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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답사, 향교

차보살 다림화 2009. 12. 1. 01:25

 2009년 11월 어느 날, 전주 향교에서

 

 

 

 

 

 

 

 

 

 

 

 

 

 

 

 

 

 

인의예지로 인간의 심성을 세우고 하늘을 덮어라.


전주천을 따라 늘어선 버드나무 둥치를 하나씩 만지면서 한벽당 방향으로 오른다.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버드나무 가지들이 허공에 무슨 글씨를 쓰는 듯 휘어진다. 버드나무 둥치의 굵기로 보아 붓놀림의 수련이 만만치 않은 세월이란 걸 안다. 예사롭지 않은 바람의 문장을 그러나 해독할 길은 없다. 실재의 너머에 있는 궁극의 경지를 들여다 볼 눈을 갖지 못한 탓이리라.

그렇게 걷다보면 한벽당 못 미친 곳에서 우뚝 솟은 홍살문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붉은 기둥을 높이 세우고 마치 허공의 정곡을 찔러댈 듯 삐죽삐죽 솟구친 창살들. 그 가운데 삼태극의 문양이 선명하다. 사소한 잘잘못까지도 가만두지 않겠다는 듯 홍살문의 기세가 무섭기조차 하다.

그 홍살문 너머로 보이는 만화루(萬化樓). 1987년, 원래 있던 지경문이 철거된 자리에 세워진 만화루는 꼬장꼬장한 훈장님처럼 범접치 못할 위세를 갖추었다. 출입하는 이들의 허물을 하나씩 들추어내 당장이라도 종아리를 후려칠 것 같은 기세. 그러나 한편으로는 깊은 속정을 휘우듬한 처마 곡선에서 읽어낼 수 있다. 지친 바람이나 산새들에게 그 넓은 어깨를 빌려주기도 하는 세심한 배려와, 때로는 무거운 허공을 온몸으로 지탱해내는 우직함 앞에서 두려움은 씻은 듯 사라진다. 출입하는 이들의 발길에 닳고 닳아 처마선을 닮아가는 문턱도 만화루의 아량을 짐작하게 한다.

 

배향과 강학의 공간, 향교

만화루 2층에 오르면 왠지 모를 뿌듯함이 일어난다. 인간의 욕망이 높은 곳을 지향하기 마련이어서 저절로 어떤 성취감을 맛보는 것일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사실은 2층 높이가 현대인들의 시선으로는 높아 보일 리 없다. 수십 층 높은 곳도 별 어려움 없이 오르내리는 세상이니 그깟 계단 몇 개 밟고 올랐다고 해서 무슨 대수랴. 그러나 그렇지만은 않다. 만화루 2층에 오르면 이성적 사고로는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영혼의 상승을 깨닫게 된다. 그 연유를 찾아가는 과정이 향교를 둘러보는 내내 계속 된다.

만화루를 내려가 정면을 바라보면 보통 사람의 허리 높이까지 단을 올리고 그 위에 대성전이 앉아 있다. 대성전은 전주시 유형문화재 제7호로 지정되어 있다. 향교에서 대성전은 사찰의 대웅전처럼 중심이 되는 곳이다. 대성전을 알기 위해서는 우선 향교에 대해 간단하게나마 이해할 필요가 있다.

향교란 공자를 비롯한 여러 성현께 제사 지내고, 지방 백성들의 교육과 교화를 담당했던 국립교육기관을 가리킨다. 현재 국공립 중고등학교에 해당한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본다면 과거에 향교를 드나들면서 공부했던 유생들이 현재 중고등학교 학생들이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학문적인 경지나 삶의 자세는 고금이 천양지차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전주향교는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고려 공민왕 3년(1354)에 처음 지었다고 전한다. 전주향교의 위치는 원래 지금의 경기전 북편에 있었다. 서거정이 지은 『부학기』에 따르면 원래 향교가 치소 내에 있었는데, 경기전이 들어서면서 향교와 태조의 어진을 모신 진전이 너무 가까워지게 되었다. 이에 유생들의 글 읽는 소리 때문에 태조 영령이 편히 쉴 수 없다고 하여 향교를 지금의 신흥중고등학교 부근으로 옮기게 하였다. 그러던 것이 선조 36년(1603년)에 순찰사 장만과 유림들이 힘을 합쳐 지금의 장소로 이전하였는데 여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원래 좌묘우사(左廟右社)라 하여 객사 남쪽 좌측에 문묘(공자의 사당)를, 우측에 사직단을 배치하는 법인데 향교의 위치가 이 법도에 어긋났기 때문이었다.

만화루에서 대성전까지 유생들의 성품만큼이나 곧은 돌길이 놓여 있다. 이 좌우에 은행나무 두 그루가 양편에 서 있다. 향교 뜰에 은행나무를 심은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은행나무는 벌레를 타지 않는다. 그래서 향교에서 공부하는 유생들도 건전하게 자라 심지 곧은 사람이 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교육의 시작과 끝에 인간이 있다

대성전은 선조 때 지은 건물로 순종 융희 1년(1907)에 당시 군수 이중익이 수리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성전에는 서울 성균관과 같이 공자를 중심으로 4성인과 10철학자, 송나라의 6현인을 모시고 있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맞배지붕은 지붕 양 면을 사람 인(人)자 모양으로 하늘이 지상의 인간들을 감싸 안는 형상이다. 그 모양이 너무 펼쳐지면 엉성하여 제대로 품을 수 없고 너무 안으로 모여들어도 협소하여 넉넉하지 못하다. 대성전의 지붕은 인간 삶의 숨결을 제대로 파고들듯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미덕을 갖추었다. 이러한 배치를 통해서도 우리 선조들의 철학을 가늠해볼 수 있다. 모든 교육의 근본이 인간이며 그 끝도 인간이 중심에 선다는 뜻일 것이다. 대성전은 앞면 3칸 모두 널문을 달았으며 기둥은 원기둥을 사용하였다.

대성전 뒤편은 명륜당이다. 대성전이 성현들의 위폐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배향(配享) 공간이라면, 명륜당은 유생들을 가르치는 강학(講學) 공간이다. 일반적인 향교의 배치는 이처럼 배향 공간이 전면에 오고 강학 공간이 후면에 위치하게 된다. 그러나 언덕에 향교가 위치할 경우에는 그 반대로 배치되는데 이러한 건물 배치법은 향교에서 배향 공간이 강학 공간보다 더 격이 높았음을 암시한다.

명륜당 동서 양편에도 동재와 서재가 있다. 이곳은 기숙사였는데 양반의 자식들은 동재에, 평민들의 자식들은 서재에 기거했다. 당시 사회구조가 철저한 신분제였음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전주향교의 정원은 90명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실제로는 정원 외의 유생들이 많았다. 그런데 그 이유가 군역을 피하려는 목적이 가장 많았다고 한다. 향교에 적을 두게 되면 군역이 면제되었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군대 문제가 젊은 청년들의 가장 큰 난제인 모양이다. 언제쯤이나 그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으려나!

명륜당 앞뜰을 거닐다보면 어디선가 카랑카랑한 목청이 들려오는 것도 같다. 먼 과거의 시간 속에서 불쑥 나타나 인의예지(仁義禮智)를 강론하는 맑은 목소리. 눈을 감고 들으면 온갖 부정과 사악함, 그리고 게으름으로 가득한 나를 돌아볼 수 있다. 발길에 걷어차이는 돌멩이 하나에서부터 저절로 떨어져 내리는 나뭇잎, 그리고 시시각각 그 모양을 달리하며 몸을 움직이는 처마선의 그림자들로부터 마음의 수련법을 배울 수 있다. 잠시 허튼 생각의 정수리 위로 나무 그림자의 회초리가 호되게 내려치며 욕망의 부질없음을 명쾌하게 보여주는 공간, 그곳이 바로 명륜당이다.

천천히,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향교 이곳저곳을 거닐어 본다. 이 시대의 향교란 궤짝 안에 넣어두고 가끔 끄집어내보는 골동품이거나 눈요깃감 유적지로 치부하기에는 그것이 전하는 의미의 폭과 깊이가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넓고 깊다. 수천 년 전의 사상이 여전히 효용이 있고, 오히려 더욱 간절하게 소용이 된다는 것은 그만큼 보편적이라는 얘기다. 그런데 잠시 그것을 망각하고 살게 된다. 대성전이나 명륜당 지붕을 올린 낱낱의 기와는 하늘을 가릴 수 없다. 그러나 그것들이 가지런하게 모이고 서로의 틈을 메워주면서 비로소 하늘을 가리고 인간을 너그럽게 품어 준다.

오늘, 우리들이 사는 세상 어딘가에는 천둥이 치고 비바람이 몰아치고 있을 것이다. 또 누군가의 마음속에는 불의와 배신, 협잡의 기운이 꿈틀거리며 일어나고 있을 것이다. 그것들을 따뜻하고 넉넉하게 보듬어줄 수 있는 지붕이 필요하다. 그 지붕은 인의예지(仁義禮智)의 마음가짐이 기왓장처럼 차곡차곡 쌓이고 다져져서 빈틈이 없을 때에만 가능하다.

그런 생각들을 하며 향교를 돌아 나오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불러 세운다. 돌아면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제는 알 수 있다. 400여 년 이상 향교 뜰을 지켜온 은행나무들이 우뚝 서서 내려다본다. 아니, 은행나무에게는 내 마음의 모든 것이 보일 것이다. 그리하여 들끓어 올랐던 온갖 욕망의 찌꺼기들을 버리게 만든다.

은행나무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여 알겠다는 시늉을 해 보인다. 아니 시늉이 아니라 정말 그렇게 하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향교를 나서는 몸이 한결 가벼워졌다. 버리고 나면 이렇듯 가벼운 것을

인의예지로 인간의 심성을 세우고 하늘을 덮어라.


전주천을 따라 늘어선 버드나무 둥치를 하나씩 만지면서 한벽당 방향으로 오른다.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버드나무 가지들이 허공에 무슨 글씨를 쓰는 듯 휘어진다. 버드나무 둥치의 굵기로 보아 붓놀림의 수련이 만만치 않은 세월이란 걸 안다. 예사롭지 않은 바람의 문장을 그러나 해독할 길은 없다. 실재의 너머에 있는 궁극의 경지를 들여다 볼 눈을 갖지 못한 탓이리라.

그렇게 걷다보면 한벽당 못 미친 곳에서 우뚝 솟은 홍살문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붉은 기둥을 높이 세우고 마치 허공의 정곡을 찔러댈 듯 삐죽삐죽 솟구친 창살들. 그 가운데 삼태극의 문양이 선명하다. 사소한 잘잘못까지도 가만두지 않겠다는 듯 홍살문의 기세가 무섭기조차 하다.

그 홍살문 너머로 보이는 만화루(萬化樓). 1987년, 원래 있던 지경문이 철거된 자리에 세워진 만화루는 꼬장꼬장한 훈장님처럼 범접치 못할 위세를 갖추었다. 출입하는 이들의 허물을 하나씩 들추어내 당장이라도 종아리를 후려칠 것 같은 기세. 그러나 한편으로는 깊은 속정을 휘우듬한 처마 곡선에서 읽어낼 수 있다. 지친 바람이나 산새들에게 그 넓은 어깨를 빌려주기도 하는 세심한 배려와, 때로는 무거운 허공을 온몸으로 지탱해내는 우직함 앞에서 두려움은 씻은 듯 사라진다. 출입하는 이들의 발길에 닳고 닳아 처마선을 닮아가는 문턱도 만화루의 아량을 짐작하게 한다.

 

배향과 강학의 공간, 향교

만화루 2층에 오르면 왠지 모를 뿌듯함이 일어난다. 인간의 욕망이 높은 곳을 지향하기 마련이어서 저절로 어떤 성취감을 맛보는 것일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사실은 2층 높이가 현대인들의 시선으로는 높아 보일 리 없다. 수십 층 높은 곳도 별 어려움 없이 오르내리는 세상이니 그깟 계단 몇 개 밟고 올랐다고 해서 무슨 대수랴. 그러나 그렇지만은 않다. 만화루 2층에 오르면 이성적 사고로는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영혼의 상승을 깨닫게 된다. 그 연유를 찾아가는 과정이 향교를 둘러보는 내내 계속 된다.

만화루를 내려가 정면을 바라보면 보통 사람의 허리 높이까지 단을 올리고 그 위에 대성전이 앉아 있다. 대성전은 전주시 유형문화재 제7호로 지정되어 있다. 향교에서 대성전은 사찰의 대웅전처럼 중심이 되는 곳이다. 대성전을 알기 위해서는 우선 향교에 대해 간단하게나마 이해할 필요가 있다.

향교란 공자를 비롯한 여러 성현께 제사 지내고, 지방 백성들의 교육과 교화를 담당했던 국립교육기관을 가리킨다. 현재 국공립 중고등학교에 해당한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본다면 과거에 향교를 드나들면서 공부했던 유생들이 현재 중고등학교 학생들이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학문적인 경지나 삶의 자세는 고금이 천양지차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전주향교는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고려 공민왕 3년(1354)에 처음 지었다고 전한다. 전주향교의 위치는 원래 지금의 경기전 북편에 있었다. 서거정이 지은 『부학기』에 따르면 원래 향교가 치소 내에 있었는데, 경기전이 들어서면서 향교와 태조의 어진을 모신 진전이 너무 가까워지게 되었다. 이에 유생들의 글 읽는 소리 때문에 태조 영령이 편히 쉴 수 없다고 하여 향교를 지금의 신흥중고등학교 부근으로 옮기게 하였다. 그러던 것이 선조 36년(1603년)에 순찰사 장만과 유림들이 힘을 합쳐 지금의 장소로 이전하였는데 여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원래 좌묘우사(左廟右社)라 하여 객사 남쪽 좌측에 문묘(공자의 사당)를, 우측에 사직단을 배치하는 법인데 향교의 위치가 이 법도에 어긋났기 때문이었다.

만화루에서 대성전까지 유생들의 성품만큼이나 곧은 돌길이 놓여 있다. 이 좌우에 은행나무 두 그루가 양편에 서 있다. 향교 뜰에 은행나무를 심은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은행나무는 벌레를 타지 않는다. 그래서 향교에서 공부하는 유생들도 건전하게 자라 심지 곧은 사람이 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교육의 시작과 끝에 인간이 있다

대성전은 선조 때 지은 건물로 순종 융희 1년(1907)에 당시 군수 이중익이 수리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성전에는 서울 성균관과 같이 공자를 중심으로 4성인과 10철학자, 송나라의 6현인을 모시고 있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맞배지붕은 지붕 양 면을 사람 인(人)자 모양으로 하늘이 지상의 인간들을 감싸 안는 형상이다. 그 모양이 너무 펼쳐지면 엉성하여 제대로 품을 수 없고 너무 안으로 모여들어도 협소하여 넉넉하지 못하다. 대성전의 지붕은 인간 삶의 숨결을 제대로 파고들듯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미덕을 갖추었다. 이러한 배치를 통해서도 우리 선조들의 철학을 가늠해볼 수 있다. 모든 교육의 근본이 인간이며 그 끝도 인간이 중심에 선다는 뜻일 것이다. 대성전은 앞면 3칸 모두 널문을 달았으며 기둥은 원기둥을 사용하였다.

대성전 뒤편은 명륜당이다. 대성전이 성현들의 위폐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배향(配享) 공간이라면, 명륜당은 유생들을 가르치는 강학(講學) 공간이다. 일반적인 향교의 배치는 이처럼 배향 공간이 전면에 오고 강학 공간이 후면에 위치하게 된다. 그러나 언덕에 향교가 위치할 경우에는 그 반대로 배치되는데 이러한 건물 배치법은 향교에서 배향 공간이 강학 공간보다 더 격이 높았음을 암시한다.

명륜당 동서 양편에도 동재와 서재가 있다. 이곳은 기숙사였는데 양반의 자식들은 동재에, 평민들의 자식들은 서재에 기거했다. 당시 사회구조가 철저한 신분제였음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전주향교의 정원은 90명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실제로는 정원 외의 유생들이 많았다. 그런데 그 이유가 군역을 피하려는 목적이 가장 많았다고 한다. 향교에 적을 두게 되면 군역이 면제되었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군대 문제가 젊은 청년들의 가장 큰 난제인 모양이다. 언제쯤이나 그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으려나!

명륜당 앞뜰을 거닐다보면 어디선가 카랑카랑한 목청이 들려오는 것도 같다. 먼 과거의 시간 속에서 불쑥 나타나 인의예지(仁義禮智)를 강론하는 맑은 목소리. 눈을 감고 들으면 온갖 부정과 사악함, 그리고 게으름으로 가득한 나를 돌아볼 수 있다. 발길에 걷어차이는 돌멩이 하나에서부터 저절로 떨어져 내리는 나뭇잎, 그리고 시시각각 그 모양을 달리하며 몸을 움직이는 처마선의 그림자들로부터 마음의 수련법을 배울 수 있다. 잠시 허튼 생각의 정수리 위로 나무 그림자의 회초리가 호되게 내려치며 욕망의 부질없음을 명쾌하게 보여주는 공간, 그곳이 바로 명륜당이다.

천천히,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향교 이곳저곳을 거닐어 본다. 이 시대의 향교란 궤짝 안에 넣어두고 가끔 끄집어내보는 골동품이거나 눈요깃감 유적지로 치부하기에는 그것이 전하는 의미의 폭과 깊이가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넓고 깊다. 수천 년 전의 사상이 여전히 효용이 있고, 오히려 더욱 간절하게 소용이 된다는 것은 그만큼 보편적이라는 얘기다. 그런데 잠시 그것을 망각하고 살게 된다. 대성전이나 명륜당 지붕을 올린 낱낱의 기와는 하늘을 가릴 수 없다. 그러나 그것들이 가지런하게 모이고 서로의 틈을 메워주면서 비로소 하늘을 가리고 인간을 너그럽게 품어 준다.

오늘, 우리들이 사는 세상 어딘가에는 천둥이 치고 비바람이 몰아치고 있을 것이다. 또 누군가의 마음속에는 불의와 배신, 협잡의 기운이 꿈틀거리며 일어나고 있을 것이다. 그것들을 따뜻하고 넉넉하게 보듬어줄 수 있는 지붕이 필요하다. 그 지붕은 인의예지(仁義禮智)의 마음가짐이 기왓장처럼 차곡차곡 쌓이고 다져져서 빈틈이 없을 때에만 가능하다.

그런 생각들을 하며 향교를 돌아 나오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불러 세운다. 돌아면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제는 알 수 있다. 400여 년 이상 향교 뜰을 지켜온 은행나무들이 우뚝 서서 내려다본다. 아니, 은행나무에게는 내 마음의 모든 것이 보일 것이다. 그리하여 들끓어 올랐던 온갖 욕망의 찌꺼기들을 버리게 만든다.

은행나무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여 알겠다는 시늉을 해 보인다. 아니 시늉이 아니라 정말 그렇게 하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향교를 나서는 몸이 한결 가벼워졌다. 버리고 나면 이렇듯 가벼운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