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는 불교인의 음료?
차문화를 논하기 전에 한번쯤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면 종교색이다.
한낱 음료에 종교색이 있을리 없건만 많은 사람들이 "차는 산사의 스님들이나 마시는 음료" 라고 말하며 외면하는 사례가 있는 것이다. 특히 기독교사회에서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데, 이유는 차나무 재배가 주로 사원 주변에서 이루어졌고, 또 참선하는 스님들이 즐겨 마셔왔다는데 있다.
그것은 이 땅에 배어있는 불교의 색깔이지 차에 담겨있는 종교의 색깔일 수 없다. 우리에게 가톨릭은 2백년, 기독교는 1백년의 역사에 불과하다.
그 이전의 역사는 유불(儒佛)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았고, 고려시대는 불교가 국교였다. 궁정에서 차가 중요한 예폐물이 되고, 사원에서 수도용 음료가 되고, 선비사회에서 풍류로 즐긴 것은 문화와 역사의 색깔이지 종교의 색깔일 수 없는 것이다.
차가 불교의 것이라면 커피는 회교의 것이라는 사실도 알아둘 필요가 있다.
10세기말 이디오피아에서 처음 발견된 커피는 적어도 5백년간 회교승들 사이에서 애음되었다. 커피의 효능도 차와 같아 잠을 쫒아주고 정신을 맑게해주니 수도용 음료로 적격이었다. 세계 최초의 커피하우스는 그래서 사우디아라비아의 회교 성지 메카에서 전도를 목적으로 하는 회교승들에 의해 문을 열었다. 그들은 순례자뿐 아니라 일반인, 상인에게까지 커피를 나누어주었다.
동서가 본격적으로 만나는 지구촌의 교류는 16세기에 시작되었다. 그 이전 로마제국이나 몽골제국이 세계국가로서 큰 발자국을 남기긴 했지만 대륙의 큰경계를 넘지는 못했다. 실제적인 의미에서 세계화의 물꼬를 튼 것은 포르투갈 스페인으로 대표되는 신대륙 발견의 대항해와 네델란드 상인들의 동서 해상무역로 개척 등이 결정적인 동기였다.
16세기 아라비아를 침략 지배한 오스만제국(터키의 전신)은 회교승들이 즐겨 마시는 커피를 콘스탄티노풀(지금의 이스탄불)로 수입해갔고, 이곳에서 다시 전 유럽으로 번졌다. 그런데 교황청이 "커피는 회교승들의 음료"라는 이유로 마시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커피는 악마의 피(커피 악마설)"라는 설은 그때 나돌던 것이다.
커피를 맛 본 사람들은 그 향기에 매료되어 계속 마시기를 원했지만 밀수의 수단 밖에 는 없었다. 특히 상류층 귀부인들 사이에 유행한 커피는 교회가 금하는 바람에 "은밀한 모임"으로 발전했고, 부인들의 "은밀한 외출"이 잦아지자 남편들은 술집으로 흘러 가정이 파괴되는 일까지 생겨났다.
금하는 것을 계속할 때 강제가 발동되는 것은 고금이 마찬가지인지 급기야 콘스탄티노풀에서는 커피를 마신 사람의 혀를 뽑고 커피 밀무역자는 커피포대에 넣어 절벽에서 떨어뜨리는 극형이 행해졌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커피는 더욱 번져 콘스탄티노플에는 물론, 베를린, 빈, 함부르크, 파리, 런던, 옥스퍼드, 마르세이유 등지에 속속 커피하우스가 생겨났고 많은 루머와 논쟁을 불러일으켜 마침내 교황의 결재를 다시 받게 되었다. 이때 처음 커피를 마신 교황 클레멘스 8세는 다음과 같은 판결을 내렸다.
"악마의 음료라는 것이 이렇게 향기롭고 맛있는가? 이런 훌륭한 음료를 이교도들만이 마신다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로다. 내가 커피에 세례를 줄 터이니 앞으로는 모든 기독교인이 편하게 마실지어다"
며칠 후 로마에서의 커피세례식은 성대하게 거행되었고, 이후 유럽의 생활문화에 일대 변화의 바람이 분다.
이와같은 커피 일화는 "차는 불교적인 것"이라고 외면하는 사람들에게 가슴 뭉클한 여운을 준다. 커피는 유럽의 산물이 아니기에 커피 이전의 유럽문화를 논할 수 없지만 차는 우리의 산물이기에 우리 생활문화와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현재 차를 외면하는 것이나 무지한 것도 문제지만 조선시대의 "억불숭유"는 더욱 아픈 역사가 아닐 수 없다. 유교를 숭상한 조선은 도덕이 제일이요 물질생활은 천시하던 청빈의 시대였다.
이는 차생활에서 가르치는 중정(中正:中庸思想)이나 "매사에 정성을 다하고, 덕을 쌓되 검소하게 쌓아야 한다(精行儉德)"는 정신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기에, 차생활을 통하여 사유(思惟)를 반려 삼고 심성(心性)을 수련하는 것이 더 널리 보편화 되었어야 마땅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쇠퇴일로를 걷다가 중엽에 이르러 단절된 느낌까지 주는 것은 도덕보다는 척불(斥佛:抑佛)이 우선했고, 척불로 인해 사원이 주도하던 차 생산이 급격히 감소한데 원인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앞에서 지적했듯 차는 불교의 승려들이나 마시는 "그런 음료"로 인식하여 의식적으로 멀리함으로서 우리 문화의 색깔까지 혼돈스럽게 하는, 그런 어리석음을 범했던 것이다.
차문화를 논하기 전에 한번쯤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면 종교색이다.
한낱 음료에 종교색이 있을리 없건만 많은 사람들이 "차는 산사의 스님들이나 마시는 음료" 라고 말하며 외면하는 사례가 있는 것이다. 특히 기독교사회에서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데, 이유는 차나무 재배가 주로 사원 주변에서 이루어졌고, 또 참선하는 스님들이 즐겨 마셔왔다는데 있다.
그것은 이 땅에 배어있는 불교의 색깔이지 차에 담겨있는 종교의 색깔일 수 없다. 우리에게 가톨릭은 2백년, 기독교는 1백년의 역사에 불과하다.
그 이전의 역사는 유불(儒佛)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았고, 고려시대는 불교가 국교였다. 궁정에서 차가 중요한 예폐물이 되고, 사원에서 수도용 음료가 되고, 선비사회에서 풍류로 즐긴 것은 문화와 역사의 색깔이지 종교의 색깔일 수 없는 것이다.
차가 불교의 것이라면 커피는 회교의 것이라는 사실도 알아둘 필요가 있다.
10세기말 이디오피아에서 처음 발견된 커피는 적어도 5백년간 회교승들 사이에서 애음되었다. 커피의 효능도 차와 같아 잠을 쫒아주고 정신을 맑게해주니 수도용 음료로 적격이었다. 세계 최초의 커피하우스는 그래서 사우디아라비아의 회교 성지 메카에서 전도를 목적으로 하는 회교승들에 의해 문을 열었다. 그들은 순례자뿐 아니라 일반인, 상인에게까지 커피를 나누어주었다.
동서가 본격적으로 만나는 지구촌의 교류는 16세기에 시작되었다. 그 이전 로마제국이나 몽골제국이 세계국가로서 큰 발자국을 남기긴 했지만 대륙의 큰경계를 넘지는 못했다. 실제적인 의미에서 세계화의 물꼬를 튼 것은 포르투갈 스페인으로 대표되는 신대륙 발견의 대항해와 네델란드 상인들의 동서 해상무역로 개척 등이 결정적인 동기였다.
16세기 아라비아를 침략 지배한 오스만제국(터키의 전신)은 회교승들이 즐겨 마시는 커피를 콘스탄티노풀(지금의 이스탄불)로 수입해갔고, 이곳에서 다시 전 유럽으로 번졌다. 그런데 교황청이 "커피는 회교승들의 음료"라는 이유로 마시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커피는 악마의 피(커피 악마설)"라는 설은 그때 나돌던 것이다.
커피를 맛 본 사람들은 그 향기에 매료되어 계속 마시기를 원했지만 밀수의 수단 밖에 는 없었다. 특히 상류층 귀부인들 사이에 유행한 커피는 교회가 금하는 바람에 "은밀한 모임"으로 발전했고, 부인들의 "은밀한 외출"이 잦아지자 남편들은 술집으로 흘러 가정이 파괴되는 일까지 생겨났다.
금하는 것을 계속할 때 강제가 발동되는 것은 고금이 마찬가지인지 급기야 콘스탄티노풀에서는 커피를 마신 사람의 혀를 뽑고 커피 밀무역자는 커피포대에 넣어 절벽에서 떨어뜨리는 극형이 행해졌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커피는 더욱 번져 콘스탄티노플에는 물론, 베를린, 빈, 함부르크, 파리, 런던, 옥스퍼드, 마르세이유 등지에 속속 커피하우스가 생겨났고 많은 루머와 논쟁을 불러일으켜 마침내 교황의 결재를 다시 받게 되었다. 이때 처음 커피를 마신 교황 클레멘스 8세는 다음과 같은 판결을 내렸다.
"악마의 음료라는 것이 이렇게 향기롭고 맛있는가? 이런 훌륭한 음료를 이교도들만이 마신다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로다. 내가 커피에 세례를 줄 터이니 앞으로는 모든 기독교인이 편하게 마실지어다"
며칠 후 로마에서의 커피세례식은 성대하게 거행되었고, 이후 유럽의 생활문화에 일대 변화의 바람이 분다.
이와같은 커피 일화는 "차는 불교적인 것"이라고 외면하는 사람들에게 가슴 뭉클한 여운을 준다. 커피는 유럽의 산물이 아니기에 커피 이전의 유럽문화를 논할 수 없지만 차는 우리의 산물이기에 우리 생활문화와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현재 차를 외면하는 것이나 무지한 것도 문제지만 조선시대의 "억불숭유"는 더욱 아픈 역사가 아닐 수 없다. 유교를 숭상한 조선은 도덕이 제일이요 물질생활은 천시하던 청빈의 시대였다.
이는 차생활에서 가르치는 중정(中正:中庸思想)이나 "매사에 정성을 다하고, 덕을 쌓되 검소하게 쌓아야 한다(精行儉德)"는 정신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기에, 차생활을 통하여 사유(思惟)를 반려 삼고 심성(心性)을 수련하는 것이 더 널리 보편화 되었어야 마땅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쇠퇴일로를 걷다가 중엽에 이르러 단절된 느낌까지 주는 것은 도덕보다는 척불(斥佛:抑佛)이 우선했고, 척불로 인해 사원이 주도하던 차 생산이 급격히 감소한데 원인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앞에서 지적했듯 차는 불교의 승려들이나 마시는 "그런 음료"로 인식하여 의식적으로 멀리함으로서 우리 문화의 색깔까지 혼돈스럽게 하는, 그런 어리석음을 범했던 것이다.
출처 : 인천시무형문화재10호범패와작법무
글쓴이 : 모봉형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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