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일기

노송천을 돌려다오

차보살 다림화 2009. 11. 16. 12:27

 

 

 

 

 

 

 

 

 

 

 

 

 

 

 

 

 

 

 

 

 

 

 

 

 노송천을 돌려다오

                                                         조윤수

  

 

    "완전의 땅, 전주는 완산(完山) 더하기 전주(全州)라 해서 완전(完全)이다. 완산과 전주라는 명칭은 완(完), 전(全)이란 표현에서 나타나듯이 가장 살기 좋고, 풍요로우며, 자연재해가 없는 안전하고 편안한 도시라고 한다. 전주는 한국의 대표적인 음식 도시, 전통문화도시, 예술의 도시, 학문의 도시, 건강의 도시 등으로 명성이 높다."
   43년 동안 전주에서 살아본 나의 경험으로는 잘 알 수 없었다. 30여 년을 넘기면서부터 서서히 그 전주를 대표하는 말의 뜻의 일부만 다가오기 시작했다. 자연 재해가 많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었다. 최근에 지구 전체의 온난화 영향으로 몇 년 전 여름에 전주천이 범람하는 경우를 처음 보게 된 사실 뿐. 겨울에 눈이 많이 내렸으나 최근 몇 년은 그 눈도 줄어들었다. 우리 자매들은 전국을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전북 지방에 오면 먹거리가 안심이라고 한다. 내가 생각해봐도 전주 사람들 같이 김치를 맛있게 담는 사람들이 없는 것 같다. 내가 처음 교동에서 신접살이 할 때  동네 어느 한 집에서 김치를 담는 날이면 이웃 잔치 날 같았다. 확독에 즉석에서 갈은 고추양념에 버무린 김치를 한 그릇 씩 돌리는 것이었다. 그 때 고구마 줄기로 김치 담는 것도 처음 알았다. 그 정겨운 풍경은 지금은 맛볼 수는 없다.

  전주시의 명칭이 전주부에서 전주시로 변경된 지 올해 60주년을 맞았다. 전주역사박물관에서는 지난 9월과 10월 동안 전주시의 60년 사를 돌아볼 수 있는 사진 전시회를 가진 바 있다. 친구와 같이 사진을 쭉 둘러보다가 우리들의 고등학교 시절의 자화상들이 걸려 있는 사진 앞에 섰다. 전주여중과 전주여고가 지금의 리베라호텔 자리였을 때의 사진들이었다. "야! 우리들 사진이 저기 있다!" 하며 그 시절로 돌아간 기분에 들떠서 그 때의 이야기들로 잠시 즐거웠다. 지금은 문화주택 자리가 된 인봉리 저수지가 메워져 공설운동장이었던 때에 한복을 입고 또는 고깔모자를 쓰고 마스케임 연습할 때. 운동장에서 전국대회가 열려 연습하던 때. 졸업사진으로 쓰기 위하여 전동성당에서와 다가산에서 하얀 모자에 가슴에 백선을 달고 나란히 찍은 사진들. 구도청 앞에서 전주여고 팻말을 들고 행진하는 사진들. 나는 그 때 중대장으로 한 중대 앞에 서서 '우로 봣'을 외쳤다. 
  리베라호텔 자리에 학교가 있을 때, 정말 눈깜짝 할 사이에 지나간 50년 전, 학교 마당 위쪽은 철길 둑이었다. 운동장에서 뛰놀다 기차가 지나가면 올려다보면서 아이들이 부르던 노래가 있었다. "전주 사람 밥만 먹고 똥만 싼다. 북대도 대학이냐, 멸치도 생선이냐." 왜 이런 가사가 생겼는지도 몰랐다. 그시절 세태를 나타낸 것일까. 그로부터 50년 뒤, 지금은 그 철길이 남원으로 내려가는 대로가 되고 전주와 남쪽을 통과하는 주요 도로가 되었다. 그 때는 전주천의 물길이 서쪽으로 돌아가는 도중 오목대에서 북으로 흐르는 작은 물길이 하나 있었다. 그것이 노송천이라고 불렸다.

  옛 사진을 보니 그 노송천을 따라 아침저녁으로 등하교를 하였던 것이다. 서노송동에서 중앙시장과 중앙성당 옆으로 와서 코아호텔 옆으로 리베라호텔까지 제법 큰 천이 흘렀다. 그 노송천의 좁은 길은 사람들이 딱 걸어다니기 좋은 길이었다. 아침 햇살을 받으며 학교까지 갔다가 노을을 등지고 어스름 저녁에 그 길로 다녔다. 여고를 졸업하고 난 후에는 전주를 잊고 서울에 살면서 부산으로 다녔다. 다시 전주에 와서 살게 될 줄이야 그때는 예상하지 못했다. 60년대 서울에서는 청계천이 복개되어 명동에서 청계천으로 이어지는 삼일고가 도로가 생겼다고 우리는 일부러 그 길을 구경하기 위하여 그쪽으로 다니기도 하였다. 그 무렵 전주에서도 노송천이 복개되었던 것 같다.
  그 시절에는 고속도로와 각 지방에서도 도로 정비가 편리하게 이루어진 때였다. 두 세대를 지난 지금은 그 도로 밑으로 흐르는 천을 복구해야 해야 도시의 숨결을 되살리게 된다는 자연의 이치를 깨닫게 되었다. 그렇게 시대 환경과 시대 정신은 변화해 가고 있다. 지금 전주시는 노송천을 다시 살리기 위하여 공사를 시작하였다. 도시 미화나 환경 등의 깊은 속내까지 전문적으로 말하기는 쉽지 않다. 다만 그렇게 중지를 모아서 진행하기로 했으니 해보고 살아보고 또 다음의 변화에 따라야 할 것인가 보다. 생성과 소멸과 건설과 파괴를 되풀이하면서 우리가 나아가는 그 곳은 어디이며 무엇일까. 단지 자연의 생명부양 능력이 고갈되지 않는 범위를 알아채면서 해 가면 좋겠다.
  늦가을이면 전주시는 노란 은행나무잎으로 뒤덮인다. 경기전을 중심으로 한옥마을과 향교까지 이어지는 노란 은행나무 잎 사이로 보이는 한옥 지붕이 천년 전주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하다. 은행나무가 전주인들의 선비 정신을 상징하는 것 같은 인상도 준다. 하지만 더 깊이 생각해보면 전주 정신을 뭐라고 해야 할지 정말 어렵다. 사람은 자연과 떨어져서 살 수 없는 자연의 일부이다.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의 천지의 기운에 맞는 먹거리에 따라서 몸의 형성이 이루어지고 생각하고 마음먹고 행동하는 양식에 따라서 정신을 만들고 영혼의 성품을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닌가. 전주인들에게서 나타나는 정신은 무엇일까.

  때를 맞추어 전주역사박물관에서 10월 14일에 전주정신 대토론회가 있었다. 장명수씨가 대 발제를 한 후, 각 분야의 전문인들이 자신의 전공 분야를 핵심으로 전주정신에 대하여 발표하였다. 하지만 뭐라고 결론 내리기 어려운 문제였다. 끝나고도 석연치 않았다. 선비정신문화와 아전문화, 민중문화에 대하여 다 말할 수 없다. 그렇다면 전통인가 예향인가 학문인가. 아니면 저항정신을 말할 것인가. 모든 것이 융합되는 비빔밥 정신인가.  문화해설사들은 관광인들에게 해설할 때 경기전에 가서는 왕조실록을 지켜낸 선비정신을 이야기 할 것이며 경기전 맞은 편의 유럽 고딕식 건축물 근대문화유산인 전동성당에 가서는 조선의 선비 정신에게 박해받았던 신진문화의 천주학을 받아들인 사람들의 고통을 이야기 해야 한다. 임시 결론으로 전주시는 많은 비용을 지출하지 않고도 문화미를 향유할 수 있는 도시다 라고 한마디 결론을 낸 이종민 교수의 발언에 박수를 치며 대 찬동하였다.
   전주방송국에서는 전주시 60주년을 맞아  '노송천을 돌려다오' 라는 다큐를 제작하였다. 본의 아니게 나는 노송천의 역사의 증언이 되어 잠시 출연하게 되었다. 노송천은 다시 불러올 수 있건만 그 때의 흘러간 물과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2009년 11월 16일)

 

 

참조:    2009년 11월 21일 밤 11시 30분   JTV(전주방송국) '노송천을 돌려다오" 방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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