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일기

무령왕릉 유물

차보살 다림화 2009. 11. 1. 23:50

공주 송산리 고분군에서

 

백제웅진 도읍기의 왕과 왕족의 무덤이 군집된 곳으로 무령왕릉을 비롯한 총 7기의 고분이 분포한다.

백제 무령왕(461-523)은 이름이 사마斯麻  혹 융隆, 시호는 무령이다.

무령왕릉은 19071년 7월 5일 송산리 6호분 배수로 공사중 우연히 발견되었는데, 묘실 전체를 벽돌로 쌓은 벽돌무덤으로

입구통로에 해당하는 연도와 시신을 안치하는 현실의 두부분으로 만들어졌다.

이 왕릉은 한국 발굴사상 최대의 학술적 의미와 역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5,6호분과 무령왈릉의 모형을 실물 크기로 제작하여 관람객들이 직접 내부에 들어가 관람할 수 있도록 하였다.

 

 

 무령왈릉 발굴 당시의 모습을 복제품으로 재현한 곳이다. 실물은 공주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이 왕릉에서 발견된 가장 중요한 유물은 地神에게 무덤의 터를 사는 기록을 새긴 묘지석이다. 이 묘지석에 의하면 왕과

왕비가 언제 어느 때 돌아가셨다는 명문이 있으므로 무덤의 주인이 누구라는 것을 밝힌 유일한 유적임을 알려준다.

 

 무령왕릉의 반신상

 

 고분군에서 작은 산을 돌아 가면 공주박물관 후문이 나온다.

역사의 뒤안길에 떨어지는 낙엽은 천 년 전에도 그렇게 왔다 갔을 것을 생각하면서...

 

 

국립공주박물관 탑정원에서

 

 국보 제 162호 돌 짐승상

돌 짐승상은 왕릉을 수호하기 위하여 만들어 놓았던 상상의 동물이다.

 

 

 이 묘지석의 명문과 미륵사지서탑에서 발굴돤 '사리봉안기'의 명문과 분위기나 글씨 체를 비교해보는 것을 기대하고 갔던 것이다.

 사재동 교수가 오랫 동안 연구한 결과 미륵사 사리봉안기로 보아 미륵사서탑의 조성 연대를 무왕이 아닌 무령왕 대의 기해년이라고 주장 했던 것이다. '백제의 르네쌍스를 그리다'란 수필에서 나는 이렇게 썼던 것이다.

 

  새꼬리 모양의 치미는 미륵사 전각마다 용마루의 양쪽 끝에 세워져서 건물의 위용을 자랑하였을 것이고 사자얼굴 다리로 된 향로, 사리함에 새겨진 공예 솜씨로 보아 다른 문물들의 솜씨를 능히 상상할 수 있지 않은가. 세 금당에 모셔진 삼존불상에는 당시 왕실 대가를 중심으로 최고 절정의 공예품이 제작되고 복장 되었으리라. 삼국시대에 제작된 국보 78, 83호인 '미륵반가사유상'를 탄생시킨 빼어난 조각 솜씨가 아닌가.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유물로 보아서도 짐작될 수 있다. "사리봉안기의 금판 명문은 무령왕릉 출토 지석의 석판 명문과 그 시대적 기록 정신을 공유하고 있는 터라 하겠다. 이러한 양자의 명문은 실로 역사적인 가치를 지닌 최고의 성과인데, 하나는 생전의 원찰에 새기고 하나는 사후의 능침에 새기었으니, 그 친연성이 실감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사리봉안기의 명문이 무령왕 대의 소산임을 족히 유추할 수가 있겠다."
  

 

 

 

 벽돌무덤의 벽돌 문양과 벽돌을 쌓은 모습. 등잔을 놓은 장소와 중방이라고 쓴 창을 낸 부분이다.

 

 

 목관의 장석들

 

 굽은 옥제품과 금세공품들

 

 

 

 

죽어서도 옷을 다려 입을수 있는 다리미까지 부장하였다.

 

각종 금제품 목걸이 

 

 

 

국보 154, 155호 왕 금제 관장식과 왕비 금제관장식

그 외도 국보 제 156호 , 왕 금제귀걸와 국보 제 157호인 왕비 금제귀걸이들이 전시되고 있다.

 

 

 

시신의 목 받침대

발 받침대도 있었다.

 

 

수저의 모습은 실용보다 모양에 더 중점을 두었던가 싶기도 .... 

 

 

석 사자상인데 두 사자가 무언가를 받치고 있는 모습이다.

주로 석등을 받치는 기둥 역할을 한다. 어느 사찰 마당에 있었던 석등이었을까.

탑 정원에는 각종 석탑과 석등의 좌대들이 즐비하였다. 

 

역시나 한 때 한 왕조의 도성이었던 곳의 박물관에는 볼 거리들이 많았다.

한국박물관 100 주년 기념으로 각 지방 박물관에는 특별 전시물을 많이 전시하고 있는 중이다.

시간이 촉박하여 찬찬히 살피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다.

 

공주 박물관에 전시된 무령왕릉 발굴품들을 돌아보면서 생각했다.

미륵사지서탑에서 발굴된 '사리장엄구'들로 인하여 다시 세상을 놀라게 한 백제의 문화.

미륵사지서탑에서 나온 '금세사리봉안기'에서 밝힌 '기해년'을 백제 무왕 때가 아닌 무령왕 때의 '기해년'이라고 해도 마땅하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무왕과 무령왕과의 사이 120년의 백제의 불교문화를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백제의 문화 발굴에 대한 과제는 지금부터 여전히 시작인 것 같다.

전북의 도청을 전주시의 삼천을 건넌 서쪽에 자리 잡은 것 같이

백제의 무령왕 시절에 먼 남쪽까지를 생각하여 미륵사 조성을 시작하였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나의 글 '백제의 르네쌍스를 그리다'를 참조하시고 도움 말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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