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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답사, 오목대와 이목대

차보살 다림화 2009. 11. 30. 19:20

 

애틋한 사람과 나란히 걸어가면서 주고받는 말들은 서로의 가슴에 시원한 그늘을 드리워준다. 말과 말이 서로 얽혀 깊은 뿌리를 내리고 꿈틀거리며 튼튼한 줄기를 세운다. 그 줄기에서 무성한 잎들이 뻗고 애틋한 사람과의 추억이 그늘에 모인다. 영원할 거라는 바람을 담은 간절한 침묵의 기도가 그 앞에 있다. 그러나 우리 사는 일이 그렇듯 나란히 걷던 그 사람이 때로는 오래 보이지 않을 때도 있다. 두리번거리며 그 사람을 찾다가 아프게 무릎이 꺾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 사람이 곁에 없는 시간에 가끔 그 그늘에 들면 꿈을 꾸듯 행복에 잠길 수 있다. 행복, 그 아릿한 그리움들.

아주 사소한 상상력이긴 하지만, 어쩌면 우리들이 나란히 걸으며 속삭였던 말들이 작은 언덕을 이루고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져본다. 이 도시에서 그곳은 오목대가 서 있는 언덕이라는 생각. 예전에 내가 무심코 발설해버렸던 그리움의 낱말이랄지 사랑한다는 수줍은 고백들이 그 언덕에 고스란히 모여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아니, 꼭 그것이 사실이 아니어도 나는 그렇게 믿기로 한다. 그 말들의 그늘에 들기 위해 오목대를 오른다.

숲의 허리를 가로질러 놓여 있는 계단을 오르면서 가슴 한켠이 쑥쑥 아려온다. 계단을 놓으면서 잘려나간 나무들과 파헤쳐진 흙더미들이 마치 누군가의 가슴 아픈 사연은 아니었는지. 가끔 찾아와 몰래 그 시절을 그리워하며 눈물 흘렸던 한 남자의 혹은 한 여자의 행복을 헐어내버린 것은 아닌지. 그도 아니라면 새끼손가락 걸며 약속했던 미래의 어느 날을 송두리째 묻어버린 것은 아닌지. 그런 생각들을 하다 보니 오목대 오르는 계단이 팍팍하다. 기실 오목대에 오르기 쉽도록 설치했을 계단이지만 자꾸만 걸음이 무뎌지는 건 무슨 이유일까? 다행히 아직 허물어지지 않고 남아 있는 숲 그늘과 산새들의 보금자리를 위안 삼아본다.

천하를 꿈꾼 곳, 오목대

계단을 다 오르면 넓은 공터 가운데 아담한 비각이 서 있다. 1900년에 세웠다는 비각 안에 서 있는 비석에는 “태조고황제주필유지(太祖高皇帝駐?遺址)”라는 비문이 새겨져 있다. 비문은 고종황제의 친필이다. 비각 뒤로 오목대가 굳건하게 서 있다.

오목대는 태조 이성계가 남원 운봉 황산벌에서 왜구를 물리친 뒤 돌아가는 길에 종친들을 모아 잔치를 베풀었던 곳이다. 이성계는 이 자리에서 중국 한나라를 세운 유방이 불렀다는 ‘대풍가’를 읊었다고 한다.

大風起兮雲飛楊       대풍기혜운비양
威加海內兮歸故鄕   
위가하내혜귀고향
安得猛士兮守四方    안득맹사혜수사방

큰 바람이 일어나서 구름이 날아 오르다
위세가 해내에 떨치고 고향으로 돌아오다
디서 용맹한 무사를 얻어 사방을 지키게 할까

대풍가를 통해 이성계는 흉중에 묻어두었던 천하제패의 꿈을 은연중 드러냈다. 이에 종사관으로 참전했던 정몽주가 격분한 마음에 한달음에 말을 달려 남고산성 만경대에 올라 북쪽 개경을 바라보며 그 심정을 노래로 읊었으니 지금도 만경대에 그 시가 새겨져 있다.

千?岡頭石逕橫 登臨使我不勝情    천인강두석경횡 등임사아불승정
靑山隱約夫餘國 黃葉?紛百濟城   
청산은약부여국 황엽빈분백제성
九月高風愁客子 百年豪氣誤書生   
구월고풍수객자 백년호기오서생
天涯日沒浮雲合 矯首無由望玉京    천애일몰부운합 교수무유망옥경

천길 된 바윗머리 돌길로 돌고 돌아 홀로 다다르니 가슴 메는 시름이어
청산에 깊이 잠겨 맹세하던 부여국은 누른 잎이 휘휘 날려 백제성에 쌓였네
9월 바람은 높아 나그네 시름 깊고 백년의 호탕한 기상 서생은 그르쳤네
하늘가 해는 기울고 뜬구름 마주치는데 열없이 고개 돌려 옥경만 바라보네

이 우국시가 만경대에 각자(刻字)한 시기는 전라도 관찰사 권적(1675-1755)이 임술년인 1742년에 새긴 것이다. 그리고 바로 옆에는 전라도 관찰사를 두 번했던 李書九가 포은시를 차운(次韻)한 시(1820년)가 적혀 있다. 정몽주가 憂國詩를 남긴 지 12년 만에 선죽교에 선혈을 뿌리고 순사(殉死)했으니, 이미 오목대를 뛰쳐나갈 때부터 이성계와 정몽주의 운명이 엇갈렸던 모양이다.

오목대에서 원대한 포부를 밝힌 데에는 어쩌면 전주가 이성계의 모태의 땅이기 때문이리라. 이렇듯 조선 왕조의 모태가 된 전주 땅이지만 48명의 임금 가운데 전주를 방문한 조선 임금은 태조 이성계가 유일하다고 하니 이 또한 기막힌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어쨌거나 오목대는 조선왕조를 세운 전주이씨와 별도로 생각할 수 없는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한때 전동성당의 건립 예정지로 거론되었다가 포기한 것이나, 일제강점기 일본왕(천황)의 권위를 보이고자 했던 신사가 오목대를 피해 다가산으로 옮겨 간 것도 오목대에 대한 전주 사람들의 ‘정신적’ 믿음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전주에서 일어난 조선 왕조가 몰락해갈 무렵 고종황제가 “태조고황제주필유지”라는 비와 비각을 세운 것은 초심으로 돌아가 왕조의 부흥을 꾀해보자는 의미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고종황제의 바람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결국 몰락해버린 이유를 ‘주필(駐?)’에서 찾으면 안 될까? ‘주필’이란 임금이 머무른 장소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직접 전주에 오지도 않았으면서 ‘주필’이라 하였으니 기울어가는 국운을 바로세우기 어려웠을 터이다.

 

목조대왕 구거유지, 이목대

오목대에 올라보면 알겠지만 오목대에서 보면 전주 시가가 한눈에 들어온다. 야트막한 언덕이지만 우뚝 솟은 언덕이기도 한 것이다. 널찍한 마당에 서면 지금도 전장에서 호령하던 이성계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 호령을 뒤로 하고 오목대에서 육교를 건너 70m 위쪽으로 가면 이목대가 있는데 건물이 있는 80m 아래쪽에 비석과 비각을 세웠다. 이 비 속에는 “목조대왕 구거유지”라 새겨져 있는데 이 역시 고종 황제의 친필이다.

목조는 조선조를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고조부로 목조가 어릴 때 이곳에서 진법놀이를 하면서 살았던 유적지로 알려져 있으며, 그러한 내용이 용비어천가 제3장에도 나타나 있다.

(원문)
周國(주국) 大王(대왕)이 ?谷(빈곡)애 사샤 帝業(제업)을 여르시니
리 始祖(시조)ㅣ 慶興(경흥)에 사샤 王業(왕업)을 여르시니

(현대어풀이)
옛날 주나라 대왕이 빈곡에 사시어서 제업을 여시니.
우리 시조가 경흥에 사시어서 왕업을 여시니. 

(해석)
전절 : 주나라가 천하를 통일한 것은 무왕 때 이루어졌지만, 그 제업의 기초는 시조 후직의 12세손 고공단보가 빈곡에서 조상의 업적을 이어받고 덕을 쌓아 백성들이 다 추대했을 때부터이다.

후절 : 목조가 전주에서 살다가 삼척을 거쳐 함경도 덕원으로 옮기니, 170여 호의 백성이 그를 따랐다. 그 후 원나라에 귀화하여 경흥 동쪽으로 이사하였는데, 거기에서 원나라로부터 벼슬을 받아 우리나라 동북면의 민심이 목조께로 돌아가니 조선 왕업의 기초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용비어천가에서는 목조가 당시의 전주부사와의 불화로 이곳에서 함경도로 옮겨간 것이 이성계로 하여금 조선조를 건국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으므로, 이를 하늘의 뜻이라고 여겼다 한다.

그런데 목조가 전주를 떠나게 된 연유가 재미있다. 당시 전주에는 안렴사(按廉使)와 산성별감(山城別監), 주관(州官) 등 고급 관리가 있었다. 그런데 때마침 전주에 산성별감이 새로 부임하게 되자, 주관은 바쳐야 할 관기(官妓)를 목조대왕께 청탁하였으나 거절당했다. 그러자 당시는 사병(私兵)을 가진 무신들이 전횡하던 시대인지라, 주관과 안렴사는 목조대왕에게 관의 명을 거절했다는 혐의를 씌워 목조대왕 일족에 대항하여 군사를 보내기로 책동하였다. 이것이 목조대왕 일족의 전주 퇴거 실마리가 되는 것이다.

아무튼 오목대와 이목대를 둘러보다 보면 전주 땅이 그리 만만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어찌되었건 오백 여년을 유지해 온 왕조의 모태가 된 땅이지 않은가! 그래서인지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의 정신에는 굳은 심지가 콕 박혀 있는 것 같다. 아무리 흔들어도 쉽게 뿌리 뽑히지 않는 정신의 심지가.

오목대가 민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그 소리들을 차곡차곡 쌓아놓는다는 느낌이 든다. 너와 나의 속삭임이 쌓이고, 우리의 울분이 쌓이고, 소리 없는 통곡이 쌓인다. 그래서 오목대에 자란 나무 한그루, 풀 한 포기가 전주 사람들의 말로 엮인 것만 같다. 오래 숲을 바라보면 그 숲이 도란거리는 목소리가 들린다. 심지 깊은 전주 사람들의 애틋한 사연의 목소리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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