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일기

자귀나무꽃

차보살 다림화 2009. 6. 29. 13:56

 자귀나무꽃

                                                          -김용옥의 꽃 기야기 중에서-

 

 

  꽃을 사랑하는 이에게 여름은 축복의 계절이다. 땀흘리며 긴긴 날을 견뎌야 하는 우리에게 거기 그렇게 저 홀로 피어나는 꽃들은 우로의 선물이다.
  서럽고 쓸쓸하고 혹독한 한겨울을 마저 보내기도 전에, 입춘이면 벌써 큰개불알꽃이나 쇠별꽃, 광대나물꽃, 보리빼이랑 서나서나 설중매가 핀다. 이내 앵초, 노루귀, 솜나물, 아기괭이눈, 복수초, 영춘화가 피고 피고, 성큼 성큼 잇따라 개나리, 진달래, 살구꽃, 자두꽃, 벚꽃에 도화와 이화가 산야에 흐드러진다. 잎새도 없는 채 무더기 무더기 4월의 꽃들이 전지를 흔든다.
  이제 훈풍과 온기로 약차오른 오뉴월, 더년생 나무들이 풋풋한 이파리 사이로 숭어리 숭어리 꽃숭어리를 매달고서 눈을 시리게 하고 코를 흥흥거리게 한다. 별밤에 수많은 등잔을 매단 듯한 아카시아꽃과 단내 솔솔 풍기는 이팝꽃더미, 꽃사태 나도 나는 좋아라, 수수꽃다리 몽실몽실 향내를 길어올려 그냥 지나갈 뻔한 발길을 부여잡고, 화사하고 흐벅진 화중왕 모란꽃이 벙글었다가 건 듯 스치는 바람에 놀란 양, 고 맑은 꽃잎을 뚝뚝 지운다. 그냥 무질러져버린 내 서러운 청춘이 진다.
  이렇게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새롭고 다른 모습으로 꽃표정이 이어진다. 어지간히, 다년생 수목화가 이울면 더위가 임신 칠 삭만큼 배부르는 7월. 7월은 잎새들이 푸를 대로 푸르러져 장년의 기운을 뿜어낸다. 마치 오랫동안 목적해온 형상을 완성한 듯 여름을 푸르게 예찬한다. 오직 초록내음, 그 초록내음에 섞여 다득한 향기를 보내오는 꽃 자귀꽃. 무더위에 합죽선 펼치듯 피는 꽃.
  자귀나무는 잎도 꽃도 특이하다.
  잎자루에 낫날 모양의, 잘디잔 잎을 지네발처럼 질서 있게 달고 있다. 그 잎들이 하는 양을 보자, 날이 몹시 궂거나 흐릴 때, 또 밤이 되면 어김없이 마주보는 잎새끼리 일심동체 한 몸으로 껴안고 눕는다. 오죽하면 합환목(合歡木) 또는 야합수(夜合樹)라 할까. 그래선 가봐. 부부금슬이 좋기를, 속궁합이 어우러지기를 기원해서 신방 창가에 정원수로 친정부모가 심어주던 나무란다. 연분홍 자귀꽃이 만발하여 달빛을 받으면 숙고사로 지은 차렵이불을 펼친 듯, 부끄러운 듯한 행복울 누려보고 싶어지지 않을 아내가 어디 있을까. 그렇게 밤마다 사랑으로 피어난 꽃이길래 부끄러운 색깔로 꽃피는가 몰라.
  꽃도 별나다. 종 모양의 꽃관은 숨어 있는 채 웃부분만 분홍 물든 꽃수술들이 일어선 꽃 모양이다. 사내꽃이다. 꽃내음조차 비린 듯 단내 뿜는 살내음이 난다.
  나무의 모양새는 햇살도 걸러내는 모치치마처럼 여성적인데, 그 나뭇가지는 매끈하면서도 단단하다. 마른 땅 아무데나 말뚝으로 박아 소나 염소를 매어두는 기둥으로 쓰거나 아궁이에 불 지필 때 부지깽이로 사용했다. 지푸라기를 고루 펴서 불지피거나 다독다독 잿불을 눌러대며 아궁이를 들낙이면서도 자귀나무 부지깽이는 불에 잘 타지 않았다. 세상에서 제일 강하게 잘 견디는 나무가 자굿대나무- 자귀나무의 전라도 사투리 - 라고 했다.
  아, 자구꽃 그늘 아래 서니 자박자박 꽃버선이 걸어나온다. 어머니는 자연의 멋을 생활에 재현하는 멋쟁이였다.  명절이면 늘 한복을 고이 빚어주셨다. 그때, 하이얀 옥양목 버선코에 달아주신 꽃방울이 자귀꽃이었다. 붉게 윤기 나는 명주실을 겹겹이 접어 한가운데를 묶고, 그 묶은 부분을 중심으로 양쪽 가닥을 모아 아기손가락 한 마디쯤 길이로 둥실하게 동여매고 실가락 가락을 펼치면 영락없이 자귀꽃이다. 주머니끈이나 버선코에, 밥상보 고리로도 달았다. 이렇게 자귀꽃을 보고 있으면, 지금은 잃어버린 전설 같은 기억들이 실실이 걸어나온다.
  
 

 

 

지난 금요일 6월 26일 한낮에 틈이 나서

더위를 잊기 위하여 자귀나무꽃을 보러 갔지요.

덕진공원에는 벌써 연꽃도 피기 시작하더이다.

여름꽃 이야기 중의 꽃들은 7월에 피었습니다.

몇 년 전의 이야기지요. 올해는 유월에 벌써 다 피는군요.

날이 일찍 더우니 여름꽃도 덩달아 볕따라 피는가 봅니다.

 

 

 

 

 

 

 

 

 자귀나무꽃 그늘에 서면

부끄러운 신혼시절의 그리움이 피어난다

 

 

 

 

 

 

 

 

 

 

 

 

 

늦은 오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신리 수원지 주변의 산자귀나무꽃이 궁금했지요.

  묵묵한 자귀나무들이 여기저기에서

살내음을 풍기고 있습니다.

 한 줄기 강바람을 기다리는 듯

자귀나무꽃을 보세요!

 

 

 

 

 

 잎줄기 양 옆으로 붙은 톱날 같은 이파리가 어둑해지면

 분홍색 꽃차렵이불 덮고 서로 홥환한답니다.

 

 

 

 

 

 

  나는 이러한 얘기들로 외롭지 않다만 내 딸애는 무엇으로 나를 추억할까.
  가을바람이 어느새 삽상하다. 여름철에 꽃으로 환희를 두던 자귀나무 잎이 노랗게 물들어 마치 날벌레 날 듯이 그 작은 잎새들을 떨군다. 달그락 달각 달그락 달각, 자귀꽃이 남긴 꼬투리가 리듬악기 연주를 한다. 유정수(有情樹)라더니, 한여름 밤의 사랑을 못내 아쉬워하나 보다. 가을바람이 자꾸만 불어라. 지나간 청춘의 사랑을 실컷 노래하도록.
  꽃들은 언제나 새롭다. 순결과 인내와 기다림으로 창조하는 방법을 알려준다. 꽃을 통하여 사색하는 길에는 인생의 내면이 도사리고 있다. 삶의 내면을 열어주는 꽃, 막막하고 심드렁하고 자기 자신이 한없이 낮아질 때 찾악면 생명의 값을 깨닫게 해준다. 그래도 살아라. 지금 서 있는 그 자리가 네 자리다. 더욱이 땡볕 여름날도 목마르며 견디며, 저러히 하늘하늘 꽃 피는 걸 보아. 자귀꽃이 못견디게 지치는 여름날을 일으켜 새우 준다. 사랑나무 자귀꽃.
  신이 가장 천진하고 무구한 마음으로 찬조한 것이 꽃일지도 모른다. 꽃들은 그냥 그대로 산다.
  자귀꽃이 피어 무더운 여름이 지겹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