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문화답사 - 다가공원, 천양정, 진북사
세상사 모든 것은 관심이 있어야 제대로 보이는 법이다. 제아무리 눈앞에 대들보처럼 버티고 섰더라도 관심이 없으면 그건 한낱 헛것에 불과하다. 여기서 觀心이란 사물의 마음, 즉 본질을 바라본다는 뜻일 것이다. 또한 關心이란 마음이 서로 관계 맺고 소통할 수 있는 그런 바라봄일 것이다. 하지만 관심이 없으니 지척에 두고도 가보지 못한 곳이 있다. 아니, 가보고자 하였으나 선뜻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그저 먼발치에서 곁눈질로 훔쳐보면서 그 속사정에 대한 추측과 상상으로 속을 태우기만 했다. 오히려 그 모양새가 한층 간절하였다. 그리하여 마음도 넉넉한 어느 하루 탁, 하니 날을 잡아 벼르고 별렀던 여정에 나섰다.
전주 관통로를 따라 걷다가 다가교를 건너면 곧장 왼편에 다가공원이 나온다. 수령이 수백 년씩 되는 우람한 느티나무가 짙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어서 도심 속의 여유로운 휴식처인 다가공원에는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몇 가지 소중한 것들이 있다.
전주천을 끼고 산허리에 펑퍼짐하게 자리 잡은 다가공원(多佳公園). 지금은 남아있지 않지만 과거의 다가산에는 이팝나무가 군락을 이루었다. 立夏에 피는 꽃이라 해서 立夏木이라 불리는 이 꽃은 해마다 5월경이면 흐드러지게 피어 온 산이 하얗게 물들였다. 옛날 전주 사람들은 그 모습을 두고 다가사후(多佳射帿)라 하여 전주팔경의 하나로 꼽기도 했다. 다가사후란 다가천변 물이랑을 끼고 한 무리의 백설같이 날리는 이팝나무 꽃 속에 과녁판을 겨누는 한량들의 풍경을 말한 것이다.
시위를 떠난 화살이 허공을 가르며 경쾌하게 날아가 과녁을 명중하는 곳은 바로 천양정(穿楊亭). 조선조 숙종 28년에 전주의 유지들이 뜻을 모아 다가천 옆에다 정자 네 칸을 마련하고 천양정이라고 이름 지었다. 과녁판은 서북방인 황학대 밑에다 세웠는데 그 후 9년이 지나 대홍수로 떠내려가고 다시 다가산 바로 밑에 세우니 산 이름을 따라 다가정이라 했다. 그 후 57년이 지난 정조 2년에 이르러 앞쪽으로 정원을 만들었고 황무지를 일구어 활터를 더 넓혔다. 또 순조 30년 8월에는 다가정 구내에 일사정을 건립하고 과녁판을 남쪽에 설치했다. 그때 이름을 다시 천양정으로 부르게 됐다. 이 후 이곳은 노인들이 사용하고 북향으로 활을 쏘는 다가정은 장년들의 활터로 사용하게 되었다. 천양(穿楊)이라 함은 버들잎을 화살로 꿰뚫는다는 뜻으로 양유기(養由基)가 백보 밖의 버들잎을 연이어 꿰었다는 고사에서 활을 잘 쏘는 것을 가리키는 말로 굳었다.
양유기는 중국에서 손꼽히는 활의 명수로 춘추시대 초나라 사람이었다. 사기(史記) 주기(周紀)에는 양유기에 관한 이야기가 다음과 같이 전한다.
‘초나라 장왕(莊王) 때 수상 투월초가 반란을 일으켰다. 투월초의 활솜씨는 누구나 무서워하는 것이었는데, 왕이 이끄는 군대의 하급 장교였던 양유기(養由基)가 나서서 투월초와 활쏘기로 대결해서 그를 죽였다. 그로 인해 반란군은 쉽게 무너졌다. 장공은 양유기가 재주만 믿고 날뛴다고 주의를 주고 활을 함부로 쏘지 못하게 했으나 결국 후에 그는 화살에 맞아 죽었다. 양유기는 버드나무 잎을 백 걸음 떨어진 곳에서 활을 쏘면 백 번 쏘아서 백 번 다 맞혔다고 한다.’
백발백중(百發百中)이라는 고사도 여기에서 나왔다고 하니 천양정이란 그런 명궁을 배출할 만한 훌륭한 전통을 갖춘 활터라는 뜻이다. 그러나 안내판에는 천양이라고 하는 이름이 왜적 아지발도의 투구를 맞춰 떨어뜨릴 만큼 신묘한 활 솜씨로 이름이 높았던 태조 이성계의 고사에서 전한다고 적혀 있다. 하지만 천양이라는 이름이 어디에서 유래했든지 이미 그 이름만으로도 천양정에 모인 궁사들의 경지를 짐작할 수 있다.
천양정에는 마침 몇몇의 궁사들이 시위를 당기고 있었다. 사대에 나란히 선 궁사들은 힘껏 활시위를 당겨 하나의 정점을 겨냥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 정점은 과녁이 아니었다. 과녁 너머 허공의 한 지점에 궁사들의 날카로운 시선이 걸려 있었다. 팽팽한 긴장과 무호흡의 호흡으로 정지한 찰라 비로소 탁, 하는 소리와 함께 화살이 비상했다. 순서를 두어 차례로 시위를 놓은 궁사들은 그러나 서로 경쟁하지 않았다. 궁사들이 이겨내야 하는 경쟁자는 옆 사대에 선 궁사가 아니라 자신의 마음속에서 소용돌이치는 무분별한 욕망이었다. 그 욕망을 평정의 심정으로 가라앉혀야 비로소 시위를 떠난 화살이 허공에 획을 그으며 세상을 관통할 수 있었다.
천양정에서 나오면 다가산으로 오르는 언덕에 관찰사 원인손 불망비 외 26기의 불망비와 선정비가 있다. 크기와 모양은 각각 다르지만 비문에 새겨진 이름들은 하나의 공통점이 있을 것이다. 바로 전주와 전라도 사람들에게 각별한 애정을 가졌던 사람들이라고 하는.
이제 다가공원 정상으로 오른다. 지금은 그저 묵묵히 전주 시내를 굽어보고 있지만 전주 사람들에게 다가산은 ‘눈물’ 같은 공간이다. 일제 강점기에 다가산 정상에 ‘신사’가 세워졌기 때문이다. 지금 다가산 정산으로 오르는 그 길은 그때 닦아놓은 길이다. 당시 일제는 이 길을 ‘참궁로(參宮路)’라고 하였다. 즉 ‘신사에 참배하러 가는 길’이라는 의미인데 다가교를 ‘신사에 참배하기 위해 건너는 다리’라는 의미의 ‘대궁교(大宮橋)’라 이름 지은 것과 궤를 같이 한다고 할 수 있다.
전주에 신사가 세워진 것은 1914년 10월이었다. 당시 이두황을 비롯한 지역 유지들에게 전주신사 및 공원건설 명목으로 9천여 원을 거출하였고, 다가산 부근 1만 8천여 평의 땅을 고사동의 이건호 외 3명이 기부하여 신사를 건립하였다.
신사 참배를 위해 닦아놓은 길을 걷다보니 저절로 울분이 치솟았다. 어찌하여 우리는 치욕의 역사를 청산하지 못하였는가. 그러나 그런 울분은 공원 정상에 오르자 서서히 누그러졌다.
공원 정상에 오르면 가장 먼저 반기는 것이 시조 문학과 국문학의 거목인 가람 이병기 시인의 시비이다.
그대로 괴로운 숨 지고 이어 가랴하니
좁은 가슴 안에 나날이 돋는 시름
회도는 실꾸리 같이 감기기만 하여라
아아 슬프단 말 차라리 말을 마라
불도 아니고 돌도 또한 아닌 몸이
웃음을 잊어버리고 눈물마자 모르겠다
쌀쌀한 되바람이 이따금 불어 온다
실낱 만치도 볕은 아니 비쳐 든다
친구들 외로히 앉어 못내 초조 하노라
- 이병기, 「시름」
난초의 시인으로 잘 알려진 가람 선생은 1891년 익산에서 태어났다. 1910년 전주공립보통학교를 거쳐, 1913년 관립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하였는데 재학중인 1912년 조선어강습원에서 주시경(周時經)으로부터 조선어문법을 배웠다. 이 무렵부터 가람 선생은 국어국문학 및 국사에 관한 문헌을 수집하는 한편, 시조를 중심으로 시가문학을 연구하고 창작하였다.
1930년 조선어철자법 제정위원이 되었고, 연희전문학교·보성전문학교의 강사를 겸하면서 조선 문학을 강의하다가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이후 전북대학교 문리대학장을 지내다 1956년 정년퇴임하고 1968년 돌아가셨다.
일제 강점기에 조선어를 연구하고 조선 문학을 강의한 가람 선생의 시비가 다가공원에 세워진 것은 어쩌면 운명인지도 모른다. 일제의 ‘신사’를 허물어낸 자리에 조선혼을 새겨 넣는 것은 당연한 역사의 순리다. 그렇게 생각하니 정상에 우뚝 솟은 호국영령비의 존재감이 한층 묵직하게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