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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답사, 경기전

차보살 다림화 2009. 12. 7. 18:42
전주 경기전
 
 
 
 
 

길은 움직임의 공간이다. 길은 A지점에서 A'지점으로 이동하는 과정이면서 동시에 두 지점의 간격을 말해준다. 우리는 그 길 위에서 끊임없이 몸을 움직여 어딘가로 이동한다. 지금 상태에서 지금 상태가 아닌 새로운 상태로의 변화가 길에는 있다.

길에는 머무름도 또한 있다. 마주오던 누군가와 잠깐 서서 이야기를 나누는 곳이 길이다. 고단한 여정에 잠시 퍼질러 앉아 다리품을 쉴 수 있는 곳도 길 아닌 곳이 없다. 길가 나무 그늘에 앉아 있으면 저절로 바람 한 줄기가 몸을 휘감고 돈다. 잠깐 그곳에 눌러앉고 싶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앉은 자리를 탈탈 털고 일어나기도 한다. 왜냐하면……그곳은 길이기 때문이다.

전주 태조로(太祖路)는 그리 길지 않고 복잡하지도 않은 길이다. 맘 먹고 걸으면 십여 분만에 그 끝을 찍을 수 있을 만큼 짧은 길이다. 하지만 그 안에는 기억만으로 살아가는 종족이 있다.

이 계절의 한낮, 한 무리의 관광객들이 경기전 앞에 모여 있는 풍광은 찬란하다. 목소리에는 생기가 넘치고 차림새도 화려하다. 그들은 바닥에 깔려있는 돌들을 깨부술 만큼 힘 있게 걷는다. 하지만 그들의 배경으로 앉아 있는 사람들이 아프게 눈을 찔러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한때 그들도 찬란했던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종아리는 팽팽한 긴장감으로 넘쳐흐르고 목청이 먼 산자락까지 울림을 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도 이제 세월의 끝자락까지 와 버렸다. 이를테면 그들은 길 끝에 매달려 있는 형국이다. 소멸해가는 종족…….

길 끝에 매달린 사람들은 길에 얽매이지 않는 법. 태조로의 시간은 다른 곳의 시간과 다른 속도로 흘러간다. 관광객들의 발길이 수십 번을 지나가도 태조로는 여전히 오후의 어느 점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은행나무 그늘에 모여 장기를 두거나 그 근처를 거닐면서 소일하는 사람들은 태조로의 기억이다. 태조로에서는 시간이 흘러가지 않는다. 다만 소멸해갈 뿐.

계절을 즐기는 관광객들은 볕에 잠시 머물다 어딘가로 흘러간다. 그러나 배경으로 머문 종족들은 저절로 소멸해가고 있다. 짙었던 나무그늘과 함께.

태조로에 가시거들랑 잠깐이라도 나무 그늘에 들어보라! 운이 좋다면 낯선 기억 하나쯤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을 주머니나 가방에 담아가지는 말지어다. 길에 서서 길을 걷는 우리에게 길의 기억을 가로챌 권리는 없다. 다만, 길의 기억을 심장에 새겨둘 일이다. 우리 스스로 길 끝에 매달려 소멸해갈 때까지는.

이제 탈탈 털고 일어나 또 다시 길을 가야 할 시간이다. 그러나 어찌 경기전 뜨락을 외면할 수 있으랴.

 

지차개하마 잡인무득입

태조로에서 경기전 문 앞으로 걸음을 옮기면 우선 하마비를 만나게 된다. “지차개하마 잡인무득입(至此皆下馬 雜人毋得入)”이라고 새겨진 풍상에 닳은 비석. 그 앞에서는 계급의 높고 낮음이나 신분의 귀천을 떠나 모두 말에서 내리고, 아울러 경기전 내부로는 잡인들의 출입을 금한다는 뜻이리라. 눈썰미가 제법 있는 사람이라면 하마비를 떠받들고 있는 두 마리의 사자가 짝눈이라는 것을 눈치챌 수도 있을 것이다. 자세히 보시라……, 오랜 풍상도 차마 다 깎아내지는 못하고 남겨둔 그 귀한 눈빛을. 그 눈빛에서 세월의 무상함이나 뼈아픈 역사의 그늘을 보더라도 엎드려 통곡할 필요는 없다. 혹자는 우리 조선 하늘 같이 맑고 깊은 그 눈빛에서 스스로의 마음을 비쳐보기도 할 것이다. 역사가 보이든 나 자신이 보이든 보이는 그대로를 마음에 담아둘 일이다.

세상이 달라져 신분의 귀천이 사라진 지금, 하마비 앞에서 잠시 속세의 나를 버리고 옛 시간 속으로 회귀해보아도 좋을 것이다. 시간을 거슬러갈 수 있는 재주가 없다면 경기전에 고여 있는 옛 이야기들에 귀를 살포시 열어두어도 좋다.

사적 제339호로 지정된 경기전. 조선 건국과 함께 왕국의 위용을 세우기 위해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봉안한 곳. 태조의 어진은 전주뿐만이 아니라 경주와 평양 등지에도 봉안해 두었다. 경주는 집경전, 평양은 영숭전이라 하고 전주는 경기전이라 한 것은 세종 24년이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화마로 태조 어진은 조선 산천을 떠돌기도 했고, 병자호란때는 무주 적상산성까지 치욕의 원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198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에는 가까운 위봉사로 피난가는 수난의 세월을 건너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애써 상기해서 무엇하랴! 과거의 시간은 소멸하고 소멸하여 무극의 지점에 고스란히 모여있는 법.

그래도 이것 한 가지만은 꼭 알아두자. 현재 경기전에 봉안된 어진은 1872년(고종9년) 원 어진이 너무 낡아 불태워서 경기전 뜨락에 묻고 새로 모사한 어진이 봉안되어 왔다. 그러던 것이 1999년 훼손을 염려하여 또 다시 어진을 모사하여 전시하고 원 어진은 영구 보존하고 있다.

숱한 발길에 닳은 세월을 부드러운 곡선으로 앉힌 문턱을 넘어 경기전에 들어서면 정면으로 높이 선 홍살문을 만나게 된다. 홍살문은 궁전이나 관아(官衙)·능(陵)·묘(廟)·원(園) 등의 앞에 세우던 붉은색을 칠한 나무문으로 대개 9m 이상의 둥근기둥 두 개를 세우고 위에는 지붕이 없이 화살 모양의 나무를 나란히 박아 가운데에 태극 문양을 넣었다. 홍살문에 단청의 오방색 가운데 붉은 색을 칠한 이유는 태양을 숭배하던 의식에서 비롯했다. 태양의 색은 음양에 있어 陽의 색인 붉은색이다. 붉은색이 사악한 기운을 몰아내준다는 이유인데, 동짓날 팥죽을 끓여먹는 풍습도 같은 이유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홍살문 가운데에는 삼지창이 만들어져 있는데 삼지창의 목 부분에 태극문양을 새겨 넣었다. 삼지창 역시 사악한 기운을 몰아내는 역할을 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이렇듯 홍살문은 경기전을 출입하는 모든 사람들의 사악한 마음을 경계하고 물리치기 위한 것이다. 그러니 무심코 지나가버릴 일이 아니다. 태조 어진에 대한 경의와 엄숙함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 홍살문을 지나가는 동안이라도 잠시 스스로의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는 말이다.

 

한 줌 빛에도 눈이 부시다

가지런하게 놓인 포석(鋪石)을 따라 걷는 동안 저절로 발걸음이 단정해짐을 느낀다. 문턱을 넘을 때는 자연스럽게 고개가 숙여진다. 문의 처마가 낮아서이기도 하지만 꼭 그런 연유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돌이켜보면 홍살문을 지나오는 동안 내 안에서 조그만 변화가 생겼던 탓이다. 마음이 바로 서고 심기가 숙연해졌던 것이다. 아마도 경기전 뜨락에 고인 시간의 밀도가 저절로 그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경기전 본전이라고 할 수 있는 정전의 뜰은 그리 넓지 않다. 깨끗하게 비질이 된 뜨락에는 시시각각으로 처마 그림자가 그 모양과 색을 달리한다. 그늘이 있어 오히려 한 줌 빛이 눈부시게 반짝이는 곳.

정전은 지대석(地臺石)과 면석(面石) 및 갑석(甲石)으로 이루어진 춤 높은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3칸 다포계(多包系) 형식의 맞배집 형식을 갖추었다. 그 전면에 바로 붙여 춤이 약간 낮은 기단을 정전 기단과 접속시켜 앞으로 돌출시키고 그 위에 첨각(添閣)을 두었다. 이 첨각 기단의 동 ·서 ·남면에는 각 1개씩 계단을 두어 벽돌을 깐 보도와 연결하였다. 화려하게 치장하지는 않았지만 조선 선비들의 두루마기 자락처럼 단아하고 곧은 기운을 느낄 수 있는 지점이다.

대개 태조 어진 앞에서 태조의 풍모를 감상하는 것으로 발길을 돌리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잠시 고개를 젖혀들고 천장을 올려다볼 필요가 있다. 마치 화려한 색깔의 새들이 일제히 날아오르는 형국이라고나 할까? 새떼의 비상으로 어지러운 단청의 군무(群舞) 앞에 저절로 입이 떡 벌어지게 된다. 하늘과 땅, 그리고 사람을 형상화 한 삼태극이 대들보를 지탱하고 있다. 그 대들보가 경기전 정전을 떠받치는 것뿐만 아니라 이 나라의 오랜 역사를 지탱해 온 근본적인 힘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경기전 정전에는 태조 어진뿐만 아니라 영조, 정조 고종 등의 어진도 봉안되어 있다. 물론 근래에 모사한 어진이지만 태조 어진과는 색다른 기품을 느낄 수 있다.

원래 경기전에는 많은 부속건물들과 별전이 있고, 서남쪽에 전사청(典祀廳) ·동재 ·서재 ·수복방 ·제기고 등과 북동쪽에는 별전과 조산(造山) 등이 있었다. 그것들은 세월과 함께 소멸하였다. 그 많은 건물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면 경기전의 위용과 규모에 압도당할 수 있으리라. 그래서 지금 이대로의 경기전 모습이 소박하나마 인간적이고 친숙하게 느껴진다.

최근에 몇 채의 부속 건물을 복원하기도 했다. 이를 두고 갑론을박의 세평이 있기도 하다. 보기에 따라서는 복원된 건물이 아직 기존의 선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러한 것들은 세월에게 맡겨두자. 아직 우리는 경기전 뜨락에 선 은행나무 한 그루만도 못하지 않은가? 경기전을 지켜본 세월의 길이에서 만큼은.

 

아! 전주사고여…

전에서 돌아나오면 동편으로 조그마한 문이 있다. 그 문을 열고 나오면 오른쪽에서 소소한 살랑거림이 있다. 대숲. 대나무의 크기로 보아 식재한 지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이렇듯 자잘한 식재들이 경기전의 숨겨진 매력이다. 대숲을 지나올 때는 화려한 단청에 피로한 눈을 감고 귀를 활짝 열어두어도 좋다.

대숲을 오른편에 세워두고 왼편으로 시선을 돌리면 전주사고(全州史庫)가 나뭇가지 사이로 보인다. 전주사고에 대해서는 구구절절하게 이야기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 다만, 임진왜란 당시 춘추관과 충주사고, 성주사고에 있던 실록들이 잿더미가 되었지만, 전주사고의 실록은 살아남았다는 사실 정도는 기억해 두기를. 만약 전주사고의 실록마저 불에 타 없어졌다면 조선의 역사 자체가 한줌의 연기로 사라져버렸다는 것이다. 지금 전주사고에 있던 실록은 서울대 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다. 텅 빈 전주사고를 보면 가슴 한켠이 먹먹해지기도 한다. 조선의 역사를 담아냈던 전주사고가 무심하게 비어 바람소리만 가득해서 오래 바라보지 못한다. 실록의 사본이라도 채워 넣는다면 전주사고를 지켜냈던 손홍록, 안의 등 많은 지역민들의 충정을 뼛속 깊이 아로새길 수 있을 것이다.

이제 경기전 뜨락에 다시 서게 된다. 그곳에서는 은행나무 그늘에 외람되게 서 있는 예종대왕 태실과 비를 만날 수 있다. 원래 완주군 덕천리 태실 마을 뒷산에 있던 것을 일제시대 때 파괴되어 구이초등학교 북방으로 옮겨졌다가 1970년 경기전에 옮겨 놓은 것이다.

태실은 부도와 같은 형태로 사각의 기단석 위에 상하가 약간 긴 구형의 돌을 올리고 팔각의 옥개석을 덮었으며, 그 둘레를 팔각형의 난간으로 둘러싸여 있다. 태실의 총 높이는 234cm, 옥신 둘레는 255cm, 난간둘레 1,540cm, 난간주의 높이는 108cm이다.

태실비는 귀부, 귀신, 이수를 다 갖추고 있는데, 거북이가 도사리고 앉아 있는 형태의 돌 위에 세워졌으며 윗부분은 용을 조각한 대리석으로 되어 있다. 비는 높이 1m, 폭 46㎝, 두께 21㎝로서 네 모퉁이에 각을 세웠다. 비의 전면에는 “예종대왕태실”이라고 되어 있으며, 후면에는 비의 건립 연도가 새겨져 있는데, 선조 11년(1578)에 세웠으며, 영조 10년(1734)에 고쳐 세웠다고 되어 있다.

예종대왕 태실 앞에서 잠시 시간을 잊고 경기전 뜰을 거닐어볼 필요가 있다. 우람한 은행나무를 두 팔로 감싸 안고 나무가 간직하고 있는 역사의 맥박을 느껴보기 위해서다. 무수한 사람들의 발길이 뜨락에 새겨지고 또 지워지기를 반복하는 동안, 그렇게 다져진 뜨락이 고스란히 역사의 든든한 기반이 되었음을 나무는 우리에게 말해줄 것이다. 그 소리를 듣고 난 다음에는 낡은 기와의 처마선을 오래 바라보기를 희망한다. 처마선이 끝나는 곳에서 곧장 허공으로 내질러 시선을 옮기면……, 조선의 마음씨같이 맑고 깊은 하늘 끝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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