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일기

도솔암 가는 길

차보살 다림화 2009. 12. 3. 16:26

 고창 선운산 도솔암 가는 길

 

선운산 중턱, 도솔암이 있는 칠송대라는 암봉의 남쪽 벼랑에는 거대한 여래상이 새겨져 있다. 40미터가 넘는 깎아지른 암벽에 새겨져 있는 이 암각 여래상은 그 위용이 장대하기 그지없다. 양식으로 보아 고려시대 불상인 것이 틀림없다. 사적기에 의하면 고려 충숙왕 때 효정선사에 의해 선운사가 크게 중수됐다고 하는데 바로 그때 제작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도솔암 오른 는 길에는 진흥굴이 있다.  (최근 선덕여왕 드라마의 한 장면을 여기에서 촬영했다. )

진흥왕의 설화는 선운사에서 도솔암으로 가는 길가에 있는 진흥굴과 연결된다. 진흥왕은 왕위를 버리고 왕비 도솔과 공주 중애를 데리고 이 천연동굴에서 수도하였는데 어느날 그의 꿈에 미륵삼존이 바위를 가르고 나타났다고 해서 이 굴을 열석굴裂石窟이라 이름지었다는 것이다.

선운사 창건설화는 바로 이것을 검단스님 얘기와 연결시켜 만든 것이다. 경주나 개성이 아니라 지방에 세워진 절들은 그 창건설화의 주인공이 의상,원효,자장.진표 등 신라의 스님이며, 9세기 이후가 되면 흔히는 도선국사를 창건자로 삼는다. 그러나 백제의 스님을 내세운 예는 호남땅에서도 드물다. 그 이유는 통일신라 시대는 말한 것도 없고 고려시대에조차 백제의 전통을 잇는다는 것 자체를 불가능하게 했던 시대적 분위기가 있었던 탓이다. 다시 말해서 백제의 고찰이고 검단선사가 창건했다고 해도 좋을 것을 굳이 진흥황과 연결시켜야 권위를 세울 수 있고 보호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호남 사람들이 그때도 그렇게 당했던 상흔이 여기에 이렇게 남아 있는 것이다.

 

 

 

 

 

 

 도솔암 석가여래상/배꼽의 비결로 더 유명해진 고려시대 마애불이다. 칠송대 양옆에는 멋들어진

소나무 한 쌍이 마치 협시보살처럼 자리하고 있어서 더욱 멋지다.

 

이 석가여래상은 결코 원만한 인상이거나 부드러운 미소를 띤 이상적인 인간상을 반영하고 있지 않다. 반대로 우람하고 도발적인 인상에다 젊고 능력있는 개성을 보여준다. 이 점은 하대신라 이래로 지방의 호족들이 발원한 부처님상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턱징이다. 곧 호족들의 자화상적 이미지가 거기에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이 불상을 새기는 작업은 아마도 대역사였을 것이다. 여기에 동원된 인원과 장비는 엄청난 것이었음에 틀림없고 제작 기간도 상당히 길었을 것이다. 더욱이 여래상 머리 위에는 닫집(누각 모양의 보호각)까지 지었었다. 지금 여래상 위쪽에는 군데군데 구멍이 나 있고 두 군에 바위구멍에는 부러진 나무가 박혀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닫집이 무너진 흔적이다. 기록에는 인조 26년(1648)에 붕괴되었다고 한다.

 

 복장 감실과 동학군의 비결

이 암각여래상의 배꼽(정확히는 명치) 부위에는 네모난 서랍이 파여 있다. 이것은 부처님을 봉안할 때 복장伏藏하는 감실이다. 여기에는 불경이나 불화 그리고 시주자의 이름 등 조성내력이 기록된 문서가 들어가는 것이 보통이다. 그리고는 세월이 많이 흘러갔다. 불교가 배척받는 긴 세월 동안 복장을 한 감실의 내력을 기억하는 사람이 없어지고 기괴한 전설이 하나 생겼다. 이 부처님의 배꼽 속에는 신기한 비결이 들어 있어서 그 비결이 나오는 날 항양이 망한다는 유언비어가 널리 퍼지게 된 것이다. 이른바 갑오농민전쟁의 '석불비결'로 알려진 이 이야기는 송기숙의 소설 <녹두장군>에도 나오는데, 그 원전은 이 사건 관련자의 한 사람인 오지영의 <동학사>에 실려 있다.

 

 

 마애불을 뒤로 돌면 등산로가 이어진다. 차밭도 조성되어

초겨울의 차꽃이 드문드문 피어 있다.

 

 

 

 

 

 

'영상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경주 기림사  (0) 2009.12.03
양산 통도사  (0) 2009.12.03
선운산 계곡의 고운 단풍  (0) 2009.12.03
진안 마이산에서, 늦가을에 2009  (0) 2009.11.17
노송천을 돌려다오  (0) 2009.1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