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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답사, 전주천과 한벽당

차보살 다림화 2009. 12. 6. 13:33

쏟아진 바람이 물줄기로 흐르다.



바람의 모양과 빛깔 그리고 그 감촉이 한없이 궁금하다. 은근슬쩍 귓불을 쓰다듬고 줄행랑을 쳐대는 그 놈. 멀리서 나뭇가지를 타고 흔들어대면서 마치 애인처럼 손짓을 하게 만드는 그 놈. 모진 마누라처럼 코끝을 빨갛게 베어 물기도 하고, 술집 계집처럼 옆구리를 살살 간질이기도 하는 바람. 그 바람을 다 보기 위해서 한벽당에 오른다.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5호 한벽당. 전주 동편 해맞이 산이라고 할 수 있는 승암산 기슭 발산 머리의 절벽을 깎아 세운 누각에 오르면 가히 바람을 볼 수 있다. 남태평양에서 발아한 바람의 씨앗 한 톨이 파죽지세로 남해를 건너고 내처 승승장구 치받쳐 오르다가 잠깐 지리산 중턱에서 힘을 죽인다. 그리고는 남원과 임실을 지나는 동안 바람에도 마음이 얹히고 관촌의 좁은 협곡을 지나오면서 낭창낭창한 몸을 얻는다. 그리하여 전주 초입인 이곳 한벽당에 도달할 때쯤이면 열여섯 살 처녀의 자태로 다소곳해진다. 그 바람이 한벽당에 잠시 머물러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빗어 넘기고 흐트러진 매무새를 손질한다.

그러나 바람은 이미 그 안에 깊은 물줄기 하나를 품고 왔다. 임실 슬치재를 넘어오는 동안 의암, 공기, 은석 등지의 크고 작은 물줄기들을 끌고 와 상관계곡에 합수한 물이 만마, 죽림, 색장동 등을 돌아 젖을 물리듯 인심을 얻어 좁은목에 든다. 이 물이 한벽당 절벽 바윗돌에 부서지니 백옥 같은 물살이 보라를 일으켜 올리며 잠깐 현기증 이는 장관을 이룬다. 그 물줄기가 곧장 남천으로 흘러 전주천이라 하니 사실 전주천의 물줄기는 바람의 여인의 속살에서 흘러나온 줄기이리라.

 

한벽당에서 한벽루까지

한벽청연(寒碧晴烟). 전주팔경 가운데 하나인 한벽당 풍광을 잘 소개하는 글이다. 서툰 대로 풀이를 하자면 晴은 ㉠개다 ㉡(마음이)개운하다 ㉢눈물이 마르다 등의 뜻이고 烟은 ㉠연기 ㉡그을음 ㉢연기가 끼다 등이니 ‘한벽당에 연기가 개다’ 정도가 될 것이다. 그러나 곧이곧대로 풀이할 필요는 없다. 연기가 갠다는 것은 맑고 청아한 풍경을 말할 것이다. 조금 억지를 부려 한 걸음 더 나가면 ‘한벽당에 오르면 내 마음에 낀 그을음이 맑게 개여 마음이 개운해진다’고 해도 무방하겠다.

한벽당에 오르기 위해 고개를 치켜들면 ‘한벽당’이라는 편액이 보인다. 강암(剛庵) 선생의 글씨로 대개 그 거침없는 붓질에 입이 딱 벌어진다. 화려하지는 않으나 소박한 그대로 인간 내면의 궁극을 뚫고 나오는 무한공력의 힘을 느낄 수 있다. 한벽당으로 오르는 돌계단도 매끈한 대리석이나 다듬어 놓은 돌이 아닌 자연석의 울퉁불퉁한 모양 그대로가 한벽당에 오르는 이의 발길에 맞춤하다. 그 감싸안듯 받아주는 돌계단을 걸어 올라가 한벽당에 오르면 최초로 만나는 것이 바로 바람. 아! 세상에 이토록 선명하게 눈에 들어오는 바람을 본 적이 과연 있기나 했던가!

한벽당은 조선 건국공신이라는 월당 최담 선생의 별장으로 태종 4년에 세운 누각이라는 설이 있다. 그러한 연유는 한벽당 처마와 맞닿아 월당루(月塘樓)가 서 있기 때문이리라. 그러거나 말거나 한벽루 그 이름은 ‘바위에 부딪쳐 백옥처럼 흩어지는 물이 시리도록 차다’ 하여 부쳐졌다고 한다.

여기서 조선시대 건물들의 이름에 붙은 루나 전 혹은 당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궁궐 전문 사학자은 건물에도 신분에 따라 계서적인 품격이 있으며 그 고유 명칭이 있다고 한다. 이를 순서대로 정리하면 전(殿)-당(堂)-합(閤)-각(閣)-제(齋)-헌(軒)-루(樓)-정(亭)의 순이다. ‘전’은 임금이나 왕비가 거처하는 곳으로 크고 화려한 곳이다. 절에서도 부처님을 모신 대웅전에만 ‘전’자를 쓴다. ‘당’은 세자나 빈들이 거처하는 곳이고 ‘루’는 이층이되 마루로 되어있어야 하고, ‘정’은 휴식의 공간이다. 이러한 계서적 고유 명칭을 감안한다면 한벽당은 ‘한벽루’나 ‘한벽정’으로 불러야 하지 않을까? 아마도 누군가가 그러한 점을 간파하고 ‘한벽루’라고 오래 전에 부르기 시작한 모양이다. 세간에는 한벽당보다는 한벽루라는 이름이 더 널리 퍼져있는 것을 보니 말이다.

한벽루는 예로부터 시인 묵객들이 즐겨 찾았던 곳이니 더러 재미있는 일화도 있을 법하다. 조선후기 명필로 유명했던 창암 이삼만 선생이 한벽루에 올랐을 때 부채 장사가 잠을 자고 있었다. 이에 창암이 모든 부채에다 글을 써 놓아버렸다. 부채 장사가 잠을 깨 화를 내자 창암이 흐뭇하게 미소를 띠며 당장 남문거리에 가서 팔아보라고 했다. 그랬더니 과연 부채가 불티나게 팔렸고 부채 장사가 다시 돌아와 사례를 하려 하자 창암 선생이 한벽루에 머문 바람을 모두 가졌으니 부채값은 부질없다며 거절했다는 이야기이다.

 

동네 인정이 흐르는 전주천

이렇듯 시인 묵객들이 한벽루를 찾은 이유는 맑고 푸른 전주천의 아침 물안개와 수줍은 미소처럼 깔리는 저녁노을의 빼어난 풍광 때문이다. 도심 가까이에 푸른 산을 어깨에 두르고 발아래 맑게 흐르는 냇물을 바라보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 신이 내린 행복이라고 할 수 있다. 한벽루에서 바람에 밀리고 밀리며 흘러가는 전주천 물은 다가산 밑을 지나 삼례 평야를 적시며 만경강에서 합수해 서해로 흘러간다. 그 사이에 오지랖넓은 물줄기에 굽이진 동네의 인정이 슬그머니 실린다. 그 물길이 소살대는 인정의 이야기를 동무 삼아 전주천을 걷는 재미가 또한 여간한 것이 아니다.

지금 물길을 낸 전주천은 그러나 원래 줄기가 아니다. 옛 하천의 줄기는 한벽당 아래에서 이목대와 오목대를 지나 현재 기린로와 비슷한 방향으로 흘렀던 것으로 추정한다. 이 물이 덕진연못을 거쳐 추천대교 방향으로 가는데 1939년 극심한 가뭄에 덕진연못의 북서쪽 모퉁이 연못 아래를 지하 10척 정도 파내려간 적이 있었다. 이 당시 지하에서 많은 냇돌을 파 올렸는데 지금도 덕진연못과 전군도로와의 사이를 파보면 하천으로 형성된 모래층이 나타난다고 한다.

전주천의 물길이 바뀐 것과 관련해서 흥미 있는 이야기가 있다. 옛날 전주시가의 집들은 동쪽으로 산을 등지고 서쪽을 향해 있었다. 그 당시의 전주는 재물은 풍부하지 않았으나 대신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그러나 물길이 바뀌고 집들의 방향이 남쪽을 지향하면서 재물이 풍부해진 대신 훌륭한 인재를 배출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전주천을 걷다보면 이런 이야기들을 가만가만 들려주는 것이 바람이다. 바람은 물줄기의 속도에 맞춰 흐른다. 그 속도는 곧 사람들의 발걸음에 보조를 맞춘 것이다. 철딱서니 없이 휭하니 앞장서 가지도 않고 저만큼 뒤처져서 게으름을 피우지도 않는다. 바람이 물길의 마음을 읽어내고 물길에 사람의 마음이 비쳐 나란히 흘러가는 전주천. 가을이면 억새가 물결을 이루며 소살소살한 운치를 안겨준다.

전주천에는 많은 다리가 놓여 있다. 그 중에 꼭 기억해두어야 할 재미있는 다리 이름이 몇 있다. 남문밖에 형성되었던 장터들의 이름을 따서 예전에 싸전(쌀가게)들이 모여 있었다하여 싸전다리(구 전주교), 맷골로 넘어가는 다리라 해서 이름 붙은 매곡교(梅谷橋)는 쇠전다리, 설대전다리, 연죽교(煙竹橋)라는 별칭이 있고, 지금의 완산교는 서해 쪽에서 올라온 소금전이 형성되어 소금전다리, 염전교라 했다. 다리에 붙인 이름만으로도 그 다리를 왕래했던 사람들의 인정이 고스란히 전해짐을 알 수 있다.

전주천은 우리나라 산업의 기적을 이룬 한강처럼 사람들을 놀라게 하지 않는다. 대신 속삭일 뿐이다. 전주천을 끼고 사는 우리 이웃들의 삶과 인정에 대해. 마음 푸근한 시간이 그리워진다면 한벽당에 앉은 다소곳한 바람에 몸을 맡기고 바람이 흐르는 대로 물길이 흐르는 대로 발길이 흐르는 대로 흘러가도 좋을 것이다. 그러다보면 나도 모르게 바람의 모양이랄지 빛깔, 그리고 바람의 속 깊은 곳에 숨겨진 따뜻한 마음 씀씀이에 흠뻑 취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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