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일기

경천사 십층탑

차보살 다림화 2009. 2. 9. 21:31

살아 있는 한국 역사의 보고
국립중앙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은  2005년 10월 28일, 용산 시대의 역사적인 서막을 열었다. 덕수궁, 경복궁, 중앙청으로 이리저리 옮겨 다니던 시절을 마감하고 새 보금자리를 마련하였다. 남북으로 훤히 트인 열린 마당은 앞으로 전개될 복합문화 공간의 대문 구실을 하며, 하늘까지 담고 있는 거울못은 닦고 비추어보는 문화의 의미를 새겨보게 한다.
 국립중앙박물관 건립은 세계문화의 맥락 속에서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조명하여 세계화를 지향하며, 남북통일에 대비한 역사(役事)이기도했다. 국내 최초로 유네스코 협력단체인 국제건축가연맹의 공인을 받아 1994년 국제설계경기로 시작되었다. 전 세계 건축가를 대상으로 좋은 아이디어를 얻고자 현상 공모하여 46개국 341(국내 78, 외국263)건의 작품이 접수되었다.  2단계의 심사를 거쳐 정림건축(김정철) 작품이 당선작으로 결정되었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남향과 배산임수 지형을 명당으로 여겨왔다. 용산은 서울의 한가운데라고 할 수 있다. 뒤에는 남산이 있고 앞에는 한강이 흐른다. 복합문화공간으로 박물관 부지로 적당하다. 교통시설이 편리하고 앞으로 남북통일의 염원이 이루어진다면 전통문화의 본산이 될 것이다.

 

 

 

 

지하철 이촌 정류장에 인접한 거리에 있는, 용산국립중앙박물관 입구

 

 국립중앙박물관은 부지면적 9만 2천여 평, 연면적 4만여 평이며 사업비 4천여 억원, 10여 년의

사업기간에 걸친 대공사였다. 서울 갈 때마다 들리긴 하지만 아직도 전시장 모두를 다 관람하지

못했다. 기획전시나 특별 전시를 보기도 시간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정원도 우리나라의 산천

모습을 그대로 닮게 조성되었기 때문에 소풍장소로도 그만이다. 갈때마다 도시락을 지참한다.

공원 안에 세워진 박물관이어서 진입로부터 야생화 밭을 옆으로 끼고 본관으로 들어간다.

우리 산야에서 볼 수 있는 낯익은 수종과 화초들로 메워져 있다.

 

 

 유난히 훤칠하고  잘생긴 소나무는 멀리 속초에서 온 금강송이란다. 관람으로 피로해진 몸은 푸른 숲이 누구러뜨려 줄 것이고,

휴식시간이 무료해지면 유물을 찾아 나서는 자연스러운 환치가 이루어진다. 커다란 인공호수 '거울못'. 건물 앞의 물은

전통적으로 명당 요건의 하나라고 한다. 하지만 이 연못은 그 이상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유물을 관람한다는 것은 내면성찰의 시간

이기 때문이다. 나는 누구인가? 어디에서 왔는가? 내 모습을 비추어보고, 미리 마음을 추스르라는 것이다. 그래서 거울못의 주체는 물이다. 수중생물을 키우지 않는 이유이다. 거울못에서 건물로 오르는 길은 한국 산성의 성벽 모습과 흡사하다. 멀리서 보면박물관이 성곽에둘러싸인 형상이다.

 

 열린 마당으로 들어가면 오른 편이 역사의 길로, 왼편은 기획전시실과 어린이 박물관과 강당 등이 있다.

 봄, 가을의 단체 관람객까지 가늠해서 확보한 넓이이다.

 천천히 계단을 오르면 확 트인 광장이 나타난다. '열린마당'이다. 지붕이 있으면서도 앞뒤로 훤히 뚫려 안이면서 바깥인,

한옥의 대처마루 같은 공간이다. 뒤로 보이는 남산은 우리 전통 건축의 중요 개념인 借景인 셈이다. 왼편으로 더 멀리

북악산까지 보인다. 모든 방문객은 이곳에서 만나고 소통한다.  이 박물관 건물은 앞뒤의 구분 없이 설계되었다.

남산 쪽에서 보면 그 나름의 아기자기한 맛이 있다.   열린마당에서 출입구까지 내려오는 굽이치는 곡선은 남도의 돌담길 같다.

 

 

 건물 안, 동관 입구의 원형공간 '으뜸홀'은 박물관 전시실의 관문이다. 천정까지 그대로 뚫려있어 시원하다. 어디를 보아도 인위적으로 꾸미지 않아 천의무봉의 경지이다.      전시실의 중앙복도인 '역사의 길'. 어쩐지 텅 빈 듯한 느낌, 여백의 미가 이곳의 컨셉이다. 전시와 관람의 공간이기 때문에 어쩌면 의도된 단순함이다.

  관람자의 관심이 유물에게만 쏠리도록 배려하는 마음이다. 미색의 대리석은 바깥의 화강암에 비해 온화한 분위기를 준다. 건물 안인데도 답답하지 않고 쾌적하게 느껴지는 또 하나의 이유는 '역사의 길' 천정을 통해 유입된 자연채광 덕분이다. 특수 유리를 부착해 유물에 해로운 자외선은 걸너내고 눈이 편안해하는 부드러운 빛만 불러들었다. 복합문화공간인 새 박물관이 아직은 많이 낯선 사람들도 많지만, 새로운 곳에 발을 들여 놓았을 때 고향 같은 푸근함을 느낄 수있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낯을 익히는 데는 애정이라는 스펙트럼이 제일이라고. 건물도 생명체라고 하지 않는가, 사람들이 어떻게 가꾸느냐에 따라 무한히 성장할 수도 있다. 천천히 눈길을 맟추다보면 한결 친숙해 질 것이다. 박물관이 싱싱하게살아 움직이게 하는 것이 우리들의 몫이라고 박물관 사람들은 말한다.

 

 

 

 

 

 박물관 동산에서 작난치고 노는 아이들

                                                                                                                           

                                                                                                                      경복궁 시절의 경천사지 십층탑

                                                                                                                       옆에서. 누굴까 ,1961년도?

 

 

 

 

사라져 가는 것은 아름답다
-경천사지 십층석탑-

 

  용산의 국립중앙박물관의 동관 실내, '역사의 길'에는 조형이 너무나 아름다운 "경천사지 십층탑'이 떡하니 자리잡고 박물관에 들어오는 람 누구나 그 탑에 서지 않을 수 없다. 이 박물관에 처음 들어섰을 때 나는 그 아름다운 탑의 조형에 사로잡히기보다 잠깐 혼란에 빠졌었다. 60년 대 내가 서울에서 대학에 다닐 때 분명히 본 탑인데, 그리고 그 탑 앞에서 찍은 사진도 있는데...  어느 날 그 옛날 사진을 찾아냈다. 그건 분명히 경북궁 안(지금의 민속박물관 앞)에 있었고 누구나 그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친구와 같이도 찍고 독사진도 찍었다. 오랫동안 그 탑의 역사는잊고 있었던 것이다.
  경천사지 십층석탑은 모든 병을 낫게 하였다고 일명 '약황탑'으로 불리었다고 한다. 개성 부소산에서 1907년 일본으로 밀반출 되었고, 1918년 고국으로 반환되었던 것을 1960년 경복궁에 시멘트로 복원하였다. 그러니 막 경복궁에 복원되었을 때 우리는 경복궁에 다니면서 국전을 보고 그 탑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 후 산성비와 여러 이유로 1995년 다시 해체 되어 10년간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수리한 후 용산국립중앙박물관 동관 실내에 복원하였다. 그러니 민족의 현대사와 더불어 만고풍상을 같이 겪어온 셈이다. 국내이거나 외국이건, 유물 반출에 얽힌 이야기는 많다. 유물 이동은 경찰 호송 하에 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어마어마한 보험액이 걸린다. 유물이동은 그래서 군사작전을 방불케 한다고 한다. 경복궁 내의 박물관에서 용산으로 이전할 때도 그랬고, 더욱이 이 경천사지 석탑을 복원한 과정은 아슬아슬한 위험을 겪으면서 무사히 끝마쳤다고 한다.
  경천사 십층 탑은 그 조형미가 뛰어나다. 고려 중기 이후에는 원나라의 영향을 받아서 사각 탑보다 원형 탑이나 팔각 탑이 많다. 월정사 9층탑이 그렇고 경천사지 십층 탑 또한 그러하다. 경천사지 십층탑에는 각 층 4면에 부처상이 많이 조각되어 있으며, 모서리마다 나무로 조각한 듯 세밀한 조각 솜씨가 무엇을 형상화했는지도 알 수 없어 올려다 보기에 아득하기만 하다. 이 탑을 박물관 내에 복원하는 일을 담당한 박물관 사람에게는 대단한 모험이었다 한다. 포크레인으로 작업을 하는데 이미 완성된 건물 안에서 작업을 해야 하니까, 대리석 바닥에서 하는 작업은 조금의 실수도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마음 조리며 아찔했던 순간이 많았다 고 했다. 사실 복원 작업을 마친 박물관 담당자는 그 탑이 본래 '약황탑'이었기 때문에 사람도 탑도 다치지 않고 무사히 작업을 마쳤을 것이라고 후일담을 이야기 한 바 있다. 성공적으로 완수한 작업이었기에 그렇게 쉬운 한 마디로 말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이렇게 우리나라에 들어온 불탑의 위력은 오늘날까지도 위력을 발하며 여전히 탑 앞에 서면 부처의 위력에 공손해지고 그 탑의 조형미에 감동된다. 우리나라도 왕국의 시대에 접어들면서 삼국 모두 받아들인 불교는 문화적 도약을 도모할 수 있는 선진 종교였다.

" 평생을 읽어도 다 읽을 수 없는 팔만사천의 법문이 불경으로 들어왔다. 문자가 없는 세상에서 문자를 사유해야 하는 세상으로 일약 도약을 하게 된다.  샤마니즘의 주술은 불경 앞에 머물 자리가 없어져 버렸다. 불, 법, 승 삼보를 들여와 공손히 모시는 전당을 마련하고 포교를 하니 불경 같은 책 만드는법, 붓글씨 쓰는 법, 종이 만드는 법, 기와집 짓는 법, 연꽃무늬 기와 만드는 법, 절집의 벽채에 그림 그리는 법, 불교행사 때 춤추는 법,  지금까지 보도 듣도 못한 수준 높은 온갖 것이 함께 들어온다. 어찌 임금이 받아들이지 않았으랴!" 

 컴퓨터 자판으로 이렇게 글을 두드릴 수 있는 방법이 있으니 어찌 원고지에 또박또박 글자를 새기고 있겠는가. 시간도 많이 걸리고 손도 아프다. 그러니 누구나 컴퓨터를 사고 인터넷을 공부해야 한다. 오늘날 정보사회를 이룩한 근거도 문화의 약진, 인쇄술에서 출발했다고 할 만 하다. 세계에 유례 없는 우리의 인쇄술이 불경을 새기기 위하여서였다.  서양에서 성경을 널리 전파하기 위하여 발견된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그러한 것처럼.
  삼국시대 정복 국은 백성을 다스리기에 불도를 폈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고구려, 백제, 신라 모두 불교가 성행하였고 사찰과 석탑조성의 경쟁이 심했다. 신라의 불국정토 구상은 천년의 역사를 지탱한 원동력이 되었다. 더욱이 불도를 닦으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니 세습되는 왕권에도 도전할 수 있는 희망을 몰래 가져볼 만하기도 했다. 부족마다 자기 부족에서 왕을 추대하려는 혁명적인 일도 벌어졌다. 불교는 그렇게 우리나라에 퍼져 들어갔다. 서서히 흡수된 이슬비는 모래밭을 적셨고, 강물 위에 번지는 물방울처럼 번져 나갔다.
 그리고 절을 세우는 곳마다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한 탑이 세워졌다.  불경에는 조탑공덕경이 있고 불경을 사경 하는 공덕이 있다. 지금도 절에는 각종 불경을 사경 하는 인쇄물이 여전히 성행하고 효력을 발생하고 있다. 우리의 전통문화재의 모든 부분이 불교 문화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니 절집의 처마 밑에 서서 올려다보는 처마 선이며 지붕을 받치는 공포의 조각들이 꽃잎 같고, 낙조에 홀로 선 석탑의 실루엣이 그리도 아름답다. 지금은 사라져 간 옛 사람들의 기원과 삶의 흔적이 베인 세월의 옷을 입고  있기 때문에 더욱 아름답다.

 

 

1967년도?   눈내린 겨울 경복궁 마당에서 

빛 바랜 45년 전 고등학교 수학여행 때 사진 

사람도 옛 사람은 사라지니, 사라지고 있는 나도 아름다움을

남길 수 있을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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