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일기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차보살 다림화 2009. 2. 11. 19:15

 

 아! 백제탑이여

 

 

 

 

부처님의 진신사리는 있어도 없어도 좋고 아름다운 연인이라 해도 좋다. 이 차꽃으로 탑에 헌다공양 올리는 마음이다.

80년도 초, 풀밭에 둘러싸인 이 탑 앞에 우리는 정성스레 차를 우려 올리고 탑을 돌곤 했다. 우리 스님은

유난히 백제 탑들을 좋아했으니 정림사지 5층탑을 더 좋아했다. 그러니 정림사지 탑을 닮은 미륵사지와 왕궁석탑엘 자주 갔다.

그 때는 연꽃 같은 스님이 좋아하는 것이라면 나도 따라 좋아했고 스님의 행을 그대로 닮고 싶었다. 탑을 올려다 보는 시선

따라 같이 바라보기를 좋아했다. 내가 다례원을 열었을 때, 전라북도에 오니 차 하는 사람도 없고 찻집(전통)도 없다시면서

스님은 나의 차방에 찾아오셔서 좋아했고 우린 한 눈에 서로 반했다. 선뜻 전화주셔서 송광사 마로니에를 보러 가자 하시고,

연꽃 필때는  연방죽에 가자 하셨다. 덕진 연못 가까이 살았으므로 나는 삶은 감자를 바구니에 담고 연못가에서 다식 삼아

즐기곤 했다.

그님이 경기도로 옮긴 후 많은 날들이 지났다. 문득 그리워지는 날들이 되살아나, 미륵사지와 왕궁리 석탑을 찾게 되었다.

논산의 명상원에 가끔 다니던 중, 돌아 오는 길에는 탑 자리에 자주 들러서 쉬었다 오곤 했다.  한참을 탑을 올려다 보고

있노라면 고즈넉한 은혜로운 손길 같은 마음결이 느껴지는 것이 좋았다. 어느 날 오후 넋놓고 바라보자니 한 무리의 대학생들이

교수님을 모시고 탑 앞에 서는 것이다. 부산의 대학생들이었다. 혼자 말로 '왜 이렇게 이 탑이 아름다운지! ' 중얼거렸다.

  이들을 이끌고 이 백제 지역을 답사하는 교수님은 내 말을 귀담아 들으시고 문득 학생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손뼉을 치며

 "딱,딱,딱, 자, 여러분 이 백제 탑이 어떻게 아름다운가요? 신라 탑과 어떻게 다른가요?" 약간의 침묵이 흘렀다. 멍 하니

모두 올려다 보았다. 물론 기단부에서 상륜부까지 돌조각을 쌓는 데는 모두 과학적 원리가 있다. 그리고 시선이 닿았을때의 체감까지

고려한 점도 있다.

 

 그 교수님의 설명을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나도 머리를 끄덕이며 다시 보았고, 그 후로 더욱 감미롭게 그 미감을 음미하곤 했다.

"초층 탑신은 맏형처럼 듬직하고 2층 이상은 어여쁜 누이 동생들처럼 옹개종개 오라버니 넓은 등에 업혔다. 평사낙안 기러기처럼 너른 지붕은 넉넉하고 한가로운 정경.... 지붕 끝마다 드러난 추임새는 어느 여인이 진양조 느린 가락으로 춤을 추다가 불현듯 손끝을 튀기는 악센트....

위층으로 오를수록 지붕은 넓고 몸뚱이는 가냘퍼....  저 꼭대기의 긴장은 아름답다 못해 애틋하고 속이 타들어간다. " 이렇게 소재구박사님은

표현했다. 아마도 이 감상은 정림사지5층석탑의 미를 표현한 말인 것 같지만, 이 왕궁탑에도 충분히 해당되는 맛이다.  전시관에서 옛날 탑 사진을 보는 한 관람자는 자기는 이 부근의 마을에 살았는데 초등학생 때 저 탑 주위에서 놀면서 옥개석(지붕돌)위를 올라다녔다고 했다. 인근 초중등학생들의 소풍장소가 미륵사지와 이 왕궁터였다. 소재구 탑전문 박사님도 그랬다. 어렸을 때 늘 이 주위에서 놀 질 때까지 자주 놀았단다. 그 인연이 나중에 청년 시절부터 탑에 미쳐 새벽부터 밤늦도록 돌아다닐 줄을 그때 어찌 상상이라도 할 수 있었겠느냐고 술회했다. 참 인연이란 묘하다. 내가 아버지의 직장 인연 때문에 중고등학생시절을 이곳에서 보낸 일이 후에 다시 이곳 사람과 결혼할 인연이 될 줄이야. 설화의 주인공처럼 서동이 선화공주를 찾아다니던 것 같이 내 남편도 청년시절 다시 나를 찾아다니다 결국 서울에서 직장생활하던 나를 전주까지 데려올 줄이야!

 

 

  어렵사리 삼국을 통일한 신라. 백제를 무너뜨리고도 고구려와 8년 간이나 전쟁을 해야 했다. 그리고 당나라를 물리치기까지 힘겨웠다. 통일한 나라를 화합하기에는 내용이 충분해야 했다. 자기 고장을 유지하기 위하여 익산 지역 사람들은 백제의 마지막 희망과 꿈이었던  미륵사를 유지하기 위하여 강력한 신라인들로부터 시주를 받아야 했겠지. 지역을 살리고 화합하기 위하여 그들의 민요에 신라의 선화공주라는 상상의 인물을 등장시켰다.  문학적 상상력은 선화공주를 빌어 서동의 신분 상승을 올려놓을만  했을 것이다. 아무튼 이 지역은 오랜 세월 서동요의 덕을 보아왔던 셈이다. 새삼스레 선화공주가 아니고  익산의 호족이었던 '사택적덕'의 딸이 무왕의 비였다고 해도, 그렇게 고치고 싶지 않을 지도 모른다. 그 당시는 동맹 결혼도 많았으며, 왕비가 어디 한 둘이었던가.

  나 역시 아버지의 덕택에 경남에서 산 세월보다 전주에서 산 세월이 많아졌다. 이제는 이곳의 문화미에 푹 젖게 되어 탑 앞에 서면 한 살처럼  느껴진다. 고대에 선화공주가 그랬던 것처럼 내 피도 걸러지고 여과되어 나에게서는 복합 문화 맛이 나지 않을까 싶다. 아버지가 첫 세대로써 영호남의 가교를 이었으며 내 아들도 대를 이어 영남 여인을 아내로 맺었으니 그렇게 해서 우리는 한 영토 안에서 하나의 역사와 문화를 이어 창조해 가고 있다.

 

 보이는 유적은 하나 뿐인데 왕궁터에서 발굴된 유물이 많아 전시관을 따로 지어서 전시 중이다. 최근에 와서 지방자치제의 영향으로

문화 경쟁이 많이 일어난다. 무슨 유적의 실마리라도 있게되면 더 확대 해석하여 부풀리는 점도 없지 않음을 느낀다.

일률적으로 똑 같은 서양 잔디공원으로 조성되어 진정한 유물의 전통미를 흐리게 되기도 하다. 전시관을 나오고 탑 주위를 돌아나오는

마음이 어쩐지 영 시원치는 않다. 왕궁터보다 더 넓은 주차장과 그리 많이 활용될지 모를 시설들이 주변 경관과 어울리지 않은 것 같은 것은 내 생각일 뿐일까. 

 

 1917년 사진은 탑이 일반적 무덤 봉분 위에 서 있는 것 같다.

 

 

 

 

 

1965년 해체 복원된 뒤, 인근 중학생들의 봉사활동 모습이다.

 

 

 전주에서 논산까지 지방국도가 새로 생긴 후, 왕궁터 발굴이 시작된 시점의 사진인 것 같다.

 

 2008년 봄 사진

 

 2009년 2월 10일 사진

 

 

 

 

 

왕궁리오층석탑과 쌍릉 

 

쌍릉은 대능과 소능이 있는데 그것이 무왕과 무왕비인 선화공주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탑리 마을에서 국도로 올라와서 금마 쪽으로 달리다가 금마 사거리에서 죄회전 하면 '무왕로'를 지난다.

길 이름을 '무왕로' '선화로' 등으로 지어 익산은 거리마다 옛 백제를 떠올리게 한다. 무왕로의 중간 지점 쯤

가면 '쌍릉'의 이정표를 만나게 되고 우측으로 '쌍릉로'인 작은 길을 조금 가면 길 가에 대능이 나타난다.

선화공주의 넋이 되어 무왕로를 지나면서 그 옛날의 치열했던 신라와의 갈등 속에서 백제의 영화를 꽃피워

보려던 무왕의 심정으로 되될아가 본다. 지금은 그들 혼백들도 능 주위로 다시 찾을 것 같지 않다 어쩌면

그 혼백들은 먼지 같은 氣로 화해서 오늘날 우리들 혼의 일부로 환생되었는지도 모른다.

 

 주차장에서 능으로 난 길은 두 갈래다. 왼쪽의 이 능이 소능인데, 아마도 선화공주의 무덤으로 여겨진다. 아니 이젠 선화공주란 이름을

바꾸어서 그냥 무왕비의 능으로 불러야 할지. 오랜 세월 기정 사실로 받아들여진 설화는 그대로 가치가 있었기에...

 

 입구에서 오른 편으로 난 산책길을 따라가면 저 소나무숲 사이로 대능이 보인다.

 

 능 앞에서 지금 사람들이 판석을 놓았다. 이 판석 위에 차꽃을 공양 올리고 싶다.

 

 

 대능 쪽에서 소나무 숲길을 따라가면 소능까지 산책길로 이어진다.

 

 소능 쪽에서 숲을 빠져나오면 이렇게 대능이 나오고 바로 큰길 가이다.

 

 

 대능의 꼭대기에 올라 동쪽, 왕궁터의 원경이 멀리 아스라이 보인다.

무왕과 왕비가 죽어서도 왕궁터를 그리며 백제의 치세가 탄탄하도록 빌고 있을 거라는

염원을 담아 왕궁터를 향한 이곳에 능을 마련하지 않았을까. 지금 내가 공주의 혼이라면

그렇게 나라의 안녕을 원하며 쳐다보았을 것 같다. 고대 왕국들의 비원이 한데 뭉쳐져

이제는 통일된 한 반도가 이어져 왔고. 남북이 하나되기도 빌고 있지 않을까.

 멀리 아스라이 왕궁터가 보인다.

 

 폐허가 다시 살아날 듯하게 발굴되고 있는 왕궁터의 석탑을 차거운 달빛이 보드랍게 어루만질 것이다. 오늘 같은 보름날 밤이면,

쌍릉에서는 무왕 부부의 혼이 달빛 속에서 오늘의 세태를 감지하며  달을 올려다 보며 빌지 않을까. 나라의 앞길을 위한 기원을...

이제 무거운 왕관 내려놓았으니 서동으로 돌아가 한가하게 소나무 산책로를 따라 공주를 맞으러 가서 달밤의 고요를 두 손 잡고

너울너울 춤추워 보소서. 그 옛날 두분이 사자사를 방문하려할 때 미륵사 연못에 나타난 삼존불이 또 나타나서 무슨 언질을

주실지 가늠해 보시라.    2009년 첫 보름날을 지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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