는 대명사가 있습니다.
하지만 커피나무 열매가 아닌 것을 커피라고 하지않듯 차나무 잎이 아닌 것을 차라고 하는 나라는 없습니다. 차와 커피는 동양과 서양의 구별 만큼이나 뚜렷하게 대립되는 상징 같습니다만, 알고보면 커피 소비량은 많지않습니다. 차의 소비가 월등히 많고 선진 사회는 물론 원시적 생활을 하는 아프리카인까지 차를 마시지 않는 민족은 없습니다. 건강과 정서 생활에 없어서는 안 되는 음료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차의 대명사는 작설(雀舌)
차를 생산하는 나라들에는 나름대로 대명사가 있다고 했습니다.
오룡차(烏龍茶)는 타이완이요, 용정(龍井)·철관음(鐵觀音)은 중국이고, 옥로차(玉露茶)는 일본, 립톤 하면 영국입니다. 우리나라 차의 대명사는 작설(雀舌)입니다. 차 만들기 적합한 잎의 부드럽고 연하기가 참새 혀와 같다하여 작설차(雀舌茶)라 이름하고, 품질을 논할 때도 참새작(雀)자를 써서 세작(細雀), 준세작(準細雀), 중작(中雀) 하는 식으로 등급을 매겼습니다.
차나무는 산차과(山茶科)의 상록활엽관목(常綠闊葉灌木)으로 따뜻하고 습기가 많은 곳에서 잘 자랍니다. 연평균 기온이 13℃이상, 강우량이 년 1,500mm 이상이어야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지리산을 중심으로 영호남의 남쪽지방이 자생이나 재배에 적합합니다.
키 작은 동백나무를 연상케하는 차나무는, 여느 관목이 다 그렇듯 밑둥에서 가지가 올라와 옆으로 퍼지는데, 높이는 60 - 90cm 정도이며 잎은 갸름하고 윤기가 있습니다. 뿌리는 직근성이서 밑으로 곧게 뻗습니다. 그래서 옮겨 심으면 살지 못하기에 우리 옛 사회에서 여성에게는 정절, 남자에게는 불사이군 충절의 상징이었습니다.
이러한 차나무의 잎에 현대 과학도 가려내지 못하는 신비한 성분이 가득하여, 우려 마시면 여러 면에서 우리 삶을 육체적으로 건강하게 하고 정신적으로 윤택하게 합니다. 성현들은 모두 차를 벗 삼았습니다. 때론 약용으로, 때론 수도용 음료나 의식용으로, 때론 풍류로 즐겼습니다.
커피나무에 열매가 열려야 하듯, 차나무 잎이라 아무 것이나 다 원료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봄 - 즉, 4-5월에 새로 돋아나는 잎이어야 차가 될 수 있습니다. 그중 덕(德:효능)이 뛰어난 차는 곡우(穀雨)를 전후해 채취되는 순(荀:芽)과 같은 어리고 여린 잎입니다. 이때의 잎은 정말 참새 혀처럼 곱고 연해서 작설차(雀舌茶)란 이름이 실감됩니다.
일반적으로는 작설차라 했지만 다른 이름을 붙이기도 했습니다.
대나무 숲에서 차나무가 잘 자랍니다. 대나무 이슬 먹은 차는 죽로차(竹露茶)라 하고, 차는 지혜를 준다하여 반야차(般若茶)라 이름하기도 했습니다. 설록차(雪綠茶)·춘설차(春雪茶)는 여기저기 잔설이 남아있는 이른 봄에 따서 만든 녹차를 연상하게 하는 이름들입니다.
이제 이해가 되실 겁니다. 이런 부름들이 인삼차 생강차 쌍화차 하고 부른는 것과 같을 수는 없습니다. 인삼은 인삼즙, 쌍화는 쌍화탕이라는 바른 명칭이 있습니다. 차나무 잎이 원료가 아닌 것을 차라고 부르는 나라는 지구촌 어디에도 없습니다.
인류 문화사는 곧 차문화사
문화사란 인간의 지혜가 밝아져 미개에서 벗어나 발전해 온 기록입니다. 불을 이용해 물을 끓이는 것도 시작의 하나입니다.
목이 마를때 짐승처럼 물가에 엎드려 마시던것을 용기(用器)를 이용해 떠 마시게 되었고 다시 그 물을 끓이거나 음식을 익히고 데쳐 먹으면서 식문화도 발달했습니다. 특히 음료가 인류사에 미친 영향은 매우 큽니다. 전쟁같은 굵은 사건만 열거해도 미국의 독립전쟁. 영국과 청나라 같 아편전쟁, 이 땅의 임진왜란 등이 차 때문에 일어났습니다. 생활문화·예술 측면에서보면 도자기·건축·의복·문학 ·서화·음악·예절 등이 차를 매개로 꽃을 피웠습니다.
억지가 아닙니다. 좋은 사람을 만나면 우선 차 한 잔 나누고 싶어지는게 본능입니다. 기왕이면 멋있는 공간에서 훌륭한 그릇에 차를 담아 나누고 싶어집니다. 분위기에 어울리는 잔잔한 음악이 있으면 더욱 좋고 꽃이 한편에 있으면 더욱 좋을 것입니다. 이런 차를 누구 시키지않고 직접 낸다면 상대방은 더욱 좋아할 것입니다. 차 내는 모습이 반듯하고 정성스러우면 그만 상대방은 감동하고 말 것입니다. 상대에게 감동을 주는 만남처럼 기분좋은 일이 또 있겠습니까. 자연스럽게 몇가지 이야기하였지만 차를 중심으로 보면 연결되지않는 문화·예술이 없습니다. 심지어 철학까지도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는 차에 무식한 국민이 되어버렸지만 반만년 찬란한 역사에는 차의 향기가 흥건합니다. 차를 모르고 고려청자와 조선백자를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집에 오신 손님 정성껏 대접하고 가시는 손님 뒤가 안보일때까지 배웅하는 우리의 미풍양속 또한 차를 외면하고 성립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차가 없었다면 차례(茶禮) 지낸다는 말도, 일상다반사(日常茶飯事)라는 말도 없었을 것이며, 다산 정약용선생이 '음다흥음주망(飮茶興飮酒亡)'을 외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차에 관심을 기울여 보십시오. 다도(茶道)라고 엄숙하게 부르지 않아도 좋습니다.다례(茶禮)라고 주장하며 번거롭게 행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냥 '차 놀이'한다고 정감있게 부르며 생활화하면 어떻습니까.
차를 배운다는 것은 사고의 폭을 넓히자는 것이요, 차를 행한다는것은 아름다움을 가꾸고 다듬자는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차는 여성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오히려 남성에게 절실한 우리 문화입니다.
출처 : 인천시무형문화재10호범패와작법무
글쓴이 : 모봉형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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